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李元翼, 1547년 ~ 1634년)은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왕족 출신 문신, 학자, 정치인이다. 號는 梧里. 본관은 全州. 음서로 관직이 승의랑(承議郞)에 이르러 다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 사헌과 호조·예조·이조 판서, 의정부좌의정 등을 지내고 관직이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의주로 몽양가는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 근검절약,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東人)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는 남인이 되었다. 광해군때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인조 반정 이후에도 영의정에 초빙되어 서인, 남인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여 남인에 학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윤휴, 허목, 이순신 등의 인척으로, 윤휴의 서모이자 윤효전의 첩은 그의 서녀였고, 서외손 윤영은 충무공 이순신의 서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돈간이었다.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로, 정실 손녀딸의 남편이었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4세손이며, 외가쪽으로는세조, 예종, 성종 세 조정에서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의 후손이다.
오리 이원익, 그는 어떤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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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元翼(1547. 명종2 ~ 1634. 인조12)이 살았던 時期는 나라 안팍으로 제도적으로나 사회구조적으로 심각한 격변에 휘말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살얼음판 같은 시대였다.
- 1545~67 명종때 척신정치의 폐해
1575 선조때 동서분당 당쟁이 격화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부패가 만연하였고, 1585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1592~1598 임진전쟁(日本: 文祿慶長의 役 , 中國: (萬曆의 役) 국토의 80%를 빼앗겼고 백성의 반이 생명을 잃었으며 그야말로 國家存廢의 危機를 맞았다. (1608~1623)당쟁이 사당화까지 되면서 광해군 조정의 綱常이 날라갈 뻔했던 소용돌이 1623 仁祖反正, 1624 이괄의 반란, 모문룡의 폐해(1621~1629), 1627 정묘호란 등등 경천동지할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 났으며, 종국에는이원익사후 3년도 되지 않아서 1636 병자호란의 국치를 당하고야 말았다. - 나라밖의 정세는 明이 쇠망의 기미를 보이는 가운데, 일본이 흥성하고 만주가 굴기하여, 明중심의 기존 세계질서에 도전하고 있던 동아시아 전체의 격변기 였다.
마침내 明淸교체로 귀결되었던 외부세계의 격변 속에서, 조선은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의 안정과 통합을 찾지 못함으로써 임진전쟁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중유의 대 전란을 국내로 끌어드려서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왕권이 무너지고, 당쟁으로 私黨의 이해에만 급급하여, 사리사욕만 앞세우는 부정하고 부패한 선비관료를 의지할 수 없는 리더십 부재 속에서, 백성들은 피폐될 때로 피폐되어 더 이상은 어떻게 할 수 없어 바야흐로 나라가 망하고야 마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 1545~67 명종때 척신정치의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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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절대절명의 시기에, 오리이원익은 어느덧 조선의 정치와 행정의 정점에 서 있었다.
- 농민과 함께 동거동락한 삶: “安民이 제일” — 백성을 살 맛나게 해줘야 한다.
1547년 태종의 왕자 익령군의 4세손으로 태어났음. 당시 국법으로 임금의 종척4대까지 벼슬에 나갈 수 없었으므로 그는 이웃 농민들과 함께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훗날 그가 “백성을 편안하고 잘 살게 하기 위한” 정치를 하고, 그 누구도 말만하고 실행하지 못했던 大同法을 제도로써 구현하고 성공적으로 시행하였다. - 오리정승·오리대감: 그는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한 경세가였다.
1569 과거 급제하여 등과 이후 선조·광해·인조 3대에 걸쳐 관직생활 60여년에 40년을 재상으로, 6번 영의정, 4번의 도체찰사를 88년을 사는 동안 거의 16세기부터 17세기 한세기에 걸쳐 역임하였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그는 일이 있고 일을 당할 때마다 나라의 위기 때마다 부패 관료들의 시기와 모략이나 당색에 개의치 않고 항상 최일선 현장에 달려가 문제를 명쾌히 해결해 냄으로써, ①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의지하고 싶은 존재가 되었으며 ②이래로는 백성으로부터 부모와 같은 존경을 받아 오리정승·오리대감으로 백성들의 삶의 희망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또한 ③용서와 화해·설득과 소통의 리더십으로 비록 반대당의 공직자들조차 그를 존경하였다. - 조선 最高의 淸白吏 = 백성을 편안하고 잘 살게해야..
조선 최고의 청백리로서 (①오리 ②황희③맹사성) 자신은 두어칸 띳집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살면서도, 「나라를 든든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백성을 편안하고 잘 살게 해야 한다는」 安民第一의 信念으로 一貫되게 원칙을 지키고 제도개혁에 힘썼으며 言行一致의 政事를 보면서 살았다. - 救國의 위대한 人物
본인의 건강이나 가정을 돌볼 틈 조차 없이, 오직 救國의 一念으로 조선8도를 관서의 평안도 황해도에서부터 경기, 충청, 호남, 관동, 경상 그 어디든지 바다와 산성을 누비며, 때로는 말을 타고, 때로는 걸어서, 혼신의 힘을 다 쏟아내 드디어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해낸 위대한 人物이다.
그는 본인의 업적들을 주위 사람이나 후인들에게 자랑하며 함부로 얘기하지 말라고 유언까지 하기도 하였다.
- 농민과 함께 동거동락한 삶: “安民이 제일” — 백성을 살 맛나게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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梧里 李元翼의 리더쉽
- 과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渴望되는 리더십으로서, 결코 비범하지 않은 人物 오리정승, 어떻게 그런 업적을 세울 수 있었는지,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옳은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① 安民이 國泰라는 信念을 일관되게 실천하고
② 現場관리의 소신과 言行一致의 원칙주의자
③ 화해와 용서 그리고 몸에 벤 청백(淸白)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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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료 :
1) 사당 : ① 금천현 한천동(현 광명시 오리동) 사당, ② 安州 淸江祠 = 生祠堂, ③ 평양 사당 = 生祠堂, ④ 星州 사당
2) 조선 최고의 淸白吏 : “그의 청렴함을 모두가 본 받는다면….”
「 爲相四十年, 數間茅屋 不蔽風雨 若令百僚師之何憂乎民困 」
3) • 仁祖廟庭에 배향 (효종2년 신묘6월)
• 여주 기천서원에 배향 (현종원년경자)
4) • 李公桑(安州의 뽕나무)
• 도포자락속에서 나온 비장의 군사지도 (이여송 평양탈환)
• 부교와 고기비늘 (양반묘와 군사용 부교가설·풍수설은 미신이다. 고기비늘처럼 묘(墓)를 써라.)
• 화약과 화포
• 군병방수제 개혁과 군사훈련.이원익의 조선군.
• 휴가신청과 答書 (통제사이순신과 도체찰사이원익)
• 한산도정승봉(政丞峰)
• 이것은 나의 힘이 아니고 相國의 힘이다. (非我也 相國也 )
• 대명외교와 군량조달
• 相公雨
• 원두표의 장군·멍군
• 백성의 눈물과 환호
• 광해를 살려라
• 이괄의 반란과 호패법 철패
• 完平 : 완평, 종척대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李元平
5) 정유재란의 승리와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
•이순신(원균은 안되고이순신여야만 합니다.)
•정기룡 •이복남
•곽재우 • 곽준
• 정경세 • 조정도
• 이시발
•권율의 파직과 재등용
• “우리나라에는 오직이원익한사람뿐”(我國只有李元翼而已矣) -선조-
6) 大同法 宣祖 : 군왕의 치적 중 제일이 백성의 安民(요역과 조세의 감면, 쌀로 납세 통일)
大同法 광해 :이원익의 大同法(선혜청) 시작 : 경기도
大同法 仁祖 :이원익의 大同法(재생청) 확대 시행 : 관동(강원도)
7) 賜几杖 耆老宴과 觀感堂
• “그의 청렴함을 모두가 본받는다면 어찌 백성의 삶이 어려움을 걱정하겠는가”
「 若令百僚師之 何憂乎民困 」-仁祖-
8) 오리정승·오리대감
• 석자세치의 작은 巨人
• “이 한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生靈以公爲肥㾪)”
• “위대하다! 한몸으로 세상의 균형을 이루고 계셨도다.( 偉勻衡之獨秉)”
-丁若鏞, 梧里李元翼을 讚함-
9) “아쉬워라 이 시대에 경을 일으켜 나의 재상 자리를 빛나게 하지 못하는 구나.”
「惜不起來 賁我鼎席」-정조-
2012. 12.
이 병 서
오리 이원익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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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원익의 리더십
-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국가와 국민이 꼭 필요로 하는 지도자의 리더십을 오리에게서 찾는 것. – > 역사에서 조선 중기(선조, 광해, 인조) 삼대를 통해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의 우리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인물 오리
- 왜 잘 알려져 있지 않나? -> 어떻게 잘 알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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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부각 시킬 것인가.
- 임진왜란으로 왕권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피폐되어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왕과 백성들이 그의 능력과 인품에 의지하여 살 수 있었던 위대한 정치 행정가 오리 이원익
- 백성의 부를 창조한 경세가 오리: 그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지 못했으나 백성의 곤궁을 덜어주고 조금이라도 더 잘살게 하기 위해 극력으로 왕에게 건의하여 실천하게 한 대동법. 전국시행을 목표했으나 제약이 많아서 선혜청을 설치하고 광해 때 우선 경기도부터 시행함. 인조 때 관동지역으로 확대시행
- 위대한 정치 지도자
- 분당 당쟁시대 왕권을 살리고 엄격한 준법과 원만한 관용으로 백성위주의 정치를 근본으로 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아우르고 그러한 소신을 절대로 굽히지 않은 위대한 영의정, 지도자
- 전란 중 다방면의 정보수집 활동 등 조선 군의 전투력 향상으로 승전함은 물론 명군의 활약을 극대화시킨 외교능력.
- 군체제 정비와 군량조달 수송 등 최고의 병법전략가: 피폐한 백성을 자부심 갖고 스스로 싸울 수 있도록 분발시킴
- 인재의 발굴과 기용: 이순신, 곽재우, 정경세, 권율, 이시발 등
- 역사상 유일의 청백리, 실사구시의 실천가
- 관직 생활 60년 중 40년 동안 정승을 하였는데 두어칸 초가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지낸 진정한 청백리(인조실록, 선조, 광해 등 왕조실록)
- 강직하고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자화자찬을 자손들에게 까지도 엄격히 금한 實事求是의 실천가
- 풍수지리설을 부정(명당은 없다. – 고기비늘 묘지): 검소한 생활 자세의 확립
2012. 12. .
이 병 서
오리 이원익의 일대기
1. 초기 활동
출생과 가계
이원익은 조선의 왕족으로 1547년 함천도정(咸川都正) 이억재(李億載)와 사헌부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인 부인 정씨(鄭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 이방원의 서자이자 세종대왕의 서제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4세손이다.
증조부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이고, 할아버지는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이다. 숙부는 이억순(李億舜)과 이억수(李億壽)인데, 숙부 이억수는 광해군 때 고령의 나이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폐모론이 나오자 폐모에 반대하는 지사들을 이끌고 항소(抗訴)하여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아버지 이억재는 부인 우씨(禹氏)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뒤에 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이원익이다.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아버지의 대에서 끝났으나, 그는 학문을 부지런히 연마하였다. 그는 키가 작았는데, 이 때문에 ‘키 작은 재상’으로 불렸다.
외가쪽으로는 세조의 측근이자 계유정난, 세조 반정을 도왔고, 세조, 예종, 성종때에 각각 영의정을 지냈던 정창손과 김질의 후손이기도 했다.
소년기와 청년기
1564년(명종 19년)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합격, 생원이 되었으며 그뒤 일찍이 음보(蔭補)로 관직에 출사하여 승의랑에 올랐다. 그뒤 다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후 승문원에 있었으나, 원래 인품이 곧았으며 굳이 불필요하게 사람 사귀고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 율곡 이이만은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의 서장관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이듬해 예조랑(禮曹郞)에서 뽑혀 황해 도사가 되어 크게 인망을 얻었다.
이후 삼사의 요직을 거쳐 군기시 판관, 사간원사간,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의 글재주를 시험해본 명나라 관리들 앞에서 유창한 서예 솜씨와 글재주, 시 솜씨를 드러내 이름을 떨치고 되돌아왔다.
율곡 이이가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그의 밑에서 일을 잘 처리하여, 이이가 천거하여 1576년 정언이 되고, 1578년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선조 20년) 안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안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약곡 1만 여석으로 기민을 구호하였다. 1583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그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처음에는 당색으로는 동인 이었으나, 정여립의 옥사를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자, 그는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라 남인이 되었다.
2. 정치 활동
임진왜란 전후
임진왜란, 정유재란, 호성공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 후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판서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왕이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이듬해 평양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한 죄로 물러난 유성룡을 변호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선조 25)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임금의 어가를 호종하였다. 이어 평안도 도순찰사, 사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여 함경남도와 평안남도까지 올라온 왜군과 맞서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좌상(左相)이 되어 누차 소문을 올려 국사를 논했으나 서인의 배척을 당했다. 선조를 간언하였다가 밉보여 한때 대신을 그만두고 시골에 가 있었으나 1600년 다시 소환되어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1604년 비로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에 피봉되었다.
한편 그의 문하에 미수 허목이 찾아왔다. 이후 허목은 그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관상을 볼줄 알았던 이원익은 그의 재능의 비범함을 알아봤고, 허목에게 자신의 손녀를 주어 손녀사위로 삼았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장수들 중 이순신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는데, 후일 그의 서녀를 통해 이순신과도 사돈간이 된다.
광해군 시절
유영경 등 소북계열에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전란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공로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이 즉위하자 남인에 속했음에도 영의정에 발탁되었다. 영의정 취임 초기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전국적으로 실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하게 하였다. 개혁 성향이던 북인은 그의 견해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일부 남인은 북인 정권에서 수상을 지내는 그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임해군의 처형 당시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했다가 북인들의 눈밖에 났으며, 영창대군을 모함하여 사형하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1615년에는 이이첨 등에 의해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나타나자,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다가 기자헌, 정구 등의 변호와 탄원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홍천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왔다.
3. 생애 후반
인조 반정
인조 반정, 이괄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23년(광해군 15년) 초 외가쪽 선조 정창손의 묘를 이장할 때, 이원익은 그의 신도비를 재건하고 서거정의 글씨체에 한백겸이 덧붙여 쓰고, 심열의 글씨로 복원시켰다.
1623년 봄 선조의 서손 능양군과 서인의 주도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남인이었으나 숭용산림의 정책에 따라 특별히 의정부영의정으로 등용되었으며, 서인-남인 연합정권을 구성하였다. 이후 인조 반정이 백성들과 사대부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므로 영의정으로 재직하면서 민심 수습에 큰공을 세웠다. 그러나 연합 정권은 1년만에 사실상 붕괴된다.
1624년(인조 1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공신 이괄의 난 때에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다. 이때 그는 한성부 감옥에 갇인 49인의 정치범을 함부로 처형하는 것을 반대하고 만류했으나, 서인 조정은 그의 건의를 무시하였다. 또한 인목대비(仁穆大妃)는 한사코 광해군을 죽이고자 하였고 모든 공신은 이에 찬성하였으나, 이원익은 대비에게 간청하여 이를 무사하게 하였다. 그밖에 광해군의 암살을 미리 예상하고 사람을 보내 광해군을 비밀리에 보호하게 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공부(貢賦)를 단일화하였다.
대동법 시행
이원익은 國利民福이 화급한 일임을 들어 선혜청을 두고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다. 이러한 건의에 따라 광해군 때(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행하였고, 인조 때에 전국에 확대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관동지역까지 확대 시행(1658년)하게 되었다. 그 후 숙종 때(1708년)에 이르러 잠곡 김육의 건의로 梧里의 대동법을 전국에 시행하게 되었다.
1623년(인조 1년) 1월 10일 인조가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1]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고 한다.[1]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당시 한성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 49명에 대한 처형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년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죽음
이후 치사(致仕)하여 관감당(觀感堂)으로 은퇴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등으로 여생을 보내니 그의 문하에서는 허목, 윤휴 등이 배출되었다. 특히 그의 애제자 중의 한사람인 미수 허목은 그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이원익이 40여년간 정승을 지내는 동안 초가집 생활을 영위하자 그의 검소함에 감동한 인조는 친히 관감당을 지어 집과 토지를 하사해 주었다. 조선 국왕이 신하에게 직접 집을 지어준 사례는 방촌 황희의 영당과 이원익의 관감당, 그의 제자이자 손녀사위인 허목의 은거당이 있다.
그가 만년에 거처하던 관감당 근처에는 그를 모신 사당과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던 곳은 후일 영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영당말’이라는 자연부락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1634년에 사망하니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7세였다. 사후 인조의 묘정에 함께 모셨다.
4. 사후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뽑혔으며 남인에 속해 있었으나, 성품이 원만하여 반대파로부터도 호감을 받았다. ‘오리 정승’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대표적인 저서인 《오리집》 등을 집필하였다.
공신들의 부패와 전횡이 계속되면서 1658년(효종 9년) 청백리이자 사심없었던 그의 뜻을 기리고자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재의 경기 광명시 소하2동)에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를 세웠다. 그뒤 삼현사는 충현사(忠賢祠)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676년(숙종 2년)에 숙종이 직접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 친필 사액을 내렸다.
5. 저서
저서로는《오리문집(梧里文集)》, 《속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