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 인조대의 정국과 이원익의 정치적 활동
(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머리말
선조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 조선의 정국은 대내적으로는 붕당정치가 치열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국제적 긴장 관계가 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사회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며, 조선을 둘러싼 긴장된 국제관계와 정치적으로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 국정의 최중심에서 정국을 합리적으로 운영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이다. 이원익은 선조ㆍ광해군ㆍ인조 대의 대표 관료로 다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평소 검소하게 살아 청백리(淸白吏)에 오를 정도로 성품과 능력에서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선조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16세기 후반~17세기 중반 국가의 주요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항상 그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가 않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원익에 관한 연구는 그의 업적에 비해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조선중기 인물 연구 경향이 주로 학문적 사승관계에 비중을 두어 실제 국정을 이끌어갔던 관료학자에 대한 연구 경향이 소홀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최근 기존의 연구 경향에서 탈피하여 실무 관료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1) 여전히 관료학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성과들은 부족한 실정이다.
이원익에 관한 연구는 처음에는 그에 관한 전기류나 간략한 소개글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하여,2) 최근에 와서 좀 더 다각적인 측면에서 그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도순찰사 등을 역임하면서 평양성 전투에 깊이 관여한 활동상이라든가,3) 영남 남인과 이원익의 관계를 구명한 연구들이 수행되었다.4) 광해군과 인조대에 이원익의 정치 혹은 정책 활동과 그를 둘러싼 전반적 정치적 환경을 정리한 연구와5) 17세기 초 공물변통에서 이원익의 역할에 대해 주목한 연구도 있다.6) 이외에 이원익의 시 60수 가량을 분석하여 그의 시 는 질박하고 간결한 표현을 통해 진지한 태도와 충일한 정감을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한 연구가 있다.7)
본 연구에서는 조선중기 이원익이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이 매우 컸음을 주목하고 그동안 연구된 성과를 바탕으로,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이르는 시기 이원익의 정치활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선조대의 정국과 이원익
1) 임진왜란 이전의 활동
이원익은 1547년 10월 24일 한양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 오늘날 동숭동 일대)에서 태어났다.8)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의 고조는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의 11남인 익녕군(益寧君, 1422~1464)이다. 그의 증조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으로 수천군은 높은 절개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에 대한 일은 남효온의 「사우전(師友傳)에 기록되어 있다. 수천군은 청기군 표(彪)를 낳고, 청기군은 함천군 억재(億載)를 낳았는데, 함천군은 글을 좋아하여 박학하였고, 오성(五聲)과 율려(律呂)에 통하였으니, 함천군은 이원익에게 부친이 된다. 모친은 동래군 부인 정씨로 감찰 치(緇)의 딸이다.9)
1564년 생원 초시에 합격하였는데, 이이(李珥)와는 동방(同榜)이었다. 이 해 겨울에는 성균관에 들어갔다.10) 1565년에는 정몽주의 7세손인 정추(鄭樞)의 딸과 혼인했으며, 1569년(선조 2) 10월 문과별시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이원익의 관료로서의 생활은 선조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1567년 선조의 즉위가 본격적인 사림정치의 시도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선조대의 시대상은 이원익의 정치활동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선조의 즉위 후 역사 속에서 훈구파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일부 훈구파는 사림파로 전향하였다. 사림파는 이제 재야 정치가의 입지에서 벗어나 중앙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집권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내부 간에 분열이 일어났다. 외척 정치를 비판하는 비판자의 위치에서는 사림파가 한 목소리를 냈지만 이제 정치 주도층이 되면서 학파의 성향이나 지역적 기반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분열의 조짐은 특히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와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 간에 나타났다. 1572년 노련한 정치인 이준경은 죽기 직전 조정에 붕당이 일어날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했다.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마찰을 계기로 완전히 당을 달리하는 분당이 이루어진 것이다. 동인이 외척정치에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면 서인은 외척 중에서도 일부 양심 있는 외척은 수용하자는 입장의 온건론이었다.
동인들은 선배 사림에 속하는 허엽을 영수로 추대했지만 그 중심을 이룬 인물은 유성룡ㆍ우성전ㆍ김성일ㆍ이산해ㆍ김우옹ㆍ정인홍ㆍ허봉ㆍ이원익 등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소장파 인사들이었던 반면, 서인들은 박순을 영수로 하여 정철ㆍ신응시ㆍ정엽ㆍ송익필ㆍ조헌 등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허엽과 박순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함께 학문을 배웠는데 동서분당기에는 각기 다른 당파의 수장으로 추대된 점도 주목된다.
동서분당이 일어나기 직전인 1574년 10월 이원익은 황해도 도사(都事)에 임명되어, 당론에서는 한 발짝 멀어져 있었다. 특히 이원익이 황해도 도사가 되었을 때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로 있었다. 당시 여러 관리들이 이원익을 경시하였으나, 이이는 한 번 보고 그의 재주를 알아 마침내 정무(政務)를 맡겼다고 한다.11) 이원익은 황해도 도사로 있다가 1576년(선조 9) 1월 중앙관직으로 돌아와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실록에는 당시 이원익에 대한 인물평을 가하고 있다.
「원익은 젊어서 과거에 올랐는데, 조용히 자신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성균관 직강으로 있다가 황해 도사가 되었는데, 감사 이이가 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살피고서 감영(監營)의 사무를 맡기었다.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才器)와 조행(操行)이 쓸 만한다고 말하고, 드디어 홍문선(弘文選)에 기록하였다. 이윽고 정언에 제소되니 대신들이 제목(除目)을 보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부지런하고 조심하며 재주가 있는데도 하급 관료로 침체해 있었는데, 이제서야 현직(顯職)에 통하였으니 조정에 공론이 있다 하겠다.’ 하였다. 이 때 군적을 처음 반포하였는데, 제도(諸道)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어떤 이는 소략하게 하고 어떤 이는 각박하게 하여 백성의 원망이 많았다. 그런데 해서(海西)에서 만든 군적만이 최고로 일컬어지니, 원익은 이 일로 이름이 드러났다.’
위의 기록을 보면 이원익의 인품이 뛰어나고 관료로서의 자질을 겸비했으나, 하위직에 있어서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는데, 1576년 1월 정언에 제수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의 관직에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정언에 이어 지평ㆍ형조정랑 등을 역임했으며, 1577년에는 예조정랑ㆍ지평ㆍ정언ㆍ수찬ㆍ헌납 등 중앙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수찬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기록을 모면, ‘이때 홍문관의 관료들이 즐겁게 놀이하고 서로 따르는 것을 좋아하면서 번(番)들기를 회피하여, 하리들이 이들의 휴가를 요청하는 데 지쳤었다. 그러나 원익은 아예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아전들이 성인(聖人)이라고 칭찬하였으나 동료들은 비웃었다.’12)
고 하여 이원익이 원칙을 지키는 관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시작될 때 이원익은 외직에 있어 당인의 입장에 있지 않았다. 또한 당쟁을 예고한 인물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이원익의 스승인 점을 고려하면 기본적으로 이원익은 당쟁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준경은 선조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으로서, 선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기도 했다.13)
이준경은 황희의 고손인 황효헌(黃孝獻, 1491~1532)에게 『소학』을 전수받았으며, 19세 때 종형인 이연경(李延慶, 1484~1584)을 통해 조광조를 만나 사림파의 학문을 전수받은 인물이었다. 이원익은 『동고유고(東皐遺稿)』의 문생록(門生錄)에 이름이 처음으로 실려 있어서, 이준경의 애제자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준경이 당쟁을 예고한 내용은, 실록14) 및『당의통략』에 기록되어 있다.15)
이원익은 본래 붕당과는 무관한 인물이었지만, 1583년 이이를 탄핵하는 동인들과 보조를 같이하다가 동인이 되었고, 동인이 남인ㆍ북인으로 갈라질 때 유성룡을 지지하여 남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파적인 색깔이 강하지 않았다. 유성룡으로부터는 출사한 직후부터 인정을 받았고, 정치적 입장이 같아 점점 관계가 친밀해졌으며, 유성룡의 제자들과도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이원익의 가계 역시 종친의 후손으로서 특정의 학파나 정치세력과 연결될 수 있는 관계가 적었다. 왕실의 종친이라는 가계적인 기반 또한 이원익이 비교적 중도적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575년 분당된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가속회된 사건은 1583년에 있었던 계미삼찬(癸未三竄)이다. 계미삼찬은 동인인 대사헌 이기(李墍),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이 서인인 박순(朴淳)과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난 사건이다.16) 이원익은 당시 우승지로 있었는데, 당시 선조가 승지도 모두 바꾸라는 명이 있어서 1583년 8월 1일 이원익도 파면을 당하였다. 이 때 유성룡은 이원익의 임관(臨官) 자세를 보고 감명을 받았고 이후 두 사람은 교분이 두터워졌다.17)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 이원익은 파직을 당하고, 1584년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 생활에서 벗어나 집상(執喪)하였다. 당시 서울 낙산 밑에 집이 있었는데 여가만 있으면 거문고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자탄자영(自歎自詠)하였다고 한다. 음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며, 이 시기에 삼각산ㆍ해인사ㆍ금오산 등을 두루 유람했다고 한다.18)
4년 가까이 부친상을 집상하고, 산수에서 휴식 기간을 갖던 이원익은 1587년(선조 20) 4월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 실록에서는「이원익이 파산(罷散)하여 있다가 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쳤으나 오히려 복관되지 못하였다. 이때 안주는 관방(關防)의 중요한 진영인데 재해를 여러 차례 겪고 기근이 들어 조폐(凋弊)되었다는 것으로 명망이 중한 문신을 정밀히 골라 그 지방을 다독거려 수습하게 하되 구임(久任)시켜 공을 세우도록 책임지우기를 청하였다. 명관(名官)이 모두 꺼려 피하기를 도모하였으므로 상이 이조에 명하여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도록 책임 지웠는데, 판서 권극례(權克禮)가 이를 인하여 면관된 사람을 기용하고자하여 이원익을 주의(注擬)하니 상이 허락하여 이 임명이 있게 된 것이다.」19)
라고 하여 모두가 꺼리는 변방의 수령직을 이원익이 맡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원익은 부임 직후, 조곡(糶穀) 1만 석을 감사에게 청해서 종자를 주어 주민들에게 경작을 권하여 풍년이 들자 조곡을 모두 갚고 창고를 가득 채웠다. 또한 군정을 변통하고 잡역을 감면하여 몸소 변진(邊鎭)에 양세(粮稅)를 납입하게 하여 조등(刁蹬)의 폐단을 없앴다. 안주는 서로(西路)에서 누에치기를 힘쓰지 않았으나, 이원익은 백성에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사람들은 이원익을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렀다.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20) 이원익은 지방관으로 부임하여서 지방의 현안을 금방 파악하고 단기간에 안주가 풍요로울 수 있게 하였다. 그만큼 관료로서의 자질이 탁월했음을 볼 수가 있다.
안주목사로 재임하던 시절 이원익은 안주의 군병방수제도(軍兵防守制度)를 개혁하기도 하였다. 종래 4교대제였던 군역을 6교대제로 바꾼 것이다. 4교대제는 군대를 4등분하여 돌아가면서 교대근무하게 하여 1년에 3개월씩 복무하게 한 것으로, 이를 6교대제 함으로써 1년에 2개월만 군역을 담당하게 하여, 농민들의 군역을 줄여 농사짓는데 불편을 줄이고자 하였다.21) 이 제도는 이후 황해도 관찰사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채택하여 이를 조정에 건의하여 국가의 정식 병제로 채택하도록 했다. 1589년 9월에는 형조참판이 되었는데, 이 때의 실록 기록에도, ‘윤두수가 그때 감사가 되어 모든 군사와 백성에 관한 사무가 있으면 그때마다 차임(差任)하여 그와 의논하였는데 건혁(建革)한 바가 많았고 일이 완료되면 그의 공로를 계문(啓聞)하였다. 이원익도 두수가 도랑이 있고 임사(任使)를 잘한다 하여 그에게 쓰여지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관서 지방의 민정(民政)에 정리된 바가 자못 많았다.’22)고 하여 윤두수가 이원익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윤두수가 서인의 핵심 인물임을 고려하면, 이원익은 당색(黨色)과는 무관한 관료였음이 드러난다.
1589년(선조 22) 10월에는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 빌미가 되어 기축옥사가 일어났다.23) 기축옥사로 말미암아 천여 명의 선비가 희생되었고, 서인이 동인을 공격하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시키면서 동인 내에서는 유성룡을 종주로 하는 남인과 정인홍을 종주로 하는 북인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기축옥사로 인하여 동인과 서인의 치열하게 대립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축옥사와 관련해서 이원익이 개입한 정황은 뚜렷이 발견되지 않는다. 정철ㆍ유성룡ㆍ정인홍ㆍ이발ㆍ최영경ㆍ정언신 등 동인과 서인의 핵심인물들은 기축옥사에 깊이 관여 되어 있었던 점과 비교하면 이원익의 처신은 보다 분명해진다. 그만큼 당쟁의 중심에서는 한 발짝 비껴서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축옥사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1591년 윤3월 이원익은 대사간에 올랐다. 그러나 그때까지 기축옥사의 핵심인물에 대한 정치적 탄핵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원익은 이해 5월 대사헌 홍여순 등과 함께 정철ㆍ백유함 등을 탄핵했다. ‘서로 붕당을 지어 조정을 어지럽히면서 자기들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없애고자 하였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결국 정철은 진주에 유배되었다가 강계로 이배되었고, 백유함ㆍ유공신ㆍ이춘영 등도 극변에 유배되었다.24) 정철에 대한 강경한 처벌로 말미암아 이원익은 완전히 동인으로 분류되었다.
1591년 7월 이원익은 예조판서를 거쳐 8월에는 이조판서에 올랐다. 기축옥사를 마무리하고 정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선조는 당색이 옅은 이원익을 신임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 임진왜란과 이후의 활동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4월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이원익의 관료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란 직후인 4월 14일 이원익은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체찰사를 겸직하여 서행(西幸)하게 되었다.25)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동서분당 이후 당론이 분
열되고, 군사제도와 국방체제가 여러 가지 모순을 드러내는 시점이었다. 전쟁 초기 조선은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일본군의 숙련된 전투경험과 신무기에 일방적으로 밀렸다. 특히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면담한 통신사의 보고가 엇갈렷다. 1591년 3월 귀국한 통신사 일행은 곧바로 사행의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 자리에서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담력이 있고 안광이 빛나 보인다며’ 침략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고, 김성일은 ‘풍신수길은 서목(鼠目:쥐새끼의 눈)으로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니다’고 보고하였다.26) 김성일은 전쟁의 위협이 전파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는 점을 지적하였지만 결국 임진왜란은 현실이 되었다.
일본군의 침공에 조정은 우왕좌왕하였다. 우선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고,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삼아 북상중인 일본군을 문경새재에서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4월 24일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신립은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 넓은 들판에 진을 치면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이끄는 왜적과 맞섰다. 기병 중심의 아군이 탄금대 들판에서 싸우는 것이 효과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탄금대는 논과 저습지로 기병이 활동하기에 매우 불편하였고, 들판이어서 아군이 쉽게 노출됨으로서 조총으로 무장한 적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또한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 남한강을 뒤로 한 배수진(背水陣) 작전은 후방의 탈출구를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조선군의 전멸을 가져와 훗날 병력을 가다듬을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질 수 없게 하였다. 믿었던 장군 신립의 패배로 조정의 사기는 완전히 꺾이게 되었다. 죽령ㆍ조령 등 천연적 요새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대한 정보에 어두웠기 때문에 빚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신립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더 이상 서울을 사수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서둘러 서울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떠나 평양 천도를 결정하면서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분노했다. 공노비ㆍ사노비의 문서가 보관된 장례원과 형조의 방화가 이어지고,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등 궁궐에 대한 방화도 이어졌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같은 사람은 도성을 지키고자 군사를 일으켰다가 국왕의 피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대를 해산시켰다. 국왕의 피난길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전황이 계속 불리해지자자 선조는 6월 13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향하였다. 조금 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뜻에서였다. 선조가 평양에 도착했을 당시 이원익은 평안도 도순찰사로 있으면서 행궁과 식사를 마련하여 편의를 제공하는데 힘썼다.
이원익은 ‘감히 죽음을 각오한 선비 10여 명이 신과 사생(死生)을 같이 하자 약속하고 있사오니 이들과 같이 적의 군중에 들어가 적장의 머리를 베어 국가의 위태로움을 조금 늦추어 볼까 합니다.’27)라고 청할 정도로, 굳건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오활한 말이라고 하면서 이원익의 의견을 좇지 않았다.
이원익은 전쟁 때의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군대가 굶주리고 있으니 호조의 전세나 창고 곡식을 지급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고을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대기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각 고을로 하여금 계속해서 군량을 지급하게 하고 있으나 도로가 멀기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많습니다. 비변사에서 강변의 토병은 술ㆍ고기와 면포를 주어서 구휼한다는 뜻을 보였으나 유독 내지(內地)의 군대에게는 남의 나라 사람 보듯 하고 있으니 호조로 하여금 전세나 창고에 저장된 쌀과 콩을 지급하게 하소서.」28)
이원익은 전쟁 수행에 군량조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조의 전세미나 비축미를 과감히 방출하여 군량 공급을 함으로써 전투력을 증진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때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대동강까지 육박하는 상황이 되자 초조해진 선조는 이에 대한 대책을 대신들과 논의하였다. 이원익은 ‘국왕은 사직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해야 합니다. 비록 처지가 곤궁하고 또 명나라가 작은 나라의 왕실을 위한다고 하지만 명나라 당으로 건너가서는 안 되며 건너가도 평안하지 않을 것입니다.’29)라고 하면서 명나라로 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선조는 6월 11일 평양성을 떠나 영변으로 떠났다. 선조는 평양을 떠나면서 8도 도원수에 김명원, 좌의정에 윤두수, 이조판서에 이원익을 두게 하여 3천여 명의 군사로 평양성을 지키게 하고 영변절도사 이윤덕(李潤德)에게 대동강을 방어하도록 하였다.30) 또한 이원익에게 은밀히 엿보아 밤에 왜군의 진영을 공격하라 하였다. 그는 김진(金珍) 등에게 토병 100여 명을 인솔하고 일본군 진영을 공격하여 승리했으나, 돌아오던 중 일본군의 추격으로 인하여 조선군의 상당수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31) 일본군은 이러한 틈을 타서 평양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평양성이 함락된 후 이원익은 이천(李薦)과 함께 순안으로 이동하여 패잔병을 수습하고 전력을 추스를 수밖에 없었다.32)
평양을 떠난 선조의 피난행렬은 결국 의주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평양성 전투에서 관찰사 송언신(宋言愼)과 병사 이윤덕(李潤德) 등의 도주로 지휘체계가 혼란한 상황에서도 이원익이 고군분투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특별히 정헌대부로 승계하고 평안도 도순찰사 겸 도관찰사로 임명하였다.33)
당시 이원익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에 민심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고 병기를 갖추는데 힘쓸 것을 역설하는 한편, 군량ㆍ군수품 조달을 독려하여 제독부(提督府)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들 중 일부를 평양에서 황주 간의 곡식 운반을 책임지게 했으며 한편으로는 선박을 통해 황해도로 운반하였다. 아울러 성벽을 수리하거나 명으로부터 화포 등에 대한 관련기술을 전수받았다. 이원익은 엄정한 군율을 강조하여, 김경서(金景瑞)가 군량을 운반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군문에 잡아다가 무겁게 결장(決杖)하였다.34) 또한 명나라의 전사자를 위하여 기자묘에서 제사를 지내 명나라 군대의 전사자를 위로하고 부의물(賻儀物)을 내려 명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힘썼다.35)
한어(漢語)에 능했던 점 또한 이원익이 명나라 관리를 대하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원익ㆍ이경석(李景奭)이 모두 한어(漢語)를 해득하였으므로, 제조가 되어 사역원 관원이 오면 반드시 한어로 수작(酬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36)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와도 직접 대화하면서 군량을 조달할 때도 이원익의 외국어 능력은 힘을 발하였다. ‘공이 한어(漢語)에 능통했던 관계로 임기응변을 제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이와 같은 경우가 허다하였다.’는 지적은37)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이 남해안에서 전력을 비축하여 다시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때, 이원익은 유성룡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임명되어 하사도(下四道)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였다. 이원익은 김늑(金玏)을 체찰부사로, 남이공(南以恭)을 종사관으로 삼아 각도를 순찰하였다.38) 영남에 주재하는 동안 이원익은 곽재우ㆍ정경세ㆍ정온 등을 깊이 알게 되었으며, 선조에게 ‘곽재우는 명장이니 서울로 불러서 올리지 말고 남쪽 변방에 두어 왜적의 뜻하지 않는 침략에 대비하게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39)
이원익은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만나 완벽한 군비태세를 보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치하하였다. 이때 잔치가 벌어진 방산(蒡山)을 병사들은 정승봉(政丞峯)으로 불렀다고 한다. 전란기 이원익과 이순신의 인연 또한 각별하였다. 이원익이 행정에 빈틈없고 군율에 엄격했던 점을 감안하면, 휘하의 장병들에 대해 엄격한 군율을 적용시키고40) 빈틈없이 전쟁 준비를 하는 이순신은 매우 흡족한 장수였을 것이다. 이원익과 이순신의 인연에는 두사람을 모두 추천한 유성룡이 있었다. 이원익과 유성룡의 친분은 유성룡의 제자인 이준(李埈)과 이원익이 사돈을 맺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으며,41) 이원익은 유성룡이 조정을 떠난 이후로 유성룡의 제자인 정경세ㆍ이준ㆍ최현 등 영남 남인들을 적극 후원하여 조정에서 기반을 유지하도록 하려고 노력하였다.42)
이어서 이원익은 호남지방을 돌아보고 영남으로 와서 성주의 체찰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군율을 엄격히 하여 병사나 관리들이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명령에 불복하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히 처벌하였다. 그 대상에는 권율(權慄)이나 송언신과 같은 인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영남의 강이 좌우가 크고 넓어서 지리적으로 작전이 용이하지 않은 지형이기 때문에 군대를 좌우감에 분속ㆍ편제하였으며, 산성을 보수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순신을 거제에 주둔시켜 일본군의 동태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토록 하였으며, 곽재우로 하여금 해변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이원익은 각종 군비수축, 병력배치, 인사운영 등 군사부문에 있어서 다방면에 걸쳐 남다른 식견과 수완을 보여줬다. 이원익이 체찰사 때의 경험을 회고 형식으로 쓴 다음의 기록에는 당대 그와 교유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체찰사로 영남에 있은 지 오래다. 정승 유성룡은 내가 공경히 섬긴 분이며, 노경임(盧景任)은 명민(明敏)하고 경(敬)에 힘을 쓴다. 곽재우는 더러 잘못한 일은 많으나 호협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는데, 나의 책망을 받으면 얼른 깨닫고 종시 나를 섬겼다. 김우옹은 유아(儒雅)하고 직량直諒) 하였는데, 정인홍을 멀리 피하여 기전(畿甸)을 떠돌았다. 이상 몇 군자는 지금 다 볼 수가 없으니 때로 생각이 떠올라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이순신은 충용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유성룡이 그를 나라에 추천하였다. … 원균이 한산도에 와서 크게 패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망해갔다. 이순신은 왕명을 받고 갔는데 적병이 또 크게 이르렀다. 이순신은 임기응변하여 신출귀몰한 비법을 쓰고 사졸들은 사력을 다하여 큰 공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유탄을 맞았다.」43)
위의 기록에서 이원익은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영남의 학자들에 대한 신뢰가 깊었으며, 특히 이순신에 대한 신뢰가 컸음을 볼 수 있다. 1596년 11월 선조와 윤두수ㆍ유성룡ㆍ이산해ㆍ정탁 등 조정의 대신들이 모여 수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이원익은 이순신을 적극 옹호하였다.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별로 없었으나, 원균은 기색이 늘 발끈하였습니다.’ 거나, 두둔하는 이산해나 윤두수와 팽팽히 맞섰다.45) 이순신이 한 때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하였다가 다시 기용되어 정유재란 때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에는 이원익과 같은 인물들이 끝까지 지원한 것도 큰 바탕이 되었다. 이순신 역시 이원익의 후원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순신은 ‘군사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한 것은 상국의 힘이었다.’고 하고, 이내 탄식하기를, 내가 장수가 되어 밖에 있자 참소한 말들이 길을 메웠는데, 상국이 오로지 나의 계책을 써주었으므로 오늘날 수군이 약간 완전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나의 힘이 아니고 바로 상국(相國)의 힘이었다.’46)고 하였다.
임진왜란 후인 1598년 7월 이원익은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명나라 병부 주사 정응태의 무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연경으로 떠났다. 임진왜란의 참전 경험과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적 실무 능력으로 당시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고 1599년 1월 귀국하였다. 선조는 이원익의 공을 인정하여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다. 1599년 5월에는 이이첨 등과의 대립 과정에서 영의정에서 물러나 동호(東湖)에 일시 거주했으나, 선조는 9월에 다시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 무렵 이원익은 유성룡을 탄핵한 북인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남인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북인에 대한 이원익의 인식을 살펴보자.
「천하의 일이나 국가의 일은 다만 공(公)이냐 사(私)냐 하는 두 글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순전히 공도(公道)로만 쓰면 태평한 세상이 되고, 공도와 사정(私情)이 뒤섞이면 나라의 형세는 부지되더라도 말세가 됩니다. 순전히 사정만 쓰면 나라는 망합니다. 남인들이 요로를 차지했을 때는 사정이 실로 많았지만 공도가 10에 3, 4는 되었습니다. 북인들이 일어난 이후로 공도가 삭 없어지고 사정이 크게 행해졌습니다.
북인이 대북ㆍ소북으로 갈라진 이후로, 소북 가운데서는 사류로 자처하는 사람이 그래도 많이 있습니다만 대북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두가 다 사당(私黨)으로 순전히 사정만 씁니다. 이들이 일어나 힘을 쓴다면 나라 일은 끝장입니다.」47)
이후 선조대 후반의 정국에서 이원익은 북인의 중심인 이이첨, 홍여순, 정인홍 등과 대립하면서 사직을 청하고 시흥 금양리(衿陽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서ㆍ관북지방의 도체찰사를 맡는 등 실무관료로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 때 어가를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호성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48) 1607년 선조가 죽음을 앞두고 세자에게 전위를 명하는 자리에 원임대신의 자격으로 참여하였지만 영의정 유영경의 계략으로 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49)
2. 광해군대의 정국과 이원익
광해군의 즉위와 더불어 북인 정권 시대가 열렸다. 북인 중에서도 정인홍ㆍ이이첨 등 대북이 권력을 잡은 대북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원익은 남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50) 이원익의 당색이 심하지 않고 내외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보여준 관료로서의 탁월한 능력 또한 당색을 초월하여 그를 영의정에 임명하게 한 요인이었다. 광해군은
‘경이 정승으로 들어오자 조야(朝野)가 서로 경하 하였고 군민(軍民)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다렸으니, 꿈을 꾸고 복상(卜相)한 것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경은 공정하고 충성스럽고 맑고 정직하여 일편단심 나랏일을 걱정하여 왔으니, 오늘날 영상의 직임은 경이 아니면 안 된다. 질병이 있더라도 스스로 조리하고 행공하도록 하라. 경은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고서 힘써 과매(寡昧)한 나를 보좌하라.’51)
고 하면서 이원익에 대한 깊은 신뢰를 표시하였다. 선조 말년 국정을 주도하던 영의정 유영경이 광해군의 즉위로 갑자기 파직된 후 공석된 자리인 만큼 영의정에 올라야 할 인물은 경륜을 갖춘 대표적인 화합형 인사여야 했고 이원익은 이 조건에 잘 부응하는 인물이었다.
광해군 초반의 정국에서 이원익이 가장 크게 비중을 둔 것은 세제 개혁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당시는 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라 백성들은 각종 세금을 내는 것에 큰 부담을 많이 느꼈다. 그 중에서도 공납(貢納)의 부담이 가장 컸다. 이원익은 공납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동법을 적극 주장하고 나섰다. 그의 주장을 보자.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몇 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을 설치하여 매년 봄ㆍ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 곁의 고을은 사객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과 조사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 결 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52)
공물을 지방의 특산물 대신에 쌀로 납부하자는 수미법(收米法) 논의는 선조대 이이 등에 의해 이미 제기되었다. 수미법은 군량미 해결과 민생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제기되었지만, 기존에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고 이익을 취하는 방납인의 반발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방납의 폐단이 결국은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점을 인식하고, 공물을 쌀로 받는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한 것이다. 대동법은 전국적인 실시가 아닌 단계적으로 실시되는 방식이었다.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려 하였다.
이원익은 대동법을 담당하는 관서로 선혜청을 설치하고 그에 맞는 관원을 배치한 다음, 1결당 쌀 16두를 봄ㆍ가을로 나누어 8두씩 징수하였다. 이를 봄ㆍ가을로 7두씩 수납, 경기도가 부담한 일체의 경납공물로 사용하고, 봄ㆍ가을로 1두씩은 각 군현에 유치하여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충당시켰다. 선혜청은 당시 물가를 참작하여 방납인에게 급가(給價)하고 방납인은 지정된 물품을 각사에 납품하도록 하며, 산릉ㆍ조사의 역을 제외하고는 수미 16두 이외의 일체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대동법은 기존의 공물 부담이 호별 부과 방식이었던데 비하여 토지 결수를 부과 기준으로 하면서 지주의 부담은 증가하는 반면 소농의 부담은 줄어드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광해군대 개혁정치의 분위기와 맞물려 대동법은 처음 시행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한 시행세칙의 미비, 지주와 방납인의 반대 등으로 전국적인 시행은 보지 못하였다.53)
광해군 초반 이원익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대동법 추진을 적극 추진하기도 했지만, 광해군 초반부터 임해군의 처형과 영창대군 살해에 이어 인목대비의 유폐가 이어지면서 이원익은 북인 정권과 선을 그으면서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북인의 핵심인 정인홍을 비롯하여, 이이첨, 홍여순 등의 정치 노선에는 일체 동조하지 않았다. 임해군의 처형에 대해서 이원익은 전은론(全恩論)을 주장하며 죽이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54) 정인홍은 이원익의 전은론을 모역으로 몰아붙였다. 정인홍은 광해군의 왕통에 조금이라도 위해가 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강력한 척결을 주장한 만큼 이원익과 정치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원익은 여러 차례 병을 칭탁하고 영의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그 때마다 광해군은 이원익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1609년 1월에는 당시 이미 고질화된 당쟁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조정의 붕당의 조짐이 30년 전에 일어났는데, 근래에는 그 풍습이 더욱 고질이 되어 인물의 현부(賢否)는 분변하지 않고 자기 당이면 취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버리며, 논의의 시비는 따지지 않고 자기 당이면 가하다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불가하다 하므로 현우와 시비가 뒤섞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진용(進用)하면 그 진용된 자가 어진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그 당이기 때문이다.’ 하고, 한 사람을 물리치면 그 물리침을 당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그 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며, 논의의 가부까지도 어느 쪽임을 가리켜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온 나라의 경ㆍ사 대부가 한 사람도 당목(黨目) 가운데 들지 않은 자가 없어 피차가 서로 시기하고 각기 혐의를 가지기 때문에 일을 만나면 방황하며 담당하려 하지 않고 남의 일 보듯하여 국사를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리니, 이를 생각하면 진실로 통탄스럽습니다.」55)
이원익은 남인이었지만 뚜렷한 당색을 보이지 않았고, 당쟁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지적하는 입장에 있었다. 1609년 8월에는 무려 23차례의 사직서를 올린 끝에 영의정 직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56) 그러나 1611년 9월 광해군은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으로 불렀다. 11월 이원익은 광해군이 신궁인 창덕궁에서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차자를 올려 그 잘못을 건의하였다.57) 1612년 1월에는 15차례나 사직서을 올렸으며, 4월에 영의정을 사직하고 물러났다.
이원익이 사직하고 있던 1613년(광해군 5) 5월 영창대군 옥사가 일어났다. 조령에서 일어난 은상 살해 사건과 사건의 주모자인 일곱 명의 서얼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진술은 조정을 긴장시켰다. 서양갑ㆍ박응서 등이 은을 모아 거사자금으로 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영입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했다는 이른바 ‘김제남 역모사건’은 영창대군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서인들이 유배 또는 삭탈되었고 남인들 또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이원익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남겼다.
「그런데 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이로 인해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고 합니다. 신은 그만 놀라서 간담이 철렁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가 지극히 중합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인데, 성명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과연 이 논의가 없었다면 신이 경솔히 항간의 말을 믿고 사전에 시끄럽게 한 것이니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58)
이원익은 당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대규모 역옥이 궁극적으로 폐모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측하면서,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모자간 의리를 강조하였다. 이원익의 상소는 광해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광해군은 ‘불효가 어떤 죄악인데 과인에게 의심을 두고 도리어 항간의 말을 믿는단 말인가. 어찌 나를 대하기를 도리어 항간 사람만도 못하게 하는가’59)라고 화를 냈다. 이후 광해군은 이원익의 상소를 자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동조하는 세력까지 겨냥하여 색출하고자 하였다. 이원익을 위해 상소문을 올린 김효성은 유배당하고, 홍무적ㆍ정택뢰는 금고에 처해졌다. 결국 이원익은 1615년 6월 69세의 나이로 홍천에 유배되어 2년여를 유배지 홍천에서 보냈다. 1616년 12월에는 진사 윤선도가 이원익을 사마광으로 비유하고, 이이첨ㆍ유희분ㆍ박승종이 이원익에게 죄를 덮어씌워 반대파를 함정에 넣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다가 외딴 섬에 안치되기도 했다.60)
1619년 2월 이원익은 유배에서 풀려나자, 5월에 여강(驪江)에 있는 앙덕리(仰德里)에 우거하였다. 앙덕리에서 고향에 돌아온 이원익의 생활은 초가 두어 칸에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고 처자들은 하루걸러 끼니를 먹을 정도로 빈한했다고 한다.61) 이 시기가 대북 정권이 주도한 폐모론이 전개되면서 정국이 급속히 냉각된 점을 고려하면, 홍천 유배와 여강에서의 우거 시기는 오히려 이원익에게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폐모론에 적극 반대한 정치적 행보는 인조의 집권 이후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복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3. 인조대의 정국과 이원익
1623년의 인조반정은 광해군대 북인 정권에 소외되었던 서인들이 주축이 되어 남인과 연합하여 권력을 잡은 사건이다. 광해군을 보좌한 대북 세력의 핵심들은 거의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위경ㆍ한찬남 등 대북파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장 거리에서 처형되었고, 외척으로서 권세를 한껏 누렸던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도망하다가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영수 정인홍도 고향인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왔다. 그는 이미 89세의 고령의 몸이었지만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후원자였다는 점과 반정의 주역인 이귀 등 서인과의 오랜 악연 때문에 처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중앙 정부에서 정인홍의 대리자 역할을 하면서 공안정국을 주도했던 이이첨은 이천까지 도주했다가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적극 받들어 실천했던 평안도 관찰사 박엽과 의주 부윤 정준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실리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인물들도 반정의 주요 명분인 ‘친명배금’의 논리에선 역적일 수밖에 없었다. 북인세력으로서 겨우 처형을 면한 사람들은 대부분 투옥되거나 유배되면서 대북파는 거의 전멸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수립된 후 이원익은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급작스런 정권 교체에 대해 신료들이나 백성들이 적응할 수 있게 선조대부터 국정 경험이 풍부했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것이다. 광해군과 인조 즉위 후 연속해서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된 것은 그만큼 새로운 시대에 정국을 안정시킬 적임자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광해군대에 전개된 옥사 사건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간 점은 정치적 복귀에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된 이유를 당시의 사관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혼조 시절 임해군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를 개진하였고, 폐모론이 한창일 때에 또 상차하여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극력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에 유배되었다가 전리에 방귀되었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62)
이원익이 발탁된 것은 임해군의 옥사, 폐모론으로 이어지는 광해군대의 대북 주도의 반대세력 탄압 과정에서 전은론(全恩論)을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비전에서도 이례적으로 이원익을 불러 하교하기를, ‘경이 일찍이 원부(冤婦)를 위해 직언하다가 죄에 걸려 내쫓김을 당하였으니 경의 충정은 가히 해를 꿰뚫는다고 하겠다. … 경은 더욱 충성을 다하여 새 임금을 잘 섬기기 바란다. 위로 조종의 반석 같은 기업을 회복하고 아래로 끊어져 가는 민생의 생명을 살림에 있어 오직 경 한 사람을 믿을 뿐이다. 이에 과부의 침식이 다소 편안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하교하였다.63)
반정을 주도한 서인세력들은, 서인에서 영의정이 나오는 것 보다 이원익과 같은 중립적인 인사가 영의정이 되면, 거사의 명분도 강화되고 향후 정국의 원활한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의정으로 다시 발탁된 이원익은 형벌과 포상을 마땅히 하여 우선 조정의 기강을 세워야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반정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한 조치로 판단된다. 무예를 익히고 부세수취상의 폐단을 제거함으로써 전쟁에 대비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것을 역설하고 있는 점도 주목되는데, 방납의 폐단을 줄이고 공물을 견감하는 방안은 이원익이 광해군대에도 적극 추진한 정책으로 대동법의 실시에 대한 확신이 일관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1623년 3월 인조가 영의정 이원익을 인견했을때 이원익이 밝힌 소신은 대내외적인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가장 합리적인 대책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모든 일처리에 있어 전철만을 지켜서는 감동을 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반드시 비상한 조치가 있어야 민심을 감복시킬 것입니다. 앞으로 노적(奴賊)을 방비하고 중국군을 접제하는 일이 극히 난처합니다. 현재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었습니다. 반드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며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모든 요역(徭役)도 백성에게 책하지 말아서 민력을 조금이라도 펴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백성은 지극히 신령한 것이라 그들로 하여금 중국 군사를 대접하게 하더라도 원망이 없을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노적을 정벌하게 하더라도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군신의 대의는 모른다 하더라도 임진년에 재조한 은혜에 모두 감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야 온갖 간신배가 조정에 차 있었으니 누가 중국군과 합세하여 노적을 토벌하려고 하였겠습니까. 요즈음 들으니 성상의 결단력에 감동을 주는 조치가 많다고 합니다. 민심이 뭉치면 충분히 몽둥이를 들고도 적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본래 천하의 강병(强兵)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진실로 민심을 얻는다면 사람마다 모두 즐거이 나라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이 적에 대해 무슨 어려움이 있겠으며 방비에 있어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64)
이원익의 현실 진단에 대하여 인조는 ‘경의 말이 옳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요역과 부세를 경감하여 우선 민심을 집결시키는 것이 제일이다.’고 하면서 깊은 공감을 표시하였다. 한편, 인조가 즉위한 후 불안하던 정세에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이 발생하였다. 인조는 황급히 한강을 건너, 과천ㆍ수원ㆍ천안을 거쳐 공주로 피난하였다. 이원익은 인조의 어가를 호위하여 공주까지 내려갔다. 이때 이괄의 반란군은 주로 평안도 출신의 군인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관군의 입장은 반란군에 대한 선무공작과 지역민의 민심을 달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조세감면, 산업장려책, 병력확보, 군수조달 등 다방면에 걸친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지역민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인물이었다.
이원익 역시 ‘신이 전에 감사로 있을 때에 조금이나마 돌보아주고 안정시켰으므로 떠난 뒤에도 신에 대한 생각을 조금 갖고 있으니, 신이 달려가서 역순을 깨우치면 백성의 마음이 혹 이로 인해 진정될 수 있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같이 참석했던 대신들도 ‘관서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듯이 이원익을 사모하여 생사를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괄이 어찌 그 어린아이들을 거느리고 그 부모를 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이원익으로 하여금 가서 서방 백성을 타이르게 하면, 이괄이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동의하였다. 결국 이원익은 다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기여했다. 임진왜란 때부터 이원익은 관서ㆍ관북 지역의 도체찰사로 활약하여 지역 사정에도 밝고 그 곳의 민심을 안정시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괄의 난과 같은 변란 때도 충분히 그 힘을 발휘한 것이었다.
1627년의 정묘호란은 이미 80세가 넘은 이원익으로 하여금 또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게 하였다. 1627년 1월 후금이 침입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로 하고 이원익을 다시 도체찰사로 삼았다. 이원익이 노쇠함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인조는 이원익에게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이라며 그의 능력을 깊이 신뢰하였다. 이원익은 분조(分朝)하여 전주로 떠난 소현세자를 배행하였다.
1630년부터 인조대 정국의 최대 이슈는 원종(元宗), 즉 인조의 생부인 정원대원군의 추숭 문제였다. 이 문제는 조신은 물론 태학, 사학의 학생, 성균관 유생들까지 참여하는 대대적인 예론으로 발전하여, 3년여를 다툰 끝에 1632년(인조 10) 5월 추존을 결정하고 별묘(別廟)를 설치하였다.65) 인조의 생부 추숭에 대해 이원익 역시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원익은 생부 추숭에 반대한 좌의정 김류를 파면하자 자신도 죄를 받겠다고 나섰고, 결국 인조는 득죄한 신하들을 풀어주었다.
이 무렵 북방에서는 청나라 태조[누르하치]가 더욱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는데, 이원익은 인조가 국방책을 하문하자, ‘적의 실정을 예측할 수 없으니 항상 정예병들을 준비하여 방어책을 세우고 훌륭한 장수들을 골라서 대비하게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80대 중반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국가에서 필요했던 원로였던 것이다. 80대 중반에도 서울과 향리를 오가며 국정에 필요한 처방들을 내세운 이원익은 1634년 1월 29일 정침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인조 대에 조정으로 다시 돌아온 이원익은 고비마다 사태를 수습하면서 국방과 민생안정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러한 활동은 그가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80이 넘어서도 그는 엄연한 정치 현역이었던 셈이다. 실무관료로서 이원익의 능력은 이식이 언급한 다음의 자료에서 압축되어 있다.
「정무(政務)를 행함에 있어서는 우선 기강(紀綱)이 잡히도록 노력하는 한편 오로지 전고(典故)에 의거해서 처리하였으므로, 아무리 복잡하기 그지없는 일이라도 모두 타당하게 결말이 나곤 하였다. 그리고 사방의 행정을 담당할 때에도 인명이나 지명은 물론이요 품목(品目)과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한번 보기만 하면 잊어버리는 적이 없었으므로, 아전이나 종복(從僕)이 감히 속이려 들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일흔을 넘기고 여든을 넘긴 나이에 이르러서는, 공이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문서를 처리하는 면에 조금 재주가 능하여, 소싯적이나 장년에는 곧잘 공사(公事)를 마무리하곤 하였는데, 이는 단지 기억력이 남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늙어서는 금방 지난 일도 까마득히 잊곤 하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근무를 할 수가 있겠는가.” 하기도 하였다.」66)
한편 이원의 일생을 압축한 졸기에는 오래도록 관료로 생활하면서도 청렴한 삶을 견지했던 일생이 정리되어 있다.
「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치적(治績)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고, 관서(關西)에 두 번 부임했었는데 서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선조조(宣祖朝)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ㆍ영창의 옥사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적신 이이첨 등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자, 원익이 광해에게 소장을 올려 자전께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君父)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홍천(洪川)으로 귀양 보냈는데, 대체로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상이 반정(反正)하고 나서 맨 먼저 그를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고 매우 위임하였다. 그리고 그가 연로하였으므로 궤장(几杖)을 하사하여 편안하게 하였고 또 흰 요와 흰옷을 하사하여 그의 검소한 것을 표창하였다. 갑자년 변란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공주(公州)까지 호가(扈駕)하였고, 정묘년 난리 때에는 총독군문(摠督軍門)으로서 세자를 전주까지 배행하였는데, 조야가 모두 그를 믿었다. 이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이때에 죽으니, 나이 87세였다. 상이 관(棺) 1부(部)를 하사하라 명하고 예조 낭청과 경기 감사를 보내어 금천에 가서 호상(護喪)하게 하였으며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 뒤에 종묘에 배향하였다.」67)
맺음말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대를 살아간 관료이자 학자였다. 학자로서의 면모 보다는 학문적 능력을 실무 정책에 반영한 관료로서의 성향이 훨씬 짙어 보인다. 그러나 관료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관료로서의 실무능력보다는 학파적ㆍ당파적 입장에서 조선 중ㆍ후기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오래도록 지속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원익은 선조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간 후 관료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 도순찰사로 임명된 후 평안도 지역의 민심수습과 병사모집 및 군수조달에 전력을 기울였고, 선조의 피난에도 적극적으로 보필하였으며,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 하였다. 또한 일본의 재침을 대비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군 기강 확립, 산성의 개보수, 군사훈련 등의 현안에 매진하였다.
광해군 즉위와 함께 영의정에 임명된 이원익은 국정전반에 관한 과감한 개혁책을 주장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인목대비의 폐모론과 관련하여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켜, 결국 그와 그를 동조하던 인사들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가 집권을 한 후 다시 영의정에 발탁되었으며, 이후에도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도체찰사 자격으로 이괄의 난을 수습 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인조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가시화 되었을 때는 이미 80대 중반의 고령이었지만, 국가 원로로서 임진왜란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하면서 ‘영원한 현역’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원익은 선조에서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국가의 요직을 맡으면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국방의 다양한 현안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수습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당파에 기울지 않고 국가의 현안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합리적인 처신은 3대에 걸쳐 모두 영의정을 맡는 ‘진기록’을 세우게 했다. 이원익과 같은 인물이 더욱 그리운 것은 치열한 정쟁으로 국익이나 민생 보다는 이념이 우선시되는 현실정치에 대한 답답함 때문은 아닐까?
주석 및 참고문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신병주, 『조선중ㆍ후기 지성사 연구』일지사, 2007.
2) 김성균,「이원익」,『한국의 인간상 1』, 신구문화사, 1965; 이희덕,「백성의 반려 오리정승-이원익」,『한국
인물대계』4, 박우사, 1972; 강주진,『오리대감 이원익소전』, 탐구당, 1990.
3) 이양희,「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한국인물사연구』4호, 한국인물사학회, 2005.
4) 허권수, 「오리 이원익과 영남 남인과의 관계 연구」,『한국인물사연구』4호, 한국인물사학회, 2005.
5) 송양섭, 「17세기 전반 梧里 李元翼의 정치활동과 정책구상」, 『한국인물사연구』5, 2006.
6) 이정철, 「오리 이원익과 두 번의 공물변통」, 『조선시대사학보』54, 2010.
7) 윤호진, 「이원익 기에 나타난 不動心과 仁에의 지향」,『한국인물사연구』4호, 한국인물사학회, 2005.
8) 『오리선생문집』권 2, 「遺事」明孝肅皇帝嘉靖二十六年 我恭憲二年十月二十四日 公生於漢陽之泉達坊
9) 『오리선생문집』권 2, 「遺事」梧里李相國 諱元翼字公勵 梧里別號也 我恭定王子益寧君袳之四世孫也 翼寧君生秀泉君貞恩 秀泉君以高節聞 事在秋江師友傳 秀泉君生靑杞君彪 靑杞君生咸川君億載 咸泉君好文學博雅 通於五聲律呂之變 咸泉君於公爲皇考妣東萊郡夫人鄭氏 監察錙之女也
10) 『오리선생속집』 부록 권1, 「年譜」 公十八歲春 中生員初試 秋 中覆試三等 第三十五 李珥榜下 冬居泮
11) 『선조수정실록』선조 7년(1574) 10월 1일(임인).
12) 『선조수정실록』선조 10년(1577) 7월 1일(병술).
13) 이준경은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선조대왕을 영립(迎立)하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에 헌신하였으며, 신진사류와 기성사림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고자 노력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14) 『선조수정실록』선조 5년(1572) 7월 1일(갑신).
15) 『黨議通略』「宣祖朝」 宣祖初 領相 浚慶卒 遺箚曰 今人高談大言 結爲朋黨 比終必爲國家 難拔之患
16) 『黨議通略』「宣祖朝」 命竄謹元應漑篈 是謂癸未三竄
17) 허권수, 「오리 이원익과 영남남인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한국인물사연구』4, 2005, 4~5쪽.
18) 강주진, 『오리대감 이원익 소전』탐구당, 1990, 27~28쪽.
19) 『선조수정실록』선조 20년(1587) 4월 1일(경신).
20) 위와 같음.
21) 강주진,『오리대감 이원익 소전』, 탐구당, 1990년, 157~158쪽.
22) 『선조수정실록』선조 22년(1589) 9월 1일(을사).
23) 정여립의 역모 사건은 1589년 10월 안악군수 박충간 등의 보고를 받고 황해감사 한준이 조정에 올린 비밀장계에는 기축옥사의 도화선이 된 정여립의 역모 내용이 나타나 있었다. 정여립이 기축년 겨울 서(황해도)남(전라도)에서 일시에 병사를 일으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성을 직접 쳐들어가 무기고를 불사르고 조운 창고를 약탈하며 심복을 도성 요소에 배치한다는 것이 역모의 기본 시나리오였다. 이어 자객을 나누어 보내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거짓으로 교지를 꾸며 인근의 수령과 병사(兵使), 수사(水使)를 죽이며 언관을 사주하여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을 파직시키고 그 틈을 타서 일제히 궐기한다는 것이었다. 정여립이 황해도를 역모의 진원지로 삼은 데 대해서 연려실기술 등에는 이곳이 일찍이 임꺽정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정여립과 함께 역모에 핵심적으로 참여한 변숭복(안악), 박연령(안악), 지함두(해주) 등은 모두 황해도 출신이었다. 1589년 정여립에 대한 역모 고변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되고 주모자 및 연루자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정여립의 자살로 역모의 주모자는 사라졌지만 그와 연루된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었으며,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다. 특히 서인의 강경파 정철이 수사의 책임을 맡으면서 이 사건의 파장은 점점 확대되었다.
24) 『선조수정실록』선조 24년(1591) 5월 1일(을축).
25) 『오리선생문집』권 2, 「遺事」 壬辰之亂 以吏曹判書 兼平安道都巡察使 先行
26) 일부에서는 황윤길이 서인, 김성일이 동인이므로 이를 당쟁의 산물로 보고 있으나, 김성일의 경우 이황의 제자로서 이황은 이전부터 일본과의 교린정책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로서 스승의 학문적 영향도 일부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27)『燃藜室記述』선조조고사본말.
28)『선조실록』선조 25년(1592) 5월 25일(갑신).
29)『오리선생속집』, 부록 권2, 행장 권유.
30)『선조실록』선조 25년(1592) 6월 11일(기해).
31)『선조실록』선조 25년(1592) 6월 11일(기해).
32)『선조실록』선조 25년(1592) 6월 15일(계묘).
33)『선조실록』선조 25년(1592) 6월 21일(기유).
34)『선조실록』선조 26년(1593) 2월 5일(경인). 金應瑞盡率其軍 輸送糧料事 已受分付 而今無一石之到 諸將之不用命 至於此極 極爲痛憤 應瑞嘉善加削去後 令李元翼捉致軍門 從重決杖 督運糧餉 星火馳去事 下諭似當 賊兵經過處 收埋慰祭事 令該司斯速擧行
35)『선조실록』선조 26년(1593) 1월 15일(경오). 今詳李元翼等狀啓 則天將出祭陣亡軍土於普通門外云 以我國之事 天朝士卒 橫罹鋒刃 極爲傷痛 令本官 精備莫物且令分戶曹參判成壽益 臨戰所行祭云
36) 『燃藜室記述』 별집 권 7, 官職典故 諸司.
37) 『澤堂集』 별집 권8, 行狀,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經理遂如公言 蓋公漢語精捷 故能應機周旋 多類此
38)『선조실록』선조 28년(1595) 7월 16일(정해). 右議政李元翼 啓曰 欲以金玏 以體察副使啓差 而方任憲長 事體未安 敢啓 且持平南以恭 欲差爲從事官 而亦在臺憲 竝稟
39) 허권수, 앞 논문, 5~6쪽.
40)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즉결 처분도 취하는 등 부하에 엄격했던 지휘관 이순신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41) 이원익은 첩에게서 2남 7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제전(悌傳)은 이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42) 허권수, 앞 논문, 13쪽.
43) 『梧里先生文集』부록 권1, 「逸事狀」 余仍以體察入嶺中久 柳相成龍余所敬事 盧景任明敏篤敬 郭再祐或多妄作 而豪俠好義 受余呵責 飜然覺悟 終始事余 金宇顒儒雅直諒 遠避仁弘 漂泊畿甸 此數君子 今皆不得見矣 時復思想 不堪悽惋云 李舜臣忠勇有智略 柳公成龍薦之 … 元均來大敗閑山 自此而始蕩然 舜臣承命再來 而賊兵又大至 舜臣臨機制變 神出鬼秘 士卒盡死力 大功垂成 而忽爲流丸所中
44) 『선조실록』선조 29년(1596) 11월 7일(기해).
45)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평가와 관련한 논쟁에 대해서는 ‘이재호, 「이순신과 원균 누가 진정한 구국의 명장인가」『조선사 3대논쟁』역사의 아침, 2008.’ 참조.
46) 『오리선생문집』권 2, 「遺事」 舜臣曰 令將士忘死者 相國也 仍嘆之曰 我爲將在外䜛疑當道 相國專用吾計 今舟師粗完 非我也相國也
47) 『梧里先生文集』 권2, 疏箚, 「引見時啓辭」(1599년 11월 25일) 天下國家之事 只判於公與私二字而已 純用公道 則爲太平之世 公私交雜 則國勢雖扶持 而爲叔季之世 純用私情 則國亡矣 南人當路時 私固多 而公亦有十之三四矣 北人起後 公道滅絶 私情大行 北人分爲大小北之後 小北猶多有以士類自處者 至於大北 則幾皆私黨 純用私情 此輩起而用事 則國事去矣
48)『선조수정실록』선조 37년(1604) 6월 25일(갑진).
49)『선조수정실록』선조 40년(1607) 10월 11일(경오).
50)『광해군일기』광해군 즉위년(1608) 2월 14일(신미).
51)『광해군일기』광해군 즉위년(1608) 2월 15일(임신).
52)『광해군일기』광해군 즉위년(1608) 5월 7일(임진). 以各邑進上貢物 爲各司防納人所搪阻 一物之價倍蓰數十百 其弊已痼 而畿甸尤甚 今宜別設一廳, 每歲春秋收米於民 每田一結兩等例收八斗 輸納于本廳 本廳視時物價 從優勘定 以其米給防納人 逐時貿納 以絶刁蹬之路 又就十六斗中兩等 各減一斗 給與本邑 爲守令公私供費 又以路傍邑多使客 減給加數 兩收米外 不許一升加徵於民 惟山陵 詔使之役 不拘此限 請劃一施行
53) 『오리선생속집』권1, 부록, 「年譜」, 62세. 宣惠廳始此 其法 每春秋 逐民田一結 各收米八斗 輸於京庫 以時俵給各司私主人 使自貿納上供諸物 視時巿估高下而優剩其數 使私主人亦得以自資 此外不許尺布升米加徵民戶 以革防納什倍之弊 科條精密 經久可行 而姑令先試於畿內 巨室豪民 皆失防納大利 百端沮撓 光海亦欲罷之 而以畿民言其便行之
54) 『오리선생문집』권 3, 「謝恩賜且陳全恩事箚」(1608년 2월 20일).
55) 『광해군일기』광해군 1년(1609) 1월 9일(임신).
56) 『오리선생문집』續集 附錄 권1, 「年譜」, 63세 및 『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8월 13일(신유).
57) 『광해군일기』광해군 3년(1611) 11월 24일(기미).
58) 『광해군일기』광해군 7년(1615), 2월 5일(임오). 今者流聞道路之間 聚首洶洶以爲 因此將延及於大妃 臣驚心隳膽 不覺神魂之飛越 母雖不慈 子不可以不孝 母子之間 名位至大 倫紀至重 聖人 人倫之至 聖明之世 安有此事 儻朝廷果無此議 則臣之輕信道聽 先事强聒 罪不可逭乞治臣妄言之罪 以定國人之疑
59) 『광해군일기』광해군 7년(1615), 2월 5일(임오).
60) 『광해군일기』광해군 8년(1616) 12월 21일(정사).
61) 『오리선생문집』속집 부록 권 1, 「年譜」, 73세. 二月有 放歸田里之命 五月寓居驪江上仰德里 草屋數間 不蔽風雨 家小伴日而食 面有飢色 公坦如也.
62) 『인조실록』인조 1년(1623) 3월 16일(병오). 元翼忠貞淸白 自先朝入相 負一國重望 昏朝臨海之獄 首陳全恩之義 廢論方張之初 又上箚 極陳盡孝之道 兇徒深嫉之 幾不得保 謫洪川五年 放歸田里 至是 復拜首揆 朝野相慶 上遣承旨趣召 入城之日 都民加額以迎
63) 『인조실록』인조 1년(1623) 3월 23일(계축).
64) 『인조실록』인조 1년(1623) 3월 22일(임자). 元翼曰 凡處事循塗守轍 似難聳動 必有大擧措 可以服人心 前頭備禦奴賊 接濟天兵等事 極爲難處 目今民生塗炭國計虛竭 必須量入爲出 節用愛民 而凡干徭役 不責於民 少紓其力 則百姓至靈 使之支供唐兵而無怨 征討奴賊而不憚 君臣大義 雖未必知 而皆感壬辰再造之恩故也 向者群奸滿朝 誰肯與天兵合勢討賊乎 近聞聖斷 多有聳動之擧人心固結 則可以制梃禦敵矣 我國素稱天下强兵 苟得民心 人皆樂爲之戰 何難乎此賊 何憂乎備禦 上曰 卿言是矣
65)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연구』, 집문당, 166~175쪽.
66) 『澤堂集』 별집 권8, 行狀,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其爲政 務挈綱紀 專用典故 雖事端無窮 而裁割曲當 凡行政四方 人名地名 品目度數 一閱之便不忘 故吏僕不敢欺及踰耆耋 歎曰 吾才長於刀筆 少長 能辦公事者 徒以記性兼人也 今老矣 事過而有遺忘 如此而尙可仕乎
67) 『인조실록』 인조 12년(1634) 1월 29일(병진).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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