壬亂 극복과 李元翼의 역할
(권기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머리말
梧里 李元翼은 임진왜란 기간 중에 평안도 관찰사와 정승에 임명되면서 선조를 보좌하여 전시의 조정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梧里는 7년의 전쟁 기간 내내 줄곧 중임을 맡고 戰場을 누비면서, 왜란 극복 과정에서 같은 시기 정승으로 활약한 柳成龍에 필적하는 업적과 공헌을 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상대적으로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1)
본고에서는 오리의 왜란 기간의 여러 활동을 시기별로 살펴보고, 전시의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왜군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오리가 보여준 역할과 성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임진왜란기 조선 조정의 기본 전략과 전란 극복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규명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오리의 생애를 전해지는 문헌 자료는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일실되어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實錄과 文集을 주 자료로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문집으로 梧里先生文集 (본집 5권, 부록 5권, 보유, 속집 2권, 별집 2권, 속집부록 1권)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이 실록을 통해서도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疏箚, 敎書, 狀啓, 引見奏事 등 공적인 글로 채워져 있는 한계가 있다. 다만 오리의 활동을 중심으로 날짜별로 사건이 정리되어 있는 李相國日記 가 있는데, 오리의 庶女 1명이 12년간의 일을 기억으로 외어 전하였다고 한다.2) 대부분 임진왜란과 관련된 주변 사실이나 선조 재위 말기부터 광해군대에 이르는 정파 사이의 대립에 관한 사건이나 人事, 상소문 등을 나열하고 있으며, 일부 오리의 개인적 거취나 활동에 관한 기사도 보인다. 본고에서는 일단 실록의 기사를 토대로 오리의 활동상과 의미를 정리하되, 문집의 기사로 일부 보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3)
먼저 왜란 발발초기 몸소 전투를 지휘하며 御駕가 北邊의 끝인 義州까지 후퇴하는 위급한 상황을 돌파하려는 노력을 살펴보고, 이어서 전황이 다소 호전된 후 평안도관찰사로서 지방을 장악하고 후방을 지원하는 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조정의 최종 항전지이자 명군의 진입로였던 평안도에서 이룬 성과를 인정받아 전시의 정승으로 임명되어 보다 큰 규모의 戰局을 다루게 된 이후의 활동도 장을 달리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오리는 정승이 된 이후에도 중앙조정에서 국왕을 직접 보좌하기 보다는 남방의 體察使로서 전쟁터를 순행한 기간이 길어서 실질적인 전방의 총지휘관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선조와 조정이 그에게 기대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끝으로 丁酉再亂을 앞두고 또다시 전투가 격화된 이후의 위기 관리자로서의 오리의 역할을 살펴볼 것이다.
1. 평안도 관찰사로서의 임무와 역할
(1) 전란 초기의 전투 지휘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梧里는 전쟁 수행과 관련하여 중임을 맡는다. 선조는 서쪽으로 파천하기에 앞서 오리를 평안도의 都巡察使로 삼아 먼저 떠나게 하였다. 오리는 과거 안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지역사정에 밝았고 백성에게 善政을 베풀어 추앙을 받은 경력도 있음을 인정받고 있었다. 때문에 평안도의 父老를 효유하고 人心을 수습하라는 임무를 받았고, 그는 4월 28일 황해도 지방에 대한 책임을 맡은 崔興源과 함께 4월 28일 임지로 떠났다.4) 5월 8일 대신들은 오리가 오랫동안 이 평안도에 있었으므로 物情에 밝아 모르는 것이 없으니 체직하지 말고 도순찰사에 仍任하도록 청하니 선조가 윤허하였다.5)
오리가 서울을 떠날 때 실록에 나오는 그의 직임이 ‘徵兵體察使’였다는 데서도 드러나듯 그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적과 교전하는 장수라기보다는 민심을 수습하여 후방을 안정시키고 병력과 군량 등을 보급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평안도로 먼저 떠난 이원익은 서울의 한강에 도착한 田稅를 戶曹에 이야기하여 대동강으로 옮겨 오게 해야 한다는 대책을 좌참찬 韓應仁에게 전달한 사실에서도 오리의 주된 역할이 무엇인지 잘 나타난다.6)
그러나 전쟁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오리는 평양성에서 적의 북진을 막는 과정에서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전투 지휘에 나서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리는 都巡察使로 임명되면서 ‘都觀察使’를 따로 두지 않아 政事를 일원화한 사실도 그에게 거는 조정의 기대와 신임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한편, 그를 중심으로 전투 지휘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도 있다.7) 선조는 6월 2일 여러 대신을 인견하였는데, 이원익은 평양수호책의 입안을 요구하면서, 평양성을 죽음으로 지키든지, 그렇지 못하다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편의에 따라 조치할 것인지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는 이미 義州나 江界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성 안의 인심을 고려해 달라는 이덕형의 의견을 듣고는, 이원익에게 평양성을 지킬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이에 오리는 기필할 수 없다고 답했다.8)
6월 11일에는 좌의정 윤두수와 함께 평양성 방어를 위한 전투에 나섰다. 寧邊節度使 李潤德이 대동강 여울을 지키는 동안, 出身 金珍에게 강변의 土兵 백여 명을 인솔하고 강을 건너가 왜적의 군영을 쳐부수어 전과를 올렸다. 적군이 자고 있는 동안 수백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배가 한꺼번에 도착하지 않아 30여 명의 토병이 강속에 빠져 죽는 피해도 있었다.9) 이 전투의 의미에 대해 오리의 諡狀에서는 ‘서쪽 군사가 적의 강약을 시험해 본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하였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10)
그러나 끝내 평양성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6월 15일 평양의 대동강 여울의 방어가 무너진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대다수의 군사가 흩어지고 2백여 騎의 왜군이 이미 건넌 상황에서도, 이원익은 침착하게 順安으로 와서 흩어진 병졸을 수합하려고 한 것은 평가할 만한 점이었다11) 평양 함락후 종적을 감췄던 전 평안도 관찰사 宋言愼의 치계에 따르면, 14일 왜적이 王城灘을 건너오자, 도순찰사 이원익과 防禦使 李薲이 흩어져 떠났다고 한다.12) 이 무렵에 오리는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었고,13) 오리의 주도 하에 간간이 왜군이 주둔 중인 평양성에 대한 공격이 계속 시도되었다. 練光亭 건너편의 東院을 밤에 공격한 후, 관할 토병에게 상을 주고, 李元翼·李薲에게도 약간의 恩典을 내려 권장하는 뜻을 보인 것이 확인된다.14)
이원익은 평안도 관찰사로서 재직하는 중의 지휘체계와 관련해서 梧里先生文集 에 실린 「諡狀」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선조가 의주에 나가 자리잡고 있는 사이, 오리는 安州, 肅川 사이에 머물러 적의 충돌을 막았는데, 이때 원수 金命元, 韓應寅, 權徵이 모두 도순찰사라 일컫고 그와 대등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오리는 그것이 불가한 일이라 말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戎服을 입고 원수에게 배알하니 호령이 한 사람에게서 비로소 나왔다고 한다. 곧 지휘체계의 일원화를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전시 상황에서 평안도를 총괄하면서는 治法, 征謀, 行朝의 奉供, 명군에 대한 군량조달 등의 책임을 오리가 맡았는데, 심혈을 쏟은 바에 계획이 모두 타당하여 일이 잘 처리되었으므로, 논자는 ‘李伯紀의 재주를 가지고 張德遠의 충성을 겸하였다’고 하였다고 한다.15)
오리는 평양 부근의 전투 이후로는 직접 병력을 지휘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모습을 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1593년 2월 비변사는 도원수 金命元의 장계에 따라 金應瑞에게 휘하의 친병을 이끌고 제독 이여송의 군대보다 앞서 나가 협력하여 적을 소탕하도록 조치하면서, 이원익에게 먼저 下諭해 둘 것을 청한 사실을 통해 오리가 병력 지휘에도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16)
(2) 賊情과 戰況의 파악
오리는 이후 큰 전투에 직접 나선 것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선조의 요구에 따라 왜군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기 위해 힘썼으며, 비변사에서도 이원익의 장계를 통해 왜군이 장차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병력을 움직이려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17) 오리는 주로 전쟁 수행과 관련된 종합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한 조치를 하고자 힘썼으며, 중요한 사항은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러한 사례로서, 선조는 평안도 관찰사 이원익과 兵使 李薲 등에게 馳諭하여, 賊勢의 강약과 숫자 등을 비밀히 馳啓할 것을 명하고, 아울러 힘써 싸운 將士도 치계하도록 했다.18)
전투를 통해서 알게 된 見聞을 알리는 것도 오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中原人이 전투에 임하는 조선 관원의 옷소매와 갓을 보고 전쟁터에 싸우기에 부적합함을 지적하며 시까지 지은 일화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밖에 왜인의 토굴 제도, 명군의 화포, 적병의 총통, 왜군의 用兵 전술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논했다.19)
이원익의 전황 보고는 전쟁의 국면이 급박한 위기에서 명군의 개입과 반격으로 전환된 1593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오리는 황주목사의 飛報를 인용하여 명군이 黃州牧에서 올린 전과를 치계하기도 했다.20) 오리는 왜군이 서울에서 퇴각한 것은 도주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명군과 대치하면 군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21) 부산은 적의 본국과 가까우니 그곳에 웅거하면서 명군이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또한 계책은 上·中·下 세 가지가 있는데, 왜군이 비록 下策을 쓴다 해도 우리는 저들이 上策을 쓸 것이라 여기고 강력히 방어할 방도를 취하여야 옳을 것이라고 하였다.22)
이원익은 명군의 참전 이후 강화에 나서는 일본의 의도에 대해서도 통찰하고 선조에게 진언하였다. 일본은 본디 (중국의) 正朔을 받드는 나라가 아닌데, 朝貢하기를 바라는 이유를 궁금해 하는 선조에게, 유성룡은 ‘적은 반드시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사방으로 나가 약탈한 것인데, 우선 화해를 청하여 우리 군사를 지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고, 선조는 오직 평안감사 이원익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였다.23)
선조는 오리를 적극적으로 신임하며,24) 그의 전황 파악에 대해서도 신뢰하며 여러 가지 계책을 묻고자 하였다. 왜란이 3년째를 맞는 1594년에 선조는 “지혜가 궁해지고 계책이 다하였으니 참으로 어떠한 계획이 있다면 모두 물어서 채택하여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이원익과 같은 자가 있는 데이겠는가. 西方이 중요하므로 비록 불러 쓸 수는 없으나, 생각과 견해를 묻지 않을 수 없으니, 下書하여 그의 계책을 묻는 것이 어떠한가?” 라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도 하였다.25)
(3) 병사의 모집과 군량의 확보
오리가 주로 담당한 것은 전투보다도 현지의 군사를 모으는 일이었다. 오리는 강변에서 6백여명의 土兵을 모은 실적을 선조에게 보고하면서, 이들이 남쪽 군대와 달리 잘 쓰면 예전의 군대와 같이 潰散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한 이전에 평양성에서 江灘을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물이 몹시 얕고 토병의 숫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이어서 明軍에 軍糧을 대는 문제와 함께 명군과 협력하여 평양에 진공하는 시점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는데, 이원익은 밤을 틈타 불을 질러서 공격하는 전술과 함께, 남쪽 군사들보다는 土兵의 전투력을 높게 보고 남쪽 군사에게 군량 운반을 맡기는 계책 등을 제안했다.26) 군사를 모아서 전투력의 수준에 따라 적절히 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1593년 2월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군사 중 상당수가 사실상 도망병이 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리자, 비변사에서 그 책임을 물어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이원익을 推考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는데,27) 이원익에게 병력 관리의 책임이 물어졌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리는 군량을 조달하여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데에 주력했다. 전쟁 초기부터 오리는 각 고을에서 군량을 지급하고 있으나 도로가 멀어 굶주리는 자가 많다면서, 비변사에서 강변의 土兵은 술고기와 면포를 주어서 구휼한다는 뜻을 보였으나, 유독 內地의 군대에게는 남의 나라 사람을 보듯 하고 있으니, 호조로 하여금 田稅나 창고에 저장된 쌀과 콩 등을 지급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28)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반하라는 분부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은 金應瑞를 이원익으로 하여금 처벌하도록 한 비변사의 조치에서도 군량 조달의 책임자로서의 위상이 느껴진다.29)
군량 조달의 미비는 병사의 도망으로 이어졌다. 서울의 왜군이 위축되고 명군의 進就가 부진한 상황에서 평안도 출신의 무사들은 군량이 다하여 도망쳐 돌아가는 자가 많아지자, 이를 대체하는 정예병 300명을 쇄출하여 엄선하는 임무가 이원익에게 맡겨지기도 했다.30) 이렇게 병사의 모집과 군량의 확보는 어느 한 쪽을 폐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였다.
이원익은 모병 뿐 아니라 군사 훈련에서도 남다른 재간을 보여주었다. 비변사가 아뢴 바에 따르면, 평안 감사 이원익만이 營府에 소속된 군졸을 초출하여 대포를 쏘고 칼 쓰는 법을 훈련시켜 완전히 익힌 자에게는 상을 주기 때문에 점차 무예가 완성되어 간다고 하며, 그 밖에는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31) 선조는 오리의 군사훈련을 칭찬하며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다른 신하에게 “군병을 조련하는 등의 일은 평안감사를 본뜨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32) 선조는 이원익의 부지런함은 누구도 미칠 수 없다면서, 평양 안에 검술과 포 쏘는 법을 익히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하였고, 유성룡은 이원익이 ‘방패를 베고 누워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우고, 兵制가 오랫동안 폐해진 것을 한탄하여 바로잡아 세울 것을 생각하며 제대로 賞罰을 시행하므로 한 달 사이에 성과가 있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33) 이원익의 군사 훈련 성과로, ‘평안도의 군병은 그가 감사로 있을 때에 이미 부서를 나누고 장수를 정하여 哨官·旗摠·隊摠을 두어 서로 통속하게 하고 포 쏘고, 창검 쓰는 기술을 가르쳐서 그 수효가 이미 많으니, 훈련을 거치지 않은 다른 도의 군사에 비하면그 차이가 매우 크다’는 유성룡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34) 이원익이 평안도 감사가 물러난 이후에는, 이미 훈련을 시켜 대오의 定數를 갖춘 예전과 달리 군병의 인원이 감축되고 이미 갖추어진 殺手와 砲手가 뇌물을 바치고 면제되기를 꾀하는 폐단이 생겼다는 지적도 있었다.35)
(4) 장병에 대한 인사와 유공자 포상
오리는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휘하 장병과 공이 있는 백성에 대한 포상에도 힘썼다. 예컨대 왜군이 평양을 함락하던 날에 적을 토벌하라고 당부하고 자결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분전하다 죽은 金德霖에 대해 표창을 건의한 사례가 있다.36)
오리는 전쟁에 공로가 있는 자는 병사 뿐 아니라 지역민에게도 포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고하였는데, 이는 지방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93년 6월 이원익은 中和 사람들이 종시 적에게 따르지 않고 村夫나 野老까지도 힘을 다하여 싸웠다면서, 적을 많이 죽이고 왜적에게 입은 피해도 컸을 뿐 아니라, 적을 토벌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으므로 과거를 따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이에 선조는 과거를 따로 시행하지 못하더라도 이 고을에 과거 인원수를 넉넉히 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37) 뒤에 이원익의 언급을 참고하여 中和郡의 邑號를 승격하도록 조치하였다.38) 이어서 평안도의 田租를 감하여 위로하는 조치에서도 비변사는 감사 이원익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시행한 다음 추후에 보고하도록 하였고,39) 호조에서는 1년간 제향에 쓸 물건과 奴婢身貢 이외에 기타 일체의 貢物을 蠲減해 주도록 하였다.40)
(5) 明軍과의 연락과 협력
오리의 역할을 거론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중국 장수와의 연락과 소통이었다. 특히 오리가 명군이 들어오는 길목인 평안도 관찰사를 맡았던 까닭에 이러한 역할이 더욱 집중되었고, 그 결과 명의 장수들에게도 이원익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判尹 李德馨의 말에 따르면 沈遊擊(沈惟敬)이 어떤 자에게 ‘내가 石尙書(石星)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와서 그대 나라를 위해 死生을 걸었는데 내 마음을 아는 자는 단지 布政司와 백성들뿐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포정사란 이원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41) 오리는 중국 장수와의 깊은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명군과 교섭하면서 알게된 명군의 동향에 대해서 틈틈이 조정에 보고하여 발빠르게 조치할 수 있도록 했으며,42) 명군의 의사를 조정에 전달하면서 가능한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썼다.43)
오리가 제공한 명군에 관한 유용한 정보 중에서 南軍과 北軍 사이의 갈등은 명군의 행태와 폐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했다. 오리는 남쪽 장수와 북쪽 장수가 계획하고 있는 바와 왜적의 정세에 대해 서로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정도로 화합하지 못하는 정상을 설명하였다. 또한 중국에 귀순한 㺚子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참하여 바치는 문제가 일어나다보니, 북군이 참획한 것을 남군은 반드시 조선인의 머리를 참획했다고 지목하는 일도 있음을 아뢰었다. 그리고 남군과 북군의 공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앞서는지에 대해서 전투를 직접 체험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상세히 논하였다.44) 이후에 명군이 우리나라 사람을 죽여 공으로 삼는다는 소문의 확인은 이원익에게 맡겨졌다. 예조판서 윤근수의 서계에 따르면, 명군의 張旗鼓가 평양부 사람의 수를 속히 조사해 가지고 오도록 하였는데, 아마도 북군의 제독이 우리나라 사람을 죽여서 자기의 공으로 삼았다는 말이 중국 조정에 성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하였다. 하지만 현존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는 평안도 감사에게 묻는다고 해도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므로, 오리에게 물어서 적절히 답하여 윤근수에게 轉送하도록 하였다.45)
중국의 원병에게 충분한 곡식을 제공하는 것은 오리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 1593년 2월에 오리가 평양에 있는 곡식이 4~5일 분량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兩湖의 군량을 준비하고 보병을 더 청하는 일은 늦출 수 없다고 재촉한 것이 확인된다.46) 평양을 탈환하기 위해 투입된 명군을 위해, 오리는 각처의 군량과 마초를 운반하도록 독려하여 提督府에서 쓰도록 하였다.47) 중국 장수들은 군량과 마초가 계속 공급되지 않아 노여움이 있었고, 將領들은 식사에 鹽醬이 없어서 더욱 불만이 많은 상황이라서, 도순찰사를 맡고 있는 오리에게 이에 대한 조치도 하유하였다.48)
비변사에서는 試取에서의 登科者로 도망한 자를 군량 수송에 充定하도록 하는 임무도 오리에게 맡겼다.49)
오리는 명군의 군량을 운반하는 역할을 감독하면서, 일도의 민력이 탕진되고 站 사이의 거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육로로는 운반하기도 어렵고 배가 모자라 해로로 운반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자 병사에게 분담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평양에 머무르고 있는 명군의 인원수가 4천여 명이고 1일 소비량이 거의 50여 석인데 비축된 양곡은 겨우 4만석이므로 한 달이 지난 후에 大兵이 도착하면 급식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을 내놓으며 시급함을 강조했다.50)
명군을 위해 병력을 보충해 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리는 도순찰사로서 명군을 위한 식량과 말먹이를 준비할 것과 아울러, 전투에서 손실된 인원 3천명에 상응하는 인원을 징병하여 명군의 무기를 착용시켜 하나의 부대를 편성하라는 명나라 장수의 요구를 장계로 보고한 것이 확인된다.51)
명군의 도움으로 평양을 탈환하고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패한 이후에는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 교섭이 시작되는데, 이와 관한 문제에 관해서도 선조는 오리와 긴밀히 상의했다. 오리는 1593년 3월, 提督 李如松이 강화하는 일을 이미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전하며, 근일 벽제 전투에서 사로잡혔던 명군이 돌아와서 제독이 기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독의 군중에서도 벽제에서 한 번 패한 후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강화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한다는 정황을 전했다.52) 강화 문제가 제기되자 명군은 싸울 뜻이 없어졌고, 명군에게는 왜적을 죽이지 말 것을 명이 내려지고, 우리 군에게도 교전하지 말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원익은 ‘대체적으로 이미 강화가 결정되어 나아가 싸울 뜻이 전혀 없는데, 결국 불공대천(不共戴天)의 흉적이 온전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매우 통탄스럽다’고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53)
명군과의 연합작전은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중국 장수의 환심을 사기 위한 잔치에서부터, 명군이 일으키는 민폐나 사고 등에 이르기까지 그에 맞는 합당한 조치를 해야만 했다. 오리는 병졸을 거느리고 오는 중국 장수에 대한 환영연을 베풀어야 하는지 여부를 예조에 알아보고 茶啖床과 물품을 참작하여 증여하는 임무를 부여받기도 하였다.54) 한편 오리는 평양성 안에서 作亂을 일으키는 명군을 단속하고 징치한 사실을 장계에 올려 합당한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하기도 했다.55) 살해당한 중국인에 대한 처치에 대해서도 중앙에 보고하여 적절한 처치를 위촉 받은 일도 있었다.56)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섭에 대해서 이원익은 꾸준히 보고를 했다. 명의 遊擊將 戚金이 進貢하는 왜인 小西飛 등 30여 명을 대동하고 평양에 들어온 일이 있었는데, 이원익은 불공대천의 원수가 우리 땅을 경유하는 것을 항의하였으나 유격 등은 事勢가 어쩔 수 없다고만 하였다. 이에 이원익은 왜인이 있는 곳에 쌀과 반찬, 땔나무와 먹을 물을 전연 공급해 주지 않고, 명군이 스스로 마련하길 기대하였다.57)
이원익은 중국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기에 중국인과의 은밀한 대화가 가능했다. 이원익은 安州에서 열린 중국 사신과의 餞慰宴이 파한 후 중국 사신은 이원익은 華語를 이해한다는 말을 듣고는 通事를 시켜 말을 전하지 않고 신을 자기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서 은밀한 말을 전했다. 그러나 이원익은 “신이 약간 화어를 이해는 합니다만 허다한 곡절을 상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고 겸양하면서 대의를 설명하였다.58)
(6) 民生의 안정을 위한 노력
한편 관찰사로서 본연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民心을 安集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리는 이런 측면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 큰 성과를 낸 인물로 평가된다.59) 애초에 이원익이 평안도의 감사로 임명될 수 있었던 배경은 예전에 安州牧使로 재임하면서 큰 성과를 내고 本道의 인심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중앙 조정에서는 점차 그에게 백성을 편안히 하고 후방에서 전투에 대비하는 역할을 기대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비변사에서는 ‘중신을 파견하여 箕城(평양)의 백성을 위무하고 성벽을 수선하는 일’은 이원익에게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라고 언급한 데서도 이러한 시각이 잘 드러난다.60)
이렇게 후방에서의 民生을 안정시키는 牧民官으로서의 역할은 명군의 평양 탈환과 왜군의 후퇴로 어느 정도 전황이 안정되는 1593년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전투 준비와 작전 지휘도 중요한 일이지만, 백성의 삶을 안정시켜 적과 맞설 수 있는 국력이 갖추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조치의 하나는 民弊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軍役의 개혁은 백성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동시에 전쟁을 수행 능력을 확충하기 위한 선결과제였다. 오리는 병사 申磼과 함께 軍籍을 만들면서 ‘一族之弊’를 해결한 것을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선조에게 알리면서, 이 폐해는 팔도가 모두 똑같으나 특히 평안도가 심하다고 하였다. 또한 土兵을 모아 양성하면 변방 경비가 견고해질 것이며, 價布만 납부할 것이 아니라 軍丁을 보내어 실질적으로 변방 경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고 작은 服役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바치는 綿布의 폐해 때문에 南兵이 赴防할 때는 최대 13~14필의 면포가 들어가는 폐해에 대해서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61)
오리는 ‘하루아침에 농부를 전쟁터로 몰아넣으니 달아나지 않으면 죽을 판’이라는 선조의 말에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 실정은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백성의 사정은 진실로 가련하다’고 하면서 養民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62)
이렇게 민생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民田의 이익을 독차지하는 탐관오리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다.63)
(7) 성과에 대한 평가와 중용
상기한 바와 같이 여러 성과를 낸 오리에 대해 선조는 전적인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선조는 1793년 11월 중국의 總兵 劉綎과 문답한 후 그가 조선의 위태한 정상을 간파하고 있는 점에 감화되어 “중국에는 劉總兵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이원익이 있을 뿐이다.” 라고 칭송한 바 있었고,64) 뒤에 오리의 공로를 시상하기 위해 오리의 아들이나 사위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면서,
“평안 감사 이원익의 사람됨은 내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니, 지난날 우리나라에는 단지 이원익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라고 했다.65)
선조는 還都하면서 오리의 공을 특별히 인정하여 加資로서 포상했고, ‘적을 친 공은 없지만 마음을 다하여 조치한 까닭으로 오늘의 行次가 있게 되었다’면서 공을 치하하였다. 또한 대소 신민이 모두 오리를 평안도 관찰사로 유임시키기를 원하였으니 민심을 얻었다는 것을 알만 하다고 하면서, 평안도의 민심이 질박하지만 民物이 凋殘하여 촌락이 드물어 걱정스러운 사정에 대해서도 하문하였다.66)
이처럼 오리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매우 컸고, 한때 大駕가 머물렀고 반격의 발판으로 삼았던 지역이 평안도였던 만큼 그 관찰사의 자리도 도원수 이상으로 중시하고 있었다. 유성룡 등은 권율의 자질을 거론하면서 ‘평안도가 중하기는 하나 이원익을 도원수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선조는 ‘10년이 가도 이원익을 체임해서는 안된다’면서, 이원익이 재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가짐이 節儉하고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으며 軍器․軍務도 극진히 조처하고 있어 八道를 그와 같은 사람에게 맡기면 成效가 있을 것이라고 극찬하였다. 이에 유성룡 등은 이원익이 정성스럽고 진실하며,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일을 조처하면서도 聲色을 드러내지 않으니 진실로 심복할만한 사람이라고 극찬하였다.67) 오리는 사은사 金睟가 山海關에서 만난 중국의 主事 張揀에게까지 성을 잘 수선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평양 布政官’으로 알려질 정도로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68) 이러한 평판 때문인지 오리는 얼마 되지 않아 평안도 관찰사에 유임시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史官의 평가는 이러했다.
사신은 논한다. 임진년 변란때 이조 판서로 평안도 순찰사를 삼았다가 얼마 안되어 본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원익은 스스로의 몸가짐을 청렴하고 간소하게 하여 하루에 먹는 음식이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민폐를 살피고 武備를 잘 닦았기 때문에 비록 전쟁을 겪었어도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하게 되었는데 상이 유임시켰다.69)
2. 정승 임명과 體察使 활동
(1) 우의정 임명과 進言
오리는 평안도 관찰사로서 전란 극복에 큰 기여를 한 실적과 공로를 인정받고 정승의 후보자로서 물망에 오르게 된다. 1594년 11월에 영의정 柳成龍의 入啓로 沈守慶·崔興源·金應南 등과 함께 卜相되었다.70) 그러나 후임 평안감사를 인선하는 문제로 정승으로의 발탁은 다소 지체되었다. 선조는 평안 감사가 체직되면 어떤 사람이 그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유성룡은 평안 감사의 소임이 지극히 크니 창졸간에 찾기 어렵다는 의견을 밝혔다.71) 그러자 선조는 평안 감사의 직책이 중요하지만 정승만큼 중요하지는 않으며, 만약 이원익을 정승으로 삼는다면 서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體察使를 부여하여 그로 하여금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게 하자고 제안하였다.72)
그리하여 1595년 2월 다시 한번 卜相單子가 政廳에 전해졌다.73) 이어서 평안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로 있던 이원익에게 ‘선정을 베풀어 한 도의 인민이 부모처럼 사랑하였고, 군졸을 훈련시켜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崇祿大夫를 加階하였다.74) 그러고도 이원익을 체직하는 문제는 계속 논의되었다. 柳永慶은 관서 지방도 중요하지만 남쪽 지방이 더욱 긴급하니 이원익을 남쪽으로 보내자고 했고, 선조는 영상 유성룡에게 ‘이원익을 원수로 삼고 이덕형을 평안 감사로 삼자’고 했으나 불가하다고 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던 것이라 설명하였다. 선조는 이원익으로 원수를 삼는다 해도 적을 물리치는 일은 期必하기 어렵고, 평안도도 근본 구실을 하는 지방이니 이원익을 체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75)
선조는 卜相보다도 평안 감사의 후임을 찾는 문제로 더 고심하고 있었는데,76) 諸將을 화합시키고 군민을 위무하는 데 수단이 부족하다는 평이 있던 도원수 권율을 교체하는 문제를 논의할 때도, 이덕형을 도원수로 삼는 방안은 고려 대상이 되었으나, 이원익은 근본 구실을 하는 중요한 지방(평안도)에 있다는 이유로 교체해 오는 것을 어렵게 보았다.77) 동년 5월에도 元帥가 군사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니 이원익으로 교체하는 일을 李山海가 상소로 논하였다.78) 동년 6월에 영의정 유성룡이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우의정도 결원인 상황에서 金應南만이 국사를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 되자, 유성룡은 이원익을 정승으로 삼고 평안 감사는 李德馨으로 대신할 것을 제안하였다. 곧바로 沈守慶·崔興源·이원익을 복상하고, 이원익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임명했다.79)
오리가 영의정으로 임명되자 조정에서는 바로 上京시킬 조치를 취했다. 승정원에서 이원익의 교대를 생략하고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라고 청했으나, 선조는 그 지방을 비워놓고 교대를 생략한 채 올라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보았다.80) 비변사에서는 이원익이 평안도에 오래 있으면서 練兵, 屯田의 조치 절목을 조리 있게 만들어 一道의 인심이 편하게 여긴다면서, 임무를 계승하는 자가 준행할 수 있도록 평안도에서 시행한 연병, 分部, 定將, 연습 등의 규정 및 이원익이 그 도에 있을 동안 상세히 기록한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본도에 비치하고 준행하게 하여 폐지되지 않게 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이를 따랐다.81) 이원익의 실무 능력이 매우 탁월했으며, 조정 신료들도 인정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원익의 업무 인계에 대한 배려는 이에 그치지 않아, 선조는 교대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몇 달을 머물러 신임 감사를 지도하게 하자고까지 했으나, 비변사가 온당치 않은 일이라 반대하여 그만두었다.82)
우의정에 임명된 이원익은 선조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했다. 선조는 비변사 당상을 인견한 자리에서 이원익에게, “이 事變의 시초에 우상이 홀로 장담하기를 ‘왜적이 절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고 했었는데 지금 과연 그렇다.”고 칭찬하면서 신하들이 동심협력할 것을 주문했다. 이원익은 곧 남쪽 지방으로 떠나게 되면서 그곳 실정을 겪어본 사람과 동행하면 실수가 적을 것이라고 하면서 副察使 이하 종사관은 물러간 다음 적어서 아뢰겠다고 하였다. 또한 평안도 사람 중 공이 있는 자로 林仲樑의 예를 들면서, 평안도 사람이 비록 학문을 모르지만 황해도의 인심과 딴판이라고 평가하였다.83) 이원익은 자신을 보좌할 관리들을 추천하였는데, 우의정으로 임명된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16일, 대사헌 金玏을 體察副使로 임명하고, 지평 南以恭을 종사관으로 삼고 싶다고 아뢰니 선조가 윤허하였다.84)
얼마 후 周易 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이원익은 전란 극복을 위한 여러 가지 進言을 하였다. 먼저 평양과 서울의 槍法을 비교하며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논하였는데, 선조는 어른 아이 할 수 없이 검법을 연습한 것은 이원익이 성심껏 가르친 덕이라고 치하하였다. 또한 평안도 수령 가운데 표창할 만한 자가 없는지 물어보니, 泰川縣監 洪汝栗, 永柔縣令 姜絪, 祥原郡守 金庭睦, 寧邊判官 沈彦明 등을 추천하였다.
이원익은 군역과 환곡의 문제를 해결하여 병력을 확보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방안을 내놓고자 노력했다. 먼저 병란과 흉년, 전염병 등으로 고갈되어 버린 軍額을 다시 채우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만약 보통 때처럼 그 이웃과 一族까지 침범하면 군인의 숫자가 날마다 감축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다 없어질 것이니, 떠돌아다니거나 絶戶가 된 것은 빨리 그 수를 빼고 현재 남아있는 자들로 군적을 만든 다음에야 백성들이 혜택을 받을 것이며, 군액을 채우는 것은 후에 차츰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온당할 것이라 하였다.
이어서 환곡에 대해서도 논하였는데, 우리나라의 還上法은 公私에게 모두 유익하여 수령의 供給과 貢物, 세금, 부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에 힘을 받고 있다고 하며, 임진년(1592)에는 분탕을 당하지 않은 고을에도 元穀을 흩어주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고, 계사년(1593), 갑오년(1594)에는 분급해줄 곡식이 없었으니 임진년에 분급한 것만 현재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라 하였다.
그런데 만약 영구히 면제한다면 곡식 나올 길이 없어 소량의 곡식으로는 蕩敗한 숫자를 충당할 수 없다면서, 떠돌아다니거나 죽었거나 絶戶된 자를 제외하고는 분급해 준 양에 따라 적절히 헤아려 봉납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주장했다. 선조는 情理와 事勢로 보아 백성들에게 결코 추징할 수 없다고 보았으나, 이원익은 일단 還上을 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手足을 움직일 곳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명나라 장수들이 끊이지 않고 와서 군량을 수송하여 쓸 곳이 매우 광범위한데 관청에 저축한 것이 없으면 백성에게서 마련해내야 할 터이니 이는 더욱 백성을 침탈하는 것이 된다고 하며, 환곡을 거두어들일 필요성을 계속 역설했다. 이에 선조와 대사헌 金玏은 현재의 起耕地에서 숫자를 나누어 봉납하는 절충안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단순히 백성에 대한 ‘신의’만을 내세우는 선조에 비해 현실적으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예산을 융통할 것을 염려하는 이원익의 입장 차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임진년의 還上’ 문제는 뒤에도 ‘도로 捧納하면 신용을 잃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팔도의 창고 곡식이 말이 아닐 것’이며 ‘이원익이 숫자를 나누어 봉납하자고 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일’이라면 재논의되었으나, 선조가 도리에 어긋나고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며 거부하였다.85) 군역과 환곡에 관한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현안이 된다.
정승의 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體察使의 명을 받은 오리는 남쪽으로 향하기에 앞서 자신의 인사권 및 지휘권에 대해서 분명히 하고자 했다. 오리는 지방의 감사나 병사․수사가 軍務에 관한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平時의 方伯이 통정대부 이하의 수령을 독자적으로 벌을 주는 것과 같이, 軍門에 잡아다가 벌을 줄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니, 선조는 도원수 이하는 도성 밖의 일은 경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으니 중앙에서 통제하지 않겠다고 하며 확고한 신임을 보여주었다.86) 이러한 원칙은 후일 도체찰사로 활동 중인 오리가 ‘장계를 올린 일을 시행하든 시행하지 않든 수 개월이 되었는데도 가부’가 없다는 말에 ‘4도의 일을 이미 그에게 위임하였으니 시행할 만한 일은 도체찰사가 먼저 시행하고 나중에 啓聞하는 것이 가하다’는 선조의 전교로도 확인된다.87) 또 후일 홍문관의 관원 가운데 周易 을 아는 자가 전혀 없어지는 문제가 생겼는데, 李元翼의 종사관이 된 金時獻은 [ 주역 을 아는 인물이지만] 대신이 스스로 임명한 것이어서 조처하기 어려우나, 이원익이 경연관이 없는 것을 미안하게 여긴다고 하며 다시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처리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선조는 옛날에 廷臣이 스스로 가려 임명하는 일이 있었으니 사체가 미안하며 어려울 듯하다고 하여 오리의 종사관에 대한 인사권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88)
오리는 軍禮의 강화를 통해 軍律을 강화하고 병력을 확고하게 장악해 두고자 하였다. 軍門의 경우 號令과 節制에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하니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法典을 상고해 보니 京外官이 會坐할 때의 경우 이외에 軍門의 行禮에 대해서는 참고할 만한 의례도 없고 일정한 규정도 없으니 대신으로 하여금 논의하여 군문에서 통용할 수 있는 예식을 만들게 하자고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89)
오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우려스러운 관심사는 백성의 피폐상이었다. 오리는 영남이 탕패한 상황에 대해서 심한 우려를 드러내며, ‘투항하거나 포로된 백성들이 왜적이 물러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슬퍼하고 왜적이 머무른다는 소문을 들으면 기뻐하는데 인심이 이 같은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살아날 구명이 저 왜적들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비록 西湖의 양곡을 수송한다 하더라도 1천 리 먼길에서 양곡을 수송해서는 굶주린 백성을 다 구제하지 못할 텐데, 만약 해변의 백성들이 일시에 흩어지면 아무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 우려하였다. 또 선조에게는 老成한 신하를 발탁하여 廊廟에 두고 자문할 것을 청하면서 참판 李墍를 추천하였다.90)
(2)體察使 파견과 활동
오리는 우의정이자 諸道都體察使로서 1595년 8월 1일 하직하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91) 이후 남방 여러 道에서의 활동은 실록 기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오리는 퇴각한 왜군의 정황을 파악하고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모친을 만나러 경상도에 내려간 동지중추부사 尹先覺은 거기서 만난 체찰사 이원익의 말을 인용하며 적이 반수 이상 바다를 건너갔으며, 조선에서 군사 훈련하는 일을 들은 관백이 壹岐島로 하여금 군사 4만을 모아 훈련하게 하였는데 실제로는 1만 명 훈련하는 것에 그쳤다는 등의 소식을 조정에 전했다.92) 왜군 철수에 대한 정세 보고는 각처의 보고를 종합하여 치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1595년 10월의 치계에서는 왜가 떠나가고 머물러 있는 정형을 각처에서 보고한 바로 참고하여 알리고 있는데, 沈遊擊과 指揮 金嘉猷의 보고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어서 중국 사신 上使와 副使의 행보와 왜적에게 빌붙은 자의 향배 문제 등을 함께 거론하였다.93)
영의정으로 임명된 직후에도 거론한 바 있는 軍籍 관리 문제도 장계를 통해 계속 건의하였다.
병조에서 지금은 군적 점검을 크게 거행할 시기는 아니지만, 이웃과 친족이 침해당하는 근심은 근일에 더욱 심하니, 이원익의 장계에 따라 各色 군정을 일체 현존 수효에 따라 한 데 뭉쳐 作戶하면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조금이나마 은혜를 입을 것이라고 하니, 선조는 알았다고 전교했다.94)
이원익은 예하의 지방관에 대한 징계를 통해 관료 조직의 질서를 잡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노력하였다. 남원의 수령을 지낸 李福男은 극히 청렴하나 刑杖이 과중하였으므로 백성은 모두 애모하였으나 호족이 싫어하였다고 한다. 이원익은 이복남이 물러나 달아났다고 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그가 감사와 화합하지 못하였으므로 인심을 수습하고자 이처럼 징계한 것이라고 한다.95)
1596년 3월 체찰부사 李廷馨과 선조의 대화를 보면 이원익이 체찰사로서 남방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방침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정형은 전임 副使 金玏이 母喪을 당하여 이원익의 천거로 대신하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선조를 인견한 자리에서 “산성을 수축하여 重鎭을 설치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인데, 이원익은 남하한 후 오로지 백성을 무마하는 것으로 선무를 삼고 요새를 점거하여 파수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직 조치가 없으므로 간혹 그를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선조는 “물의가 그와 같은가? 원익이 남하할 때 내가 은밀히 領相에게 말하였는데 과연 내 말과 같구나”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이에 이정형은 “영남은 잔파되어 민력이 극도로 약화되었으니, 원익이 요새를 설치하고 성을 수축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며, 물의가 혹 그를 비방하더라도 성상께서 진압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하며 옹호하였다.96) 요컨대 오리는 방어시설을 구축하는 것보다 민력을 회복시키는 것을 선결 과제로 본 것이다.
동년 4월 영남에서 노모를 만나고 돌아온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를 인견하면서 영남의 정세에 관한 질문에 답을 했는데, 이를 통해서도 이원익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유성룡은 星州와 八莒에 있던 도체찰사 이원익을 만나 보았는데, “남방이 근래 操練 등의 일을 거행하면서 軍丁을 모아 곳곳에서 연습하고 있으나 대개 原額이 많지 않아 左右道를 합하여 겨우 2천여 명 밖에 안된다”고 하였고, 남방의 인심이 해이해져 수령 등도 성을 지킬 뜻이 없고 兩班品官 등의 사람들도 전연 견고한 의지가 없어서 산곡으로 도망가 피신할 생각만 하고 있다고 하니, 이원익 또한 이 일이 극히 민망하다고 하였다. 또한 대구 姑母山城 부근에 있는 錦江亭에 진영을 설치하는 문제를 이원익과 함께 상의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원익은 其人의 폐단을 거론하면서 백성의 안정책을 추구하였다. 유성룡은 이원익의 말을 전하며, ‘기인의 價布가 1朔에 木 8필인데, 금년에는 목이 귀하고 쌀[米]이 천해서 8필의 목을 備納하기가 극히 어려우니, 쌀로 그 가격을 商定하면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고, 또 皂隷 1삭의 價木이 6필인데 捧納이 극히 민망하다 하니, 이것 또한 쌀로 상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선조는 비변사가 該司와 의논하도록 하였다.97) 이상의 논의에서도 드러나듯이 군역과 공납의 폐해를 해결하여 민심 이반을 막아보려는 것이 오리의 주된 관심사였다.
오리는 의병장을 불러서 등용하고자 노력하였다. 오리는 義兵을 일으킨 곽재우를 두세 번 격문으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이덕형의 말에 따르면, 곽재우는 재산을 털어 군사를 모을 때는 적을 토벌하는 것만 생각했으므로, ‘明朝에서 講和하여 싸움을 그만두게 되면 내가 나아가도 할 만한 일이 없으며 처자는 죄다 죽고 나 한 몸만이 남았으니 자취를 감추어 세월을 보내고 싶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왜군과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고 강화 국면에 접어든 당시의 정세를 잘 보여준다.98)
오리는 명과 일본 사이의 협상에 관해서도 상세히 파악하여 조정에 알렸다. 오리는 우병사 金應瑞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국 사신이 왜군 진영에서 보인 동향에 관하여 역관 要時羅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보고하였다.99) 이렇게 오리가 정보 수집에 힘썼기에, 선조가 중국에 주문을 할 때도 그의 치계를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100) 오리는 書幣를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만세의 원수를 하찮게 여기고 義理를 저버리는 일이라 하여 반대하였는데, 유성룡은 ‘이원익이 書狀에도 질질 끌면서 결단하지 못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겼다’면서 우의정 이원익의 뜻도 서장을 시급히 보내자는 뜻이냐는 선조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니 선조가 의논이 정해졌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이원익의 뜻이 선조의 결심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101)
이원익은 왜인과의 潛商을 금지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서장을 올리면서 잠상 문제를 금지한다고 조정에서 거듭 밝혔고 두 번 세 번 檢飭했는데도 右兵使 金應瑞는 전연 거행하지 않았다면서 지금 晉州에 와 있는데 각별히 禁防하게 하겠다고 보고했다.102) 잠상의 무리는 왜인의 心腹 노릇을 하여 난처한 일이 많기에 특별히 금단하고자 한 것이다.103)
오리는 전황이 소강상태에 있는 기간에 체찰사가 되어, 예전에 급박한 戰局에서 미루어지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일을 행하고자 했는데, 그 중 하나가 文敎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는 書狀을 올려 이르기를, 文과 武는 어느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는 것이고, 文敎는 武備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병란이 일어난 이래로 문교가 없어져 經典과 詞章 모두 여염에서 들어보기 어렵고 세상 풍습이 날로 투박해지고 있으니 매우 한심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비를 모아 詩才하여 그들의 뜻을 진작하려 했으나 영남은 왜적이 변방에 웅거하고 있어서 거행하지 못하였고, 이번 羅州를 순찰하는 길에 試才하여 入格한 사람을 포상하였으며, 全州와 충청도 중앙 지역의 고을을 순찰할 때도 시재하려고 계획 중이라 보고하였다.104)
(3)宣祖의 召命과 보고
1596년 10월에 이원익은 召命에 따라 서울로 돌아와 선조에게 적의 동태와 민심 등에 대한 종합 보고를 하였다.105) 그 내용을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아래와 같이 언급해 보기로 한다.
①군사력의 양성
오리는 군무에 있어서는 대중을 통솔할 재능을 가진 장수는 없고 변방에는 지친 군사들의 탄식만이 있어 아무리 격려하고 타일러도 軍心이 점차 흩어져서 모든 일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매우 염려스러웠다면서, 그래도 各營에는 각기 隊伍를 조련시키는 규율이 있었는데, 慶州·星州·安東 등 4고을에서 수령들이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남방의 군사력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다. 이원익은 남방의 장수가 직책을 근면히 수행하는지에 대한 선조의 질문에, 力戰하는 병사들인 줄은 알 수 없으나, 일에 당하여 막힘없이 다스릴 만한 장수는 별도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沿海 지방의 사정에 대한 질문에는 수군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水軍이 모두 죽어버려 賊勢가 두려워 매우 당황하고 있는데, 이전 흉년에 많이 죽었고 해변에는 能櫓들이 거의 죽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8결로 능로들의 役을 據定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를 부릴 줄 모르는 자도 정하여 보내기까지 하였다.
특히 적을 막아내는 데 있어서 民心의 향배와 관료의 기강이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오리가 직접 살피고 온 지방의 사정은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었다. 먼저 경상도는 徭役을 견감하여 준 까닭에 백성들이 은혜를 입고 衣食에 여유가 있었으니, 만약 적이 다시 발동한다면 비록 패주할 염려는 면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을 위로하고 안집시키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을 듯하다고 평가하였다. 전라도는 이원익이 이번에 처음으로 가 본 곳이었는데, 전라도는 비록 경상도가 당한 焚蕩보다는 낫지만 만약 전쟁 소식이라도 있을 경우에는 더욱 소란스러울 것이며, 비록 隊伍를 조련한 군사가 있다 하여도 싸움을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적었다고 평가했다. 국가가 兩湖에 대하여 비록 貢物을 감제하여 주기는 하였으나 난리통에 모두 사망하여 버리고 살아남은 자가 겨우 7분의 2∼3뿐이니 生成할 가망이 전혀 없고, 守宰들도 사람답지 않아 憑公營私하는 잘못을 알면서도 저지르는 자가 있고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자도 있었다면서, 피폐한 상황에 수령의 부패까지 겹쳐 매우 어려운 상황임을 토로했다.
군사시설의 확충은 충분히 이루지 못하였다. 산성의 공사는 있는 곳이 많아 아직 마치지 못하였고, 物力이 바닥나서 就役할 수 없는데, 지금 都事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케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군중의 戰馬를 조치하여 공급하는 것은 전투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고 선조도 우리나라 사족은 말이 없이는 싸울 수가 없다고 하며, 이를 매우 강조했다. 오리는 이에 대해 韓明璉 같은 무리는 어떻게든 스스로 준비하고 있고, 전에 제주의 말 50여 필을 뽑아 왔으나 쓸 수 없었고, 京中에는 계청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②관리의 자질에 대한 논평
장수들의 자질과 인품에 대한 논평도 있었다. 통제사 이순신에 대한 생각을 묻는 선조에 대해, 그 사람은 힘써 종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閑山島에는 군량도 많이 쌓였다고 답했다. Leterphocomxa . 당초에는 왜적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가 후에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는 선조의 평가에, 이원익은 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이며 처음과 달리 태만해졌다는 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일축했다. 節制할 만한 재질이 있느냐는 선조의 의구심에 대해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진다”는 말로 답했다.
오리는 장수로 삼을 만한 인재를 선발하고, 軍功이 있는 자를 포상하는 데 힘썼다. 오리는 장수 개인의 戰功과 特長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히 알고 선조에게 자문하고 있었다. 전공으로 行伍 가운데 발탁되어 당상으로 승진한 韓明璉은 군대 지휘에 능하여 이미 지쳐 있고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白士霖은 밤새도록 병서를 읽고 적중에 종횡무진 돌격한 것은 분명하다고 하였다. 卒伍 가운데 힘껏 싸운 자로 일찍이 戰馬를 내려준 張禹石의 사람됨에 대한 선조의 물음에, 이원익은 사람됨이 굳고 용감하여 먼저 올라가 적의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지만, 글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邊將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밖에 오리가 추천한 인물로서 白士霖이 있었고, 元均은 성질이 매우 거세어서 上司와 文移하고 節制하는 사이에 반드시 서로 다투는 문제가 있지만, 전투에서는 매우 기용할 만하다고 하였다. 다만, ‘국사를 위하는 일에 매우 정성스럽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선조의 칭찬과는 달리 戰功이 없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되는 인물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원익은 원균에게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되고, 전투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격전을 하게 해야 하는데, 평상시 군사를 거느리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하여, 장수의 성품에 따라 달리 활용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또한 원균이 지극히 청렴하다는 선조의 주장에도 ‘어찌 지극히 청렴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면서 부정적으로 답했다.106)
道內 諸軍 가운데 공이 있는데도 상을 못 받은 자가 있느냐는 선조의 물음에, 오리는 軍功으로 상을 받은 경우에 으레 부실한 점이 많아서 공은 높은데도 상이 작은 자도 있고 상은 큰데 공이 작은 자도 있었으므로 군중이 서운해 하고 있으나, 만일 다시 고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혼란스럽게 될 것이니 형편상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오리는 慶尙水使 權應銖에 대해서는 賣買를 공공연히 하고 사사로운 혐의로 刑을 쓰는 것이 잔혹하지만, 永川 전투에서 공로가 많았기 때문에 체직시키지 않았다고 하였다. 功過를 적절히 비교하여 인사에 활용하려는 입장인데, 선조는 ‘과실이 하나도 없는 자를 찾아 장수로 기용하려 한다면 잘못’이라 하며 무인이로서 才智만 있다면 완전하지 않아도 기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하지만 오리는 ‘식견이 미치는 한 꼭 미리 결정하고 난 연후에야 진달할 수 있는 것인데, 장수에 합당한 사람은 쉽게 얻기가 매우 어려워서 용이하게 말할 수 없다’고 하여, 당시 실록의 사관에게 ‘원익이 대신의 몸으로서 전하께서 흉금을 털어놓고 하문하는 때를 당하여, 도리어 쉽게 얻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으로 대답함으로써 성상의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너무도 낙담케 하였으니,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없다’는 평을 얻었다. 장수를 고르는 시각에 있어서 군신간의 시각차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수령의 賢否에 대해서도 상세히 논하였다. 수령 중에서는 직무에 충실한 자도 있고, 公事의 首尾조차 모르는 자도 있었는데, 충청도 수령의 현부는 알 수 없으나, 전라도는 이미 狀啓한 대로 康復誠과 李福男이 잘하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이복남은 슬기로운 사람이라 장수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또한 형벌을 지나치게 써서 自用하는 병통이 있었고, 羅州에도 營을 설치하여 군사 3백 여 명을 두고 兵使와 결속시켜 援兵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올라왔다면서, 수령을 오래 맡기면 모든 일을 잘 다스릴 수 있지만 자주 바꾸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니, 그대로 머물러 두고 兵使로 차출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건의하였다.107) 전시 상황이어서인지 수령을 선발하는 문제는 장수의 적임자를 찾는 일과 분리되어 논위되지 않았다. 한 예로 鄭起龍과 洪季男에 대해서도 戰功과 수령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자질을 적절히 비교하며 어느 정도의 승진이 적절한지를 논평한 것을 들 수 있다.
③민생의 안정
연해 지방 촌락의 상황에 대한 설명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전반의 피폐상으로 이어졌다. 바닷가의 촌락은 모두 비어 있었고, 양반들도 모두 요역을 면하지 못하여, 富者가 小民의 일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방의 경제 사정이 궁색해지자 양반들이 소민의 책임까지 일정 부분 감당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기서 이원익의 양반 신분의 책무 이행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나타나는데, 그의 신분관의 일면까지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평상시에는 더러 徭役을 하지 않는 자도 있었는데 지금은 양반들도 모두 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경상도야 말할 것 없지만 적들이 분탕질하지 않은 전라도 지방에는 더러 富者가 小民들의 일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流徙하지 않았고 소민들은 모두 도망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캐보니, 양반들은 그래도 국가와 더불어 休戚을 같이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신은 마음속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처럼 오리는 小民보다는 양반의 선도적 역할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가 평소 ‘백성은 오직 국가의 근본이니 조정에서는 이 점을 절급한 임무로 삼아야 하며, 기타의 일들은 餘外의 일’이라 하면서도, 이른바 ‘大家世族’의 역할에 대해서는 선조에게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大家와 世族들의 문제에 있어서 평상시에는 豪强이라고 불려졌었지만 오늘날 시점에서 그들을 보건대 그들이야말로 국가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소민들은 물고기나 새같이 놀라 흩어졌어도, 士族들은 동요하지 않았으니 일국의 元氣가 될 만합니다. 당초 변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킨 자들이 모두 이 사족이었으니 이로써 인심의 向背가 정해졌습니다. 이 점을 심
상히 보지 말고 국가가 그들을 알아주어야 할 것입니다.108)
오리는 사족이 국가의 ‘元氣’로서 전란 극복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더라도,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히 아뢴 바 있다.
사람들에게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은 연후에야 윗사람을 친애하며 목숨이라도 버리는 법입니다. 이미 恒心이 없고 보면 아무리 그들을 엄중한 법으로 묶어놓는다 해도 태연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떠나버릴 계획만 갖고 정착해 있을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니, 한번 고향을 떠나고 나면 바로 도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백성의 생활이 곤핍하다는 말은 곧 선비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고 성상께서도 필시 이 일을 보통일로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신이 직접 자세히 보고 왔는데 왜가 물러간다 하더라도 국가의 근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크게 걱정스럽습니다. 일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소서.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일처리에 급급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 만을 다스리는 것이니,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고서야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민생을 안정시킬 계책에 대해서도 여러 의논을 내놓았는데, 대체로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오리는 1~2년의 기한으로 매우 힘든 요역은 호조로 하여금 견감하게 하여 민력을 조금 여유있게 할 것을 청하면서, 호조에서 節目을 변통하기도 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조절하기도 하여 賦貢을 대부분 감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소민은 저축이 적어 한번 侵徵하면 즉시 가산이 패망하고, 流徙하거나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적이 아무리 염려스럽다고 해도 民嵒의 두려움이 적보다 심하며, 우리나라의 부고는 兩湖이니 소복시킬 방책을 먼저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을 막아내려면 먼저 백성의 삶을 안정시켜야 하며 무엇보다도 산업이나 생산에서 우리나라의 기틀이 되는 지역인 ‘兩湖’ 지방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오리는 田結의 감소에 대해서도 크게 우려하였는데, 평상시 4~5백 結이나 되던 것이 지금은 2백 결 뿐이라 하였고, 起耕한 곳은 겨우 3분의 2밖에 안된다고 하였다. 또한 ‘御藥’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백성이 죽는다’고 할 정도로 民怨이 심함을 거침없이 상주하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京官을 내려보내 年分을 覆審하면 稅入이 많아질 것이라 제안했다. 해마다 未收된 田稅를 蠲減하고자 하면 나라의 경비도 걱정이므로,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의 전세에 대해서만 減除할 것을 주청했다. 海運判官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백성들에게 거둘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임진년의 還上에 대해서 오리는 예전에 논의할 때와는 입장을 바꾸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만약 명분 없는 일을 가지고 민간에게 徵捧한다면 더욱 옳지 않은 일일뿐더러, 남방에 와서 직접 보니 전쟁의 와중에서 죽음만을 면했을지라도 모두가 빈털터리로 의지할 곳이 없는데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백성이 고통을 받는 현장을 목격한 결과 종래의 입장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중국에는 還上이 없느니 우리나라도 이를 없앨 수는 없느냐는 선조의 물음에는, ‘환자는 예전부터 전하여 내려온 舊法으로서, 백성들이 혹 遠慮도 없이 모조리 먹어버리고 남음이 없다면 달리 救荒할 방법이 없을 것이므로 환자의 법을 둔 것’이라고 하며 긍정하였다.
오리는 체찰사로서 올라온 후 ‘其人’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각도 백성들의 폐해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木花가 희귀하니, 평상시에 其人 1명이 납부하는 8疋의 수량은 도저히 마련하여 낼 수가 없다. 아전들이 京役하는 제도를 임시방편으로 혁파하고, 각읍에서 현재 起耕하여 수합한 米升으로 수년 동안 시행해봐서, 피차가 모두 편하다면 이를 영구한 방법으로 삼아도 혹 무방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 수령에 대한 검칙이 ‘견제’로 인해 제대로 실행되기 어려웠는데, 기인에 관한 일도 啓下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실행하기 어려웠다. 전에는 각 고을의 공물을 木綿으로 평균하여 私主人에게 지급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상납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저지르는 폐단이 크므로 호조에서 규찰하고 法司 또한 드러나는 대로 바로잡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史臣의 평에 따르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원익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雜役의 감면을 청하였다. 특히 경상도에서 인구가 격감하고 接應할 일이 번다한 상황을 잘 살펴 줄 것을 강조했다. 선조는 호조와 상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경상도의 농사 형편은 지난해와 다름이 없으나, 대개 전라도에서 온 流民이 起耕한 까닭에 官家의 수입이 없었다면서, 수령이 비록 쇄환하고 싶어도 어루만져 불쌍히 여겨야 하기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고 있고, 이 때문에 전라도 수령은 유민 몫의 役을 本邑에 남아 있는 백성에게 부과하는 까닭에 민원이 더욱 심해져 난처해진 사정을 아뢰었다.
또 백성들 중에서 전쟁터에서 죽거나 절의에 죽은 사람을 표창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선조의 전교에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즉시 방문하였으나 근거할 문한 문적이 없어서 귀로 들은 것에 의거하였다고 하였다.109)
④敵情의 파악과 국제정세
오리는 부산 등지에 남아 있는 敵情에 대해서도 상세히 보고하였다. 오리는 저들이 처음부터 속여왔으므로 去留를 期必할 수 없다고 보고, 적들의 ‘謝恩’과 우리의 ‘回賜’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대마도주가 관백에게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하늘에 빌었는데 地震 사건이 있었다는 일화도 보고하였다.
명군이 바다를 건너 군량을 운반해오는 경로에 관해서도, 수로를 택한다면 登州와 萊州를 경유하여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고, 연경으로 갈 때 이 길을 이용한 정몽주가 ‘바람만 순조로우면 30일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 말을 인용하며 가까운 길이라 평가하였다.
3. 丁酉再亂 前後의 전쟁 관리
(1) 梧里의 재차 남하와 전투 준비
1596년 10월 상경하여 다양한 진언을 올린 오리는, 왜적의 재침 조짐이 있던 11월에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왜군과 맞서게 되었다. 유성룡은 오리가 11월 9일에 출발할 예정이라고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중국의 南兵을 남방의 어느 곳에 留屯시켜 인심을 안정시키고 적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도록 해서 전황의 악화를 미연에 막아야 하는데, 명군에 대한 饋餉하고 出兵 요청을 하고 협력할 수 있는 조선의 名將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리에게는 또한 남방의 한산도․장문포 등 해상을 충실히 지키는 임무도 부여되었다.110)
왜군의 재침과 오리의 남방 파견을 앞두고, 1596년 11월 7일 조정에서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이산해는 오리를 남방에 내려보내려 한 의도는 밝혔는데, ‘邊將을 제압하고 백성을 타이르려 한 것일 뿐’이었다. 선조는 오리를 서울에 계속 머무르게 하고자 했으나, 유성룡은 ‘내려 보낼 때의 처음 뜻은 下四道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던 만큼 이제 올라오게 한다면 萬全의 계책이 아닐 듯하다’고 하다며 반대하였다.
선조는 오리에게 언제 떠날 것인지를 확인하고, 高彦伯을 데려가도록 했다. 오리는 ‘賊情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저들이 下三道에 웅거할지, 아니면 곧바로 진군할지 몰라서는 안되겠다’고 아뢰었다. 또한 오리는 ‘우리나라 사람은 왜자의 그림자만 봐도 문득 달아나므로, 4~5백 騎라도 한꺼번에 급히 달려서 흩어진다’면서 자신이 馳報하더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어서 明使 沈惟敬의 말을 黃愼의 軍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보고하며,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와 관련된 정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왕래하는 일로에 많이 있는 양곡이 적이 움직일 경우 적에게 도움이 될 가능성을 선조가 지적하자, 오리는 사람들이 流離하여 사방에서 입에 풀칠하다가 방방곡곡에서 그대로 경작하여 곡식을 저축한 자까지 있는 사정을 거론하며, 居民도 따르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客民까지 통제하기는 어려울 것임을 말했다. 또한 왜군이 輕兵으로 곧바로 온다면, 그 시기는 얼음이 얼 때쯤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리는 남하 이후의 행보와 계획에 대해서도 아뢰었다. 먼저 星州의 營中에 내려가서 善山의 金吾山城을 지키려 하며, 모든 일을 동료와 의논하였으나 의논이 둘로 갈라져 어찌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영남은 이미 왜적을 겪었으므로 거의 驚動하는 마음이 없겠으나, 兩湖는 부역이 많고 사람들의 원망이 커서 국가가 있고 관원이 있는 줄 모르니 매우 민망하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오리는 다른 도는 두루 돌 수 없는 형세이므로 금오성에 들어가 지키려는 전략을 세우고 있는데 비변사가 반대하고 있어서 곤란하다고 하였다. 이에 선조는 ‘主將은 싸움에 나가 임기응변해 하며, 비변사가 右相을 가르칠 수 없고, 우상도 비변사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니, 스스로 힘쓰라’는 답을 내릴 뿐이었다. 그 밖에 민생과 관련하여 其人이 防納하는 폐단을 해결할 것을 다시 한번 청했다.111)
오리에게 부여할 역할과 행보에 대해서는 조정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선조는 오리가 관서의 인심을 얻었으므로 온갖 조치를 의뢰할 수 있다고 보았고, 신하들은 혹은 우선 京中에 머물러서 남방의 일도 아울러 돌보아야 한다 하고, 혹은 남방의 민심이 바야흐로 어수선하므로 다시 내려가서 한번 경략하여 지시하고 분부한 뒤에 올라와야 마땅하다 하고, 혹은 남방에 멀리 가지 말고 우선 충청도로 내려가 서울과 가까운 지방에서 형세를 보아 진퇴하도록 하되 일이 급하면 먼저 관서로 내려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하였다. 이에 선조는 방어하는 일은 副使와 都元帥 이하에게 맡기고 우선 서울에서 절제하다가 사세를 보아 關西로 가야 한다고도 하였다.112)
비변사에서는 11월 9일 오리가 대신이므로 감사가 될 수 없고 체찰사로서 내려가야 하며, 下三道의 인심이 바야흐로 어수선하여 오리가 내려오길 바라기 때문에, 그곳을 버리고 關西로 내려간다면 下道의 민심이 안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선 남방으로 내려가거나 충청도에 머물러 있어 한번 경략하여 형세를 보아 진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청했다. 이에 선조는 뭇 의논이 그렇다면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113)
같은 날 헌부에서는 오리를 도체찰사로서 시급히 남방으로 파견할 것을 청하면서, ‘이원익이 남방으로 내려간 뒤에 백성이 울며 愛慕하였고, 이번에 올라와서는 오로지 민폐를 덮어 주었으므로 도탄에 빠진 백성이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이제 만약에 문득 서울에 머무르고 내려가지 않게 한다면 민심이 의지할 데가 더욱 없어져서 다들 흩어질 생각을 품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서방이 비록 중하기는 하나 이원익이 本道에 있을 때 이미 규모가 있고 도체찰사가 있으므로 이원익을 급히 남방으로 내려보내 인심을 鎭撫하고 武備를 감독하도록 하자고 하니, 선조가 아뢴 대로 하도록 윤허하였다.114)
오리는 장차 11월 17일에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보고하면서, 위아래가 서로 믿고 대신과 신하가 만나서 情意가 막히지 않고 宮中과 府中이 일체가 되어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고 아뢰었다.
예전에 남쪽 변방에 있을 때에 ‘通信하는 일은 반드시 무사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羈縻할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하는 것이지, 和議하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또한 왜군이 오더라도 막을 것을 생각하면서 국도를 보전할 방도를 생각할 것이며, 중국에 의지하여 편안하기를 바라면서 적이 곧바로 西路로 향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 하였다. 위에서는 大國에 의지하여 편안하기를 바라더라도 大臣을 시켜 성을 지키게 하면 그런대로 와해하여 무너질 근심을 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리는 또한 동궁을 반드시 중간에 머물려 인심을 진압하게 해야 할 것이며, 명령이 끊어지면 군사가 해체될 것이니, 급박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武士를 가려서 有旨를 잇따라 내려보내야 한다고 당부했다.115) 11월 15일에는 충청수사가 閑山에 가는 일은 도체찰사 이원익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형세를 보아 처치하도록 하였다.116)
11월 17일, 右議政 兼江原忠淸全羅慶尙等道 都體察使로 임명된 오리는 서울에서 떠나면서 선조를 인견하였는데, 선조가 내리는 醞盤을 직접 받았다. 떠나기에 앞서 임금과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오리는 충청도 쪽으로 내려가면 將官을 볼 수 없고 공문을 보낼 수도 없으니 반드시 경상, 전라도 지방으로 내려가 잇따라 공문을 보내야 군사를 모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오리는 먼저 敵情을 파악한 후, 이에 따라 방비책을 세우며, 민생을 안정시킬 대책에 대해 논의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방어태세 완비
적의 침범에 대비하여 전략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오리는 군사를 모아 결전하려는 도원수 권율의 계획에 대하여 兩湖에서 1만 4천 석의 곡식을 내야 할 형세이므로 쉽지 않을 것이기에 원수를 만나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특히 일본의 財力이 부유하고 웅대하다는 선조의 우려에, 오리는 “저들은 한 州에 3백의 精兵이 있더라도 죄다 抄錄하여 날마다 田賦에 따라서 군사를 내므로, 어느 結로는 어느 군사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을 마련한 후에 움직인다”고 대답하여 일본군의 군량 보급이 충실함을 언급하였다. 오리는 ‘淸野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방방곡곡에 저축한 것이 깨끗이 없어져 적의 군량 문제를 어렵게 되므로, 적이 오는 길을 끊거나 늦출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적을 막기 위해서는 山城의 지세나 시설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다. 오리는 星州山城에 대하여 ‘수축했어도 성 모양이 좋지 않고 골짜기의 평평하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將士들이 다들 그곳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그밖에 善山의 金烏山城은 城子가 매우 좋으나 물이 적어 우물을 파야하는 점, 안에 민가가 빽빽하지만 온 힘을 다하여 방비할 곳은 대개 적은 점 등을 지적하였다. 公州山城은 오리가 직접 올라오며 살펴본 결과 물가의 산성으로 안이 대접과 같아서 형세가 매우 낮고 좁다고 보았다. 다만 중간에 물이 막혀 있고 가운데 언덕이 있으므로 조치하여 민가를 만들면 매우 좋은 까닭에 감사가 衙屬을 데리고 들어가 지킬 생각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해상의 방어에 힘썼다. 오리는 한산도에 직접 들어가 보고 舟師를 얼마쯤 징발하여 막을 계책을 의논하고자 했다. 남방에 내려가 各浦의 배를 내어 농민을 싣고 沿海의 주사도 급히 징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밖에 활을 많이 만들려 해도 뿔은 있으나 힘줄이 없는 문제, 銃筒을 만들어도 화약이 없는 문제, 一路의 軍器를 말이 없어서 나르지 못하는 문제 등 무기를 제작하고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달하는 문제도 폭넓게 지적하였다.
남방에서 良將을 등용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오리는 郭再祐가 名將으로 알려졌는데 불러도 오지 않고 아직 그 사람을 보지 못했기에 천거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禹伏龍은 武將이 아니기는 하나 남방의 兵馬가 있는 곳에서 守令을 시키면 필시 물러나지 않고 한 지역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 밖에 군공이 있는 자를 널리 포상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당상으로 加資하여 爵名을 높이는 것보다 參奉 같은 末官일지라도 제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였다.
②明軍과 降倭의 활용
명군의 적극적 참전을 유도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선조와 오리는 명군이 우리의 남쪽 변방을 구원할 것인지 우려했고, 천하의 큰 힘으로도 변방에 양식을 나르고 멀리 가서 강한 적을 정벌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오리는 만약 명군이 登州와 萊州를 거쳐서 넘어온다면, 반드시 남방에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남방은 조정에서 방어할 방책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리는 ‘王城은 중국의 힘을 의뢰하더라도 下三道는 반드시 우리 백성의 힘으로 보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중국에만 의존하려는 선조에게 ‘우리나라 사람은 참으로 스스로 힘써야 하니, 어찌 오로지 중국만을 믿을 수 있겠느냐’며 독려했다.
항복한 왜군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제 나라를 버리고 와서 붙는 자는 반드시 속으로 詐惡한 마음을 품으로면서도 겉으로만 투항해 붙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다 배반하지 않더라도, 참으로 붙으리라 보장할 수 없으며, 金應瑞의 陣中에서 불측한 일도 있었던 예를 들며 우려를 드러냈다.
③민폐의 개선과 민심 안정
하지만 무엇보다도 민생의 안정이 중요했다. 오리는 병란 이전부터 수령이 어질지 못하여 백성이 침학을 받았는데, 병란 이후로는 더욱 무휼하지 않아 백성들이 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져 거의 다 고향을 떠나 일정한 거주지와 가족이 없어졌다고 보았다. 법이 시행되지 않으니 명령해도 가지 않고 왜적을 막게 하면 줄곧 달아나며, 不逞한 사람이 돌봐주면 도적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리는 그의 지론이었던 其人의 공물을 개혁할 것을 다시 한 번 청하였다. 其人의 일은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더욱 심하므로 반드시 변통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공물을 받아들이는 元數를 조금 줄이자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백성에게 폐해가 되는 일이라면 모두 말하라는 선조의 말에, 오리는 ‘신이 장계하더라도 該司에서 번번이 防啓하므로 民情이 답답하여 못 견딘다’며 자신의 생각이 실무관서에서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는 고충을 토로했다. 또한 ‘백성의 힘이 매우 지쳐서 응당 해야 할 온갖 身役도 이바지하지 못하니 처자를 가두더라도 어찌할 수 없다’면서, 쌀도 바치기 어렵고 무명을 살 때 도리어 3~4섬의 쌀을 써야 겨우 응할 수 있다면서 刷還하려 하더라도 이미 떠나 살고 있어 결코 돌아오지 않으니 엄히 벌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선조는 ‘편의대로 하라’면서 軍賞을 행하고 민폐를 없애는 일은 낱낱이 지휘를 기다리지 말고 右相의 마음대로 하라면서 폭넓은 재량권을 위임했으나, 오리는 중앙에서 재결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으니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민생의 안정에 유의한 까닭은, 이 문제가 원활한 전쟁 수행의 기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량의 보급이 중요한데, 오리는 군량을 兩湖에서 나르게 할 경우 사람들이 이미 병들어 지쳐 있는 상태라 매우 어려울 것이라 보았다. 또한 兩南 사람은 다들 徭役에 괴로우므로 싸울 뜻이 없으니, 북돋아 인도하여 격려해야 한다고 보았다. 영남의 인심을 오래 관찰한 경험을 언급하며, 그들이 ‘임진년에는 뜻밖에 병란을 당하였으므로 그처럼 겁냈으나, 이제 다시 온다면 어찌 적과 함께 살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으나 병란을 당해봐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호남은 인심이 원망한다는 말은 있는데 난동까지야 생각하지 않겠지만, 국가가 잘 알아서 처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전라도는 병란 이후 국가에 공이 많거니와 양반으로서 勤王한 자는 다 호남 사람이 聲色의 차이 없이 호남 사람을 필이 거두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117)
(2) 이원익의 전투 지휘와 외교 활동
오리가 파견된 뒤에도 그에 대한 국왕과 조정의 신뢰는 확고했다. 유성룡은 예전에 오리가 서방에 내려가면 인심이 반드시 좋아했다고 하였고, 戶曹判書 金晬는 명군의 양식을 위해 이원익을 서방에 보내려 한다 하니 아랫사람들이 매우 염려하였는데, 대개 남방 백성들은 자기들을 버린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118)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도 있던 이원익에게 경상도와 전라도 兩道를 관할하는 것은 과중한 부담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황해도 관찰사 李廷馣은 ‘도체찰사 李元翼은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처사에도 매우 능합니다만 원래 기질이 허약한데다가 질병이 겹쳐 있으니, 한 사람의 정력으로는 양 道에 두루 미칠 수 없다’면서 호남에 대신을 또 한 사람 파견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119)
오리는 ‘一身이 將相을 겸하고 있어서 당시에 그를 蕭何와 鄧禹에 비유했다’는 평처럼, 남방에서 임금을 대신하여 개별 전투의 지휘에서부터 전쟁 전반을 좌우할 주요 정보를 수집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리에게 부여된 임무로서는 우선 왜적을 직접 공략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선조는 왜장 加藤淸正을 해상에서 요격하라는 교지를 내린 바 있었는데, 전일 오리가 내려갈 때 이 뜻에 따라 水軍의 장수와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120) 오리는 휘하의 군관 鄭希玄에게 명하여 부산에 있는 적의 소굴을 몰래 불태우는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121)
1597년 1월 21일 加藤淸正이 2백여 척의 배를 몰고 다대포에 상륙한 사실을 書狀으로 보고하며, 加藤이 보낸 牌文의 내용도 첨부하였다.122) 오리는 적정을 분석한 관문을 비변사에 보내어 국왕에게 보고될 수 있도록 했다. 1월 21일 보낸 관문에 따르면, 왜적이 내일 아침에 左道로 향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비변사에서는 고언백을 금일 출발시켜 죽령을 넘어 속히 좌도로 향하도록 했다. 일로의 고을에서 식량과 정탐하는 군사를 많이 내어 돕도록 하기도 했다. 오리의 신속한 邊報에 따라 중앙 조정에서도 비교적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123) 1월26일에는 울산군수의 馳報를 인용하여 왜적이 정박했던 곳에 屯聚시킨 선박 5백여 척이 그 포구 2馬場 남짓 되는 곳까지 빈틈없이 정박한 사실을 보고하였다.124) 왜적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국왕과 비변사 유사당상이 모인 자리에서도 이원익의 전황 보고나 과거에 내놓았던 계책이 큰 참고가 되고 있었다.125)
오리가 임무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의 하나는 도원수 권율과의 성향 차이와 지휘체계였다. 오리의 종사관 홍문관 교리 노경임은 선조와 인견한 자리에서, 오리와 권율이 가까운 곳에 있으나 조치하는 ‘規劃’이 같지 않음을 고했는데, “이원익은 일을 반드시 자세히 살핀 연후에 하는데, 권율은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급하게 하므로 같지 않음이 많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마땅히 도원수가 체찰사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나, 우부승지 許筬은 ‘名號가 많아서 諸將이 영을 들어야 할 主將을 모른다’면서, 이미 ‘元帥’라 이름해 놓았으면 스스로 결단해야 하며 남의 節制를 받아야 한다면 副使라고 칭호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126) 2월에는 도체찰사와 도원수 사이의 지휘체계상 어긋남이 더욱 심해져, 비변사가 도원수를 엄중히 논핵해야 한다는 뜻을 아뢰었다. 오리가 이미 체찰사의 명을 받고 四道의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으니 원수 이하가 모두 節制를 받아야 하며, 權慄도 대소 軍務를 모두 품의하여 명령을 받아 시행해야 하는데, 이번에 수군과 육군을 아울러 擧兵하는 막중한 일에 가부를 품의하지도 않고, 체찰사가 만나보고 일을 의논하려고 세 차례나 전령했는데도 나아가지 않았으니 심히 부당하다는 것이다.127)
오리는 우리의 군사 기술이 적에게 유출되는 것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저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서장에서 경상좌수사 李雲龍의 첩정을 인용하며, ‘淸正이 西生浦에 있을 적에 적에게 붙은 海尺 河甘同이란 자가 우리나라 板屋船 제도로 배 한 척을 만들어 주어 사용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行刑할 것을 청했다.128)
1597년 3월부터 적과의 직접적인 교전 상황이 임박해졌다. 이원익은 書狀에서 富山城의 경우 民情이 潰亂할 뿐 아니라 성의 주위는 매우 큰데 군병이 單弱하여 사세상 지킬 수 없다고 보고, 도원수 권율도 같은 생각인 것을 확인한 후, 장관․수령의 家屬을 公山城으로 옮겨 놓고 적이 공격해 오면 군사를 출동시켜 요격하게 할 것을 청했다.129) 오리는 4월부터 시시각각 탐지되는 적정을 보고하였다. 경상좌도 병사 成允文의 牒呈을 인용하여, 3월 21일 倭船 14척이 부산포 맞은 편 가마리에 정박하였는데, 그중 9척은 쌀을 싣고 와서 가마리포에 정박하였고, 나머지 5척은 右道의 竹島를 향해 떠나갔음을 치계하였다.130) 긴박해진 상황 속에서 적 진영에 다녀온 僧將惟政과 문답하였는데 그 중 분통한 말이 많아서 차마 기록하지 못하고 비변사로 유정을 직접 올려보내기도 했다.131) 또한 下四道에서 부모가 적의 손에 살해당한 이를 모집하여 구성된 ‘奮義
復讎軍’의 지휘체계도 체찰사 오리에게 일원화하여 募兵과 行軍 절차를 지휘 독찰하게 되었다.132)
유정이 다녀간 이후에도 오리는 왜적의 정세를 살피는 데 힘썼다. 오리는 蔚山郡守가 馳報한 倭書 3통을 치보한 일과 加藤淸正의 진중에서 뛰쳐나온 왜인들에 대한 처리를 비변사에 보고하여 처리하였다.133) 오리가 치계한 적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는 중국에 보내는 자문에서도 인용되어 활용되었다. 5월 12일 중국에 병조판서 이항복이 보낸 자문에는 오리가 권응수의 飛報에 나온 정탐꾼 朴奇男이 들은 바를 근거로 치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정탐을 통해 알아낸 왜인의 말은 ‘조선이 만일 강화하려 하지 않으면, 일본의 큰 위세와 많은 군사로 올 6~7월 사이에 바다를 건너와 우선 전라도를 약탈하고 마음껏 분탕질을 하겠다’는 것이었다.134)
오리는 왜적을 공략할 방략에 대해서도 직간접으로 조정에 건의했다. 5월 선조가 대신과 비변사 유사 당상을 인견하고 국내외 정세와 대책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좌의정 김응남은 오리에게서 받은 편지를 인용하며, “그의 의견도 우리 나라는 스스로 떨쳐 일어날 형세가 없으니, 비록 곧바로 적의 소굴을 향하여 쳐들어갈 수는 없을지라도 天兵으로 성원을 삼고 때때로 출병하여 출몰하는 적들을 공격한다면 옳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고 전했다.135)
6월에는 수륙 양군이 종합적인 전투 계획을 조정에 보고했다. 중국의 남북 군사가 속속 나왔으나 곧바로 진격하지 않고 오랫동안 屯守하기만 하면 우리나라 백성이 피폐해지고 재물이 탕갈될 상황인 까닭에 어떤 돌파구를 뚫을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오리는 권율 도원수와 숙의하여 慶尙左右道 및 中道 세 곳의 邊陣에서 각기 정예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나누어 進屯해 밖으로 나오는 왜적을 차단하는 동시에 적이 만약 군사를 많이 내어 침범해 오면 역시 진퇴하여 무찌르면서 뒤에 오는 主陣이 응원하도록 하였다. 주진이 나아가 둔칠 수 없었던 것은 糧道가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반드시 수군을 이용하여야만 일이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 배를 건조하고 格軍을 충원하는 문제도 지적하였다.136) 오리는 작전의 입안과 실행을 위해서 때로 중국 장수와 문답하고 비밀 서장을 보내오기도 했다.137) 전쟁 지휘와 아울러 관리의 규정 위반에 대해서 단속에도 힘썼는데, 오리는 장계를 올려 驛馬의 규정을 위반한 통제사와 도원수의 종사관을 파직하고 추고하도록 하였다.138)
6월 29일 오리는 종사관 南以恭의 치보를 인용하며 加德島와 安骨浦에 있는 적의 소굴을 공격한 전황을 보고하였다.139) 7월 14일에는 아군이 적선 10여 척을 포획한 것을 치계하였다. 이달 8일에 왜선 6백여 척이 일본에서 건너와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였는데 右道 舟師가 밤을 틈타 강을 건너 다대포 앞바다에 정박하였다가 포획한 것이었다.140) 이미 왜군의 선박 중 많은 수가 바다를 건너온 상황을 포착한 오리는 7월 21일 치계하여 증원군을 요청했다. 아울러 많은 군사가 필요함에도 식량이 모자라고 또한 정예병이 필요한 상황임을 알렸다.141) 이처럼 오리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황과 적의 이동을 조기에 파악하고 중앙 조정에 알려 필요한 조치를 제 때에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元均이 7월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오리는 奔潰한 將官들을 군법에 의해 치죄하지 않아 오늘날 달아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면서, 원균을 비롯한 패주한 장수의 처벌 문제를 도원수 권율과 의정하여 치계하였다. 특히 원균은 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하자고 청하고, 이하 수령과 변장도 등급을 나눠 죄를 주기로 하였다.142)
육전에서도 왜군의 진격을 계속 허용하고 있었다. 8월 8일 오리는 왜군이 南江에 浮械를 설치하고 강을 건너 진주에 입성했음을 보고했다.143) 이어서 남원도 함락되었는데 이때 오리는 星州에 주둔하여 秋風嶺·鳥嶺·竹嶺 등을 막고, 도원수 權慄은 高靈에 주둔하여 左右道를 節制하고 동서의 各路를 수비, 차단하게 하였는데, 중간의 賊路가 왜적들로 가득 차 소식이 두절됨으로써 어느 성이 포위당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144)
후일 선조가 총독 刑玠에게 보낸 자문에 따르면, 이때 오리의 역할과 결과적으로 왜군의 진공을 저지하지 못한 정황이 확인된다. 오리와 권율은 직접 싸우는 장수가 아닌 까닭에 왜군의 예상 침입로에 맞추어 군사를 배치하고 적을 막도록 지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초 왜적이 직접 서울로 쳐들어 올 기세가 보여 星州와 高靈이 경상도의 中路로서 요충이 되므로 오리와 권율이 나누어 주둔하였으나, 뜻밖에 중로의 왜군이 陜川과 草溪 등의 길을 따라 南原으로 올라오자 오리와 권율은 왜군에 막혀 차단당해 남원을 구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145)
오리는 9월에도 창원과 옥천에서 아군이 올린 전과를 보고하였다.146) 그러나 곧 9월 26일경 오리는 병이 위중하여 휴가에 들어갔고, 마침 영의정 유성룡은 京畿와 湖西로 가고, 좌의정 김응남도 장차 나갈 상황이라 영의정 세 자리가 일시에 비어버리는 상황이 되었다.147) 그런 가운데 오리는 10월 14일 병을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사임시켜 줄 것을 간청하게 된다.148) 그는 11월 3일에 재차 파면을 청할 때는 황제의 칙서에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사유로 들기까지 했다.149)
이 해 12월에는 오리가 다시 軍門 邢玠와 국왕의 남하와 관련된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군문은 국왕이 남하하면 호종하는 장사가 군량을 낭비하고 각 고을은 명령을 받드느라 왜적 토벌에 전념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오리는 대군의 군량을 조발하는 일 때문에 국왕이 친히 나아가 독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국왕이 남하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회보하는 역할을 오리가 맡기도 했다.150)
12월 29일 오리는 淸正의 군대를 무찌른 승전보를 전하고 군문의 동정을 알렸다.151) 오리는 군문과 협의하여 각처에 성을 쌓고 둔전을 경작하는 것을 협력하여 장기전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왜군의 기세는 꺾었으니 장기적인 전쟁을 명군과 협력하여 수행해야 하는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152) 이어서 오리는 중국 南兵으로 하여금 山城에 주둔하면서 屯田을 하도록 한 계책을 성사시키도록 꾀했다.153) 군문은 오리를 통해 비밀스런 계책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왜적 속에 있는 간첩을 이익으로 꾀어 加藤淸正을 독살하고자 하는 일이었다.154)
오리는 1598년 3월에 일을 충실히 하지 못한다고 하여 대죄하였다.155) 이 시기 이원익의 주된 일은 軍門과의 의사 소통이었다. 오리는 ‘建州㺚子’들이 왜군과 싸우기를 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邢軍門에게 확인한 후, ‘이들 역시 왜노와 마찬가지이니 달자를 뽑아 왜노를 죽이는 것은 한 왜노를 더하는 것’이라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니, 군문도 이를 따랐다.156) 오리는 陶通判이 조선의 군대 중에서 전투 능력이 없는 자를 차출하여 군량을 운반하고, 京江의 船隻을 다수 調發하여 빠른 시일 내에 경강의 米豆를 영남에 운송함으로써 糧餉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듣고 보고하였다. 이 기사를 적은 실록의 사관은 이원익에 대해 “자상하고 淸簡하여 關西 관찰사로 있을 때 백성을 사랑하고 군대를 조련하는 등 성의를 다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建白이 없이 세상 따라 오르내려 언론이나 기량에 있어 하나도 볼만한 것이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라고 했는데,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보다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으로 해석된다.157)
이 시기의 오리는 예전보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자책하는 글을 올리며 職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는 면이 보인다. 오리는 자신이 죄명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조정의 누가 될 터이니 속히 罷斥하고 다른 재상으로 바꾸어 달라고 재차 청했다. 이에 선조는 是非는 그만두고라도 정승의 자리가 비어 있는 상황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158) 이 시기 오리는 정승으로서는 유일하게 행공을 하는 ‘獨相’ 상태였다. ‘卜相’을 하여 궐위된 좌의정을 정하라는 유성룡의 주청에 대해 선조는 ‘참으로 인재라면 한 사람이라도 충분하다’고 하여 여전히 확고한 신임을 보여주었다.159)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1598년 7월에 좌의정이 된 오리는 국왕과의 인견 자리에서 전쟁 수행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辭意을 만류하는 선조의 箚子로 출사를 하였다면서, 출척과 진퇴에 대해서도 관여하는 經理가 자신을 指斥하였는데 어떻게 태연하게 공무에 임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선조는 성을 내면서 세 명의 대신이 모두 사피하면 어떻게 하겠느나며 만류했다.160) 오리는 7백여 석이나 되는 많은 군량을 마련한 朴毅長에 대한 論賞 여부를 의논하며, 加資는 과중하니 참작하여 적당히 논상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161) 같은 달에 오리는 陳奏使로 명에 가는 것이 결정되었고,162) 經理 楊鎬를 변호하는 주문을 가지고 가는 임무가 있었다.163)
오리가 명나라에 가 있는 사이에 主事 丁應泰가 양호를 시기하여 조선을 두 차례나 탄핵한 사건이 일어나 물의를 빚었다. 이원익은 燕京에 이르러서 정응태가 조선을 모함하여 ‘조선이 왜적을 끌어들여 天朝를 침범하려 한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奏本을 작성하여 通政司에 바치니, 통정사가 장차 이 주문을 황제에게 올리려 하였으나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164)
오리는 이듬해 1899년 1월 10일에야 연경에서 돌아와 중국 상황을 보고했다. 이원익은 북경에서도 衆議가 모두 정응태가 그르다고 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정응태가 무함한 일인 年號 등에서도 대강 변명하였다고 하였다. 다만 廟號에 대해서는 변명할 만한 말이 없고, 사실상 중국 조정에서 모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은 솔직하게 하면서 일일이 변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閣老 趙志皐가 중국을 피폐시켜 가면서까지 東藩을 구원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으나 황제가 독단으로 패전의 보고가 도착해도 동요하지 않아 병사의 동원이나 군량의 수송이 완만히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명 내부의 대조선 정책의 동향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파악하여 분석한 것이었다.165)
이후에 보낸 사은사에서 정승급 대신을 보내지 못하게 되자, 좌의정 이덕형은 중국 조관에서 이전에 經理를 保留시킬 때 時任議政을 보낸 것과 비교할까 우려하여 이원익의 뜻으로 곡진히 稟請을 마들어 본국의 정상을 전달하자고 아뢰니 선조가 승인하였다. 이를 통해 대명 외교에서 오리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166)
1이후 이원익이 전쟁의 수행과 관련하여 두드러지는 언행은 찾기 어렵고, 1599년 1월 14일 영의정으로서 ‘당을 만들고 화친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논척을 당한 유성룡을 변명한 기사가 확인된다.167) 1599년 2월 영의정 이원익은 황제에 대해 辨誣한 일을 성사시킨 일로 선조가 내린 恩賞이 분수에 넘치다고 사양한 기사가 확인되는데, 당시의 史官은 그의 왜란 기간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168)
이원익은 젊었을 때는 물욕이 없어 세상이 되어가는 대로 따라 움직여 별달리 建白한 일이 없다가 임진년 봄에 이르러 西道의 백성을 鎭撫하여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았다. 다만 아깝게도 국량이 좁아 조정에서의 의논이 공정하지 않았으며, 한갓 유성룡의 才藝가 아까운 것만 알고 그가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몰라 차자를 올려서 論辨하기까지 하였으니 애석하다.
그의 전쟁시 공무 경험은 후일 후금이 발호하는 상황에서도 關西와 海西의 군사를 운용하며, 평안도의 田結 9만여 결에서 결마다 군사 한 명씩을 내는 방안을 제시하는 등의 제언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169) 또한 胡馬가 국경을 범할 경우의 방비책에 대해 논하면서 강화도를 보장지로 삼으면서 元子를 남한산성에 들어가 거하게 하면서 동서가 상응하여 적을 견제하게 하는 방책을 내놓기도 했다.170)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리 이원익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전시 체제의 조정에서 관찰사와 정승을 지내면서 전투지휘, 후방지원, 민생대책, 외교활동 등의 다양한 公務를 몸소 처리하면서 전란 극복에 다른 누구보다도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활약이 높이 평가받을 점은 정승으로 있을 때에도 국왕의 곁에서 口論만을 일삼는 데 그치지 않고, 體察使의 직임을 띠고 늘 전투의 현장에서 있으면서 至難한 과업을 수행한 사실이다. 그는 평안도의 牧民官으로서 전시 상황을 만나 민심 수습과 외적 방어라는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였고, ‘出將入相’이라는 말 그대로 선조의 곁에 있을 때는 여러 방략을 강구하여 제시한 재상이었지만, 곁을 떠나면 전투를 지휘하고 병력과 군량을 모집하는 장수였다. 그런가 하면 동아시아 국제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던 임진왜란의 특성상, 피할 수 없었던 첨예한 外交戰의 현장에서 명의 장수와 사신을 응대하기에 힘쓰며 한 차례 몸소 使行까지 다녀온 외교관의 면모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一人多役을 고루 수행하여 끝내 전란을 승전으로 이끈 인물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거니와, 왜란 이후에도 光海朝仁祖朝에 이르는 치열한 붕당정치의 시기에 모두의 존경을 받는 經世型 實務官僚로서 큰 족적을 남긴 점을 감안하여, 오리의 생애는 그 시대를 이해한다는 관점에서 더욱 다각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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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활동에 관해 조명한 논저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柳完相․李良熙, 1998 「經世家로서의 梧里 李元翼 硏究 -壬辰倭亂中 功績을 中心으로-」 長安論叢 18, 長安專門大學 ; 이정철, 2010 「오리 이원익과 두 번의 貢物變通」 朝鮮時代史學報 54, 조선시대사학회 ; 姜周鎭, 1990 梧里大監 李元翼 小傳 , 探求堂 ; 이양희, 2005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 韓國人物史硏究 제4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 李相國日記 는 4권 4책의 필사본으로 2가지 판본(古 4250-49, 古4250-49A)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古4250-49의 책 끝에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己卯年條 발문이 남아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원익의 일기는 본래 수십권으로 전해지다가 병자호란 당시에 소실되었는데 그의 庶女가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전한 것이 겨우 4권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문집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오리의 ‘日記’는 계해년부터 없었는데, 그의 庶女 1명이 12년 동안의 일을 기억으로 외어 전하여 「續日記」라고 하였다고 한다.( 梧里先生文集 2권, 「遺事」)
3) 본 발표원고는 실록의 기사를 중심으로 1차적으로 정리한 결과물이며, 문집 등 기타 사료를 보다 적극적인 활용하고 이상국일기 의 내용을 반영하는 것은 후속 작업을 통해 보충하고자 한다.
4)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4월 28일(정사)
5)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5월 8일(정묘)
6)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5월 2일(신유)
7)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5월 9일(무진)
8) 선조실록 27권, 25년(1592) 6월 2일(경인)
9) 선조실록 27권, 25년(1592) 6월 11일(기해)
10) 오리선생문집 부록 제2권, 「諡狀」
11) 선조실록 27권, 25년(1592) 6월 15일(계묘)
12) 선조실록 27권, 25년(1592) 6월 26일(갑인)
13) 선조실록 27권, 25년(1592) 6월 21일(기유)
14) 선조실록 28권, 25년(1592) 7월 1일(무오)
15) 오리선생문집 2권, 「諡狀」
16)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5일(경인)
17) 선조실록 29권, 25년(1592) 8월 4일(신묘)
18) 선조실록 29권, 25년(1592) 8월 1일(무자)
19)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20일(을사)
20) 선조실록 34권, 26년(1593) 1월 11일(병인)
21)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25일(무신)자 기사에서도 선조는 적이 경성을 떠난 것은 깊은 계략이라고 보는 이원익의 견해에 근거하여 스스로 지킬 계책을 강구할 것을 요구했다. 이원익이 비슷한 언급을 것은 선조실록 48권, 27년(1594) 2월 4일(계축)자 기사에서도 “처음 왜적이 경성에서 물러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서로 慶賀하였으나 유독 이원익만은 ‘적이 아무 까닭 없이 스스로 물러간 데는 속뜻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심히 걱정스럽다.’고 하였다”는 선조의 언급으로 확인된다.
22)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21일(갑진)
23) 선조실록 45권, 26년(1593) 윤11월 14일(갑오)
24) 선조는 경상도 관찰사 洪履祥을 인견하면서 “옛 사람을 멀리 끌어댈 것 없이 평안 감사 이원익(李元翼) 같은 사람을 경은 본받아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선조 54권, 27년(1594) 8월 15일(경신))
25) 선조실록 55권, 27년(1594) 9월 28일(계묘)
26) 선조실록 28권, 25년(1592) 7월 4일(신유)
27)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6일(신묘)
28)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5월 25일(갑신)
29)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5일(경인)
30)선조실록 36권, 26년(1593) 3월 25일(경진)
31)선조실록 47권, 27년(1594) 1월 30일(기유)
32)선조실록 49권, 27년(1594) 3월 28일(병오)
33)선조실록 52권, 27년(1594) 6월 26일(계유)
34) 선조실록 68권, 28년(1595) 10월 22일(신유)
35) 선조실록 71권, 29년(1596) 1월 4일(신미). 특진관(特進官) 신잡(申磼)은, “이원익(李元翼)이 평양(平壤)에 있을 때 대오(隊伍)를 결성하고 군졸을 애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대오에 편성되었는데, 원익이 갈려 온 후에는 각읍의 수령들이 전연 거행하지 않고 심지어는 뇌물을 받고 면제해 주면서 군적을 바꾸기까지 하니 극히 한심한 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선조 71권, 29년(1596) 1월 7일(갑술))
36) 선조실록 63권, 28년(1595) 5월 6일(무인)
37)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21일(갑진)
38)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15일(무술)
39)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18일(신축)
40) 선조실록 40권, 26년(1593) 7월 14일(병인)
41) 선조실록 33권, 25년(1592) 12월 27일(계축)
42) 선조실록 34권, 26년(1593) 1월 15일(경오). 이원익은 명나라 장수가 전사한 군사를 위해 평양 보통문 밖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을 전하자, 비변사에서는 명나라 사졸을 위한 제사를 본 고을로 하여금 지내도록 조치했다.
43)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15일(경자). 이원익은 명군이 평양에 입성한 일로 아뢰면서, 명군이 북쪽의 적을 방비하기 위해서 주둔하고 있음을 치계하면서 駱參將의 小帖 내용을 보고하였다.
44)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20일(을사)
45) 선조실록 36권, 26년(1593) 3월 17일(임신)
46)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20일(을사)
47)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10일(을미)
48)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19일(갑진)
49) 선조실록 35권, 26년(1593) 2월 28일(계축)
50)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21일(갑진)
51) 선조실록 34권, 26년(1593) 1월 14일(기사)
52) 선조실록 36권, 26년(1593) 3월 23일(무인)
53) 선조실록 37권, 26년(1593) 4월 6일(경인)
54)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26일(기유)
55) 선조실록 40권, 26년(1593) 7월 12일(갑자)
56) 선조실록 45권, 26년(1593) 윤11월 3일(계미)
57) 선조실록 42권, 26년(1593) 9월 12일(계해)
58) 선조실록 46권, 26년(1593) 12월 12일(신유)
59) 선조실록 30권, 25년(1592) 9월 17일(갑술)
60) 선조실록 34권, 26년(1593) 1월 28일(계미)
61)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21일(갑진)
68) 선조실록 52권, 27년(1594) 6월 19일(병인). 뒤에도 명의 유격장군 胡大受는 “李布政이 지성으로 군졸을
훈련시켰으므로 군사들에게 흥기하는 마음이 있어 국가에 적을 방어하고 임금을 호위하는 무사가 있게 되었
다”고 칭찬하였다. 여기서 李布政이란 이원익이 일찍이 평안도 방백으로 있었으므로 불린 호칭이다.( 선조실
록 65권, 28년(1595) 7월 25일(병신))
69) 선조실록 52권, 27년(1594) 6월 24일(신미)
70) 선조실록 57권, 27년(1594) 11월 6일(경진)
71) 선조실록 57권, 27년(1594) 11월 6일(경진)
72) 선조실록 57권, 27년(1594) 11월 6일(경진)
73) 선조실록 60권, 28년(1595) 2월 1일(갑진)
74) 선조실록 60권, 28년(1595) 2월 15일(무오)
75) 선조실록 60권, 28년(1595) 2월 20일(계해)
76) 선조실록 60권, 28년(1595) 2월 22일(을축)
77) 선조실록 60권, 28년(1595) 2월 22일(을축)
96) 선조실록 73권, 29년(1596) 3월 1일(무진)
97) 선조실록 74권, 29년(1596) 4월 2일(무술)
98) 선조실록 76권, 29년(1596) 6월 12일(무신)
99) 선조실록 74권, 29년(1596) 4월 17일(계축)
100) 선조실록 74권, 29년(1596) 4월 26일(임술)
101) 선조실록 77권, 29년(1596) 7월 15일(경진)
102) 선조실록 78권, 29년(1596) 8월 28일(계해)
103) 선조실록 80권, 29년(1596) 9월 1일(갑오)
104) 선조실록 80권, 29년(1596) 9월 19일(임자)
105) 이하에 서술된 내용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선조실록 81권, 29년(1596) 10월 21일(갑신)자의 기록이다.
106) 이원익은 원균과 이순신 중에서 늘 이순신을 지원하는 입장이었다. 이순신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훼방을 하여 장차 원균으로 그 직임을 대신하려고 할 때, 이원익은 馳啓하여 ‘원균은 쓸 수 없고 이순신은 파직시킬 수 없다’고 하며 사유를 갖추어 다시 조정에 알렷고, 임금이 다시 그에게 물으니 심혀을 쏟아 극력 변명하였으나 결국 원균이 와서 대신하였다고 한다.( 梧里先生文集 권1, 「逸事狀」) 인조대의 조정 논의에서의 회고담에서도, “체찰사로서 영남을 순행할 때 한산도에 이르러 이순신의 진영과 보루를 다니며 구획을 살펴보았더니 매우 규모가 짜여져 있었다”고 하였고, 인조가 이순신을 칭찬하자 “그 때 비록 불측한 사람의 말이 있었으나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끝내 힘써 싸우다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남쪽 지방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 않는다”고 하면서 “육지에 있는 병력을 완고하게 만든 연후에 적을 막아낼 수 있는데, 전일 한산대첩은 이상의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리선생문집 별집 제1권, 「引見奏事」(인견 때 일을 아뢰다.(4) 갑자년(1624) 3월 8일)
107) 선조실록 81권, 29년(1596) 10월 5일(무진)
108) 후일 丁卯胡亂(1627) 때 이원익은 仁祖가 分朝를 內浦를 거쳐 보내고자 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임진왜란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음과 같이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남쪽 지방의 士子들을 평일에는 비록 ‘豪强’이라고 지목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명분을 매우 중하게 여기므로 만약 급난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명색이 사자라는 자들은 반드시 나라와 흥망을 같이할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단지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이같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계책에서도 반드시 奴僕을 수습하여 스스로 지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적들 또한 ‘너희 나라 양반이 가장 제어하기 어렵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리선생문집 별집 2권, 「引見奏事」(領府事로 도체찰사를 겸했을 때 인견한 자리에서 일을 아뢰다(2), 정묘년(1627년) 1월 21일)
109) 선조실록 81권, 29년(1596) 10월 21일(갑신)
110) 선조실록 82권, 29년(1596) 11월 7일(기해)
111) 선조실록 82권, 29년(1596) 11월 7일(기해)
112) 선조실록 82권, 29년(1596) 11월 8일(경자)
152) 선조실록 96권, 31년(1598) 1월 24일(경술)
153) 선조실록 96권, 31년(1598) 1월 24일(경술)
154) 선조실록 97권, 31년(1598) 2월 3일(무오) ; 선조실록 97권, 31년(1598) 2월 7일(임술)
155) 선조실록 98권, 31년(1598) 3월 7일(임진)
156) 선조실록 98권, 31년(1598) 3월 9일(갑오)
157) 선조실록 99권, 31년(1598) 4월 15일(기사)
158) 선조실록 99권, 31년(1598) 4월 19일(계유)
159) 선조실록 99권, 31년(1598) 4월 20일(갑술)
160) 선조실록 99권, 31년(1598) 4월 29일(계미)
161) 선조실록 100권, 31년(1598) 5월 15일(기해)
162) 선조실록 102권, 31년(1598) 7월 15일(무술)
163) 선조수정실록 32권, 31년(1598) 8월 1일(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