梧里 李元翼의 生涯와 治績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1. 머리말
이원익(1574-1634)은 선조 · 광해군 ·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종실(宗室) 출신 현상(賢相)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왕자인 익령군(益寧君)의 4세손으로 1569년(선조 2)에 문과에 급제해 1634년(인조 12) 죽을 때까지 65년간 관직생활을 했고 그 중 44년간 재상의 직위에 있었다. 그동안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을 맞이해 이조판서로 평안도도순찰사를 겸임해 관서지방을 방위하는데 앞장섰고, 이여송과 함께 평양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1595년(선조28)에는 우의정으로서 4도도체찰사를 겸임해 성주(星州)에 부(府)를 두고 남쪽지방을 진무(鎭撫)했다. 뿐만 아니라 1624년(인조 2) 이괄난 때는 78세의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도체찰사가 되어 난을 평정했다. 무엇이 이원익으로 하여금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 설 수 있게 했을까? 그는 키는 작았으나 담대하고 사명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국란을 당해 백성을 사랑하고 군비를 갖추어 나라를 수호하고 국왕을 호위했다. 이러한 공으로 이원익은 40 여년간 6 차례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국정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청렴결백해 아주 가난하게 살았으며, 비록 국왕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신랄하게 비판하고 바른 소리를 했다. 병이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큰 일이 없으면 관직에서 계속 물러가기를 원했으며, 왕이 내려주는 선물이나 녹봉을 사절했다. 이러한 자세는 조선시대 공직자의 모범이요, 선비정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오리 이원익의 생애와 치적을 상세히 살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올바른 공직자 정신과 선비정신을 본받게 하고자 한다.
2. 家系
오리 이원익은 전주이씨1)로 시조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 벼슬을 한 이한(李澣)이며, 중시조는 태종의 12번 째 아들인 이치(李衤+多)다. 이원익은 이치의 4세손이다. 왕손은 4대가 되어 친진(親盡)이 되면 일반 양반처럼 과거시험을 보아 벼슬할 수 있었다. 이원익의 직계 존 · 비속을 도표로 그려 보면 [표 1]과 같다.
[표 1] 李元翼의 直系尊· 卑屬 2)
이원익의 고조는 익령군(益寧君) 치(李衤+多)다. 그는 태종의 12남(遺腹子)으로 시호는 소강공(昭剛公)이요 불천위(不遷位: 공이 있는 사람으로 5세가 되어도 신주를 묻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神位)였다. 1422년(세종 4) 10월에 태어나 1464년(세조 10) 7월 10일에 죽었다. 향년 43세. 묘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元堂面) 성사리(星沙里) 산 144번지 별라산(別羅山)에 묘좌(卯坐)로 있다. 1466년(세조12)에 세운 표석(表石)이 있다. 어머니는 숙선옹주(淑善翁主: 뒤에 善嬪으로 改封되었다)로 1468년(세조 14) 6월 17일에 죽었다. 부인은 둘인데 첫째부인은 절제사 박종지 의 딸이요 (朴從智) , 판서를 지냈고 시호가 충숙공(忠肅公)인 박신(朴信)의 손녀요, 판윤을 지낸 박지의(朴之誼)의 증손녀요, 재신(宰臣) 윤향(尹向)의 외손녀인 군부인(郡夫人) 청송(靑松: 璿源譜에는 雲峯) 박씨다. 묘는 익령군묘 뒤에 묘좌(卯坐)로 있다. 딸 하나를 두었다. 둘째부인은 첨지중추부사 조철산(趙鐵山)의 딸이요, 평양부원군 조견(趙.)의 손녀요, 판서 조덕유(趙德裕)의 증손녀요, 전주이씨 이수량(李守良)의 외손녀요, 평양부원군 조인규(趙仁規)의 5세손인 군부인 평양조씨다. 묘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所下里) 산 137번지 삼석산(三石山) 동쪽 기슭에 사좌(巳坐)로 있다. 표석이 있으며, 의천군(義泉君) 승은(承恩)과 수천군(秀泉君) 정은(貞恩) 두 아들을 두었다. 딸 넷은 김신(金信) · 원근레(元謹禮) · 박정(朴禎) · 정지추(鄭之推)에게 시집갔다.3)
의천군 승은은 익령군의 장자로 자는 백총(伯寵)이요, 의천군(義泉君)은 그 시호이다. 아버지는 익령군 이치(.+多)요, 어머니는 평양조씨다. 1451년(문종 1)에 태어나 1489년(성종20) 정월 15일에 죽었다. 향년 39세. 묘는 고양군 남면 별라산에 있다. 표석(表石)과 묘갈(墓碣)이 있다. 처음에 의천정(義泉正)이 되었다가 익령군을 봉사(奉祀)하기 때문에 의천군(義泉君)으로 승진했다. 그는 도량이 넓었으며, 생산(生産)을 일삼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해 박씨부인을 자기를 낳은 어머니처럼 섬기고, 조상을 받드는 일에 열심이어서 속절(俗節)에 반드시 사당에 새물건을 올렸다. 다만 술이 지나쳐 이 때문에 병을 얻어 일찍 죽었다. 그의 병이 위중했을 때 성종이 특별히 의약을 하사하기도 했다. 부인은 참의 정계우(鄭繼禹)의 딸이요, 판서 정구진(鄭龜晉)의 증손녀인 현부인(縣夫人) 광주정씨(光州鄭氏)다. 1518년(중종 13)12월 13일에 죽었다. 묘는 남편의 묘의 뒤에 자좌(子坐)로 있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성정(水城正)수장(壽長)이요, 딸은 충순위(忠順衛) 강세응(姜世應)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유산령(柔山令) 수양(壽楊)과 조종령(朝宗令) 수견(壽堅)이요, 딸은 충의위 이예(李禮)에게 시집갔다.4)
이원익의 증조 수천군 정은(貞恩)은 익령군의 차자다. 자는 정중(正中), 호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설창(雪窓), 시호는 수천군(秀泉君)이다. 어머니는 평양조씨다. 동모형(同母兄) 의천군(義泉君)이 수천군을 장사지낸 것이 1505년(연산군 11) 9월이니 죽은 것도 이 때일 것이다. 그가 태어난 1451년(문종 1, 신미)로부터 1505년까지 한 갑자가 돌지 않았을 것이니 55세를 산 셈이다.5) 처음에 수천부정(秀泉副正)이 되었다가 뒤에 도정(都正), 군(君)으로 추봉되었으니, 손자 함천군(咸川君)이 공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특히 음률(音律)에 능했다. 손가락으로 튕기고 손바닥을 움직이는 것과 굽히고 꺾는 것, 고음(高音)과 화성(和聲)을 신묘하게 하고 막히지 않았다 한다. 그리하여 때로 슬픈 곡조를 타면 강개(慷慨)해서 듣는 자들이 모두 울었다 한다. 그는 나면서부터 부귀했으나 지위로써 교만하지 않았고, 비단옷을 벗어던지고 선비의 흰옷을 입었다. 1602년(선조 35) 9월에 이원익은 우찬성 심희수(沈喜壽)에게 부탁해 그의 묘갈명을 짖게 했다. 심희수는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록(師友錄)을 참작해 다음과 같은 명(銘)을 지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왕손(濯濯天枝)
금처럼 정교하고 옥처럼 광택이 나네.(金精玉潤)
재주는 갖추지 않은 것이 없고,(才無不備)
학문을 근본으로 삼았네.(學以爲本)
학문을 갈고 닦아(切磋琢磨)
사람 사귀는데 화기로웠네.(.然三益)
몸은 부귀에 있었어도,(身居富貴)
뜻은 산과 못에 있었네.(志在山澤)
가슴 속의 율려(律呂)는(胸中律呂)
다른 사람을 감응해 움직였네.(感物而動)
화락하고 순한 데서 나온 바이니,(和順所發)
어느 것이 기묘하지 않으랴.(敦非妙用)
모든 것을 씻어 깨끗이 하니,(消融蕩滌)
이것으로 마음을 길러,(要以養心)
원망하지 않고 수고롭게 하지 않았네.(不怨不勞)
태평시절의 음률이라,(治世之音)
궁상(宮商)이 번갈아 변하네.(宮商迭變)
사방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四座掩淚)
마음 상하는 소리가 들려도(仰.出聽)
혹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다네.(容有是理)
평생의 주옥같은 글들은(平生咳口+垂)
세상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네.(行世無幾)
글 한 구절도 남기지 않은 것은(禁.隻句)
또한 하나의 나머지 일일세.(亦一餘事)
돈독히 증손을 낳으니,(篤生曾孫)
어진 상국(相國)이었네.(憲憲相國)
정성이 깊어 먼 조상을 추모하고,(誠深追遠)
선현의 유적을 적어서(表述先蹟)
금양(衿陽)의 언덕에 비갈을 세웠네.(以竪碣衿陽之阡)
효성스런 생각이 법도가 있으니,(孝思維則)
남은 경사가 길이 이어지리.(餘慶綿綿)6)
묘갈명은 우찬성 심희수(沈喜壽)가 썼고, 글씨는 외현손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썼다. 유사(遺事)는 이원익의 손서인 미수(眉.) 허목(許穆)이 썼고, 행록(行錄)은 7세손 완성군(完成君) 이존도(李存道)가 썼다.7) 증손 영의정 이원익이 출세해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추증되었다.8) 문학으로 세상에 한 때 이름이 나서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는 이치를 먼저하고, 글을 뒤에 했으며, 덕을 행하는 데는 안을 먼저하고 밖을 뒤에 했고, 시를 짖는 데는 격조(格調)를 먼저하고 글을 뒤로 했다고 했다. 검약(儉約)을 좋아했으며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평생에 사람과 충애(忠愛)하기를 잘하고, 위태로운 말이나 격앙된 의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오 · 갑자사화 때 명사들이 모두 화를 당했으나 공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았다. 널리 음율에 통해 거문고를 잘 탔는데 곡조가 간략하고도 절개가 있고 청렴하고도 곧아서 뛰어난 소리라고 일컬었다. 사화 이후에는 세상일을 다 버리고 매양 달밤에 사람이 없을 때 거문고를 어루만지면서 탄식했다. 유고(遺稿)가 있었으나 모두 불태워 버려서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손자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도 음악을 즐겨 수천군은 거문고를 타고 함천군은 경쇠를 첬다고 한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록(師友錄)에 수천군이 수문(首門)으로 적혀 있다.9) 같 이 논 사람들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 소총(篠叢) 홍유손(洪裕孫) · 월창(月窓) 안응세(安應世) · 풍애(楓崖) 유선언(柳善言) · 처사(處士) 권안(權晏) · 학사(學士) 이종준(李宗準) · 학사 권경유(權景裕) · 죽계(竹溪) 이윤종(李尹宗) ·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 · 신영희(辛永禧) · 민귀손(閔龜孫) · 이달선(李達善) · 이원(李.) · 이분(李.) · 강흔(姜.) · 남표(南慓) 등이다. 이 중 김시습 · 남효온 · 안응세 · 권안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김시습은 방외인(方外人)으로 기개가 보통 사람보다 높아서 눈에 두려운 사람이 없었고, 비록 한 때 높은 벼슬에 있던 자라도 종처럼 꾸짖었는데, 홀로 수천군 이정은 · 남효온 · 안응세와는 끝까지 친하게 지냈다. 안응세는 세상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일찍 죽고, 권안도 기사(奇士)로서 수천군보다 20 여세 위인데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 죽지 않고 늦게 세 벗을 얻었다“고 했으니, 수천군 · 남효온 ·이윤종을 두고 한 말이다. 수천군의 음율은 세상에 으뜸이어서 김유(金紐)가 그 곡조를 평해 ”시냇가의 매화“라고 했다. 그가 1485년(성종 16) 가을에 남효온 · 우선언 · 무풍정 이총 등과 안화동(安和洞)과 첨성대(瞻星臺)를 구경했는데, 때는 중양절(重陽節)이요 경치가 좋았다. 우선언이 흥이 나서 일어나 춤을 추고 수천군은 비파를 타거나 혹은 북을 치는데 합하고 그치는 것과 고저가 모두 절주(節奏)에 맞아 산에 가득한 사녀(士女)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작별에 임해 수천군이 산주(山主)에게 사례하기를 ”만일 다시 우리 일행을 보려거든 모름지기 장안(長安) 시중(市中)에 물어보라!“고 하니, 주인이 치사하기를 ”궁벽한 곳에서 음악소리를 듣지 못하다가 이제 신선같은 음악을 듣고 먹은 귀가 잠시 뚤렸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 때 산 위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해는 떨어지고 달은 돋는데 바람이 일어 나무들이 운다. 이에 수천군이 청산별곡(靑山別曲)을 타니 중들이 모여들어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중에 한 늙은 중이 수천군을 가장 좋아했는데 빌기를 ”선객(仙客)이 이 절에서 논 것은 옛날에는 최치원(崔致遠)이요, 오늘날은 공들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돌아 오는 길에 말 위에서 타기를 그치지 않으니 길가의 행인들이 모두 발길을 멈추고 들었다고 한다. 남효온이 말하기를 ”수천군의 음율은 무풍정 백원(百源)과 이름이 가지런한데, 의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백원은 웅혼(雄渾)하지만 손이 거칠고, 수천군은 격조는 높으나 기(氣)가 편벽하다’고 하는데 내가 친히 수천군의 거문고 뜯는 것을 보니 듣는자가 반드시 우는지라 백아(伯牙: 고대에 거문고를 잘 타던 사람)가 죽은 지 천 년 이후에 이 사람이 제일이 아닌가? 기운이 편벽되다는 말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닌가? 백원은 일찍이 악기를 갖추어 밤낮으로 익혔고, 수천군은 집에 아무 것도 없어서 가는 곳마다 우연히 악기를 잡으면 순전히 나에게 복종하는 것 같아 그 솜씨가 몹시 높다. 그러나 지음(知音)하는 자는 혹 기롱하기를 ‘수천군의 거문고 재주는 백아와 같으나 그 때의 사정에 맞추는 것은 백원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어찌 경제(經濟)의 재주가 갖추어져서 조그만 재주에 돌려보냈기 때문에 편벽되게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펴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한다“고 했다.10)
수천군은 중년 이후로 세도(世道)가 잘못 되는 것을 보고 매양 슬픈 노래로 감개(感慨)하고 때로 눈물을 흘렸으니 이는 대개 1494년(연산군 즉위년) 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마음대로 음란하고 사납게 굴어 사람을 죽이는 것을 그치지 않으니 사람마다 두려워서 아침 저녁을 보존할 수 없었다. 어느날 김굉필이 말하기를 “남효온이 거리낌 없이 말하고 겸손할 줄 모른다고 하자 그는 드디어 옛 습관을 모두 버리고 문을 닫고 교제를 끊고서 절대로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다. 또 평일에 저술한 시문 수편을 모두 불태웠다. 그후 무오 · 갑자 사화가 계속 일어나서 사류들이 모두 죽었으나 그는 온전할 수 있었으니 군자들이 말하기를 명철보신(明哲保身)했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그 높은 심정과 뛰어난 음향(音響)이 성시(聲詩)로 전해진 것이 하나도 집에 간직된 것이 없고, 『추강집』(秋江集)에 약간편이 전해져 올 뿐이다.11)
수천군은 종실에 태어나 조정의 직책을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조금도 베풀지 못하고, 또 혼란한 때를 당해 숨어서 살았으나 뒷 사람들에게 덕을 심고 도운 것이야 다 헤아릴 수가 없다.12)
첫째 부인은 감찰 유중발(柳重發)의 딸이요, 감사(監司) 유장(柳暲의 손녀딸이며,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가 정숙공(貞肅公)인 월정(月亭) 유정현(柳廷顯)의 증손녀인 현부인(縣夫人) 문화유씨다. 묘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所下里) 산 101번지 도당점(禱堂岾) 남쪽에 해좌(亥坐)로 있다. 표석이 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가 그 사람이다. 둘째 부인은 양천허씨인데, 부림수(缶林守) 이표(李豹) · 결기수(結杞守) 이현(李玄) · 무령수(武寧守) 이월(李越) 등 세 아들을 낳았다. 묘는 남편 무덤 계하(階下)에 정좌(丁坐)로 있다.13)
이원익의 할아버지는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다. 이표는 처음에 청기수(靑杞守)가 되었다가 청기군으로 승진했다. 품계는 소덕대부(昭德大夫)였다. 묘는 소하리(所下里) 산 101번지 도당점(禱堂岾) 아래에 해좌(亥坐)로 있다. 표석이 있다. 부인은 생원 조경(趙璟)의 딸인 배천 조씨(白川趙氏)다. 남편과 함께 묻혀 있다.14)
부림수 이표(李豹)는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창선대부(彰善大夫)에 추봉되었다. 부인은 둘인데, 첫째부인은 평산신씨(平山申氏)요, 둘째부인은 민숭영(閔崇英)의 딸인 여흥민씨(驪興閔氏)다. 묘는 이원익묘에서 자방(子方)으로 75척에 신좌(辛坐)로 있다. 부인 둘과 함께 묻혔으며 표석이 있다. 결기수 이현의 부인은 참판 최명창(崔命昌)의 딸인 개성최씨다. 무령수 이월의 부인은 부정(副正) 김우윤(金禹胤)의 딸이요, 영의정 김국광(金國光)의 증손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다. 15) 남편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 북면 이천(梨川)에 유좌(酉坐로 묻혔다.16)
청기군은 6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보천부정(甫川副正) 이억정(李億正)이요, 차남은 이원익의 아버지인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요, 3남은 숭천도정(崇川都正) 이억령(李億齡)이요, 4남은 제천정(提川正) 이억동(李億同)이요, 5자는 단천령(端川令) 이억순(李億舜)이요, 6자는 덕천군(德川君) 이억수(李億壽)다. 보천부정 이억정은 1500년(연산군 6)에 태어나 처음에 보천부수(甫川副守)가 되었다가 뒤에 보천부정(甫川副正)으로 승진했다. 묘는 아버지 청기군 묘의 위쪽 술방 으로 척에 임좌 로 (戌方) 32 (壬坐) 있다. 표석이 있다. 부인은 둘이 있었다. 첫째부인은 진사 정황(鄭璜)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초계정씨(草溪鄭氏)다. 묘는 수천군 묘에서 묘방(卯方) 으로 45척에 유좌(酉坐)로 있다.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둘째부인은 별좌 윤항(尹沆)의 딸인 정부인 파평윤씨다. 남편과 함께 묻혔다.17)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는 이원익의 아버지다. 자는 대년(大年)이다. 아버지는 청기군 이표(李彪)요, 어머니는 국자생원 조경(趙璟)의 딸인 배천조씨다. 1503년(연산군 9) 11월 9일에 태어나 1584년(선조 17) 8월 13일에 죽었다. 향년 80세. 처음에 함천부수(咸川副守)가 되었다가 1535년(중종 30)에 시예(試藝)에 뽑혀 창선대부(彰善大夫) 함천정(咸川正)으로 승진했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죽자 직혼전(直魂殿)에 뽑히고, 3년 후에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진했다. 1560년(선조 15)에 나이 80이 되어 정의대부(正義大夫) 함천군에 피봉되었다. 1584년(선조 17) 8월에 그가 죽자 10월에 금천현(衿川縣) 소하리(所下里) 오리동(梧里洞) 청기군 묘하에서 사방(巳方)으로 29척에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장사지냈다. 그리고 차남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어 은예(恩禮)로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에 추봉되고, 정1품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올랐다.18)
함천군은 충성스럽고 성실해서 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자기 몸이 더러워지는 것 같이 여겼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수천군 이정은의 재주를 이었다고 했다. 매양 달밤에 사경(砂磬)을 치면서 스스로 마음을 붙이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대악(大樂)이 사경에 그 소리가 전하는 것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오행(五行)의 운행을 잘 알아 항상 이원익에게 경계하기를 “큰 나라에서는 경(卿)이 되고, 작은 나라에서는 상(相)이 될 것이나, 늦게는 화액(禍厄)이 있고 위험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이원익이 늘 말했는데 그 말이 다 맞았다고 한다. 그는 귀한 신분으로 후덕하고 오래 살았으며 자손이 현달했다. 손자 사위 허목은 묘지명에서
“아아!(嗚呼)
개결한 지조와(介潔之操)
넓고 맑은 글이로다.(博雅之文)
덕이 두텁고 세운 것이 순박해,(德厚而樹淳)
돈독히 밝은 사람을 낳았네.(篤生哲人)“19)
라고 읊었다.
부인은 둘이다. 첫째 부인은 첨지 우정(禹鼎)의 딸이요, 첨지 우윤공(禹允恭)의 손녀이며, 예안군(禮安君) 정장공(靖莊公) 우제(禹.)의 6세손인 군부인(郡夫人) 예안우씨(禮安禹氏)다. 묘는 시흥군 서면 일직리(日直里)에 사좌(巳座)로 있다. 표석이 있다. 슬하에 자녀가 없다. 둘째 부인은 감찰 정치(鄭.)의 딸이요,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정창손(鄭昌孫)의 4세손이며, 감사(監司) 최중홍(崔重洪: 和順崔氏)의 외손녀인 군부인 동래정씨다. 1512년(중종 7) 정월 20일에 태어나 1555년(명종 10) 4월 26일에 죽었다. 향년 44세. 남편과 함께 묻혔다. 김귀영(金貴榮)이 짖고, 김응남(金應南)이 쓴 신도비와 동계(洞溪) 정온(鄭蘊)이 지은 묘지명과 미수(眉.) 허목(許穆)이 지은 묘지명이 있다. 정온은 부인 동래정씨의 묘지명도 지었다.20)
함천군 이억재의 부인이요, 영의정 이원익의 어머니인 군부인 동래정씨는 천성이 온유하고 손순(遜順)해 깊은 덕이 있었는데, 중매쟁이가 상서로운 것을 점쳐서 함천군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남편을 섬기는데 어긋난 행동이 없고 아들을 가르치는데 사랑과 의리가 있었다. 집을 다스리는데 조리가 있고, 비복(婢僕)을 거느리는데 은의(恩義)가 있었다. 함천군이 종실로서 부 귀를 누리면서 어진 종실이 된 것과, 아들 이원익이 40년간 관곽(館閣)에 출입하면서 청백하 게 국가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동래정씨의 주선 때문이었다. 정온은 동래정씨의 묘지 명에서
“동래의 정씨는(東萊之鄭)
동쪽 나라의 으뜸이네.(甲于東國)
고려로부터 지금까지(自麗.今)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않았네.(冠冕不絶)
부인의 계통은(夫人之系)
두어 대 동안 벼슬이 낮았네.(數世官卑)
여자의 행동은(女子之行)
다시 나르는 수가 있네.(有以復飛)
덕문(德門)에 출가해(于歸德門)
순종하기만 하고 어김이 없었네.(有順無違)
아들이 경사롭고 배필이 좋아(胤慶配良)
이에 상공을 낳았네.(乃生相公)
아아! 상공은(.歟相公)
나라를 위해 종실의 주석(柱石)이 되었고.(爲國臣宗柱石)
여러 조정에 우리 종묘를 도왔네.(累朝扶我宗.)
오직 이 빛나는 빛은(維此耿光)
부모의 가르침이요(父母之敎)
이름을 드날려 나타난 것은(揚名以顯)
상공의 효도일세.(相公之孝)
옛 지문을 고쳐(圖改舊誌)
산이 옮겨지고 골짜기가 변하도록 길이 전하니(以永於傳山移谷)
명(銘)이 어둡지 않으리.(銘不昧.)21)
라고 읊었다.
청기군의 3자는 숭정도정(崇川都正) 이억령(李億齡)이다. 이억령의 자는 대우(大羽)다. 1514 년(중종 9) 10월 17일에 태어나 1596년(선조 29) 9월 15일에 죽었다. 향년 83세. 처음에 숭 천부수(崇川副守)가 되었다가 명선대부 숭천도정으로 승진했다. 묘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 하리 산 101번지 도당점(.堂岾) 아래 해좌(亥坐)로 있다. 표석이 있다. 부인은 호군 한극침 (韓克.)의 딸이요, 좌찬성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의 현손녀인 청주한씨다. 묘는 소하 리 삼석산(三石山) 아래 마산(馬山) 머리의 수천군 묘 오른 쪽 언덕에 유좌(酉坐)로 있다. 표석이 있다.22)
청기군의 4자는 제천령(堤川令) 이억동(李億同)이다. 이억동의 묘는 부인 이씨와 함께 이원 익묘의 왼쪽 산록에 술좌(戌座)로 있다. 쌍분(雙墳)이다.23)
청기군의 5자는 단천령(端川令) 이억순(李億舜)이다. 이억순의 자는 대수(大.)다. 1524년(중 종 19)에 태어나 1574년(선조 7)에 죽었다. 향년 51세.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스스 로 기개(氣槪)와 풍도(風度)가 있어 족히 사람을 움직였다. 그러나 조그만 절도에 구애되지 않 고 방종(放縱)해 자연 그대로 맡겨 두어 산업을 돌보지 않았다. 할아버지 수천공(秀泉公) 이 정은(李貞恩)의 유풍을 이어받아 음율(音律)에 밝았다. 집이 남교(南郊) 밖에 있었는데, 오상 (吳祥) · 강극성(姜克誠) · 고경명(高敬命) 등의 명사들과 함께 남당(南塘)에 모여 피리를 불면 사람들이 듣고 이는 “아무 공자(公子)가 함께 노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일찍이 잘못된 비방을 받아 남양(南陽)으로 내쫒겨 살다가 일년이 못되어 서울로 돌아왔다.24)
부인은 셋이다. 첫째 부인은 고성(固城)김씨로 소생이 없다. 묘는 청기군 묘 왼쪽 인방(寅 方) 80척(尺)에 유좌(酉坐)로 있다.25) 둘째 부인은 청주한씨로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원 득(李原得)인데, 진사가 되어 음보(蔭補)로 사평(司評)을 지냈고, 두 딸은 내금위 이승남(李承 男)과 무과를 거쳐 첨지(僉知)를 지낸 민항(閔沆)에게 시집갔다. 셋째 부인은 한산이씨인데 소 생이 없다. 둘째 · 셋째 부인은 남편과 함께 뭍혔다.26) 세 번째 부인을 얻을 때 그의 나이 50 세가 가까워 친구들이 말렸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이 어린데 내가 만일 일찍 죽으면 자녀를 거두어 키우는 것은 정실(正室)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결행을 했다고 한다. 과연 그가 죽은 뒤에 한산이씨는 아이들을 잘 키웠다 한다. 셋째 부인은 1570년(선조 3) 2월에 죽었 다.27)
청기군의 6째 아들은 덕천령(德川令) 이억수(李億壽)다. 1537년(중종32)에 태어났다. 처음에 덕천부령(德川副令)이 되었다가 뒤에 명선대부(明善大夫) 덕천령(德川令)으로 승진했다. 효자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묘는 시흥 선영의 도당점(禱堂岾) 아래 해좌(亥坐)로 있다. 부인은 둘이 다. 첫째 부인은 윤방손(尹邦孫)의 딸 파평윤씨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원의(李元義) 요, 딸은 군수 이희보(李希甫)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첨지 신종원(申宗元)의 딸 평산신씨 로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원례(李元禮) · 이원지(李元智)요, 딸들은 전일원(全一元), 판 관 최충일(崔忠一)에게 각각 시집갔다. 부인 둘이 다 남편과 함께 묻혔다.28)
청기군 이표(李彪)의 네 딸은 진사 이완(李.), 현감 윤흡(尹洽), 인의(引儀) 安孝宗), 이문기 (李文琦)에게 각각 시집갔다.29)
함천군 이억재는 4남 3녀를 두었다. 4남은 이원보(李元輔) · 이원익(李元翼) · 이원경(李元 慶) · 이원지(李元祉)요, 3녀는 현감 이회(李澮-한산인), 한응인(韓應仁-청주인), 박윤복(朴允 福)에게 각각 시집갔다.30)
장자 이원보(李元輔)의 자는 백익(伯益)이다. 1530년(중종 25) 10월 13일에 태어나 1589년 (선조 22) 8월 8일에 죽었다. 향년 60세.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어 1576년(선조 9)에 생원이 되고, 1577년(선조 10)에 처음 귀후서(歸厚署) 별제가 되었다. 그후 1578년(선조 11)에 의금부 도사, 1580년(선조 13)에 한성부 참군(.軍)을 역임했는데, 재판을 공명하게 잘 판결한다는 평 이 있었다. 1581년(선조 14)에 내섬시 주부, 1582년(선조 15)에 통진현령이 되었으나 아버지 가 돌아가 벼슬을 내놓고 돌아왔다. 이에 백성들이 정치를 잘했다고 유덕비(遺德碑)를 세워 주 었다. 1586년(선조 19)에 복을 마치고 흡곡(.谷)현령에 임명되어 맑게 몸을 지키고 어진 정 치를 했다. 1589년(선조 22)에 몸이 아파 그만두고 그해 8월에 죽었다. 금천현(衿川縣) 소하리 (所下里)에 해좌(亥坐) 사향(巳向) 언덕 위에 장사지냈다.31) 이원익의 『갑진록』에 의하면 1591 년(선조 24)에 호종원종공신에 책훈되어 좌승지를 증직했다고 한다.32) 표석과 참판 박숭원(朴 崇元)이 지은 묘갈, 동생 이원익이 지은 묘갈음기(墓碣陰記)가 있다. 부인은 별좌 , 증영의정 최숭조(崔崇祖)의 딸이요, 종사랑(從士郞) 최명손(崔命孫)의 손녀, 선전관 최효공(崔孝恭)의 증 손녀, 좌찬성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후손인 숙부인 전주최씨다. 남편과 함께 묻혔 다.33) 함천군 이억재의 차자는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이다. 자는 공려(公勵)요, 호는 오리(梧里)다. 1547년(명종 2) 10월 24일에 태어나 1634년(인조 12)정월 29일에 죽었다. 향년 88세. 문과에 급제해 1595년(선조 28)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할 때도, 인조가 즉위할 때도 영의 정에 임명되었다. 임진란을 극복하는데 공로가 많아 선무공신(宣撫功臣), 호종공신(扈從功臣) 에 록훈되고, 온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623년(인조 1)에 궤장(.杖)을 받고, 1627년(인조 5)에 시흥에 은거하자 집을 하사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는 시흥 삼석산 (三石山) 아래 건좌(乾坐)로 있다. 부제학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지은 신도비명, 우의정 허목 (許穆)이 지은 행장이 있고, 호군 이식(李植)이 지은 시장(諡狀), 대학사 권유(權愈)가 지은 속 행장(續行狀)이 있다. 여주와 안주에 서원이 있고, 평양에 생사당(生祠堂)이 있다.34)
부인은 현신교위(顯信校尉) 정추(鄭樞)의 딸이요, 군수 정세신(鄭世臣)의 손녀요, 참봉 정홍 문(鄭洪文)의 증손녀요, 문충공 정몽주(鄭夢周)의 7세손이요, 함종인(咸從人) 어계호(魚季瑚)의 외손녀인 정경부인 연일(延日)정씨다. 남편과 함께 묻혔다.35)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은 3남 8녀를 두었다. 3남은 이의전(李義傳) · 이효전(李孝傳) · 이제전(李悌傳)이요, 8녀는 군수 이정직(李廷稷-한산인), 무첨사(武僉使) 김여현(金汝賢), 박윤 장(朴允章), 낭청 윤성(尹誠: 파평인), 송흥축(宋興築: 진천인), 이시행(李時行: 경주인, 鰲城이 항복 손자), 이교(李喬: 양성인), 윤영(尹鍈: 남원인, 충무공 이순신 외손녀)에게 각각 시집갔 다.36)
1636년 이원익의 장자 이의전(李義傳)의 자는 의중(宜仲)이다. 1568년(선조 1) 11월 23일에 태어나 1617년(광해군 9) 7월 22일에 죽었다. 향년 50세. 31세에 비로소 벼슬하기 시작해 4현(고창 · 인천 . 양성 . 과천), 5군(풍덕 . 안산 . 양근 2 . 가평), 2부(철원 . 이천)의 고을 원을 지냈 다. 아버지 이원익은 항상 “청렴하면 공변되고 공변되면 밝아진다. 정치를 하는 데는 백성에 게 어질게 하고 물건을 사랑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이니, 호령이 공평하고 상벌이 사사롭지 않으면 백성이 따를 것이요, 인심이 흩어지면 만사가 다 그릇 된다”고 훈계했다. 이 에 그는 한결같이 아버지의 훈계에 따랐더니 가는 곳 마다 칭송이 자자했다. 양근군수로 있을 때 왕으로부터 표리 (表裏)를 하사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한 것도 그 때문이며, 두 번째 양근군수 로 있을 때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이 고을을 지나가다가 “맑은 기운이 사람을 엄습한다”고 논평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원수(元帥)가 철원으로 들 어와 그가 군사를 정돈하고 척후를 엄하게 하고 군량을 조달하니 부중이 편안하게 되었다. 1634년(인조 12)에 아버지 이원익이 죽자 그는 67세의 고령인데도 묘하에서 여묘 3년을 살았 다. 그런데 궤연(.筵)을 거리가 두어 마장이나 떨어져 있는 정당(正堂)에 차려놓아 하루에 두 번씩 왕래했다. 효성이 지극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37)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 때 임금을 모신 공으로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완선군(完善君)에 피봉되었다. 좌찬성을 증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70세가 되어 서호(西湖)에 있으면서 봉조하(奉朝賀)로 왕래할 뿐이었다. 1617년(광 해군 9) 에 노직(老職)으로 자헌대부를 받았고, 그해 7월 22일에 중풍으로 죽었다. 묘는 삼석 산 아래 제일강(第一岡)에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있다. 묘표음기는 허목이 짓고 유하익(兪夏 益)이 썼다.38)
그는 담박하고 화려한 기운이 없었다. 책을 좋아해 고을을 다스릴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특히 5음(五音: 宮) . 商. 角. 徵. 羽) 6율(六律: 12율 중에 陽聲에 속하는 黃鐘. 大.. ..+先. .賓.夷則.無射) 의 변하는 것을 알아서 음악에 통달해 이를 집안 대대로 이어왔다. 이원익이 늘 말하기를 “수천군(이정은)은 거문고를 뜯고, 함천군(이억재)은 경쇠를 친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익이 죽은 뒤에 그는 다시는 거문고를 뜯지 않았다고 한 다.39)
부인은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장사랑 안굉(安宏)의 딸이요, 봉사 인응원(安應元)의 손녀, 생원 안선무(安善武)의 증손녀인 정부인 순흥안씨다. 1570년(선조 3) 11월 15일에 태어나 1617년(관해군 9) 10월 30일에 죽었다. 향년 48세. 남편과 함께 쌍분으로 묻혔다.
이의전(李義傳)은 3남 5녀를 두었다. 3남은 이수약(李守約) . 이수기(李守紀) . 이수강(李守 綱)이요, 5녀는 현감 허교(許喬)의 아들인 우의정 미수(眉.) 허목(許穆: 陽川人), 판서 윤탁연 (尹卓然)의 아들인 윤극화(尹克和: 漆原人), 동지 이호(李灝)의 아들인 이경수(李慶需: 慶州人), 권집(權鏶)의 아버지인 권촉(權矗: 安東人), 정홍(鄭泓)의 아버지인 정호공(鄭好恭: 延日人)에게 각각 시집갔다.40)
이의전의 큰 아들은 이수약(李守約)이다. 이수약의 자는 이성(而省)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원익이요, 어머니는 통사랑 안굉(安宏)의 딸인 정부인 순흥안씨다. 1590년(선조 23) 3월 18 일에 태어나 1668년(현종 9) 2월 16일에 죽었다. 향년 79세. 10세에 비로소 글을 배워 경사 (經史)를 섭엽했다. 17세에 국자초시(생원진사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1615년(광해군 7)에 그가 26세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죄를 얻 어 과거를 보지 못했다.41)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 할아버지가 다시 영의정이 되자 벼슬길이 열려 선공감역이 되고, 이듬해에 장원서 별좌가 되었다. 그 해에 생원시 2등 제 9인으로 뽑혀 사헌부 감찰, 장예원 사평, 연풍현감을 역임했다. 연풍현(延豊縣)은 폐현(廢縣)이었는데, 다시 현으로 승격시켜 그를 현감으로 보낸 것이다. 그랬더니 과연 잘 다스리고 돌아오자 현민들이 비석을 세워 기렸다. 1633년(인조 11)에 사헌부 감찰이 되고, 1634년(인조 12)에 공조좌랑이 되었으며, 1636년(인 조 14)에 양천현령이 되었다. 1636년에 뱡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이의전이 남한산성에 들 어가 인조를 호종했다.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자 아버지가 영남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에 그는 즉시 벼슬을 내놓고 어버지를 따라갔다가 1639년(인조 17)에 형조좌 랑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그 후 용담현령이 되고, 1645년(인조 23)에 포천현감이 되었으나 병 으로 곧 물러났다. 1647년(인조 25) 에 아버지 완선군(完善君)이 죽었다.42)
1624년(인조 2)에 이괄난이 일어나자 공신들이 내변(內變)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해 공신들 이 고상(故相) 기자헌(奇自獻) 등 37인을 죽였다. 그리고 상국(相國) 김모의 시장(諡狀)에 “마 땅히 3공(三公)을 베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 때 이수약은 아버지 상중에 있었는데, 상소를 올려 할아버지의 죄를 변명하니 인조가 태상시(太常寺)에 명해 시장을 고치게 했다. 1650년 (효종 1)에 순창군수가 되었는데, 1년 만에 상사(上司)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었다. 이듬해 할 아버지 이원익이 인조묘정에 배향되자 효종은 그를 장원서 별제에 제수하고, 가을에 종친부 전첨(典籤)에 승진시켜 주었다. 일찍이 윤대(輪對)에서 종친부의 폐단을 갖추어 아뢰니 이를 모두 들어주었다. 효종이 “군현을 다스린 것이 몇 번이냐”고 묻자 “신이 일찍이 군현에 나간 것이 다섯 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윤대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람은 일에 익숙한 자 이다. 일을 아뢴 것이 볼만했다”고 칭찬했다.43)
1653년(효종 4)에 광흥창수로 옮겼다가 고성군수로 나갔는데 1년 후에 또 상사에게 좋지 않게 보여 파면되었다. 그는 이로부터 벼슬에 뜻이 없어 원림(園林)을 다스리면서 세월을 보 냈는데 1658년(효종 9)에 사재감 첨정으로 다시 임용되었다. 그는 비록 벼슬을 즐거워하지는 않았으나 관직을 맡으면 반드시 직책을 다하고 감히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말하기 를 “대대로 나라에 은혜를 받았으니 벼슬이 비록 낮더라도 부지런히 애써서 임금께 보답해야 한다”고 했다.44)
1660년(현종 1)에 장악원 첨정이 되었다가 다시 광흥창수로 옮겼으나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 었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그 후 몇 해 동안 병으로 앓다가 1668년(현종 9) 2월 16일에 죽었다. 그해 4월 28일에 수천군묘 뒤에 장사지내니 그의 명을 따른 것이다.45) 이수약은 부모를 잘 섬겼고, 검소한 것을 좋아했며, 밖으로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착한 것을 사모하기를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듯 하고, 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마치 몸이 더러 워지는 것처럼 여겼다. 일에 있어서는 평생에 몸을 욕되게 하는 것과 남에게 아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이수약은 선상국(先相國)의 풍도가 있다”고 했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가이 어진 상국(相國)의 손자로다”라고 했다. 글 보기를 좋아하 며, 『한중잡록』(閑中雜錄) 10권을 지었다.46)
손자 완성군(完成君) 이존도(李存道) 때문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완능군(完陵君)에 피봉 되었다. 묘는 수천군 묘 위에 곤좌(坤坐)로 있다. 묘갈명과 묘지명은 미수 허목이 지었고 참판 조위명(趙威明)이 묘지명의 글씨를 썼다. 부인은 둘이다. 첫째 부인은 도승지 백인영(白仁英) 의 고손녀요, 동지 남복흥(南復興)의 외손녀인 정부인 수원백씨다. 1588년(선조 21) 4월 9일 에 태어나 1626년(인조 4) 4월 9일에 죽었다. 향년 39세. 묘는 시아버지 이의전의 묘 아래 유좌(酉坐)로 있다.47) 수원백씨는 이수약이 어려서 10년 동안 병을 앓아 거의 죽게 된 것을 밤 낮으로 하늘에 명을 빌어 병을 낫게 하니 일문이 어질다고 했다.48) 4녀를 두었는데 군수 이돈 (李惇)의 아들인 참봉 이후면(李后勉: 延安人), 진사 성하길(成夏吉)의 아들 성초노(成楚老: 昌 寧人), 권순형(權順衡)의 아들인 권이경(權以經: 安東人), 진사 한상오(韓相五: 淸州人)에게 각 각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감찰 서필화(徐必華)의 딸이요 참봉 서경직(徐敬直)의 손녀요, 증참 의 관호당(觀湖堂) 서희적(徐希積)의 증손녀요, 돈령부정 이우빈(李禹賓: 전주인)의 외손녀인 부여(扶餘)서씨다. 1607년(선조 40) 정월 24일에 태어나 1691년(숙종 17) 11월 30일에 죽었 다. 향년 85세. 4남 1녀를 두었다. 4남은 이증현(李曾賢) . 이사현(李師賢) · 이상현(李象賢) · 이경현(李景賢) · 이요, 1녀는 심항(沈伉)의 딸 심지영(沈之泳)에게 시집갔다.49)
완선군(完善君) 이의전의 차자는 이수기(李守紀)다. 이수기는 1594년(선조 27)에 태어나 판 관을 지냈다. 묘는 형수인 이수약(李守約)의 부인 정부인 수원백씨의 산소 아래 묘방(卯方)으 로 24척에 유좌(酉坐)로 있다. 부인은 이대일(李大一)의 아들, 구암(龜岩) 이정(李楨)의 증손녀 인 사천(泗川)이씨다.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진현(李晉賢)으로 1621년(광해군 13)에 태 어났다. 부인의 묘는 시흥 선영 아래 있다. 딸 둘은 강익제(姜翼濟), 정시태(鄭始泰)에게 각각 시집갔다.50)
완선군 이의전의 3자는 이수강(李守綱)이다. 이수강의 자는 자유(子維)다. 1608년(광해군 즉 위년) 5월 15일에 태어나 1674년(현종 15) 9월 8일에 죽었다. 향년 67세. 통정대부로 부사(府 使)를 지냈다. 묘는 광주 퇴촌면(退村面) 족자동(簇子洞)에 신좌(申坐)로 있다. 부인은 둘인데, 첫째 부인은 첨지 심종직(沈宗直)의 딸인 숙부인 청송심씨다. 1650년(효종 1) 8월 30일에 죽 었다. 이정현(李鼎賢: 1640년생) . 이태현(李台賢:1643년생) · 이하현(李夏賢: 1655년생) 등 세 아들을 두었다.51)
완성군(完成君) 이수약(李守約)의 장자는 이증현(李曾賢)이다. 이증현의 자는 효사(孝思)다. 1629년(인조 7) 11월 4일에 태어나 1694년(숙종 20) 10월 23일에 죽었다. 향년 66세. 1657 년(효종 8)에 선조 조 3대신의 후손을 녹용하라는 명이 있어서 사옹원 참봉에 임명된 후 예빈 시 봉사, 종묘서 직장, 사축서(司畜署) 별제, 예빈시 별제, 광흥창 주부, 사재감 주부, 군자감 주부, 내섬시 주부, 장예원 사의(司議), 교하현감, 고산(高山)현감, 영유(永柔)현감, 회덕현감, 영천(永川)군수, 선산(善山)부사, 풍덕(豊德)부사, 공주목사를 역임했다.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감사와 어사들이 훌륭한 업적을 올렸다고 상신해 구마(廐馬)와 표리(表裏) 등을 하사받거나 준 직(準職: 당상관에 올라가기 전에 필수적으로 거처야 하는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1634년 (인조 12)에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때문에 사임하고 그해 10월 23일에 죽었다.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완성군(完成君) 이존도(李存道)의 영달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완성군(完成君) 에 피봉되었다. 묘는 이원익 묘 오른쪽 위에 건좌(乾坐)로 있다.52) 이증현은 간중(簡重)해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항상 문을 닫고 화려하고 이익이 되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지키고, 욕심이 없어 청렴결백했으며, 선조의 훈계를 잘 지켰다.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
“일찍이 과거공부를 했으나(蚤學擧業)
여러 번 떨어졌네.(屢屈不利)
화려한 것보다 조용한 것을 옳게 여겨(華恬靜是)
음직(蔭職)을 받아 벼슬했네.(承蔭筮仕)
군읍(郡邑)의 수령을 역임하되(歷典郡邑)
삼가 상도(常度)를 따랐도다.(謹循常度)
항상 넘치는 것을 두려워 해(恒恐.厥)
사람들과 사귀지 않고(不事交遊)
평생 졸(拙)한 것을 지켰네.(平生守拙)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無喜芬華)
편안하고 조용한 것을 즐겼네.(恬靜是樂)
세상과 더불어 맞지 않아,(與世齟齬)
구멍을 뚫은들 어찌 들어갈고.(鑿.何入)
무리하게 내 실적을(.吾實蹟)
감히 꾸미지 않으리.(非敢贅飾)”53)
라고 했다.
부인은 수찬 김설(金卨)의 딸이요, 광해군조에 절개를 지킨 대사헌 충정공(忠貞公) 성옹(醒 翁) 김덕성(金德誠)의 손녀요, 정사공신(靖社功臣)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외손 녀인 정부인 상산(商山)김씨다. 1628년(인조 6) 10월 7일에 태어나 1700년(숙종 26) 12월 29 일에 죽었다. 향년 73세. 남편과 함께 묻혔다.54)
완성군 이수약의 차자는 이사현(李師賢)이다. 이사현의 자는 경보(敬甫)다. 이사현은 1633년 (인조 11) 5월 22일에 태어나 1700년(숙종 26) 정월 8일에 죽었다. 향년 68세. 참봉을 지냈 다. 문을 닫고 스스로 지켜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다. 그는 자질이 보통을 넘어 어려서 큰 뜻을 가졌고, 뜻이 크고 의분에 북바쳐 슬퍼하고 한탄해서 과거를 보지 않고, 성리학을 탐 구해 움직이고 조용히 있고 말하고 말하지 않을 때 법도에 의해 움직여서 고결(高潔)한 행의 (行義)는 일대(一代)에서 추중(推重)했다. 한 전관(銓官: 銓郞)이 듣고 장차 벼슬에 천거하려 하자 즉시 편지를 써서 야단을 치고 드디어 끊어버렸다. 그 후 누차 추천을 받았으나 드디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평일에 조신해 벼슬 보기를 뜬 구름 같이해서 그렇다. 묘는 삼석 봉(三石峯) 아래 도근애(道勤崖)에 건좌(乾坐)로 있다. 표석(表石)이 있다. 부인은 도사 한필진 (韓必震)의 딸인 공인(恭人) 청주한씨다. 1633년(인조 11) 11월 12일에 태어나 1714년(숙종 40) 4월 15일에 죽었다. 향년 82세. 남편과 함께 쌍분으로 묻혔다. 이사현은 2남 1녀를 두었 는데 아들은 이현도(李顯道) · 이광도(李光道)요, 딸은 세마(洗馬) 남수정(南壽挺)의 아들 남하 구(南夏龜: 의령인)에게 시집갔다.55) 완성군 이수약의 3자는 이상현(李象賢)이다. 이상현의 자는 선술(善述)이다. 이상현은 1635 년(인조 13) 정월 5일에 태어나 1705년(숙종 31) 12월 6일에 죽었다. 향년 71세. 어려서 과거 를 준비하기 위해 미수 허목에게 배웠다. 1675년(숙종 1)에 학천(學薦)으로 의금부 도사로 추 천되어 전별서(典別署) 검교관(檢敎官), 세자익위사 익위(翊衛), 장악원 주부, 군자감 판관, 삭령(朔寧)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원익의 영당(影堂)을 왕이 내려준 집의 터에 세우고, 인조의 교서를 따서 당(堂)의 편액을 관감(觀感)이라 했다. 손 자 이인복(李仁復)이 상소해 영조가 특명으로 이조참의에 추증했다. 묘는 현부인 유씨의 묘 왼 쪽 위에 해좌(亥坐)로 있다. 제학 이서우(李瑞雨)가 지은 묘갈명과 묘지명이 있다. 부인은 둘 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현감 증참판 송흥시(宋興詩)의 딸이요, 대사간 증예조판서 송표옹 (宋瓢翁)의 손녀인 숙부인 진천송씨다. 남편과 함께 묻혔다. 허목의 묘지명이 있다. 2남 1녀를 두었다. 2남은 이태도(李泰道)와 이형도(李衡道)요, 딸은 참의 정시윤(丁時潤)의 아들인 정도제 (丁道濟: 羅州人)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통덕랑 박호(朴壕)의 딸이요, 감찰 박문엽(朴文 燁)의 손녀인 숙부인 고령박씨다. 남편과 함께 묻혔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경운(柳慶雲: 진 주인)에게 시집갔다. 이상현은 3남 2녀를 두었다. 3남은 이존도(李存道: 曾賢에게 出系) . 이 태도(李泰道) ·이형도(李衡道) 요, 2녀는 참의 정시윤(丁時潤: 나주인), 유경운(柳慶雲:진주인) 에게 각각 시집갔다. 56)
완성군 이수약의 3자는 이경현(李景賢)이다. 이경현은 1637년(인조 15) 에 태어나 1676년(숙 종 2)에 죽었다. 묘는 완선군 이의전 묘의 왼쪽 경좌(庚坐)에 있다. 부인은 군수 조송년(趙松 年)의 딸인 한양조씨다.57) 이열도(李悅道)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58)
이증현의 외아들은 이존도(李存道)다. 이존도의 자는 문백(文伯)이요, 호는 망와(忘窩)다. 이 증현이 아들이 없어 동생 증이조참의 이상현(李象賢)의 장자 이존도를 양자로 들였다. 1659년 (효종 10) 5월 14일에 태어나 1745년(영조 21) 정월 20일에 죽었다. 향년 87세. 1677년(숙종 3)에 진사가 되고, 1692년(숙종 18)에 벼슬길에 올라 선공감역 의금부 도사, 군자감 주부, 형 조좌랑. 정랑, 세자익위사 위솔(衛率) . 익찬(翊贊)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통정대부, 가선대부 로 승진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완성군(完成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시종신(侍從臣)인 아 버지 덕으로 가의(嘉義)대부로 승진하고 나이가 많다고 자헌(資憲)대부, 정헌(正憲)대부로 승진 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5현, 2군, 2부의 수령을 지냈다. 청산(靑山) · 양성(陽城) . 용궁(龍 宮) 은 두 번이나 수령으로 나갔다. 아들 완양군(完陽君) 이인복(李仁復)이 원종공신이 되어 이상(貳相)에 증직되었다. 묘는 서면 경확리(驚鶴里) 산 164번 원유리(元柳里)에 자좌(子坐)로 있다.59) 이존도는 기도(器度)가 남다르고 성품이 효성스러워 선대를 모시기를 진심을 다했으 며, 공부를 많이 해 많이 알았으며, .『전사통감』(全史通鑑) 60권. 『망와만록』(忘窩漫錄) 4권 등 의 저술이 있다. 의능관(懿陵官)으로 있을 때 재지(齋誌) 중에서 익령군(益寧君) 부인 숙선옹 주(淑善翁主)의 구갈(舊碣)을 찾아 3월 15일을 정해 제사를 지내왔는데, 중간에 병화로 실전되 었다. 또 문충공 이원익의 묘갈음기를 짖고, 묘산기(墓山記)를 속간했으며, 각각 묘위전(墓位 田)을 두고, 파보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것들은 모두 문충공 이원익의 유지(遺志)에 따른 것 이다.60) 1740년(영조 16)에 그린 영정이 전한다.61)
부인은 둘이다. 첫째 부인은 군수 송수도(宋守道)의 딸이요, 대사간 송응개(宋應漑)의 후손 인 정경부인 은진송씨다. 1658년(효종 9) 2월 11일에 태어나 1680년(숙종 6) 5월 27일에 죽 었다. 향년 23세. 둘째 부인은 첨지 증참판 권석(權碩)의 딸인 정경부인 안동권씨다. 남편의 묘 왼쪽에 묻혔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현감 정지령(鄭志寧)의 아들인 정운형(鄭運衡)에게 시집갔다.62) 완성군(完城君) 이존도의 외아들은 이인복(李仁復)이다. 이인복의 자는 내초(來初)요, 호는 신절재(愼節齋)다. 1683년(숙종 9) 10월 14일에 태어나 1730년(영조 6) 정월 10일에 죽었다. 향년 48세. 1705년(숙종 31)에 생원이 되고, 1710년(숙종 36) 에 금부도사가 되었다. 1714년 (숙종 40)에 증광문과 갑과 제3인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 · 응교가 되고, 통정대부 승지, 가선 대부 도승지 . 참판으로 승진했으며, 완양군(完陽君)에 습봉(襲封)되었다. 그후 곡산(谷山)부사, 안동부사로 나갔는데 치적이 좋아 칭송이 자자했다. 문장으로 유명해 국포(菊圃) 같은 사람과 지기(知己)로 지냈다. 묘는 완성군 묘 아래 10자되는 곳에 자좌(子坐)로 있다. 표석이 있다. 문 집 6권이 전한다. 부인은 목사 남수명(南壽明)의 딸인 정부인 의령남씨다. 이인복은 2남 2녀 를 두었다. 아들은 이언수(李彦秀) . 이언충(李彦忠)이요, 딸들은 유성지(柳誠之) · 홍수(洪日+ 遂)에게 가각 시집갔다.63)
3. 이원익(1547-1634)의 생애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요, 호는 오리(梧里)다. 1547년(명종 2) 10월 24일 미시(未時)에 태어나 1634년(인조 12) 정월 29일에 죽었다. 향년 88세. 아버지는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 億載)요,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의 딸이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4세손인 군부인 동래정 씨다. 이원익은 서울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1555년(명종 10) 4월 26일에 어머니 동래정씨가 죽었다.64)
이원익은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영특했다. 글을 읽을 때는 눈에 한 번 거치면 곧 외웠다. 3 살 때 어머니가 배곺은데 젖을 빨리 주지 않는다고 어머니 머리털을 다 뜯어 놓았다. 어머니 가 아파서 눈물을 흘리자 놀라서 슬피 울었다. 그 때문에 자라서도 자주 이런 말을 하며 늙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 한다.65) 5살 때 이원익은 중병에 걸렸다. 그런데 집 앞을 지나가던 한 노 인이 “아깝다! 이 아이가 죽지만 않고 살아난다면 장차 40년 정승을 할 인물인데 몹쓸 병에 걸려 저렇게 되다니…” 라고 중얼거렸다. 이원익의 아버지 함천군이 그 노인을 부뜰고 병을 고쳐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자 산삼싹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이원익의 어머니가 친정의 석가래 틈에서 싹이 튼 산삼싹을 찾아다가 살려냈다고 한다. 이처럼 이원익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한데다가 지나치게 책을 많이 읽어 위장병으로 몸이 야위고 뼈만 남아 옷도 주체할 수 없 을 정도였는데 후에 키 작은 재상(3자 3치)이라 부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66)
이원익은 스스로 옷을 이길 만한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항시 바깥 사랑에서 잤다. 장가 가기 전에 서모가 시험삼아 젊은 여종으로 하여금 번갈아 모시게 했으나 끝내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67) 중년에 밤 늦도록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소화불량에 걸려 10 여년 동안 약을 먹어 겨우 나았다.68) 1559년(명종 14)에 13세의 나이로 동학(東學)에 입학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글을 읽어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한다. 17세 되던 1563년(명종 18)에 진사초시에 합격했으나 그 진사시가 무효가 되었다. 보은과 김제의 향시에 참가한 유생들이 시험부정 때문에 소란을 피워서이다.69) 그리하여 18세가 되던 1564년(명종 19)에 생원초시에 합격하고, 가을에 복시 (覆試)에 3등 제 35인으로 합격했다. 이 생원시는 율곡 이이(李珥)가 주관한 시험이었다.70) 그 는 평소에 남과 어울려 노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혼자 들어앉아 있어 먼지가 방에 가득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루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크게 찬탄했 다.71)
이원익은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제자이다. 그는 이준경의 문집인 『동고유고』(東皐遺 稿) 문생록(門生錄)에 정탁(鄭琢) . 심수경(沈守慶) . 이덕형(李德馨) . 이항복(李恒福) . 유영경 (柳永慶) . 최흥원(崔興源) . 심희수(沈喜壽) . 윤담휴(尹覃休) . 정언신(鄭彦信) 등과 함께 맨 첫머리에 실려 있다.72) 이준경이 황희(黃喜)의 후손인 축옹(蓄翁) 황효헌(黃孝獻)에게 『소학』 을 배웠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인 종형 탄수(灘.) 이연경(李延慶)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니 조광조계라고 할 수 있다.73) 이로 미루어 보아 황효헌의 청백리정신, 조광조의 도학 정신, 이준경의 친우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실천정신이 이원익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74) 이원익은 형이상학적 이기론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경세가적 면모가 짙은 인물 이었다. 이준경은 1547년(명종 2)에 성중에서 보니 자색 기운이 있어 나라를 도울 인재가 태 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바로 이원익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원익이 22세에 역병이 걸려 위 독해지자 왕에게 약재를 하사해 구해 주기도 했다.75)
생원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윤담휴(尹覃休) · 유영부(柳永孚) 등과 함께 재방(齋房: 東· 西齋 의 방)에 앉아있는데, 어떤 사람이 창문 틈으로 동기생을 헐뜯는 쪽지를 집어넣었다. 이에 이 원익은 그것을 찢어버렸다. 익명서(匿名書)는 유포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영부가 다시 주어 붙여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뒤에 재회(齋會)에서 이 일을 논의했는데 모두 이원익의 생각이 옳다고 했다.76)
19세가 되던 1565년(명종 20)에 정몽주(鄭夢周)의 7세손이요, 현신교위(顯信校尉) 정추(鄭 樞)의 딸인 연일(延日)정씨에게 장가갔다. 1567년(명종 22)에 관학유생들이 종각(鐘閣) 옆 노 제보인(老除保人) 안희수(安希壽)의 집에서 막을 치고 중 보우(普雨)를 베라는 상소를 올렸는 데 이원익도 거기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 집은 안팎이 가려 있지 않고 창문이 떨어져 있었다. 그 집에는 여자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주인이 괴로운 기색이었다. 이에 이원익은 아침밥을 먹 을 때 밥풀을 남겨두었다가 창구멍을 발랐다. 주인이 보고 크게 감탄해 후일에 반드시 대인군 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77)
23세가 되던 1569년(선조 2) 10월에 윤담휴(尹覃休)가 주관한 부태묘별시(.太廟別試)에서 병과(丙科) 제4인으로 급제했다. 그리하여 다음해에 승문원 권지정자에 임명되었다가 부정자로 발령을 받았다. 이때 문관 5 사람을 뽑아 승문원에 소속시켜 직접 『노걸대』(老乞大)와 『박통 사』(朴通事) 등의 책을 친강(親講)했는데, 이원익은 매번 우등을 차지해 여러 번 포상을 받았 다.78) 그는 매양 퇴근한 후에 문을 닫고 혼자 앉아서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해 얼굴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처자정자(處子正字)라 했다고 한다.79) 이 때 배운 중국 어는 그가 뒤에 대명외교를 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1571년(선조 4)에 승문원 정자에서 저작(著作)으로 승진해 봉상직장(奉常直長)을 겸임했다. 이때 그는 창릉(昌陵)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는데, 태상시(太常寺)의 어린 종 곤이(昆伊) 가 잣[栢子]을 훔쳐 먹어 교수형(絞首刑)을 당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가 재상들에게 말해 죽지 않고 귀양가서 부모와 함께 살게 해 주었다. 이것을 보고 친구 강서(姜緖)는 “공이 이 아이를 살렸으니 공의 수복(壽福)이 길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80) 1572년(선조 5)에 박사(博士), 다음 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했고, 1573년(선조 6)에는 성절사(聖節使) 권덕여(權德輿) 의 질정관(質正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12월에 호조정랑이 되었다.
연경에 갔을 때 이런 일화가 있다. 질정관은 직급이 낮아 역관들조차 괄시했다. 그들은 이 원익이 중국말을 아는지도 모르고 중국말로 희롱하가까지 했다. 그는 연경에 도착한 뒤 예부 (禮部)를 찾아가 중국말로 볼일을 조목조목 따지니 예부상서가 놀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 자에서 일어나 “잘 알았습니다”하고는 다 들어주었다. 이를 보고 역관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감복했다 한다. 본국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짐은 초라해 그의 청백에 감복했다고 한다. 그는 관서(關西)에서 어떤 기생에게 정을 주었는데, 연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기생을 다시 만나 의주에서 서흥(瑞興)에 이르기 까지 같이 왔지만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81)
1574년(선조 7) 3월에 예조정랑, 5월에 형조좌랑, 7월에 예조정랑, 9월에 황해도사에 임명 되었다. 이원익은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출세에 급급하지 않고 스스로 지조를 지켜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가 성균관 직강을 거쳐 황해도사 겸경차관에 임명되자 황해감 사 이이(李珥)가 그의 인품이 비범하다는 것을 알고 감영의 군적 정리를 맡겼다.82) 감사 이이 는 “그대의 본직은 도사(都事)이니 모름지기 먼저 나를 도와 문서를 다스리고 군적에 관한 업 무는 일과의 여가에 하라”고 하고 무릇 어려운 일은 그에게 물어서 했다.83) 이 해 정부에서는 병조 낭관 2인을 낭청(郎廳)으로 삼아 군적(軍籍)을 정리하고, 각도에서도 똑똑한 사람을 뽑아 군적을 정리해야 했다. 그런데 황해도는 민기문(閔起文) . 권덕여(權德輿) . 이이(李珥) 등 3 감사가 죽거나 병으로 갈려가 군적을 정리하지 못했다. 이원익은 도사로서 이 일을 맡아 군 적을 잘 정리해 이재(吏才)가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았다.84) 그후 이이가 병으로 교체되어 조정에 돌아와 이원익의 재능과 덕행이 쓸 만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홍문록에 등록되었고 얼마 안 돼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되었다.85) 이때 대신이 정목(政目)을 보고 “이와 같은 영재가 오 래도록 큰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구나! 잠자코 있는 사람이지만 이제 결국 남이 알아보는구 나!”라고 했다고 한다.86)
1576년(선조 9)에 병으로 잠시 정언 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복직되고 뒤에 지평, 형조좌랑 으로 옮겼다. 1577년(선조 10)에는 예조정랑, 군기시 판관,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사헌부 헌납, 성균관 직강 · 사예를 역임했다. 1578년(선조 11)에는 다시 사헌부 장령, 홍문관 수찬 · 교리, 성균관 사예 · 사성, 사간원 사간을, 1579년(선조 12)에는 성균관 사예 · 사성, 홍문관 교리,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1580년(선조 13)에는 사헌부 사간, 사헌부 집의, 홍문관 교 리를, 1581년(선조 14)에는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홍문관 부응교를 역임했다.87) 이들 관 직은 모두 문관 청요직(淸要職)이다. 청요직을 역임한 사람들만이 당상관으로 올라가 정승이 될 수 있었다.
부응교로 있을 때 선조가 정전(正殿)에 나아가 왜사(倭使)를 접대할 때 여악(女樂)을 쓰려했 다. 이원익은 김우옹(金宇.)과 함께 반대했다. 오히려 아동에게 춤을 가르쳐 춤을 추게 하라 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으나 식자들이 옳게 여겼다.88) 1582년(선조 15) 봄에 응교, 5월에 동부승지, 우부승지, 겨울에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를 역임했다. 이원익은 5-6년간 경연에 가장 많이 참여했다. 그의 강설(講說)은 자세하고 분명하며 목소리가 소탈하 고 맑았으므로 선조가 경청했고, 장차 그를 발탁해야 하겠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0월에 우부승지로서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조사(詔使) 황홍헌(黃洪憲) . 왕경민(王敬民)을 정 주에서 영접했는데, 황홍헌은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어서 이원익의 행동거지를 보고 역 관을 불러 분명히 소년재상이 될 것이라 했다고 한다.89)
1583년(선조 16) 에 이원익은 다시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때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있던 때였다. 동인인 도승지 박근원(朴謹元)은 서인인 영의정 박순(朴淳)이 하는 일을 사사건 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반대하는 유생들의 상소는 물리쳤다. 이에 8월에 왕자사부(王子師傅) 하락(河洛)이 승정원이 언로를 막는다고 공격했다. 선조는 승정원의 계사 (啓辭)를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이원익은 “이 일은 승정원의 승지 전원이 한 것이니 특정한 집필자 한 사람만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버텼다. 선조는 승지 모두를 갈아치우고 박근원 . 송응개(宋應漑) · 허봉(許封) 등 동인 세 사람을 귀양보냈다. 이를 계미3찬(癸未三竄)이라 한 다.90) 1584년(선조 17) 8월 13일에 아버지 함천군 이억재가 죽었다. 함천군은 오래 앓았는데 위 독할 때마다 선물을 싸가지고 국의(國醫) 안덕수(安德壽)를 찾아가 약을 지어다 써서 효과를 보았다. 안덕수는 늙고 각기병이 걸려 손님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원익은 몸소 약 지 으러 왕래해 그가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는 금천(衿川)에서 시묘살이를 했다.91)
1587년(선조 20) 봄에 풍악산(楓嶽山)을 유람했다. 이원익은 산수를 좋아해 삼각산의 백운 대, 개성의 성거산(聖居山) · 천마산(天磨山), 영평의 백로주(白鷺洲), 합천의 해인사(海印寺), 안음의 황석산(黃石山), 선산의 금오성(金烏城), 향산(香山)의 상원(上元), 해주의 수양동(首陽 洞), 장연의 금사사(金沙寺) 같은 곳을 구경했으며, 풍악산을 제일 좋아했다. 그리하여 그는 “70년 벼슬의 영화를 누린 것이 산천을 노닐면서 쾌활한 기분을 얻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그는 집이 낙산(駱山) 밑에 있어서 매일 그곳에 올라가 거문고를 타며 노래했다고 한다. 증조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 · 아버지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가 모두 음악에 조예가 있어서인지 그도 거문고를 잘 탔다.92)
그 해 10월에 안주(安州)목사에 기용되었다.93) 이조참판 권국례(權克禮)가 “안주는 버려진 땅이 되었으니 그 폐단을 구제할 사람은 이원익 뿐이다”라고 해 선조가 윤허한 것이다. 안주 에 부임해 보니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이원익은 단신으로 말을 타고 부임하 자마자 환곡(還穀) 만 섬을 감사 김수(金.)에게 요청해 종자를 내주고 농사를 장려했다. 가을 에 가서 대풍이 들어 환곡을 갚고도 창고가 그득 찼다.94) 한편 그는 조선(漕船)을 삼화(三和) . 함종(咸從) 등 곡식이 있는 곳과 바닷가 군현에 보내 세금을 직접 실어다가 기민(饑民)을 구 제했다. 그리고 안주 고을은 도적이 많았는데 법을 제정해 엄격히 다스리니 도적이 없어졌다 고 한다. 또한 뽕나무를 심어 수익을 올리게 했다. 그래서 그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했 다고 한다.95)
안주는 군액의 결원이 많아 족징(族徵), 인징(隣徵)의 피해가 많았다. 이원익은 병사 신립(申 砬)에게 주성(州城)을 쌓는데 1년에 군포 37동(同)이면 쌀 3천 여석을 살 수 있다. 이 곡식으 로 헐어진 주성을 쌓게 하고 이 곡식은 원환자(元還上)에 합해 내게 하면 1석(石)-4두(斗)면 족징 . 인징과 방납이 해결될 수 있다고 했다.96) 또 주세(州稅)를 의례히 변읍(邊邑)에 갔다 내어 아전들이 그 사이에 농간을 부릴 여지가 있었다. 이원익은 주세를 직접 내게 해 아전들 의 작간을 막게 했다. 안주가 잘 다스려지자 평양감사 윤두수가 왕에게 보고해 포상하고 옷 한 벌을 하사받게 했다. 그 결과 다음 해 임기가 찼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유임시키는 동시에 가선대부(종2품 하계)로 승진시켜 주었다.97)
1591년(선조 24) 2월에 치적이 훌륭해 형조참판으로 조정에 불려 올라와 3월에 대사헌으로 옮겼다. 그는 대사헌으로서 대사간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너무 부풀려 서 적용한 정철(鄭澈)을 탄핵해 변방에 위리안치하게 했다.98) 7월에 자헌대부(정2품 하계)로 승진해 호조 · 예조판서가 되어99) 경연(經筵)에 나아갔으며, 9월에는 이조판서로서 도총관과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100)
그런데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병이 갑자기 처 들어 오자 이원익은 “신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전 쟁터에서 죽음으로써 보답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원익은 하나의 병 든 서생(書生)인데 주린 범에게 던지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라고 반대해 선조는 그 를 어가(御駕)가 가기 전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平安道都巡察使)를 겸임해 관서(關 西)의 병마를 점검하도록 했다.101) 선조는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징병체찰사(徵兵體察使) 이원익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경은 전에 안주를 다스릴 때 관서백성들의 민심을 크게 샀던 관계로 지금까지 잊지 않는다 고 한다. 경은 평안도로 가서 늙은이들을 타일러 인심을 수습하라. 적군이 남쪽 지방으로 깊이 처들어 와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연이어 함락되는데 만약 적이 수도 가까이 들어닦치 면 응당 서쪽으로 옮겨 가야 할 형편이다. 이런 의사를 경은 잘 알아야 할 것이다”102)
평안도도순찰사 이원익은
“각 고을에서 군사들을 불러 모아놓고 기다리는지가 벌써 오래 되었고, 여러 고을에서 식량 을 대게 했는데 길이 너무 멀어서 굶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변사에서 강변 고을의 토병(土 에 대해서는 술과 고기를 먹이고 무명을 주어 잘 돌봐 주면서 유독 안쪽 지방의 군사들 ) 兵 에 대해서는 강 건너 불 보듯 합니다. 호조를 시켜 조세나 혹은 창고에 저축된 쌀과 콩을 나누어주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103)
라고 제안했다.
그해 5월 3일에 적의 선봉이 서울에 들어오고 어가가 개성을 거쳐 5월 6일 평양으로 갔다 가 다시 영변-의주로 피신했다.104) 적이 5월 10일에 대동강(大同江)으로 진격하자 유성룡과 윤두수 . 박동량 등은 평양을 고수하자고 하고, 정철 . 심충겸 . 이덕형 등은 평양을 철수하자 고 했다. 이원익은 “국왕은 사직을 위해 죽음을 불사해야 합니다. 비록 부모의 나라라 하더라 도 의리상 가서는 안 되는데 지금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했다. 선조는 철수하기로 결심하고 이원익을 정헌대부(정 2품 상계)로 진급시켜 평양감사 겸 순찰사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평양은 좌의정 윤두수와 평안감사 이원익에게 군사 3천을 주어 지키게 했다.105) 이때 영변 절도사 이윤덕(李潤德)이 대동강 여울목을 지키고 있었는데 5월 14일 밤에 이원익이 비밀리 에 지시해 고언백(高彦伯) . 문언(文言) 등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가 왜의 병영을 부수고 적 약 간명을 죽이고, 말 80 여필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지방 군사 40-50 여명이 적의 추격을 받아 강물에 빠져 죽고 대동강 상류의 낮은 왕성탄(王城灘)이 노출되어 그쪽으로 왜군 이 처 들어 왔다.106)
이원익은 토병의 역할을 강조했다. “토병은 남쪽 군사와 달라서 잘 쓰기만 하면 무너져 흩 어지게까지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토병 김운성(金雲成)이 왜장을 쏘아 맞추었으 니 상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선조가 지난 번 여울목은 왜 못 지켰느냐고 묻자, 이원익은 “여 울물이 너무 얕은데다가 토병 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적군은 얼마나 되었 느냐고 묻자 2천 명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군사는 몇 명이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240 명(600 명 중)이었다고 했다. 선조는 군사 수가 모자른 것이 아니라 무너져 흩어지기 때문에 적을 막아내지 못 하는 것이라 했다.107) 방어사 김응서(金應瑞)와 별장 박명현(朴命賢) 등이 용강, 삼화, 증산, 강서 등 바닷가의 여러 고을 군사 만 여 명을 거느리고 20 여 군데에 주둔 해 평양 서쪽으로 바짝 접근해 적을 첬으나 적들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별장 김억추(金億秋) 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어귀를 차지하고, 중화별장 임중량(林仲樑)은 군사 2천 명을 거느 리고 보루를 쌓고 지키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명나라 군사만 기다릴 수 없다고 해 조선군만으 로 적들을 3번 쳤으나 다 이기지 못했다.108)
그런데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 한응인(韓應寅), 권징(權徵)이 모두 도순찰사라 하면서 이 원익과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 했다. 이원익은 그 옳지 못함을 말하고 스스로 먼저 몸을 낮추어 원수에게 배알하니 비로소 군령이 한 곳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109)
이원익은 강가에 있는 군현을 따라 올라가면서 군사를 모집하고, 그 길로 의주에 가서 선조 를 보고 정주(定州)로 돌아왔다. 그는 “8도 중에 7도가 와해되고 평안도의 수 십 고을만 온전 하니 이곳이 7도를 회복할 근본이 되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왕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노력해 인심을 은혜로서 어루만지고 진정시켰다. 비록 위급한 전쟁 중이라도 언어동작이 침착 하고 아무리 번잡한 사무라도 신처럼 잘 처리했다. 임금에 대한 봉공(奉供)이든, 명군에 대한 궤향(饋餉)이든 모두 힘들이지 않고 즉시 해결했다. 그리하여 서도 사람들은 그를 신명처럼 받 들고 부모처럼 우러러 보았으며, 뒤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숭배했다.(안주에도 있다)110)
7월 18일 새벽에 요동총병(遼東總兵) 조승훈(祖承訓)과 유격(遊擊) 사유(史儒)가 5.000군을 거느리고 아군 3.000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대패했다. 성중의 왜병은 5-6.000 명 정도 있었다.111) 이원익과 김명원(金命元) . 이빈(李.+賓)은 창황히 정주(定州)로, 이윤덕(李潤德)은 병영(兵營)으로, 송언신(宋彦.)은 희천(熙川)으로, 윤두수(尹斗壽)는 행재소로 갔다. 그리하여 평양 이서의 열읍의 인민들은 놀라서 모두 달아났다. 창곡(倉穀)도 다 탕진되었다. 정주목사 이징(李.)은 수삼 관인을 거느리고 창곡 300 여석을 굳게 지키고 있어 이원익 등이 정주에서 군사 수백명을 모집할 수 있게 했다. 이원익은 영변으로 가서 토병(土兵)을 모집했는데, 조정 에서도 이미 어사 유영경(柳永慶)을 보내 강변에서 모병하게 했다. 이원익은 의주로 가서 선조 를 만나 방어책을 협의하고 다시 정주로 와서 7월 10일까지 토병 1.000 여명을 모집했다. 이 원익은 이들을 거느리고 순안(順安) 읍내로 가 평양 근교 50리 되는 곳에 진을 쳤으며, 이빈 은 평안병사가 되어 영변(寧邊)에서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뒤이어 도착했고, 도원수 김명원도 숙천(肅川)에 주둔했다. 총병(摠兵) 조승훈(祖承勳)과 유격(遊擊) 사유(史儒)는 군사 3.000 명을 거느리고 순안을 거쳐 7월 18일 새벽에 평양성을 덮쳤다. 군사행동이 신속했기 때문에 왜군들 이 미쳐 명군이 온 것을 알지 못했고, 성문도 닫지 못했다. 명군은 칠성문(七星門)으로 처들어 갔으나 많은 왜병이 달려들어 명군의 전군(前軍)이 많이 다쳤다. 또 비가 밤 늦게까지 그치지 않았고, 급히 오느라고 군사가 피로했고, 길이 질어 말이 달리기가 어려웠다. 전군(前軍)이 후 퇴했으나 후군(後軍)이 도착하지 않아 200 여리 떨어진 가산강 (嘉山江) 가로 후퇴했다. 조선 군 3.000 명도 조승훈군과 함께 성 밖까지 쳐들어 갔으나 역시 후퇴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 (釜山)에 있던 왜군이 성 밖 10리 되는 곳까지 증파되어 아군도 다시 순안으로 후퇴해 진을 쳤다. 성 안에는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 . 평의지(平義智) . 현소(玄蘇) . 평조신(平調信) 등 왜장들이 5.000-6.000명 가량의 왜군을 거느리고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고 다만 나무하는 왜군만 멀지 않은 곳에 나가게 했는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성중에 군량이 많 아 견딜만 했고 나갔다가 명병을 만날가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평양의 서 . 남 . 북군(郡)이 보전될 수 있었고, 군사와 군량을 마련해 뒷날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 아 닌가 한다. 평양을 둘러싸고 서쪽 순안에는 이원익과 병사 이빈이 5.000군, 북쪽 강동(江東) 등에는 순변사 이일(李鎰) . 조방장 박명현(朴命賢) . 별장 고충경(高忠卿), 장이덕(張以德) 등 이 5.000군, 남쪽의 강서(江西) . 함종(咸從) 등에는 방어사 김응서(金應瑞) . 조방장 이사명(李 思命) . 수령 이응해(李應.), 이수(李璲) . 별장 최침(崔琛), 이록(李祿), 김몽연(金夢淵), 김용 해(金龍海), 정기남(鄭箕南) 등이 9.900군과 중화(中和)에는 별장 임중량(林仲樑) 등이 2.000군 을 각각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8월에 이들로 하여금 삼면에서 세 차례에 걸 쳐 평양성을 공격하게 했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다만 정예군사를 성 밖에 매복시켰다가 나무 하러 간 왜적을 몇 사람 잡아죽였을 뿐이었다. 8월 말에 명은 절강인(浙江人) 유격(遊擊) 심유 경(沈惟敬)을 보내 순안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진중에서 조선군을 사열했다. 조선군의 강약 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명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용병하기 어렵다는 것 을 알고 심유경을 보내 강화를 맺어 왜적을 퇴각시키고자 한데 있었다. 심유경은 군사가 진격 할 도로를 살펴 본다는 핑계로 성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감복산(甘福山) 아래까지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때 순찰사 이원익과 병사 이빈이 수행했다. 하루는 심유경이 가정(家丁)을 데리고 평양성에 들어가 고니시 유기나가와 만나 성밖 수리되는 곳에서 강화회담을 열 것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왜의 조공을 허락하고 왜군 이 물러간다는 내용이 아니었을가 한다. 이 밀약 이후로 평양성 밖 4면 30리까지는 서로 경계 선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 아군이 심유경에게 싸워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심유경은 명으로 돌아가고 조정은 반대의견으로 들끓었다. 명의 계획은 소강상태에서 병마를 정비해 총병 이여송(李如松)으로 제독을 삼고 양원(楊元) . 이여백(李如栢) . 장세작(張世爵)을 부책임자로 삼아 추가병력을 투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심유경이 기한이 넘을 때까지 오 지 않자 왜군은 군사를 다시 일으키겠다고 협박했다. 실상은 심유경이 오다가 청석령(靑石嶺) 에 이르러 말이 넘어져 엉덩이에 부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오느라고 늦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여송 제독은 12월 15일에 4만 5천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오고 심유경도 역시 따라왔 다.112) 그리하여 2월에 어가가 영유(永柔)로 돌아와 이원익을 숭정대부(종1품 하계)로 진급시 켰다.113) 그는 장계를 올려 사양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1593년(선조 26) 정월 2일에 유격 사대수(査大受)가 순안 진중에 이르러 부산원(斧山院)에 가서 평양성에 대고 “심유경이 대관(大官)과 함께 지금 다시 왔다. 화의가 이미 이루어졌다. 심우경이 왔으니 너희들은 빨리 나와 맞이하라”고 했다. 왜장은 그 속임수를 모르고 소장(小 將) 몇 사람이 나왔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5일에 이여송이 숙천에서 달려와서 이령(李寧) 을 잡아 왜적을 다 잡지 못하고 도망가게 두었다고 죽이려 했다가 주위에서 말려 곤장 40대 로 감형시켜 주었다. 이날 각 영의 군사들이 모두 순안에 집결해 6일에 평양성을 공격했다. 적은 북성 밖 모란봉(牧丹峯) 높은 곳에 돈대(墩臺)를 짖고 총을 쏴대 접근할 수 없었다. 7일 밤에 왜군이 서쪽 성으로 나와 남병 오유충(吳惟忠)의 진영을 공격했으나, 오유충이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어서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이후로 적은 다시 나오지 못하고 성의 서남 10 여 곳에 첩석(堞石)을 떠어내고 도로를 만들어 출병할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왜 그런 전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 8일 새벽에 제독 이여송이 일제 공격을 명했다. 조선군은 남성(南城)을, 남병(南兵)은 서성(西城)을 공격했다. 이여송은 말을 타고 왕래하면서 큰소리로 “성에 먼저 올라가는 자에게는 은 1만 량을 상으로 준다고 소리쳤다. 대포를 일제히 쏘아 소 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리고 동풍이 돌연 서풍으로 바뀌어 포연(砲煙)이 적의 군중을 덮어 적들이 눈을 뜰 수 없었다. 남병이 먼저 성을 올라가고, 조선군이 다음으로 올라갔다. 그리하 여 적의 수급 1.300여 급을 베고 나머지 적들은 다 도망쳤다. 저녁에 군사를 거두어 성 밖에 진을 쳤다. 조선군은 밤에 동쪽 길에 매복을 두어 도망가는 왜군을 치려했으나 명군이 말려 그만두었다. 이날 밤 적은 배곺으고 피로해 다 도망쳤다. 다음 날 낮에 이여송이 마병(馬兵) 500으로 왜군을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하는 척하고 일부러 놓아주었으며, 조선군이 추격하는 것도 말렸다. 조정에서는 병사 이일(李鎰)이 왜적을 추격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려다 명군의 반대로 처벌하지 못했다.114)
적은 대패해 서울로 후퇴했다. 함경도의 가또군도 서울로 후퇴해 원래 있던 왜병과 합쳐 군 세가 수만 여 명에 이르렀다. 유격 사대수가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가 성 밖 10 리에서 왜 병을 많이 잡아 죽였다. 이에 이여송이 왜적을 만만히 보고 1.000 여 마졸을 거느리고 벽제참 (碧蹄站)을 공격하다가 패해 개성으로 돌아와서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고니시 유기나가(小西 行長)와 화친을 의논하게 했다. 이원익이 평양에서 말을 타고 달려가 정탐해 화친이 이미 결 정된 것을 알고 아뢰기를 “제독과 심유경이 화친을 정하고 전혀 싸울 뜻을 갖지 않습니다 장 차 한 하늘 아래에 같이 살지 못할 원수가 온전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115)
1593년(선조 26) 4월에 평안도관찰사 이원익은 강화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유격(遊擊)심유경(沈惟敬)이 강화 문제를 가지고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에게 문의하니 시랑이 곧 비준하고 7 대의 지휘 깃발을 떠나보내되 절반은 왜놈에게 주고 절반은 명나라 장수에게 주게 했으며, 명나라 군사들에게는 적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우리 군사도 적 과 맞서 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격은 왜놈을 호송해 부산까지 가게하고 사상공(謝相公)을 참장(.將)이란 이름으로, 서 상공은 유격(遊擊)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땅에 보냈다가 그냥 왜놈을 데리고 영파부로 들어 가 조공하게 한다고 하며, 왕자와 사로잡혀간 재상들은 심유격이 저쪽에 도착한 직후에 곧 보낸다고 합니다. 가또 기오마사(加藤淸正)가 자기의 공로를 믿고 즐겨 물러가려 하지 않 을 때에는 진군해 그를 죽인다고 합니다. 대체로 명이 강화할 것을 벌써 결정했고, 토벌할 뜻이 전혀 없습니다.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인 흉악한 무리로 하여금 온전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한 없이 통분 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116)
명군이 왜군과 강화를 맺고 추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윽고 적은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보내고 남해상으로 물러가 주둔했다. 선조는 이원익의 공로를 감안해 특별히 숭전대부(종 1품 하계)로 승진시켰다.117) 평안도 백성들에게는 조세를 반으로 깎아 주었다.118) 유총병(劉摠 은 왜적들은 절대로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중국에는 오직 유총병이 있을 뿐이 ) “ ” . 兵 요, 조선에는 이원익이 있을 뿐이라 했다.119) 또 말하기를
“바닷가 일대의 땅은 이미 적의 깊은 해자(垓字)와 높은 보루로 바뀌어 쉽사리 공격할 수 없으니 반드시 10만 군사와 1년 분의 군량이 있어야만 합니다. 귀국이 복이 있으면 적들 속에서 내란이 일어날 것입니다”120)
라고 했는데 이것은 싸우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1593년(선조 26) 10월에 선조는 서울로 돌아가면서 이원익에게 계속 관서(關西)를 진무(鎭 撫)하라고 했다. 그는 먼저 학교를 수리해 생도를 유치했다. 또한 부역을 경감해 백성들이 곤 궁한 것을 조금이라도 면하게 해 주려고 애썼다. 또한 군사 만 여명을 뽑아 싸우고 수비하는 법을 가르쳐 군사와 마필이 매우 정예했다. 이에 선조는 교서를 내려 포유(褒諭)하고 특별히 숭록대부(종1품 상계)로 진급시켰다.121) 관동관찰사 윤승길(尹承吉)이 장차 감영으로 부임하려 할 때 선조는 그를 불러 보고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날 중외의 임무를 부여받은 신하 중에서 오직 이원익만이 나라를 위해 성의를 다 하고 그 밖에는 한 사람도 비슷하게 하는 자 가 없으니 나는 매우 통탄스럽다”고 했다.122) 그 뿐이 아니었다. 선조가 말하기를 “평안감사 이원익은 재주가 있을 뿐 아니라 검박하게 처신하고,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며, 무기와 군 무에 대해서도 다 극진히 조치를 취하면서 밤낮으로 애쓴다고 하니 만일 8도에 다 이런 사람 을 얻어서 임명한다면 힘을 드리지 않고서도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고, 유성 룡은 “충성심이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으며,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성품이 너그럽고 도 량이 넓어서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말이나 얼굴빛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의 사람됨은 참으로 탄복할 만합니다”라고 했다.123)
1594년(선조 27) 4월에 명은 도독 이종성(李宗城)과 총병 양방형(楊方亨)을 보내어 도요도 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을 왕으로 봉하려 했다. 이는 심유경의 계책을 따른 것이다. 명은 칙서 (勅書)를 내려 1) 왜의 봉공(封貢)을 허락한다. 2) 다시는 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 3) 왜인 한 사람도 조선에 남아 있지 않고 모두 바다를 건너 간다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러나 고니 시가 속임수를 잘 쓰기 때문에 사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어디까지 왔다고 속이다가 드디 어 심유경과 함께 부산 왜영에 들어갔다. 그런데 왜가 사신을 예로서 대접하지 않고 일본에 가면 구속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이종성은 미복(微服) 차림으로 도망해 몇일 간 이나 허기 속에서 헤매다가 산을 타고 경주를 거쳐 요양(遼陽)으로 돌아갔다. 명나라는 그를 잡아갔다. 그러나 양방형은 왜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왜장들이 도요도미 히데요시와 의논해 가또 기요마사 등 왜장들을 철병한다고 하고 실상은 철병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명 사 신을 일본으로 오라고 했다. 명나라는 양방형을 상사(上使)로, 심유경을 부사(副使)로 삼아 6 일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파견할 것인가를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하다가 7월 후에 비로소 문학(文學) 황신(黃愼)을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올려 정사로 삼고, 대구부 사 박홍장(朴弘長)도 역시 통정대부로 올려 부사로 삼아 일본으로 파견했다. 일본은 사신을 영 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모욕을 주고 돌아가라고 협박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명나라가 우리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일본국왕에 봉한다고 하는데 내가 왜 명나라의 봉함을 받 은 후에 왕이 되겠느냐고 화를 냈다. 또 조선에서는 미관말직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우리를 깔 보는 것이냐고 하면서 1596년(선조 29) 겨울에 두 나라 사신을 쫓아내고 정유재란을 일으켰 다.124)
1594년(선조 27) 11월에 선조는 영의정 유성룡에게 정승 후보자를 추천하라고 했다. 유성룡은 심수경(沈守慶) · 최흥원(崔興源) · 이원익(李元翼) · 김응남(金應南) 등을 추천했다. 선조는 이원익을 정승으로 발탁하기 위해 “평양감사를 교체하게 되면 누구를 임명해야 할까?”를 물었다. 유성룡은
“평양감사의 임무가 오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므로 경솔하게 교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사 다른 사람으로 임명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원익이 그대로 눌러 있는 것만 못할 것입 니다. 신이 그 의도를 모르지 않습니다만 다만 그에게 인망이 집중되어 있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할 만한 사람은 창졸간에 잘 모르겠습니다”125)
라고 했다. 선조는
“평양감사는 실로 중요하기는 하나 아무렴 대신만 하겠는가? 만약 이원익을 정승으로 임명 하고 이어 체찰사를 맡겨서 남쪽으로 내려가 여러 장수들을 닦달하고 통솔하게 하는 한편 이덕형(李德馨)을 그의 대신으로 임명하면 어떻겠는가?”126)
라고 했다.
유성룡도 수긍했다. 그리하여 1595년(선조 28) 2월에 이원익은 숭록대부(종1품 상 계)로 승진되었다.127) 이원익은 난리를 겪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군사 8천 명을 뽑아 규정대 로 훈련시켰다.128)
이때 도원수 권율(權慄)이 영남에 있으면서 민심을 많이 잃어 도원수를 바꾸자는 의논이 있 었다. 대신들은 이원익이 도원수가 될 만 하다고 했다. 선조는 서북지방을 맡고 있어서 안 된 다고 했다.129) 그래서 권율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유영경(柳永慶)은 “평안도가 아무리 중요 하다고 하더라도 남쪽이 더 긴급하니 이원익을 남쪽으로 보내는 것이 옳다”고 했다. 권율은 김응서(金應瑞)를 시켜 왜인과 만나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명에서는 송응창(宋 應昌) 대신 고양겸(顧讓謙)을, 고양겸 대신 손광(孫鑛)을 군 지휘관으로 교체했다.130)
1595년(선조 28) 6월에 이원익은 우의정으로 승진되고 4도(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도체 찰사를 겸임했다.131) 선조는 이원익이 병으로 야윈 것을 염려해 독부(督府)를 서울에 개설하라 고 했으나 멀리서 여러 도를 총괄할 수 없다고 해 드디어 남쪽 지방을 순시했다.132) 그는 김 륵(金.)을 부체찰사로, 남이공(南以恭)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133) 선조는 4도의 일은 도체찰사가 우선 집행하고 보고하라고 했다.134)
8월에 한산도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찾아가 영루(營壘)를 살펴보고 방수방략(防守方略) 을 점검해 본 뒤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이순신이 “체찰사께서 이미 진(鎭)에 이르렀으니 어찌 군사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어 임금의 은택을 선포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다. “소고기와 술 을 준비돼 있는가?”물었더니,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라고 했다. 이원익이 장사들을 모아 시험해 상을 주고 바다 곁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 소를 잡아 군사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 이에 이순신은 “장사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게 만든 것은 상공이었다”고 했고, 후 인들이 그 산을 ‘정승봉’(政丞峯)이라 불렀다. 이원익이 호남에서 영남으로 옮겨 성주에 독부 (督府)를 개설한 다음 군사장비를 점검하고 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군율로서 엄격히 다스렸 다. 이때 도원수 권율도 장계를 올려 파직시켰다. 군사들이 소속감이 없어서 명을 받고도 달 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때에 와서 체찰부의 호령이 엄격해져 감히 쳬찰부의 호 령을 범하지 못했다.135) 또한 영남은 땅이 넓어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면 지시를 전달하기 어렵다고 해 좌 . 우도로 나누어 감사를 두자고 했다.136)
성주에 주둔할 때 금오(金烏) . 용기(龍紀) . 부산(富山) . 공산(公山) . 황석(黃石) . 화왕(火 王) . 벽견(壁堅)산성을 쌓아 위급할 때 백성들로 하여금 그 성에 들어가 잘 보전하게 했다. 그리고 적은 바다 위에 있으면서 달콤한 말로 마치 화친이 결정돼 곧 바다를 건너 갈 것처럼 하면서 수시로 군사를 놓아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137)
이에 이원익은
“적이 간교하므로 필시 재침해 올 것이니,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거제(巨濟)를 지키게 하고, 또 곽재우(郭再祐)는 명장인데 그를 서울로 불러올리면 별 할 일이 없으니, 그로 하 여금 변방에 있으면서 뜻밖에 닦쳐 올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심어사(巡審御使) 정경세(鄭經世)는 영남 사람으로 이곳 지리와 인정을 잘 알고 있으니, 그로 하여금 그 지 방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 쌓는 일을 주관하게 하소서. 또 호서안찰사 (湖西按察使) 이시발 (李始發)이 훈련시킨 수 천명의 군사는 매우 정예한데, 원균(元均)에게 소속시켜 패하게 해 서는 안 됩니다. 이시발은 이미 군사의 실정을 잘 아는 사람이니 그로 하여금 스스로 군사 를 거느리고 별도로 행동하게 하소서“138)
라고 상소해 선조가 그대로 따랐다. 권율이 파직되고 이원익이 도원수를 겸임한 지 여러 달 만에 “미리 원수를 세워 호서와 호남 사이에 주둔하게 하라”고 상신해 권율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139)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국내 인심이 흉흉해졌다. 선조는 이원익으로 하여금 다시 남쪽 변 방을 진정시키게 했다. 선조가 방비책과 여러 장수들의 능력을 물으니 이원익은 원균이 군사 들의 마음을 잃고 같은 또래와 화합하지 못하는데 반해 이순신은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 라고 대답했다. 이에 선조는 “위로 명나라가 있고, 아래로 경이 있으니, 적은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했다. 이원익은 다시 “지금 전란이 끝나지 않았으니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 급합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용만(龍灣: 의주)에 계실 때의 일을 잊지 마시고, 재물을 절약해 백성을 편 하게 햐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고 성주로 내려와 적이 재차 침범할 것을 미리 알고 이 순신으로 하여금 부산과 남해, 한산를 나누어 지키도록 했다.140)
이원익은 왜군의 동태에 대해 “적의 속셈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천벌 이 내릴 것이니 스스로 패망할 조짐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몇 해 동안에 좀 준비를 하 면 자체로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맞서서 싸우자고 한다면 숫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141) 정확한 전황 판단이다. 군사형편에 대해서도
“장수들에게는 군사를 통솔할 만한 능력이 없고, 변경 군사들은 장기간의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 아무리 격려하고 신칙해도 군사들의 마음은 점점 해이해져 가고 일에는 허술한 구석 이 많아져 가니 대단히 안타까운 노릇입니다”라고 했다.142)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난리 통에 죽은 사람이 열의 일곱쯤 되고, 두 세 명이 겨우 살아있는 셈이어서 전혀 추스 를 가망이 없습니다. 게다가 고을 원 조차 적임자가 못되니 관청 일을 빙자해 사리사욕만 채우고 있습니다. 알면서 범하는 사람도 있지만 몰라서 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143)
임란의 생생한 정황이다.
선조는 이순신에 대해 이원익에게 물었다.
선 조: 통제사 이순신이 열심히 일하는가?
이원익: 그 사람은 만만하지 않은 사람으로 애써 일하고 있습니다. 한산도에다 군량을 많이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
선 조: 처음은 왜적을 잡는데 열성이었는데 그 뒤에 듣자니 태만해진 점이 없지 않다고 한 다.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이원익: 신이 보기에는 여러 장수들 가운데서 제일 쟁쟁한 사람입니다. 싸움을 하는 마당에서 처음에 열성을 내다가 나중에 해이해진다는 문제에 대해서 신으로서는 모를 노릇입니 다.
선 조: 군사를 통솔하는 재간이 있는가?
이원익: 신의 생각에는 경상도의 여러 장수들 중에 순신이 제일이라고 봅니다.144)
선조는 서인의 시각으로 이순신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선조는 인기가 없고, 이순신은 인 기가 높으니 그를 위험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인은 유성룡을 견제하기 위해 원균을 지지하고 이순신을 비판하고 있었다. 원균에 대해서도 인물평이 극명하게 다르다.
이원익: 원균의 경우는 사람이 몹시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탓에 대체로 상급 관청에서 공문을 띄워 절제를 하면 어느 때나 맞서서 옥신각신 하곤 합니다마는 싸움터에 나가서는 꽤 쓸만 하다고 합니다
선 조: 원균에 대해서는 계미년(1583)에 많이 들었다. 나랏 일을 위해 매우 열성이 있을 뿐 아니라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원익: 원균은 싸움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인정해 주지,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쓰지 못할 사 람입니다.
김순명(金順命): 충청도 사람들은 그를 좋지 않게 여깁니다.
선 조: 무뚝뚝하기 때문이다.
이원익: 원균에게는 미리 군사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싸움판에 가서 맡겨서 돌격을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평상시에 군사를 맡겼다가는 필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145)
원균을 보는 선조와 이원익의 시각은 극명하게 다르다. 비상한 시국에 이순신이 마음만 먹 으면 왕좌도 지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이기도 하다.
1596년(선조 29) 11월 7일 미시(未時)에 선조가 별전에서 대신들을 접견했다. 이때에도 이 순신과 원균을 비교하는 논의가 있었다.
선 조: 원균은 어떤 사람인가?
유성룡: 옛날에는 육지에서 싸움을 잘 하는 장수는 바다 싸움에 서툴렀고, 바다에서 싸움을 잘 하는 장수는 육지 싸움을 잘 못 했습니다. 그러나 원균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어 디서나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그의 장점입니다. 만약 지친 군사들을 무마하라고 요구 한다면 그가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다른 사람이 있다면 등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정 탁: 바다에서 싸우는 것이 그의 장점입니다. 이제 그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써먹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유성룡: 원균이 힘껏 싸웠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단 바다싸움이 있은 뒤로 잘못을 저지르자 영남의 수군들이 대부분 그를 원망하고 있으니 원균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뻔합니다. 더구나 이순신과 원균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도 조정에 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신은 바다와 육지가 다르지만 응당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 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모여 협의하도록 했는데도 원균은 성이 나서 발끈거리기만 했 습니다.
선 조: 이순신도 그렇던가?
이원익: 이순신은 별로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았지만 원균은 언제나 성내는 기색을 보였 습니다. 옛날 장수들 가운데도 공로를 다투는 사람이 있었지만 원균은 너무 심했습니 다. 듣자니 신이 올라 온 뒤에도 원균이 이순신을 향해 분기에 찬 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옮기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옮기기만 하면 매사가 다 틀어져 나갈 것입니다. 전하가 지시를 내려 병사로서 눌러 있게 하는 것이 나을 듯합 니다. 아무리 조정에서 여러 모로 타이른다 하더라도 그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되기 때 문에 이런 위급한 때에 응당 마음을 합해서 함께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고 신도 말해 주었지만 원균은 노기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곤란하지 않습니다. 선 조: 곤란하겠다. 내가 듣자니 애당초 군사를 요청해 바다에서 싸우는데 원균이 공로를 많 이 세웠고 이순신은 따라 다녔다고 한다. 또 듣자니 이순신이 왜적을 많이 잡았으니 원균보다 낫지만 그렇듯 공로를 이룩하게 된 것은 실지 원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고 한다.
이원익: 신이 조용히 원균의 공로가 이순신을 능가할 수 없다고 말해 주었더니 원균은 말하기 를 ‘이순신은 물러가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았소. 천 번 만 번 불러서야 비로소 군사를 데리고 왔었소’ 라고 했습니다. 원균은 적이 침입한 지역에 있었으니 적과 맞닥 드리기 마련입니다. 이순신이 원균과 같은 때에 나가 싸우지 못한 것은 사정이 그렇 게 된 것입니다.
이덕열: 이순신은 15 번이나 불러서야 나가 적의 배 60척을 붙잡아 가지고 제일 먼저 공로를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원익: 호남으로 적의 배가 들어와 자기 진지로 돌입한다면 그 적도 수 없이 많을 것이기 때 문에 부득이 뒤에 간 것입니다. 원균은 애초에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이순신이 따라 가 옆에 서서 제손으로 적을 잡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부하들이 잡은 것이 역시 많 았습니다. 만일 적의 목을 많이 벤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원균보다 많을 것입니다.
정 탁: 그들이 공로다툼을 하는 심리를 놓고 말한다면 두 장수에게 다 일장일단이 있습 니다. 그러나 이순신도 만만치 않은 장수인 만큼 전하가 지시를 내려 화해를 붙이는 동시에 앞으로 공로를 세우도록 요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원익: 원균은 처음에 많은 실패를 했지만 이순신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공로를 세웠습니 다. 옥신각신하는 시초는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146)
이원익 · 유성룡 . 정탁은 남인으로서 이순신을 지지했지만 선조는 역시 원균을 지지하고 있다. 1597년(선조 30) 정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다. 유성룡은 이를 그 전 해에 짐작하고 있었다.
“신의 생각에는 적이 반드시 내년에 출동할 것이고 출동해서는 먼저 호남으로 접어들 것으 로 봅니다”147)
이에 대해 선조는
“어째 내년까지 가겠는가? 지금이 두렵다.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가 돌아가서 소굴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적에게 빌붙은 사람이 우리나라의 지형을 모두 말해 준다면 하루 사이에도 갑자기 군사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 막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148) 그러나 다시 바다를 건너오자니 이순신이 걸렸다. 고니시 유기나가는 요시라(要 時羅)라는 이중간첩을 김응서(金應瑞) 장군에게 보내 어느 날 어느 시에 가또 기오마사가 어 느 지점에 상륙할 것이니 군사를 보내 잡으라고 했다. 선조와 조신들은 그 말에 속아 이순신 으로 하여금 나가서 잡으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속임수인 것을 알고 나가지 않았다. 조 정에서는 왕명을 거역했다며 이순신을 투옥시켰다. 수군 통제사는 원균에게 돌아갔다. 유성룡 을 싫어하는 세력(서인)이 이순신을 얽어 넣음으로써 유성룡을 실각시키기 위한 당략이었 다.149)
이원익은 두 번이나 상소를 올려 “이순신을 체직시켜서는 안 되고, 원균을 대신 맡겨서도 안 된다”고 극력 만류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곧 원균이 칠천양(漆川梁) 해전에서 패해 죽자 부랴부랴 사형을 시키려다 정탁 등의 만류로 권율 휘하에 백의종군시켰던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기용했다. 또한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3.000군을 이끌고 남원에 주둔하고 있 었는데, 왜군의 공격을 받아 수백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몰살했다.150)
이순신이 부임해 보니 배는 불타 없어지고 군사는 흩어졌다. 배 12척을 가지고 재기해 왜 적과 싸우는 족족 이겼다. 이순신은
“내가 오랫 동안 밖에 있었으므로 내부에 틈이 많이 생겼구나! 그러나 상국(相國)이 나의 계 책을 전적으로 써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수군이 약간 보존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나의 힘 이 아니고 상국의 힘이다”151)
라고 했다.
9월에 이원익이 성주에서 개령(開寧)으로 옮겨 성을 사수하려 했는데 얼마 안 가서 병이나 다시 청주로 갔다. 10월에 다시 불러 서울로 돌아와 병 때문에 체찰사를 사임하려 했으나 그 대로 머물러 양호(楊鎬)의 군량을 조달하게 했다. 9월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와 직산을 공격하 자 조선은 명에 사신을 보내 왜의 재침 사실을 알렸다. 명 황제는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양 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삼아 남 . 북 군사를 거느리고가서 돕게 했다. 왜적 은 양호에게 밀려 울산, 순천 사이로 후퇴해 7, 8백리 구간에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선조는 서울이 걱정되어 이원익을 불러올렸으나 병 때문에 체찰사를 사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양호가 이원익의 명성을 듣고 군량조달을 일임해 잘 처리하자 그를 극찬했다.152)
7월 8일에 600 여척의 일본배가 와서 부산 앞바다에 정박했다. 조선에서도 이미 7일 밤에 경상우도 수군을 다대포 앞 바다에 줄지어 정박하게 하고, 8일에는 적선 10척을 붙잡았다.153) 도체찰사 이원익은
“적들의 배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는데 그 수는 대단히 많습니다. 방어하는 데는 군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경상도에 현재 있는 군량은 그 수량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만일 명나라 군사들이 기회를 보아 전진한다면 우리 군사들의 군량이 떨어질 형편에 있습니다. 군사가 아무리 많아도 정예가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간의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내려보내 주시면 순찰사와 의논해 어떤 방법으로든지 군량을 마련해 보겠습니다”154)
라는 급보를 올렸다. 비변사는 무과출신자들 중에서 정예한 자들을 선발해 보냈다. 총병(總兵) 양원(楊元)은 군사 3.000 명을 거느리고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원익은 서둘러 전투를 해 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가을에 대군이 오면 싸우자고 했다. 이원익은
“교활한 적이 우리나라를 병들게 한 지 이미 6년이나 되어 비축된 곡식은 다 떨어지고 백 성은 흩어져서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머뭇머뭇하면 구제하려 해도 될 수가 없다. 또 이미 우리 군사를 육지와 바다에 나누어 주둔시켰으니 적이 침범하면 어찌 군사를 묶어두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중약) 산성은 험하고 부성(府城) 은 약하니 교룡(蛟龍)산성을 지켜야 한다”155)
고 했으나 듣지 않다가 대패했다.
7월에 적이 간자를 보내 “왜선이 내일 올테니 맞아 공격하라!”고 했다. 이 말을 믿고 원균 이 칠천도(漆川島)에 나갔다가 전사했다. 적이 승세를 타고 남원을 공격하니 양원이 성을 버 리고 도망친 것이다.156)
도원수 권율은 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원익은 권율이 군사에 노련한 장수라 해 전에 절 도(節度)를 어긴 것을 의리로 권면하면서 그와 더불어 군사에 관한 일을 협의했는데 권율은 이원익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서생포(西生浦) 죽도(竹島)에 주둔하고 있는 가또 기오마사를 공 격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왕에게 “신이 능히 통솔하지 못해 권율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사용하게 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라고 했는데 선조는 이원익을 위로하면서 권율도 문책하지 않았다. 권율도 잘못을 뉘우치고 이후 체찰사의 명을 어기지 않 았다.157)
8월에 해상에 둔을 치고 있던 모든 적들이 쳐들어 왔다. 이원익은 김응서로 하여금 성을 굳 게 지키게 했는데 적이 오자 김응서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원익은 비장을 보내 김응서를 목베도록 했으나 도원수 권율이 숨겨주어 살아났다. 황석성(黃石城)을 지키던 장수들은 도망하 고 안음현감 곽준(郭.)과 전 군수 조종도(趙宗道)는 죽었다. 화왕성(火旺城)을 굳게 지킨 의병 장 곽재우(郭再祐)만 살아남았다.158)
이원익은 한 방면을 감당할 인재로서 이순신과 곽재우를 추천했다. 그리고 원균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말들이 모두 맞았다. 이 두 사람의 활약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강 우(江右) 지역이 평온했다.
양호는 12월에 제독 마귀(麻貴) 등과 함께 울산의 왜적을 쳤으나 외책(外柵)만 깨트리고 내 성(內城)은 깨트리지 못했다. 왜적 400 명 죽였으나 날이 추위지고 비가 내린데다가 왜의 지 원군 수천 명이 도래해 후퇴했다. 이 전투로 명의 군사와 말이 많이 상했고, 양향 . 기계를 많 이 잃었다. 양호는 전과를 허위보고하다가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에게 탄핵을 받 아 불려들어 가고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파견되었다. 정응태는 다음과 같이 조선을 무함했다.
“속번(屬藩)의 간사함은 증거가 있고, 적당(賊黨)의 떼지은 음모는 이미 들어났습니다. (중 략) 전년에 조선이 요동 백성과 쟁송(爭訟)하자, 요동도사(遼東都事)가 여러 차례 단안을 내렸는데, 조선 사람들이 불평을 가지더니 만력 20년(1592)에 끝내 저들 나라에 세거하는 왜인을 사주해 왜노(倭奴)를 불러 군사를 일으켜서 함께 천조(天朝)를 침략함으로써 요하 (遼河) 동쪽을 탈취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했습니다”159)
조선이 성을 굳게 쌓아 잃어버린 요동 땅을 회복하려 하고,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종’(宗)이 니, ‘조’(祖)니 하는 참람한 용어를 쓴다고 공격했다. 선조는 양호의 억울함을 변명해 주고 정응태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 상신 중에서 누가 사신으로 가 주기를 바 랐다 . 실상은 영의정 유성룡이 가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유성룡은 양호가 점령군처럼 국정을 전횡한 것을 싫어해 노모를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원익은 선조에게 “영상은 단지 90세의 노 모가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어지러운 때 유성룡을 밖에 있게 할 수 없으니, 신이 비록 매우 야위었으나 대신 가기를 청합니다. 제가 비록 병으로 야윈 몸이나 그래도 한 번은 갔다 올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원익이 양경리변무사(楊經理辨誣使)로 가게 되었다.160)
이원익 일행은 압록강에 이르러 중국에서 나오는 정응태(丁應泰)를 만났다. 정응태는 두세 장관(將官)을 보내 되돌아가라고 했다. 이원익은 중국말로
“우리들은 국왕의 명을 받들고 명나 라 조정에 들어가는데 지금 만일 중지한다면 이는 임금의 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힘 이 우리 일행을 포박할 수 있으니 우리를 포박해 싣고 가라. 그러면 국왕에게 할 말이 있으니 그래도 좋겠느냐?”
고 하자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되돌아갔다.161) 1598년(선조 31) 9 월에 연경에 도착한 이원익은 통정사(通政司)에 주본(奏本)을 올려 정응태가 조선을 모함한 정 황을 극력 진술했다. 정응태는 이원익 사행이 양호를 두둔하려는 것을 알고 이는 거론하지도 않고 조선이 왜를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범하려 한다느니, 참람하게 ‘조’와 ‘종’을 쓴다느니 하 면서 모함했다. 그는 부사(副使) 허성(許筬), 서장관 조정립(趙正立)과 함께 6부 과관(六部科 官)과 13도 어사에게 머리를 땅에 짖찌어 피가 흐르도록 간절히 변론했다. 이원익은
“소국은 황상께서 두 번 살려주신 은혜를 입어 임진년에 망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으니, 소국 군신은 비록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황상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망하지 않은 나라, 죽지 않은 백성이 실낱같이 연명해 온 지 이제 7년인 데, 이제 다시 사람들로부터 밀침을 당해 악역의 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 으니, 단지 소국의 사정이 참으로 애통할 뿐만 아니라, 황상께서 여러 해 동안 적극 구제 해 주신 은혜가 끝내는 한 역적을 보호한 데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배신들은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162)
라고 억울함을 탄원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든가. 통정사가 각노(閣老)에게 주문을 올려 달라고 애걸하라고 했다. 각노 에게 사정하니 각노도 “이 일은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통정사가 “배신(陪 臣)이 주본을 올리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63) 예부가 빨리 돌아가기 를 재촉하니 그는 “이 누명을 쓰고 돌아가기 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고 했다. 예부는 “황상께서 정응태의 상소를 접어두고 쓰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억울함을 씻어준 것이다”라고 했다. 이원익의 주본이 정응태 당의 저지로 황제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폭로에 의해 그 뒤에 다시 사신을 보내지 않아도 조선의 주장이 명 조정에 명백히 전달되었다. 황제는 “짐 은 너희 나라를 보존시키는데 힘을 다할 것이다. 너희 나라가 대대로 충성해 오는 것을 생각 하면 사람의 말로 인해 의혹할 수 없다”고 포유(褒諭)했다.164)
1599년(선조 32) 정월에 복명(復命)하니 선조가 그의 공로를 칭찬하고 좌의정에 임명했 다.165) 이원익은 5월에 사직하고 판중추부사가 되어 동호초당(東湖草堂)에 은거하다가 9월에 영의정으로 승진되었다.166)
유성룡은 연경에 사신으로 가지 않은 것을 이유로 이이첨(李爾瞻)등이 공격해 영의정에서 파직되었다. 이유는 주화오국(主和誤國)이었다. 이원익은 유성룡의 억울함을 상소하고 병을 핑 계로 출근하지 않았다.
“유성룡은 정사를 도운 지 10년 동안에 한 가지의 도움도 드리지 못했으니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그도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무리를 널리 박아 놓았다 느니, 표창과 형별에 대한 권한을 훔쳐 갔다느니, 뇌물 바치는 사람이 문간에 가득 찼으며, 간사하고 탐욕스러워 조정을 어지럽혔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공격하면서 죄악을 한두 가지 만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임금을 우롱하고 나라를 뒤집어엎은 옛날의 큰 간신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니 아, 이것이 어찌 정확한 논의라고 하겠습니까? 그 중에 화 의를 주장했다는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비난한 사람의 의견은 물론 정당하지만, 그 문제 의 내막도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신이 이전에 보건대 유성룡은 언제 나 청렴 하고 지조있는 사람으로 자부했으며, 나라를 근심하는 그의 한 가닥의 충성에 대해서는 실 로 동정할 바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유성룡이 일단 배척되자 유성룡과 아주 친한 사람이라고 해 배척받는 사람도 있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 배척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바 아주 친한 사람이라 든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선비 출신들 가운데 원래 많은 것인데, 이런 사람들을 하 루 아침에 모두 배척하는 것은 조정의 복으로 되지 않을 것입니다“167)
유성룡의 억울함을 정면으로 읍소한 것이다. 이에 대해 홍문관 부교리 이이첨은
“신 등은 영의정 이원익이 올린 차자를 보았습니다. 그 요지는 유성룡을 규탄한 말들이 정 확한 논의가 아니며 또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게까지 파급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현임 대신으로서 될 수 있으면 문제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한 말인 만큼 역시 일정한 소견 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데서는 너무나 경중을 전도시켜 놓았습니다. 단 지 편견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그 자신이 도리어 공정한 논의와 어긋나는 줄은 깨닫지 못했습니다”168)
라고 받아첬다. 그리고 화의를 주장한 죄에 대해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면서 무엇을 구실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계속 나 오고 있어서 황제의 위력을 믿을 수 있었으며 호서와 호남이 아직 온전하고 백성들의 형편 도 좀 괜찮아졌으니 제때에 자체의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 힘썼더라면 아마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편견을 더욱 고집하고 제 주장만 내 세웠던 것입니다”169)
라고 했다.
선조는 그만두려는 이원익을 위로하면서 출근하라고 했다. 대간은
“신 등이 지난 번에 영의정 이원익이 사직을 청하면서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견 해와 주장이 시속 사람들과는 대립되어 있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가 말한 시속 사람이란 어 떤 사람을 기리킨 것이며, 대립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을 염두에 둔 것인지 신 등은 알 수 없었습니다. 유성룡은 자신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남보다 먼저 화의를 주장해 사람들로 하여금 점 점 그릇된 생각을 하게 했고, 나라의 형세를 날로 약해지게 만들어 하마터면 임금도 몰라 보는 세상으로 될 뻔 했지만 끝내 아무런 수습책도 강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중약) 그런데 이원익은 명나라 수도에서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전하에게 글을 올려 별의 별 소리를 다 하면서 유성룡을 변명했고, 그 글의 끝 부분에서는 심지어 ‘화의를 주 장했다고 규탄한 것은 그 논조가 물론 옳기는 하지만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 다’라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세상의 공론을 속이려고 한 것이며 동시에 화의를 주장해 나섰던 그의 죄를 엄폐하려는 것이었습니다“170)
영의정 이원익이 동호로 은거하자 우의정 이헌국(李憲國)은
“이원익은 일심으로 나라를 위하니 전하께서도 이미 그의 어짊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가 어제 필마로 교외에 나가니 길 가던 사람들은 한탄을 하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우는 사 람까지도 있었습니다. 신은 이제부터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171)
라고 상소했다.
이 때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이 순직했다. 그러나 겨우 약간의 부의를 하는 정도로 끝났다.172) 10월에 당쟁의 폐해를 극론했다. 누구는 어느 당이고, 누구는 어떤 이론을 주장하 는가를 낱낱이 지적하고 어진사람을 등용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홍여순(洪汝諄), 임국노(任國老) 같은 위인을 조심하라고 했다. 그는 홍여순과 본래 친했 으나 그의 소행을 보고 절교했다고 한다.173)
1600년(선조 33) 정월에 체직되었다가 4월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174) 대간이 즉시 반발 했다. 지평 박효생(朴孝生)과 정언 박사제(朴思齊)은
“좌의정 이원익이 이전에 대신의 반열에 있을 때 유성룡과 한 짝이 되어 부당한 주장을 애 써 비호해 나서면서 별의 별 짓을 다 했습니다. 다행히 전하의 명철한 판단에 의해 공론을 속이기 어렵게 되자 김신국(金藎國), 남이공(南以恭)과 같은 경박한 무리들과 안팎으로 결 탁해 차자를 올릴 때나 접견 좌석에서 선비들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들을 은밀 히 비호해 주는 말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서 버림을 받은 지 오래였습니다. 뜻밖에도 좌의정으로 임명하는 지시가 갑자기 내리자 깜짝 놀라면서 격분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체하시기 바랍니다”175)
라고 해 당장 교체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에 대해 선조는 오히려
“좌의정은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는 어진 정승이다. 옛날에도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물었거니 와 지금도 그를 앞설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을 버린다면 어떤 사람을 쓰겠는가? 그에게 편견이 없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대체로 그것은 그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지 처 음부터 그의 마음 속에 사심이 있어서 그렇게 두둔할 꾀를 낸 것은 아니다”176)
라고 반박했다. 이헌국은 선조의 대신을 대하는 도리가 일반 관리들만도 못하다고 불평했 다.177) 이원익도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는데서 귀에 거슬리지 않으면 옳은 말이라고 하고, 귀에 거슬리면 틀린 말이라고 하는데, 부디 귀에 거슬리는가 거슬리지 않는가를 가지고 기뻐하거나 성내 지 말고, 반드시 도리에 비추어 보면 참소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될 것입니 다”178)
라고 했다.
1600년(선조 33)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죽어 이원익은 영돈령부사로 대궐에 들어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이내 동호(東湖)에 머물렀다. 그리고 8월에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려고 하자 조정에서는 명군을 남방 변방과 관서(關西)에 주둔시켜 줄 것을 청했다. 이때 이원익은 “중국은 변방의 적이 장차 외국에 걱정을 끼칠 것을 염려해 미리 군둔(軍屯)을 설치해 외국 을 보위하지 않을 것이니 바랄 것이 못됩니다. 오직 남방에 주둔할 일만을 청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선조는 이원익을 4도(호서 . 호남 · 영남 . 관동)체찰사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9월에 영남으로 내려가 군사를 훈련시키고 백성을 모집해 창원 . 울산 . 동래에 둔전을 설치했다.179) 그는 수찬 강첨(姜籤)을 종사관으로 대동하고 갔다. 그러나 이원익이 비장과 위 장이 상해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선조는 관리를 보내 고기를 먹도록 하고 서 울로 불러올려 그곳에서 병무를 보도록 했다.180) 그는 병 때문에 결국 1601년(선조 34) 1월 에 사직하고 금천(衿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8월에 다시 3도(평안, 함경, 황해)도체찰사가 되었다.181) 북쪽 오랑캐가 조선의 변장 (邊將)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비록 중요한 직책을 맡기기는 했으나 사실은 지방 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대체로 이원익이 유성룡을 구원하려 한 뒤부터 조정에서 공격하는 사 람이 많았으며, 임금도 그를 멀리했던 것이다.182) 또 그를 양서관북도체찰사로 삼았으나 병 때문에 체찰사 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했다. 선조는 서울에 있으면서 일을 보라고 했다. 이원 익이 임진난 때 관서를 잘 다스린 공이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맡긴 것이다.183) 선조는 9월에 이원익을 별전에 불렀다. 이원익이 남쪽에 가서 수고했는데 또 수고하게 되었 다고 인사를 하고 언제 어디로 갈 것이냐고 물었다. 겨울이 되기 전에 함경도를 거쳐 평안도 로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 가는 것은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함인데 임진난 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왜란이 일어난 초기에는 왜적이 오랫동안 평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부에 있는 사람은 높고 낮은 구별이 없이 다 군사로 나섰습니다. 군영에 소속된 노비나 관청에 소속 된 노비나 군사로 동원되는 것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적들이 물러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라의 경계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훈련시키고 표창도 하면서 고무해 주었으며, 다른 부역은 지우지 않고 여기에 전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꺼리지 않았습니다. 신이 그곳에 가서 있을 때만 해도 적이 물러간 지가 오래되어 관속들은 고을 수령이 침해 하고 사노비는 상전이 침해하는 통에 형편이 변해 처음만 못했습니다. 지금 이미 모두 흩 어진 것은 형편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중약) 그리고 감사는 그 도의 주인이고 체찰사는 손님인 만큼 감사가 착실하게 집행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달가워하지 않을 때는 한 장의 빈 종이로 공문을 띄우는데 불과할 것입니다.”184)
라고 해 임난 때는 관청이나 군영의 노비까지 모아서 훈련시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수령과 상 전이 침해해 사람들이 다 흩어져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에는 4도도체찰사로서 평양감사 를 겸임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사람이 평양감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서로 협조를 잘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나.
“지금 해야 할 일은 임진년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황폐하고 혼란한 때인 만큼 반드시 경 비를 줄여야만 무슨 일이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말이 ‘재물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고, 그 주석에는 ’비용을 절약해야만 나라의 근본이 공고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란으로 재해를 입은 백성들에게서 어떻게 함부로 거두어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백성들이 살아가는 낙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 지만 이것이 제일 앞세워야 할 문제입니다“185)
재물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국가재정을 절약하고 백성착취하 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적인 절검 · 애민 사상이다.
이원익은 영흥을 거쳐 성천(成川)에 부(府)를 세우고, 그곳에 곡식이 없기 때문에 종사관을 먼저 내려 보내 군량을 마련하게 해 변경을 침입한 홀라온(忽刺溫)을 치고자 했다.186) 그러 나 책립황태자(冊立皇太子)의 조사(詔使)가 와서 서도의 경비가 많이 들자 병마를 조련하는 것 을 중지했다. 이원익이 12월에 서도로 나갈 때 선조는 초엄(貂掩)과 호피(虎皮)를 하사했다.187)
1601년(선조 34) 10월에 2품 이상 관료들을 명초패(命招牌)로 불러 청렴하고 조심하는 사람 4 명을 의논해 뽑았는데 이원익 . 유성룡 · 허잠(許潛) . 이시언(李時彦)이 그들이다. 염근리 (廉謹吏)로 뽑힌 사람은 대신은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었다.188)
1602년(선조 35) 2월에 여러 번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아파 금천(衿川)에 가서 성묘하고 동호로 돌아왔다. 더구나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 병이 악화되었다. 선조는 어의 허준(許浚)을 보내 진찰케 하고, 내복(內卜) 함충헌(咸忠憲)을 시켜 이원익의 길흉을 점처보게 했다. 또 강가에 있는 집이 바람이 차다 해 어실(御室)에 있는 담요 와 발을 걷우어 내려 주었다.189) 권희(權憘)는 “이원익이 지금 수도에 있는데 자주 식량이 떨 어지곤 합니다.(중약) 지금 병 중에 있으니 먹을 것을 내려 주어야 합니다”고 해 식량을 내려 주기도 했다.190)
3월에도 여러 번 사직소를 올려 윤 6월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191) 4도도체찰사는 이덕 형(李德馨)이 임명되었다.192) 조정에서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선무공신(宣撫功臣)을 책정했는데 이원익은 양 공신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그는 상소를 올려 선무공신을 굳이 사양했는 데, 선조가 더욱 어질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 2월에 공신도감은
“난 중에 전하를 따라다닌 공신은 당초에 비준해 내려보낸 명단이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조금 의논할 것이 있는 사람과 명단에 이름이 없더라도 역시 후보자로 의논에 붙여야 할 사람을 모두 써서 올립니다. 왜적을 친 공신에 대해서는 전에 지시한 3 공신 뿐만 아니라 또 간단한 것이나마 되도록 더 찾아보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신 등이 감히 제 마음대 로는 할 수가 없어 모두 토의에 붙였던 사람으로 지시를 받고자 문의합니다”193)
라고 문의했다.
이에 선조는 “순안의 진영에는 김명원(金命元)이 원수로 있었다. 그 군사의 승 리와 패배는 그 책임이 원수에게 달린 것인데 김명원을 제쳐놓고 이원익을 취하는 것이 옳을 지 모르겠다”194)고 했다. 이에 대해 공신도감은 “김명원은 원수로 있었으나 세 곳에서 퇴각해 이곳으로 와 주둔하고 있었으니 사태를 수습하고 적의 진격을 차단한 공로가 이원익만 못하 다”고 반박했다.195) 그리하여 1604년(선조 37) 6월에는 충근정양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 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2등 제 3인에 봉해지고196) 이어 7월에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피봉되었다.197) 사관은 이원익을 “몸가짐이 청백하고 소박하며, 언제나 나랏일을 근심한다”고 평가했다.198)
이원익은 1602년(선조 35)부터 5-6년간 집에 물러와 있었다. 그리하여 1606년(선조 34)에 는 수천군 묘갈문(심희수), 함천군 묘비명(김귀영)을 수 십 부 인쇄해 종족들에게 나누어 주었 다. 그리고 1) 풍설에 구애되지 말고 자손들의 장사는 반드시 선영에 지낼 것, 2) 시조 익령군 및 숙선옹주 이하의 묘제(墓祭)는 차례로 돌아가며 지낼 것, 3) 증조 수천군 이하 3세의 묘소 와 여러 종족의 묘소의 좌향이나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 등을 모두 기록해 후세에 알게 할 것 등을 강조했다. 아울러 익령군, 숙선옹주의 묘를 수묘(修墓)했다.199)
1608년(선조 40) 2월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었다. 선조가 일찍이 장지를 건원릉 (健元陵) 곁으로 정해 놓았는데 이 때에 와서 술관(術官)이 장지가 조상의 묘에 가까운 것을 불길하다고 하자 이원익은 “명나라의 모든 능은 다 한산에 안장되었으니, 이것은 옛날 족분묘 (族墳墓: 동족을 한 곳에 합장함)의 뜻이고, 또한 부장불서(附葬不筮: 먼저 묘를 정할 때 이미 길한 곳을 정한 것이기 때문에 부장(附葬)할 때는 새로 길흉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라는 말에 어긋나지 않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파직되고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200) 선 조가 일찍이 광해군에게 말하기를 “여러 신하 중에 오직 이원익 만이 정승을 삼을 만한데 다 만 그 사람이 남과 화합하는 일이 적으므로 나는 그를 잘 쓰지 않았으나, 모름지기 성심으로 그 사람을 쓰라!”고 해 그를 영의정에 기용했다고 한다.201) 이원익이 사의를 표하자 광해군은
“경이 정승으로 들어오니 조야가 서로 경하하고 군민(軍民)이 모두 축하하니, 어찌 옛날의 어 진 정승보다 못하겠는가? 오늘날 영의정의 소임은 경이 아니면 불가하니 경은 안심하고 사 직하지 말고 부덕한 나를 도우라”202)
고 했다. 반면에 유영경은 경흥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유영경은 뒤에 서울 네거리 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고 시체를 베는 형벌)되었다. 유영경의 죄목은 무엇인가? 광해군이 1)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를 해 중흥의 공로가 있는데도 선무공신(宣撫功臣)으로 책 정하는 것을 방해했고, 2) 세손의 원손(元孫) 책봉과 혼인을 지연시켰으며, 3) 선조가 병이 위 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203) 반면에 유영경을 탄핵한 죄 로 귀양을 가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은 풀려나 요직에 임명되었다.204)
한편 삼사는 “임해군(臨海君) 진(.)이 몰래 몽둥이와 칼을 상차(喪次)에 들여보내 역모를 꾀했는데 문지키는 장졸 중에 그것을 본 자가 있습니다”라고 고변했다. 옥사를 다스릴 때 공 경들은 아무도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는데, 이원익만은 “지금 삼사가 고변했으니 삼사가 이 옥 사를 입증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문을 지키던 장졸들이 몽둥이와 칼을 실제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이원익은 “옥사가 지친(至親)에서 일어났으니 은혜와 의리를 겸해야 옳고, 억울하게 연루된 자가 많으니 용서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역적 을 두호한다고 했다. 어떤 재상이 “이제 만일 왕자를 위해 죽으면 후일 폐모론은 누가 다시 막겠는가?”라고 묻자 그는 “죄없이 왕자를 죽이는 것이 작은 일인가? 부당하게 일을 하는 것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고 했다.205) 광해군은 궁노(宮奴) 중에 죄가 있는 자를 달래어 사건 을 입증해 옥사가 이루어졌다.206) 양사가 정인홍을 귀양보내지 말고 석방하라고 하면서 이원 익에게 “대신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간이 따르지 않는다”고 협박을 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 았다. 이 때문에 정인홍이 그를 미워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6월에 지주(知州) 만애민(萬 愛民)과 도사(都司) 엄일괴(嚴一魁)가 명의 차관(差官)으로 와 왜 장자인 임해군을 놔두고 차자 인 광해군이 왕이 되었는지를 임해군을 만나 조사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원익은 “이제 면질(面質)해 임금을 정하려고 하니 이것은 진실로 상국에서 외국을 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그 러나 이미 황제의 명이 있으니 다만 사실에 의거해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 옳고, 또 선왕의 취 사선택과 국민의 향배 여부 및 임해군의 죄상을 자세하게 갖추어 차관이 복명하기 전에 먼저 명나라에 아뢰면 일이 반드시 잘 풀릴 것이다”라고 의견을 냈다. 차관이 임해군을 보자고 하 자 정인홍 등 당로자들은 임해군의 머리를 베어 차관에게 보이자고 했다. 그러나 이원익은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없으니 어기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이유로 반대했다.207)
그는 차자를 올려 공역(工役)을 줄이고, 세금을 깍아주며, 붕당을 깨트려야 한다고 주장했 다. 이어서 “지금 전하께서 우러러 섬길 분은 오직 자전(慈殿: 어머니) 뿐이고, 자전이 의지할 바는 오직 전하일 뿐입니다. 여러 왕자들이 걱정 속에 떨고 있는데, 그들을 안심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오직 전하일 뿐이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자전에게 순종하고, 아래로는 왕자 들에게 우애가 있게 해 틈이 나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208) 이러한 이원익의 전은론(全恩 論)을 역적을 두둔하는 것이라 미워해 좌 · 우의정과 함께 계속 사직서를 올렸다.209)
영의정 이원익은 명에 선조의 부고를 전하고 왕위계승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올렸다. 사신은 연릉부원군 이호민(李好閔)과 행용양위 상호군 오억령(吳億齡)이었다.210) 이원익은 6-7년 동 안 병을 앓아 6 번 째 사직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은
“경은 벼슬에서 물러날 만한 이유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글을 올려 여러 번 사임하면 서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고 저버리려고 하는가? 비록 나는 변변치 못해서 함께 큰일을 할 만하지 못하다고 해도 선대 임금을 저버리고 백성들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경은 벼슬 을 사임하지 말고 마음 놓고 몸조리를 할 것이며, 날자에 구애받지 말고 평상시와 같이 회 복된 뒤에 관청에 나오라”211)
라고 회유했다. 사신(史臣)은 이원익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원익은 어진 정승이다. 비단 한 때 선비들이 더 없이 존경했을 뿐 아니라 비록 평상시에 미워하던 사람들까지도 누구나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 영의 정으로 뽑아서 등용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은 흡족해 했으며, 선비들은 서 로 축하했다. 이는 바로 크게 무엇인가 할 만한 때였다. 또한 이원익은 임금의 비위를 거 슬리는 바른 말과 당대의 정사를 바로잡을 대책에 대해 차자를 올려 제의하곤 했는데, 이 차자도 특히 그런 내용을 올린 것이다. 그런데 한갓 문구(文具:빈 문서)로 만들었고 결국 시행하지 않은 채 수 개월 동안 잠잠하게 지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신들로서 벼슬에서 물러간 선비들과 착한 선비들을 추천한 실례가 없었으며, 조정에서는 음흉한 무리들이 뒤 덮여 있으면서 차자 속의 말과는 크게 어긋나게 행동했으니, 애석한 마음 어찌 금할 수 있 겠는가?”212)
1609년(광해군 1) 정월에 이원익인 병 때문에 사직소를 올리면서 당쟁의 폐해를 다음과 같 이 상소했다. “조정에서 무리를 나누어 짓는 징조가 30년 전에 시작되었는데, 근년에 와서 더욱 고질화되 었습니다. 그가 어진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취할 사람인가, 버릴 사람인가를 갈라 보지 않고 각각 자기 무리의 인물만 내세웁니다. 그리하여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뒤섞이고, 옳은 의견과 그른 의견이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을 등용하면 등용된 사 람이 아무리 어질다 하더라도 반드시 말하기를 ‘그 파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한 사람이 규탄을 받으면 규탄받은 사람이 아무리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말하기를 ‘그 파가 아니 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213)
이원익은 23 번이나 사직소를 올린 결과 1610년(광해군 2) 정월 신유일에 드디어 퇴직을 허 락받았다.214) 그러나 1611년(광해군 3) 8월에 이원익은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215) 이에 대해 사관은
“이원익은 순결하고 지조가 굳은 사람으로 오랜 덕행과 높은 명망으로 세상에서는 속수(涑 헹구는 물 와 비교했다 무신년 에 임금이 맨 먼저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은총이 : ) . (1608) 水 특별히 높았으나 얼마 후에 병으로 교체되었다.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바른 말을 한 사 람을 추천했기 때문에 파면되자 외부의 의논에서는 ‘이번에 정승으로 임명될 사람은 정인 홍(鄭仁弘)이 아니면 정창연(鄭昌衍)일 것이다’라고 했는데, 막상 지시가 내린 것은 이원익 이었다. 그래서 중앙과 지방에서 서로들 기뻐했다. 오랫동안 병으로 사양하면서 나오지 않 다가 이때에 와서 벼슬에 나온 것이다”216)
라고 논평했다. 이원익이 사임하려고 하자 광해군은
“경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마음이 놓인다. 이 글(사직서)을 보고 지극한 정성은 잘 알겠지만 경이 나오고 들어가는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고락과 관계돤다. 단지 원하는 것은 집에 있으면서 도리를 논하고 나랏일을 보아달라는 것뿐이다. 반드시 조정 반열에 따 라다니면서 몸을 상하게 할 것이야 있겠는가? 나의 뜻을 체현하고 사임을 청하지 말 것이 며, 아울러 영구히 나를 도와야 할 것이다. 이제 사모(紗帽)와 이령(耳領)을 내려 보내니 추위를 막는데 쓸 것이다. 사양하지 마라”217)
라고 했다. 참으로 극진한 대접이다. 그러면 광해군은 왜 굳이 병 때문에 그만두려고 하는 이 원익을 영의정 자리에 붇들어 두려고 한 것인가? 북인의 독주로 좋지 않아진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렴하고 공명한 이원익을 상징적으로 영의정 자리에 부뜰어 두 어야 했을 것이다. 이원익은 광해군이 차차 음란하고 사치해지자 경연에서
“대체로 신하의 입장은 백성의 입장과 다릅니다. 백성이란 각기 살아갈 길을 따르기 때문에 임금이 자기의 도리를 잃으면 스스로 반란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민심의 동향 에 따라 하늘의 의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신하의 입장에서 는 비록 걸(桀)이나 주(紂) 같은 임금을 섬긴다 하더라도 그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 는다면 절개를 잃은 신하로 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만큼 이야말로 백이(伯夷), 숙제(叔齊) 에게 죄를 진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어느 한 가지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 다”218)
라고 해 인심은 천심이니 이를 어기면 민란이 나고 신하는 임금이 잘못하면 목숨을 걸고 간쟁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유교정치의 본령이기는 하지만 신하는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바른말 을 해야 한다는 데 초점이 있다. 신하가 바른말을 하면 임금이 이를 수용해야지 오히려 처벌 을 하면 누가 바른말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벌(賞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원익은
“신이 오늘날의 형편을 보건대 표창하거나 처벌하는 정사는 모두 없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 다. 무슨 일이라고 하나하나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전하가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이 렇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상벌이 명확해진 뒤에야 규율이 서는 법입니다. 전하는 마땅 히 사사로운 뜻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219)
라고 광해군을 준엄하게 타일렀다. 원로대신으로서 왕에게 유교정치의 원론을 강론한 것이다. 상을 주거나 표창을 하는 것은 인재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니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야지 이 기준이 무너지면 나라를 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상과 벌이 공정하면 규율이 서고 안으로는 모든 관리가, 밖으로는 온 나라 사람이 지시에 복종하게 된다 는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고 바르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경연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고, 결재를 미루지 말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재물 을 아껴야 한다고 했다. 광해군은 이원익의 충고를 잘 유념하겠다고 했다.220) 유생 남탁(南倬 )이 이원익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올리자 그는 “나라에 체통이 엄하지 못해 성상께서 맨 먼저 신을 등용해 영상을 삼은 것을 보고 감히 아첨한 말을 지어 성상께 아뢰니 이것은 마땅히 법 을 적용해 죄를 주고 또 칭찬을 받은 사람도 죄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신을 먼저 파직 해 기강을 엄하게 세우소서”라고 했다.221) 이원익은 여러 번 사직소를 올려 영돈령부사가 되 었다.222)
1613년(광해군 5) 5월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원익은 병을 핑 계로 영창대군을 처벌하는 정론(廷論)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차자를 올려 “‘의’(王+義)는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 신들은 공론에 핍박되어 부득불 논하 게 되나 마음은 실로 민망하고 측은합니다”라고 하니 삼사(三司)가 역적을 두호한다고 처벌할 것을 청했다. 이에 이원익은 차자를 올려 “충성치 못해 임금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남의 신 하로서 지극한 죄를 짓는 것이고, 만일 논의의 어긋난 일을 가지고 불측한 지경에 빠트리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닐 듯 합니다”라고 구원했다. 광해군이 대신 중에 정의(廷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우의정 심희수가 아무 아무라고 대답했다. 이에 광해군은 “이원익 은 병이 위중하니 그가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형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부르지 않 았다. 이는 이원익이 참석하면 이 의논에 방해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223) 장악첨정(掌樂僉 正) 정온(鄭蘊)이 영창대군의 억울함을 극력 진언하자 광해군은 그를 사형에 처하려 했다. 이 에 이원익은 차자를 올려 심한 죄를 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해 결국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 로 유배보내는데 그쳤다.224) 정온의 공술 중에
“정항(鄭沆: 당시 강화부사)이 부임한 초기에 의(영창대군)는 가시 울타리 안에서 즉시 화 로 불을 치워버리고 밖에서 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3일에 병이 났으면 곧바로 급보를 올 렸어야 할 터인데 나종에 보고를 올렸고, 이어 바로 죽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몇 가지만 가지고도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전하 역시 과오를 추궁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전하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225)
라고 한 것을 보면 영창대군을 무리하게 죽게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1615년(광해군 7) 정월에 사역원 도제조를 사임했다.226) 그리고 2월에 대궐 안에 저주(咀 呪)의 변이 있었는데 교서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거론되자 이원익은
“어머니가 아무리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아들로서는 불효하게 처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는 명분과 지위가 더없이 큰 것이며, 윤리가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성인은 인간윤리의 극치에 이른 것인데 전하의 세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 까?”227)
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광해군은
“효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어떤 죄악인데 나에게 의혹을 품으면서 도리어 항간에 돌아다니 는 말을 믿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길가는 사람보다도 못하게 대하 는가? (중약) 덕이 없는 내가 이렇게 큰 변고를 당해 밤낮으로 주의를 하면서 더욱 더 높 이 모시고 있는데, 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봉양하는 일을 빠트린 적이 있거나, 문안하 는 예의를 그만둔 적이 있었는가? (중약) 경의 말을 들으면서부터 마음이 불안해 침식을 잃은 지 여러 날이 된다. 경은 그 문제를 숨김없이 진술함으로써 나의 죄를 풀어주고 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며, 외부 사람들에게만 혜택을 베풀지 말고 나 한 사람에게 대 해서도 걱정해 줄 것이다. 그리고 지시문을 공포하는 문제를 놓고 말하자면 난들 어째서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겠는가? 사실은 부득이 한 데서 나온 것이다. 방자한 사건과 흉악한 편지에 대한 문제는 모두 다 역적들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것이고, 모두 궁녀들이 한 것이 니 대비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228)
라고 했다. 그러자 대간이 이원익의 관직을 박탈하고 귀양보내야 한다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 났다. 그리고 이원익의 배후에는 그의 종사관을 지낸 남이공(南以恭)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러나 진사 홍무적(洪茂績) 등 100 여인은 이원익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다가 멀리 귀양갔다.229) 그리고 이원익은 중부지역에 거주를 제한하고, 남이공은 관직을 박탈하고, 시골로 가게 두었 다.230) 광해군은 4월에 드디어 이원익을 홍천현(洪川縣)에 부처(付處)하고 남이공을 송화(松禾) 로 귀양보냈다.231) 이원익이 홍천에 이르자 가물다가 큰 비가 왔다. 그리하여 그곳 사람들은 이를 상국우(相國雨)라고 했다고 한다.232)
얼마 있다가 유배지를 홍천에서 여주로 옮겼다. 이때 광해군이 은(銀)을 바치면 죄를 면해 주겠다는 명을 내렸다. 그때 박승종(朴承宗)이 은을 대신 바치고 그의 죄를 용서받으려 하자 정승 심희수(沈喜壽)가 “이것은 완평의 뜻이 아니다”라고 해 그만두었다 한다.233)
그후 1618년(광해군 10) 10월에 예조참판 이성(李.)이 이원익 등을 풀어주자고 해234) 1619 년(광해군 11) 5월에 이원익, 남이공 등 14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235) 이때 우의정 정인홍은 이원익을 귀양 보낸 것은 가벼운 벌이니 마땅히 형국(刑鞠)을 가해야 한다고 했고, 향간에는 이원익이 “귀양간 무리와 오가며 모의한다” “이원익이 서울에 있는 빈객들을 통한다”는 유언 비어가 난무했다. 그는 “벌을 받으면서 어떻게 사람을 보겠는가? 친척 이외는 모두 보지 않았 다”고 했다. 이때 경리 양호(楊鎬)가 요동에 있다가 우리 사신을 보고 이원익의 안부를 묻자 밖에 있다고 대답하니, “오리(梧里)와 오성(鰲城)은 어진 재상인데, 너희 나라가 쓰지 않으니 필시 소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했다고 한다.236) 3년 8개월을 홍천에서 귀양 살이를 하고 1619년(광해군 11) 5월에 이원익은 여강(驪江) 가 앙덕리(仰德里)에 우거(寓居)했 다. 초가 두어 칸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고, 처자들은 하루 걸러 끼니를 걸렀으므로 얼굴에 주린 빛이 있었으나 그는 돗자리를 짜서 연명하면서 태연했다고 한다. 이때 인목대비가 이미 서궁(西宮: 慶運宮)에 갇히고 나라는 극히 위태로웠다. 어떤 사람이 이원익을 찾아와서 당시에 일어난 일을 말해 주었으나 그는 눈물을 흘리며 대꾸하지 않았다. 여강 가에 우거할 때 친하 게 지낸 사람은 양양부사 정엽(鄭曄)과 종사관이었던 이유록(李綏祿)이다. 이때 인조반정을 모 의했는데 어떤 사람이 정엽에게 동참할 것을 의논했으나 거절하고, 이원익에게도 의논하려 했 으나 정엽이 불가하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해 그만두었다 한다.237) 이원익은 여강 가에서 3년 10개월을 지냈다.
1623년(인조 1)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에 기용했다. 반정한 인조와 공신들이 인기가 없자 명망있는 지도자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함으로써 이를 만회해 보 려는 의도에서였다. 혁명정부는 이원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왕 때부터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온 나라 사람들 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광해군 때에 임해군 사건이 일어나자 은전을 베풀라는 의리를 제일 먼저 말했으며, (인목)대비를 폐비시키자는 논의가 한창 벌어지던 초기에도 차 자를 올려 효성을 다하는 도리를 힘써 진술했다. 흉악한 무리들이 몹시 미워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홍주에서 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풀려나 시골로 돌아갔다. 이때에 다시 영의정으로 등용되자 조정과 민간에서 서로 축하했다. 임금이 승지를 불러 그가 성 안으로 들어오는 날에 도성의 백성들과 함께 축하하며 맞이했다”238)
인조는 명광전(明光殿)에서 영의정 이원익을 인견했다.
인 조: 경의 허리 병이 요즘 어떤가? 먼 길을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이원익: 엄한 지시가 두 번이나 있었기에 달려오고 싶은 마음은 한 시각이 급했으나 몸에 병이 있어 즉시 길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태만한 행동을 변명할 길 없어 황공하기 그지 없습니다.
인 조: 나는 재능도 덕도 없는 사람으로 외람되게 임금 자리에 올라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경을 기다려 나랏일을 의논해 처리하려고 했다. 경이 나를 저버리지 않고 병을 무릅쓰고 올라왔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 지금 나라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경의 도움을 받아서 종묘와 사직을 편안케 하기를 바란다.
이원익: 신의 나이가 80이 되어 감으로 정신도 근력도 쇠퇴해진 것을 느끼게 되었으니 나라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나랏일 가운데 곤란한 문제가 대단히 많겠지만 그 중에서도 큰 나라의 군사들을 구제하고 적 누루하지를 방비하는 것과 같은 일 들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전하의 애타는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듣기에 요즈음 일을 처리하는데 이미 갈피가 잡혀가고 있다고 하니 이 뒤로는 걱정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인 조: 지금 급한 일 가운데서도 인재를 얻는 문제가 제일 시급하다. 경은 오랫 동안 지방에 있었는데 숨어 있는 인재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없는가?
이원익: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어진 이를 구할 때는 힘을 다 해야 하고 적임자를 얻은 다음에는 일을 일임해야 한다’(勞於求賢逸於得人)라고 했습니다. 적임자를 얻기만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신은 외진 시골에 처박혀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지내서 만나는 사람이란 농부나 일반 백성들뿐입니다. 비록 숨은 인재가 있다 고 한들 어디에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오는 도중에 전하가 등용한 사람은 모 두 어질고 능력 있는 선비들이라는 말을 듣고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 니다. 전하가 어진 이를 등용하는 문제를 급선무로 삼은 이상 어진 인재들이 저절로 많이 나오게 될 것이며, 이조판서를 이미 적당한 사람으로 임명했으니 그가 사람을 가려 쓸 것입니다. 무엇을 다시 근심하겠습니까?
인 조: 어찌 그렇겠는가? 조정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조나 병조에서 알 수 있겠지만 시골에 묻혀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는가?
이원익: 대신의 직책은 사람 문제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것이니 신이 만약 알고 있다면 어 찌 전하의 지시를 기다린 후에 보고하겠습니까? 전하는 한창 나이인 만큼 힘을 가다 듬어 정사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며, 인재를 구하는 방도에서도 전하의 마음을 근본으 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내버려 두고 말단의 일에만 매달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왕업을 이룩하기는 쉬우나 그것을 지켜 나가는 것은 어렵 다’(創業易守成難)고 했습니다. 지금 나라 형편을 보면 만사가 파탄되어 전하는 왕업을 이룩하는 어려움과 그것을 지켜 나가는 어려움을 모두 당하고 있으므로 이제 앞으로 속을 태우는 일이 틀림없이 많을 것입니다.
인 조: 경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경은 반드시 모든 관리들을 다 통솔하고 나를 힘껐 도우라. 재상의 자리 하나가 비었어도 즉시 후보자를 선택할 것이다. 선대 임금들이 수백 년 지켜 온 종묘와 사직이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 경의 도움을 받아 이를 일으켜 세우 려고 한다.
이원익: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야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늦추겠습니까? 단지 힘이 닿지 못할 까 걱정할 뿐입니다.
인 조: 내가 왕위에 오른 지 이미 10 여일이 지났으나 모든 일이 아직 두서가 잡히지 않았으 므로 경이 오기를 큰 가뭄에 구름을 바라듯 했다.
이원익: 전하의 생각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룩되어 나갈 것입니다.
인 조: 널판 위가 차니, 자리로 나와 앉으라. 나는 백성들의 폐해를 없애려고 인재를 모아들 이고 있으나 아직 무슨 폐해를 없어야 백성들이 기뻐하고 어떤 사람을 등용해야 직 책에 적합한 지를 몰라 밤낮으로 혼자 걱정만 하고 있다.
이원익: 모든 일처리를 앞에서 행해지던 것을 그대로만 따른다면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반드시 큰 조치가 있어야만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을 것 입니다. 앞으로 적 누루하지를 막고 큰 나라 군사를 구제하는 것과 같은 일은 처리하 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도탄 속에 빠져 있고, 나라의 재정은 고갈되었으니 반드시 수입을 타산해 지출하고 비용을 절약해야 합니다. 또한 백성들을 아끼며 힘겨운 부역과 관련 되는 일들을 백성들에게 지우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여 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란 매우 민감해 큰 나라 군사들에게 공급 하라고 해도 원망하지 않고, 적 누루하지를 치라고 해도 꺼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 은 비록 임금과 신하 간의 큰 의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모두 임진년의 우리 나라 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큰 나라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기에는 간악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했으니, 누가 기꺼이 큰 나라 군사들 과 합세해 오랑캐를 치자고 하겠습니까? 요즈음 듣건대 전하가 결단을 내리시어 사 기를 돋구는 조치를 많이 취했다고 합니다. 인심이 굳게 결합하면 막대기를 가지고도 적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군사는 원래 천하의 강한 군사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정말 민심을 얻기 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즐겨 싸움에 나설 것이니 이따위 적에 대해 무엇이 어려우며 방어하는데 무엇이 근심이 있겠습니까?
인 조: 경의 말이 옳다. 오늘날의 힘겨운 부역을 가볍게 감해 주고 부세를 덜어 주어 먼저 민심을 결합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다.
이원익: 신이 듣건데 이제 경연을 열기 위해 강론할 책을 물어 보셨다 하니 신은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학문이 이미 고명해지셨다 하지만 만약 자주 경연을 열지 않으 면 착한 말이 들어 올 길이 없어질 것이니 무엇에 근거해 인재를 기르겠습니까? 민 간의 폐해나 국가의 정사에 이르기까지 경연에서는 강론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 러므로 옛 임금들이 설사 싸움을 하는 중에서도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 는 것은 실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전하도 꾸준히 노력해 마음 수양이 잘 되었다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이 어렵겠 습니까? 옛 사람이 말하기를 ‘공정한 것만이 사람들을 감복시킨다’(唯公復人)고 했습 니다. 전하가 만약 공정한 마음으로 정사를 해 터럭 만큼도 사사로운 것을 보이지 않 는다면 온 나라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덕화는 소리에 대한 반향보다도 더 빨라서 궁 중에도 사사로운 일이 없어지고 백성들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만 약 털끝 만한 사사로운 생각이라도 보이면 백성들은 실망할 것입니다.
한여직(韓汝.: 승지): 우리나라에서는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불순해 조정 안에서 붕당을 만드는 폐단이 생겼습니다. 전하가 한결같이 공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등용해 조금도 사정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인재가 스스로 나올 것입니다.
이원익: 붕당을 만드는 폐단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붕당이 생겼다면 깨트리기 어려울 것 같 지만 오직 임금의 마음 하나에 달린 것입니다. 사람을 쓰고 버리며 올리고 떨구는 것 을 한결같이 공정하게만 한다면 어진 사람들은 올라서고 못된 자들은 물러나서 조정 안이 저절로 깨끗해질 것입니다.
인 조: 붕당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에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므로 나도 근심하고 있다. 비록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 고 하지만 그 가운데는 왜 쓸 만한 인재가 없겠으며, 비록 좋은 사람들이라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어찌 다 적합한 사람들이겠는가? 이조와 병조의 판 서들이 한결같이 공정한 도리로만 생각한다면 붕당을 만드는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 이다. 이원익: 임금의 본심이 깨끗하면 아랫 사람들 속에서 어찌 공정하지 못한 결함이 있겠습니 까?239)
인조는 이원익을 의지해 난국을 풀어가고자 했다. 인재발굴, 안민정책, 재정절감, 경연참 여, 공정한 마음가짐, 붕당타파 등 광범한 정책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만큼 이원익에 대 한 신뢰가 깊고 의지할 만하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아울러 누르하지의 여진이 처들어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해 훈련할 것도 건의했다.240) 그리고 공물대납의 폐해를 빨리 해소해 줄 것을 건의했다.241) 인목대비도 이원익에게 의례하는 바가 컸다.
“경은 일찍이 나를 위해 바른 말을 하다가 죄에 걸려 쫓겨났으니 경의 충성은 하늘의 해를 꿰뚫을 만하다고 하겠다. 홀몸으로 된 나는 덕이 없어 국모노릇하기에 맞지 않기에 그만 천지개벽 이래로 있어본 적이 없는 변고를 당하게 되었다. 다행히 옥황상제의 보살핌과 황 천에 있는 선왕 신령의 도움을 받아 이처럼 어진 아들을 얻어 다시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게 되었다. 경은 더욱 충성을 다하고 새 임금을 잘 받들어 위로는 선대 임금들의 반석 같은 터전을 넓히고 아래로는 끊어져 가는 백성들의 생명을 구원하기를 바란다. 이 임무를 오직 경의 한 몸에 맡기니 나도 이제는 침식을 좀 편안히 하게 될 것이다.242)
3월에 원상이되었다.243) 이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던 자 중 수죄자(首罪者)는 모두 처벌 했으나, 그 다음 형벌을 받을 자들은 재산 적몰(籍沒)을 면제해 주고, 연좌(緣坐: 죄에 연루 됨), 협종(脅從: 협박 때문에 억지로 따름), 괘오(.誤: 남에게 속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됨 ) 의 경우는 죄를 반으로 깎아주자고 해 그대로 되었다.244) 민심을 빨리 안정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4월에 인목대비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1) 내가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 그가 못된 자인지 모르고 내 이름으로 황제에게 추천한 것은 황제를 속인 죄라는 것,
2) 내가 갇혀 모욕을 당한 기간이 10년이라는 것,
3) 외척들이 간악한 무리들과 공모해 나의 아버지 형제들을 반역죄로 몰아 죽인 것,
4) 유구국(琉球國) 세자가 표류되어 온 것을 변방의 신하를 시켜 몰래 죽인 것,
5) 광해군 부자의 죄악이 극도에 달했으므로 제때에 형벌을 가해(죽여서) 관리들과 백성들을 위로할 것
등을 꼭 집어넣으라고 승정원에 지시했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은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대 제학 신흠(申欽)과 함께
1) 광해군은 처음에는 어질다고 여기고 종묘와 사직을 받들도록 했으나 오늘에 와서는 도리 를 어기고 행동이 나쁘기 때문에 내쫒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쓰는 것이 옳다.
2) 외척들이 화를 초래했다는 등의 말은 원래의 보고가 명백하게 되어 있으니 더 말할 필요 가 없다.
3) 갇혀 욕을 본 햇수는 마땅히 사실대로 써도 좋다.
4) 그러나 광해군을 ‘제때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보고서에 넣으면 마치 그를 원수처럼 취급하고 있는 듯이 보여 명나라가 듣고 놀라지 않을가 걱정이 된다. 명나라 사람들이 이 것이 어찌 대비 혼자의 생각이라고 여기겠는가? 그 책임이 임금에게 돌아올 것이니 조심 해야 한다. 또 우리와 광해군 간에는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있으니 형벌을 가한다면 우리 도 그만두어야 한다.
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인조와 인목대비에게 제의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죽이지 않고 강화도로 귀양가게 되었다.245) 광해군이 강화도로 갈 때 이원익은 신하 중에 일찍이 광해군을 섬긴 자 들을 거느리고 남쪽 교외에 가서 꿇어 앉아 “임금으로 하여금 이 지경이 되게 한 것은 저희들 의 죄입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246) 이원익은 또한 언제 변란이 생길지 모르니, 무사 가운데 쓸 만한 사람 10 명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관청과 개인 노비 중에서 한 사람이 100 명씩 군사를 뽑게 해 정예군으로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인조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할 방도를 찾아보라고 했다.247)
이때 참찬관 민성징(閔聖徵)이 이원익은 원로대신이니 남여(藍輿: 대로 역어 만든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오게 하고, 조회에 들어 올 때는 부축해 주며, 닷새의 한 번 정도만 출근하 게 하고,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해당 관리를 집으로 보내 자문하도록 하자고 해 그대로 되었 다.248)
5월에 광해군의 아들 이지(李示+至)가 위리안치 중에 도망했는데 이원익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자 대사헌 이귀(李貴)가 “신은 이원익을 본래 존경해 왔으나 오늘의 이 행동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대신들이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신망을 받겠습 니까?”249)라고 비판하자 사의를 표했다.250) 인조는 “요즘 젊은이들이 그의 잘못에 대해 경솔 하게 말하고 있다”251)고 하면서 유신(儒臣)을 보내 문병하게 하고 또 해당 관아에 명해 궤장 (.杖)을 내리게 했다. 9월 6일에 무악(舞樂)을 가지고 사궤장연(賜.杖宴)을 베풀게 하고, 중 관(中官)을 보내 선온주(宣.酒)를 하사했다.252) 이때 3공6경을 다 모이게 했다. 학사(學士) 유 근(柳根)이 시를 지어 축하하자 이원익이 화답했다. 그리고 빙초(氷.)에 이를 그림으로 그렸 다.253) 이때 도당상회연(都堂相會宴)과 기영연회(耆英宴會)도 함께 열렸으며, 이때 수창(酬唱) 한 계해사궤장연첩(癸亥賜.杖宴貼) 1권이 세상에 전한다.254)
1624년(인조 2) 정월에 이괄난(李适亂)이 일어났다. 이원익은 영의정이었기 때문에 2월에 팔도도체찰사가 되었다. 형조판서 이시발(李時發)과 대사간 정엽(鄭曄)을 체찰부사, 최현(崔睍) 과 김시양(金時讓)을 종사관에 임명했다. 이원익은 임진란 때 평양감사로써 백성들을 안정시킨 경험이 있다면서 스스로 나가 싸우겠다고 했다.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나라를 위 한 일에서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한 말에서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지를 볼 수 있 다.255)
그러나 늙고 병들었다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정부에서는 이경직(李景稷)을 시켜 왜관의 왜병을 불러오려 했으나 그들이 본국의 허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이것을 빌미로 많은 왜병이 오면 의외의 우환이 생길 수 있 다고 해 그만두었다.256) 이괄난 이전에 어떤 사람이 고발해 기자헌(奇自獻) 등 38인을 체포한 일이 있었다. 이원익은 “기자헌의 죄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하물며 이 사람은 폐모론을 반대 하다가 멀리 귀양가기까지 했으니 10세를 용서할 자이다”라고 했으나, 공신들이 밤중에 모두 베어 죽여버렸다.257) 도원수 장만(張晩)은 병이 심해 사직을 원했으나 황해병사를 겸임케 해 잠시 쉬도록 했다. 이원익은 도감군과 도성 백성들을 거느리고 적을 맞아 치려고 했다. 그런 데 조금 후에 적이 임진강에 이르자 인조는 끝까지 수비하겠다던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피란 갔다. 이원익도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갔다. 며칠 후 이괄이 패해 잘린 목이 행재소에 전해졌 다. 그래서 여러 도의 군사들을 해산해 보냈다. 이원익도 인조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도원 수 장만은 머뭇거렸다는 죄로 일단 백의종군(白衣從軍)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원익은 “장만이 끝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깨트렸으니 전일의 죄를 사면할 만합니다”라고 건의해 사면 되었다.258) 그리고 인조가 “사민(士民) 중에 적에게 붙은 자가 많으니 어떻게 다스려야 하 나?”를 묻자 그는 “정말 적에게 붙은 명백한 증거가 있는 자는 마땅히 베어죽여야 하지만 만 일 들은 대로 베어 죽인다면 원한관계로 서로 모함해 사람마다 위태롭게 될까 두렵고, 또 이 제 뒤섞어 형벌을 가해 원망을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해 형벌을 줄이게 했다. 259)
이원익은 광해군의 폭정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또 이괄난으로 민심이 동요되기 쉬우니 재생청(裁省廳)을 설치해 경비를 절약하고 부세(賦稅)를 경감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종묘와 여러 능의 제수(祭需)를 줄이고, 3전(三殿: 왕, 왕비, 대왕대비전)에 올 리는 물자를 감손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동법을 여러 도에 실시해 부담을 고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동법은 거실(巨室)의 반대로 널리 시행되지 못했다.260) 또 강도(江都) 와 남한산성의 방어기구를 수리해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261) 3월에 흰무지개 가 해를 꿰뚫는 변이 일어났다. 이에 이원익은 “전번부터 살육된 자와 유배된 자가 많으니, 한 번 특사의 은전을 베풀어 인심을 기쁘게 하소서”라고 해 많은 죄인을 풀어주었다.262)
인조는 영의정 이원익이 사는 집이 초라하다고 해 관청에서 몰수한 집 가운데 골라서 주라 고 지시했다. 그는 차자를 올려 사양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263) 그리하여 교동(校洞)에 있 는 정조(鄭造)의 집을 골라 주었으나 그가 기어히 고사하고 받지 않았다 한다.264) 조정의 의논 에서 광해군이 올린 선조의 휘호(徽號)를 깎으려 하는 것을 “비록 혼조(昏朝)에서 한 일이나, 이미 휘호가 올려졌으니 지금 추론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반대해 그만두었다. 그리고 이원 익이 처음 조정에 들어왔을 때 어떤 사람이 정철(鄭澈)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자고 청하자 그 는 “신이 선조(先朝)에서 대사헌이 되어 정철의 죄를 논했거니와 정철이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다스린 데에는 실로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을 많이 했습니다”라고 해 그 논의를 중단시켰 다. 이때 정철의 아들 정종명(鄭宗溟)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자 그는 “정철이 죄 를 얽어 죽인 사람들은 분명히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니, 그 사람들의 관작을 회복시킨 뒤에 정철의 복관을 논할 수 있습니다”라고 해 이를 저지했다. 그래서 기축옥사로 죽음을 당한 사 람들은 모두 복관시켜 주었다.265)
공주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병이 심해져 해직을 청했다. 그는 “처음 신이 어가를 호위할 때 에 살 가망이 없어서 미리 동행인에게 ‘내가 길에서 죽으면 꼭 길가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는 데 지금 다행히 다시 성상의 얼굴을 뵙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인조는
“경의 한 몸은 나라가 흥하는가 망하는가 다스려지는가 어지러워지는가에 관계되는 만큼 조 정에 나오고 물러가는 것을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된다. 경은 반드시 나와 고락을 같이해 시 종 협력하고 보좌해야 할 것인데 오늘 병 때문에 이렇게까지 물러나겠다고 사임을 청할 줄 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는 매일 같이 경이 관청에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경의 사임 문건이 또 올라왔다. 나는 나라 일을 생각할 때 마음을 걷잡을 수 없다”266)
라고 해 이원익의 진퇴는 국가의 흥망과 관계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이에 인조는 8도체찰사직 을 풀어주었다.
1624년(인조 2) 11월에 이원익의 사위인 박윤장(朴允章)의 공초에 이대온(李大溫)이라는 사 람이 반역음모를 이원익에게 말했다고 해 대죄했다. 인조는 위로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했 다.267) 이원익은 21차례나 영의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끝에 영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268) 그러나 1625년(인조 3) 8월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269) 10월에 차자를 올려 김자점(金自點) 과 심기원(沈器遠)이 붕당을 지어 자기들의 뜻을 어기는 사람은 체포하는 행위를 고발했다. 인 조는 이에 대해 “뜻있는 약석(藥石) 의 말이로구나. 진실로 오늘날 듣지 못한 바로다. 내가 감 히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라고 했다.270) 11월에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역모와 연루되었 으나 사실이 아니므로 풀어주고 대궐과 가까운 곳에 옮겨 살도록 했다.271)
1626년(인조 4) 정월 14일에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啓運宮) 구씨가 죽었다.272) 계운궁의 병 세가 위독해지자 영의정 이원익,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 예조판서 김상용(金尙 容)은 인조가 선조에게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었으므로 낳아 준 부모에 대해서는 상복을 내려 지팡이를 잡지 않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들어가 대통을 이은 것 은 인정하나 자신이 양자로 간 적이 없고, 아직도 (계운궁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는 점을 들 어 3년복을 주장했다. 1년설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3년설은 잠야(潛冶) 박지계(朴知 誡)가 예론적 근거를 제공했다.273) 당시 조야(朝野)의 사림들은 김장생의 지팡이를 집지 않는 1년복을 지지했고,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박지계의 3년복을 지지했다. 영의정 이원익 등은
“3년상으로 말하면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성 인이 교화를 펴는 원칙이고 오늘날의 문제는 변칙적인 예법입니다. 전하는 직접 선조의 뒤 를 이은 만큼 선조는 할아버지이지만 아버지의 도리가 있고, 전하는 손자이지만 아들의 도 리가 있습니다. 선대 임금의 종통(宗統)으로 말하면 원칙상 더없이 중요한 문제인데 친부모 를 위해서 3년상을 입을 도리가 어디에 잇겠습니까? 심지어 ‘고’(考)라고 부른 것으로 말하 면 그것은 대체로 친족의 칭호를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 친족의 칭호를 ‘고’라고 한다고 해서 상복제도에 착오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의 의견이 단연코 이러하므 로 끝내 전하의 지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274)
라고 했고, 이에 대해 인조는
“3년상으로 말하면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다 공통된 것이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부모라고 불러왔는데 어째서 3년상을 시행하지 못한단 말인가?”275)
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런 원칙에 의해 1) 능원군(陵原君: 인조의 동생)을 상주로 세우는 것, 2) 금분(金粉)으로 명정(銘旌)을 쓰려는 것, 3) 6일 만에 상복을 입으려는 것은 안 되며, 나라의 장례 규례대로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6) 사관은 이러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논평 했다.
“이원익의 이 차자로 말하면 한 마디 한 마디가 절실한 말들이다. 임금도 옳고 그른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지극한 인정에 가리워서 끝내 선뜻 깨닫지 못한 채 예법이 아닌 예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277)
그러나 인조는 성복(成服)하는 날 자의로 지팡이를 집는 1년복[杖朞服]을 입었다. 뿐만 아니 라 소상(小祥) 후에도 길복(吉服)을 바꾸어 입지 않고 심상3년(心喪三年)을 행했다. 인조는 실 상 3년복을 입고 싶었지만 조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지팡이를 집는 1년복을 입은 것이다.278)
인조가 자기의 의견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자 이원익은
“전하는 위에서 큰 권한을 쥐고 있고 아래에다 큰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에서 정말 하고 싶 은 것을 실현하려고만 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결국에 가서는 조정의 신하들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대 임금의 계통이 두려운 노릇이고 신하와 백성들의 공 정한 의견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고명한 전하로서 응당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 니다. 한갓 그지없는 애통한 심정만 가지고 상사에 관한 예법을 문란시키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나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 는 것은 다 같이 효성스럽지 못한 것으로 됩니다. 더구나 종통과 사적인 친족 관계와는 원 칙상 엄격히 구별되는 만큼 나라 상사의 규례를 적용하는 것은 효도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 다. 죽을 날을 눈 앞에 둔 신은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날마다 전하 앞에서 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차자를 올린 다음 땅 속에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뒷날 천만 년 종묘와 사직 에 관한 근심이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늙은 신이 오늘날 말하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말 아야 합니다“279)
라고 말해 인조가 고집을 부리면 하고싶은 대로 하겠지만 국법에 따라 공변되게 상사를 치루 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리고는 30여 번에 걸쳐 사직소를 올리고 금양(衿陽)으로 물러났다. 이에 인조는 할 수 없이 1626년(인조 4) 12월에 그를 영중추부사로 전임시켰다.280) 인조는 해당관아로 하여금 대궐 아래에 있는 민가를 수리해 이원익에게 주라고 했으나 사양하고 사용 하지 않았다.281) 그는 훈련원 제조도 사임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82)
1627년 (인조 5) 정월에 후금이 침입해 평산(平山)에 이르자 인조는 강도(江都)로 피란했다. 남이흥(南以興)이 안주를 지키다가 패해 죽었다.283) 인조는 이원익을 경기 . 충청 . 전라 . 경 상 4도도체찰사로 삼아 세자(소현세자)를 따라 전주에 가서 주둔하게 했다. 장만은 평안 . 함 경 . 황해 . 강원 4도도체찰사로,284) 김류(金.)를 이원익의 부체찰사로 임명했다.285) 인조는 “경은 비록 늙었더라도 누워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면 사방이 반드시 기뻐서 몸을 솟구칠 것이 오”라고 하자 그는 “세자의 지위는 조정 안팎에 관계가 있으니, 청컨대 조정을 나누어 남쪽으 로 내려가 삼남의 민심을 유지시키게 하소서”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세자의 나이가 어리다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이에 그는 “이것은 사직을 위하는 큰 계책이니 신들은 승낙을 받아 야 물러가겠습니다. 만일 궁중에서 의논한다면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인조가 “세 자가 어려서 배움이 없는데 경은 장차 어떻게 바뜰어 주선할 것인가?”라고 했다. 이원익이 “감히 사력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그날로 우의정 신흠과 함께 세자를 따라 남쪽으 로 내려갔다. 이때 산관(散官)들이 분조(分朝)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 일행이 요란하자 그가 군 법을 엄히 시행했더니, “체부(體府)가 적은 치지 않고 물러나 행장(行裝)이나 검속하므로 막중 (幕中)의 정예병들이 모두 울분을 토하고 있으니 체찰사는 군사를 거두어 스스로 떠나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원익은 “이게 무슨 소린가? 임금께서 어린 아들을 늙은 신하에게 부탁 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일각인들 떠날 수 있겠는가? 곧 일행이 나를 몰아내더라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 행열을 정돈했다. 그리고 행열 중에 이의가 있을 때는 지성으로 설득해 열복시켰다.286) 이원익은 화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 재물을 아껴 쓰고, 백성을 사랑할 것을 건의했다.287) 3월에 후금과 강화하자 4월에 세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5월에 3 번 차자를 올려 훈 련원 제조직을 바꾸어 줄 것을 요구해 허락을 받았다. 그가 금천에 가서 성묘할 것을 청하자 인조는 본도에 명해 음식물과 제수를 넉넉히 지급하라고 했다. 9월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그 만두려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288) 인조는 승지 강홍중(姜弘重)을 시켜 이원익이 어떻게 지내 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승지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원익은 매우 심하게 야위었고 근력이 쇠약해 몸을 돌리거나 앉거나 누울 때 반드시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초가집 두 서너 칸 뿐 인데다 바람도 막 지 못합니다. 비록 여러 대의 조상 무덤이 있는 산 아래에 살지만 1무(一畝)의 토지나 몇 명의 노비도 없고 온 집안은 달마다 주는 녹봉만 가지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한다고 합니 다.289)
이에 대해 인조는
“40년간 정승으로 있으면서 두 서너 칸짜리 초가집에 비바람도 막지 못한다고 하니 그의 청백한 생활은 옛날에도 없는 것이다. 내가 한 평생 그를 존경하는 것은 그의 공로와 덕 행 뿐이 아니다. 공의 청백한 생활을 모든 관리들이 본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곤 란하게 사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그의 검소한 덕도 표창해 들어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해당 도에서 번듯한 집을 지어 주게 하며 또 해당 조에서 베 이불과 흰 요를 주게 함으로써 그가 숭상하는 검소한 덕을 실현하도록 할 것이다“290)
라고 했으나 이원익은 받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타이르자 그 집에 들어가 살았다.291) 뒤이어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주는 공신 노비를 내려 주었다.292) 이원익은 인조가 창고를 맡 은 아전을 시켜 녹봉을 실어다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293)
직위가 1품에 이르렀을 때 받은 녹봉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어 때로는 식량이 떨어 지기도 했다. 거처하는 집은 매우 협소해 무릅을 제대로 펼 수 없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거처 했다. 임금이 누차 적몰한 역적의 집을 하사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임금이 유사에게 명해 오리동(梧里洞)에 집을 짓도록 했으나 그는 두 번이나 사양했다. 그리고 다만 두어 칸 집을 지어 거처했다. 1631년(인조 9) 겨울에 임금이 흰 이불과 흰 요를 각각 하나씩을 하사하 고 이어서 “청렴하고 검소한 것이 바로 경의 신조이니 지금 이것으로 표창한다”고 했다. 선조 때 유성룡과 함께 청백리로 뽑혔는데 그는 “나는 벼슬에 있을 때 비록 조금 근신하기는 했으 나 곤궁에 처할 때에는 누가 물건을 주면 사양한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청렴이라고 할 수 있 겠는가?”라고 했다. 그가 수령을 지낸 곳에서 생사당(生祠堂)과 청덕비(淸德碑)를 세운 것을 모두 사람을 시켜 밤에 헐어버렸다.294)
1631년(인조 9) 6월 후금이 가도(.島)를 친다는 명목으로 처들어오자 금천에서 들어와 인 조를 만났다. 인조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자 이원익은 평시에 군사를 정비해 강화(江華)와 남한산성을 지키고 3남을 수습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만큼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게 마련이므로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백성 들의 먹는 문제를 풍족하게 해야 한다”295)
고 했다.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지만 이는 유교정치의 근본이기도 했다. 적이 물러가자 이원익 은 사직하고 금천으로 물러갔다.296) 인조는
“기덕(耆德)을 멀리하면 이것이 난풍(亂風)이라 했는데, 지금 영부사가 먼 곳에 있으니 어찌 기덕을 멀리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관직은 맡지 않더라도 만일 조정에 있게 되면 구정 대려(九鼎大呂: 주나라 寶器, 중한 지위)가 족히 나라를 진정한 것과 같은데, 다만 그 뜻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할 뿐이다. 나는 들으니 옛날 정승 황희(黃喜)가 언젠가 술에 취해 누워 있을 때 비가 와서 집이 새니 우산을 받쳐 비를 막았으므로 세상에서 그 청렴을 알아주었는데 지금 영부사의 청백이 어찌 황희에게 조금인들 양보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더욱 심복하는 바이다“297)
라고 해 이원익의 청백함이 황희와 맞먹는다고 했다.
1632년(인조 10) 6월에 인목대비가 죽었다. 이원익은 서울에 들어와 곡을 하고 돌아갔다. 겨울에 인조의 병이 악화되어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원익은 다시 들어와 인조를 만났다. 인조는 그에게 초구(貂.)를 하사했다. 이원익이 물러간 지 8년 동안에 5 번 서울에 왔고, 그 때마다 쌀과 반찬을 하사했으며, 시골집에 있을 때는 인조가 보내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 다.298)
1633년(인조 11) 12월 이원익은 대궐에 들어가 왕에게 하직인사를 했다.299) 나이가 86세나 되고 병이 심하니 더 이상 말릴 수도 없었다. 1634년(인조 12) 봄에 인조가 또 승지를 보내 문병했다. 그는 편지를 써서 당시 정승들에게 “성군을 힘써 섬기라!”고 하고 정월 29일 정당 에서 죽었다. 향년 88세. 인조는
“영부사 이원익은 선대 임금 때의 원로로서 청렴한 덕이 비할 데 없으므로 내가 속으로 기 뻐하고 진심으로 감복했다. 거북이나 시초로 점친 것처럼 믿고 나라의 귀중한 기물처럼 중 하게 여겨 왔는데 나라의 운수가 불행해 훌륭한 스승을 갑자기 잃고 보니 비통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부고를 들은 날에 곧 상사를 발표하는 의식을 가지려 했으나 병으로 그렇 게 하지 못했으니 내가 몹시 한스러워 하는 바이다. 관리를 보내어 제사지내 주는 일을 일 반 규례대로만 할 수 없으니 특별히 승지를 보내 제사지내 공경하고 추모하는 나의 뜻을 표시하라”300)
고 승정원에 지시했다. 그리하여 승지 이민구(李敏求)를 금천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주게 했다. 인조는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어고(御庫)에 간직한 관재(棺材)를 하사했다. 세자는 건덕방 (建德坊)에 있는 이원익의 옛집에 나아가 곡을 했고, 백관들도 모두 회곡(會哭)했으며, 도성 백성들은 모두 저자를 파하고 모여서 곡을 했다. 궁벽한 시골 백성들까지도 “우리 공이 아니 면 우리는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301) 2월에 인조는 도승 지를 보내 치제(致祭)했다. 묘는 4월 6일에 시흥(始興) 삼석산(三石山) 아래 건좌(乾坐)로 썼 다. 부인 정경부인 정씨와 함께 쌍분(雙墳)으로 묻혔다.302)
이원익은 일찍이 사위 윤영(尹鍈)을 불러
“나의 평생 지론이 혹 맞지 않기도 하고, 재물에 다달아 혹 피하지 않기도 했으며, 옳은 것 을 보고 혹 용맹을 떨치지 않기도 했으니 많고 적은 허물들은 이제 뉘우친들 소용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만일 묘에 새기는 글을 서로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면 혹 너무 떠벌려 사 실보다 지나치게 해 나의 부덕함을 가중시킬까 염려된다. 생각건대 평일에 서로 깊이 아는 사람으로서는 오직 이준(李埈)이 세상에 살아 있을 뿐이니 그로 하여금 나의 평생 이력을 순서대로 적도록 부탁하라”303)
라고 해 자기가 죽은 뒤에 자기의 이력을 부풀려 쓸까봐 평소에 잘 아는 이준에게 행장을 쓰 도록 부탁하라고 자손들에게 당부한 것이다. 신도비와 묘지(墓誌)는 부제학 이준(李埈)이 짖고, 우의정 허목(許穆)이 썼다. 행장은 대제학 이집(李楫)이, 속행장(續行狀)은 대제학 권유(權愈) 가, 시장(諡狀)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유사(遺事)는 우의정 허목이 각각 지었다.304) 그리 고 18년 뒤인 1651년(효종 2) 6월에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고, 인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었 다.305) 저술로는 『오리집』(梧里集), 『속오리집』(續梧里集), 『이상국일기』(李相國日記)306)가 있 다.
이원익은 일찍이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전에는 풍수설(風水說)이 없었는데, 한 (漢) . 당(唐) 이후에 그 술법이 유행했다. 우리 조상들의 장지는 여러 번 병란을 겪어 풀 속에 매몰되었는데, 나는 여러 종족과 더불어 그 처소를 살펴 찾아서 집에 간직한 어지럽게 쓴 글 속에 기재하고 자손들로 하여금 명절을 만나면 성묘하고 전(奠)을 드리게 한다”고 했다. 그리 고는 그가 금천에서 종장(宗丈)이 되어,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다른 곳에 장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고, 이미 다른 곳에 장사를 지낸 자도 아울러 옮겨오도록 했으며, 풍수설에 구애받 지 말고 비늘처럼 이어 붙여 쓰게 했다. 산의 주위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으나 사면의 구릉이 또한 많으니, 이후 비록 백 대를 내려가더라도 묘를 쓸 땅이 없을 걱정이 없다. 살아서는 한 집에 살고 죽어서는 한 영역에 묻히는 것이 정리상 편안한 일이다. 더구나 풍수설은 허탄하고 방서(方書)는 각각 달라 저기서는 길하다고 하고 여기서는 흉하다고 했으니 혹 저 말에 따라 이미 장사지낸 자가 있고, 또 이 말에 따라 이장을 하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땅을 골라 장사 한 것이 3-4대를 가지 못해서 처소를 잃어버리고, 그 위에 밭을 일구고 집을 짓되 묘소인 줄 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307) 대단히 합리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1630년(인조 8)에 남긴 유서(遺 書)에도
“1. 풍수가[山家]의 말은 본래 분명하지 않아 알기 어렵고, 또 주장이 여러 갈래이다. 길흉 이 서로 달라서 더욱 신빙할 수가 없다. 인생은 본래 천수가 있는 것인데, 그 길흉화복이 어찌 장지 때문에 달라지겠는가? 내가 본 것이 많고 내가 들은 지가 오래인지라 너희들은 절대로 풍수설[地術]에 현혹되지 마라! 다만 마땅히 한 산지에 같이 장사해 한 집의 골육 으로 하여금 서로 소원(疎遠)하지 말게 할 것이며, 자손 대대로 찾아볼 수 있게 해 그 처 소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을 것이다. 나의 선묘는 금천(衿川) 오리동(梧里洞)에 있는데, 고조모 이하 이제 이미 8대에 이르렀다. 늙은 내가 집안의 어른[門長]이 되어 같은 성씨의 문중 가족에게 엄책하노니 모두 다 와서 이곳에 매장토록 하라! 묘산의 산세가 둘러가며 있어 산등성이와 언덕이 무척 많으니 만일 순서대로 즐비하게 쓴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손 중에 혹시 내 말을 위배하고 타지로 나가 장사지내는 자가 있다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 내가 죽어서라도 영혼이 감시할 것이니 내 자손들은 마땅히 함께 꾸짖어야 할 것이다.308)
라고 해 풍수지리를 절대 신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에게 금천 오리동 선산에 차례대 로 산소를 쓸 것을 유언했다. 그리고 형제간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 제전(祭田)에 대해서는
“초록된 전답 각 곳은 종가에서 소유해 자손들에게 분등(分等)하지 말고, 대대로 묘지기에게 주어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묘소를 수호하게 하되, 우리 내외 자손이 대대로 이러한 취 지를 준수하고 바꾸지 말라!”309)
고 해 제전은 다른 자손에게 나누어 주지 말고 종가에서 소유해 묘지기에게 주어 묘소 수호를 하게 하라고 엄명하기도 했다.
그후 1658년(효종 9) 금양 사람들이 이원익을 위해 금천현 한천동(寒泉洞)에 한천사(寒泉祠) 를 세웠다. 이 사당에는 이원익과 고려 태사(太師) 강감찬(姜邯贊), 장령 서견(徐甄)을 함께 모 셔 삼현사(三賢祠)라고도 불렀다. 또 1660년(현종 1)에는 여주에 기천서원(沂川書院)에도 그를 배향했으며, 1676년(숙종 2)에는 예조좌랑 박징(朴徵)을 보내 한천사에 충현서원(忠賢書院)이 라는 사액을 내렸다. 1694년(숙종 20)에 증손 이상현(李象賢)이 금양에 하사한 집 옛 터에 사 당을 짖고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이 집은 인조가 하사한 것이어서 그 은혜를 나타내는 의미에서 그 편액을 관감당(觀感堂)이라 했다.310) 오리 영정(影幀)은 1) 1604 년(선조 37)에 그린 평양 생사당(生祠堂) 구장(舊藏) 영정(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유형문화 재 제 80호), 2)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도상(圖像)을 그리기 전에 그린 완평부원군이원 익화상초(完平府院君李元翼畵像草), 3) 1604년에 그린 호성공신이원익화상(2005년 7월 7일 국가문화재 보물 1435호) 등 3 본과 흉배 윗부분과 아래 족좌부분만 남아있는 17 세기에 그 린 것으로 추정되는 잔결본(殘缺本)이원익영정 1 본이 현전한다.311)
부인은 현신교위(顯信校尉) 정추(鄭樞)의 딸이요, 군수 정세신(鄭世臣)의 손녀요, 참봉 정홍 (鄭洪)의 증손녀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7세손인 정경부인 연일(延日)정씨다.312)
이원익은 자기의 성품에 대해
“나는 본래 용렬하며 남과 사귀는 일이 적었습니다. 성균관에서 있은 지 7년이요, 조정에 벼슬한 지 40년이었으나 남과 우정을 맺은 적이 적었고 남이 깊은 교의로 나를 대하는 자 도 역시 적었습니다”313)
라고 할 정도로 과묵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 났으며, 기품의 과불급을 스스로 살펴 몸을 변화시키는데 엄격하고 이치를 바르게 했다. 자신 에게 편리한 것만을 일삼지 않고,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남을 대하지 않았다. 천한 데서부터 귀하게 되고, 낮은 데서부터 높이 되었으나 하는 바는 항상 일정한 마음을 가졌다. 그는 백성 을 사랑했다. 그리하여 그가 발하는 정령에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르고, 그가 떠날 때는 비석과 사당을 지어 추모했다. 그래서 그가 근무한 안주(安州)와 성주(星州)에는 공덕비가 서 고, 평양에는 생사당이 세워졌다. 공훈이 중국에까지 알려졌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백방으 로 모함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죽을 뻔 했다. 그런데도 인조 반정이 일어나 혁명정부에서 광해군을 죽이려 하자 항복한 왕은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자 기가 모시던 왕이라고 그가 강화도로 귀양갈 때 그 전에 광해군을 왕으로 모신 관료들을 데리 고 전송하면서 자기들이 잘못 보좌한 죄가 있다고 했다. 그는 흉금과 도량이 밝고 넓었으며 표리가 일치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사기(辭氣)가 온화하고 얼굴빛과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으 나 일에 다다르면 마치 산악처럼 우뚝해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재상이 “누가 지금 세상에 성 인이 없다고 말하는가? 완평(完平)이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다. 어려울 때를 당하면 묘당(廟 에서 반드시 그의 말을 기다려서 결정했다 그는 글을 지을 때 이치를 가지고 근본으로 삼 ) . 堂 고 수식을 일삼지 않았으나 체재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보면 간략하고 담담한 것 같으나 의미 는 매우 심장했다. 임금에게 고하는 말은 지성이 넘쳐 임금을 감동시켰다. 그러므로 소차가 올라가면 사람들이 서로 전해가면서 외웠다. 그러나 그는 지은 글들을 즉시 없애버려 집에 간 직한 사고(私稿)가 없었다. 그는 “명예는 뜬 구름 같은 것”이라 했다. 그는 천하의 화복을 들 어도 족히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자율의 엄격함은 털끝 만큼의 사사로운 누로도 그 지조를 더럽히지 않았다. 거취의 용맹으로 말하면 마치 냇물이 쏟아져 흐르듯, 화살이 맹 렬하게 날아가듯 했다. 그는 60 여 년간 항상 혁혁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으니 비록 부인이나 어린 애들도 모두 그가 어진 정승임을 알아 공경했다. 사돈(큰아들 이의전이 이준의 사위) 이 준(李埈)은 그를 원우(元祐: 원우는 송 철종의 연호. 이때 당쟁이 심했다)의 완인(完人)“이라 했다.314) 그는 요행을 바라지 않았고, 세상에 구차하게 야합하지 않았다. 그는 선조 조에 2번 영의정이 되고(1599년 1월, 9월), 2 번 도체찰사(1600년 6월 4도도체찰사, 1601년 8월 3도도 체찰사)가 되었다. 광해 조에는 2 번 영의정(1608년 2월, 1611년 8월)이 되었다. 인조 조에도 2 번 영의정(1623년 4월, 1625년 8월)이 되었고, 2 번 도체찰사(1624년 8도도체찰사, 1627년 1월 4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전쟁으로 북쪽이 위태로우면 북쪽으로, 남쪽이 위태로우면 남쪽 으로 파견되어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러나 인조는 반정공신들을 의식해 그의 말을 전적으로 쓰지 못했고, 또 병 때문에 관직에 계속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는 앞일을 잘 내다 보기로도 유명했다. 죽기 전에 “나는 늙어 죽게 되었는데 지금 인사가 극도로 어지럽고 천도도 변했으 니 큰 화가 미칠 것이다”라고 예언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죽은 지 3 년 만에 병자호 란이 일어나 청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315)
권유는 이원익의 일생을 ‘충’(忠)과 ‘신’(信)으로 요약했다.
“‘충 ‘은 ‘덕'(德)의 올바른 것이고, ’신‘은 ’덕‘의 견고한 것이니, 유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바 이다. 무릇 ’충‘과 ’신‘은 나에게서 발해 스스로 다하고 사물에게 미치니 처음도 잘 되고 나중도 잘 될 수 있다. 백성들의 뜻을 모을 수도 있고 천지신명을 감동시킬 수도 있다“316)
고 했다. 이준은 이원익은 신하로서 ‘직’(直)과 ‘충‘(忠)을 중시했다고 했다. 평상시에는 온화하 다가도 인금에게 충언할 때는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317) 상식적으로 판단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결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남보다 앞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항상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먼저 해결해 주고 세금을 줄여 주자고 했다. 형벌을 완화하고, 먹고살 길을 모색해 주자고 했다. 대동법이 그 예이다. 이것이 정승이 할 일이 아닌가?
이원익은 40년간 재상직에 있으면서 훌륭하다고 인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유성룡은 공경하 게 섬긴 사람이요, 이순신은 충용하고 지략이 있는 사람이요, 조정립(趙正立)은 깨끗하고 바른 것을 지켰고,[恬潔守正], 조중립(趙中立)은 고집스럽게 지켜 흔들리지 않았고[執守不撓], 정홍 익(鄭弘翼)은 곧고 강했고[.直剛果], 강서(姜緖)는 학식이 높고 사리에 밝았고[高識達理], 오 억령(吳億齡)은 온화하고 밝았다고[溫和明亮] 인정했다. 또 윤담무(尹覃武)는 충신하고 독실하 나 단정하지 못한 벗을 사귀어 허물을 면치 못했고, 노경임(盧景任)은 명민하고 독실했으며[明 敏篤敬], 곽재우(郭再祐)는 더러 잘못은 있으나 호협하고 의리를 좋아했는데, 내가 책망하면 얼른 깨달았다. 김우옹(金宇.)은 우아하고 곧고 신실했으나[儒雅直諒], 정인홍을 멀리 피해 경기도에 떠돌았다. 정엽(鄭曄)과 이유록(李.祿)은 여주에 살 때 같이 살았는데 서로 대단히 친했다.318) 이항복(李恒福)이 김장생(金長生)에게 이원익과 유성룡 중 누가 더 나으냐고 물었 더니, “이원익의 재상의로서의 위업은 유성룡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항복이 ”유성 룡은 문집을 남겼지 않았나” 하니, 김장생이 “그것은 문사(文詞)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원익 이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의 말이 내게는 틀렸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단지 이것은 뒤에 벼슬하는 사부(士夫)들에게 근본에 힘쓰라고 권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319)
4. 치적
1) 청백리(淸白吏)
조선시대의 공직자들은 우선 청렴결백해야 하고, 행정능력을 갖추어야 했다. 청백리란 따로 제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깨끗한 성품을 가지고 직무에 충실한 사람을 뽑아 ‘염근 리‘(廉謹吏)라 했다.320) 청백리는 염근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깨끗한 성품만 갖추고 직무 에 소홀한 사람은 염근리가 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원익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라 할 수 있다. 이원익은 장자 이 의전(李義傳)에게
“청렴하면 공변되고, 공변되면 밝아진다. 정치를 하는 데는 백성에게 어질게 하고 물건을 사랑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이니, 호령이 공평하고 상벌이 사사롭지 않으면 백성이 따를 것이요, 인심이 흩어지면 만사가 다 그릇된다”321)
라고 훈계했다. 그리고 보면 청렴은 유교정치의 하나의 덕목이요, 시발점이기도 하다. 청렴해 야만 인사나 상벌에 공평할 수 있고, 백성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정(仁政) 과 덕치(德治)가 유교정치의 기본이요, 청렴은 그 시발점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직자가 되 려면 우선 자기 자신이 청렴해야 했다.
이원익은 이미 1601년(선조 34) 10월에 유성룡(柳成龍) . 허잠(許潛) . 이시언(李時彦) 등과 함께 2품 이상 염근리에 추천된 바 있다.322) 그러나 이원익은 “나는 벼슬에 있을 때 비록 조 금 근신하기는 했으나 곤궁에 처할 때는 누가 물건을 주면 사양한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청념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323)라고 사양했다.
이원익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권희(權憘)가 “이원익이 지금 수도에 있는데 자주 식량이 떨어지곤 합니다….지금 병 중에 있으니 먹을 것을 내려 주어야 합니다” 라고 해 식량을 내려 주었다. 그리고 강가에 있는 집이 바람이 차다 해 어실(御室)에 있는 담 요와 발을 걷우어 내려 주기도 했다.324) 뿐만 아니라 인조는 1631년(인조 9) 정월에 승지 강 홍중(姜弘重)을 시켜 이원익이 벼슬에서 물러나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강홍중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원익은 매우 심하게 야위었고 근력이 쇠약해 몸을 돌리거나 앉거나 누울 때 반드시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초가집 두 서너 칸 뿐인데다 바람도 막 지 못합니다. 비록 여러 대의 조상 무덤이 있는 산 아래에 살지만 1무(畝)의 토지나 몇 명 의 노비도 없고 온 집안은 달마다 주는 녹봉만 가지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한다고 합니 다”325)
라고 해 40년간 정승으로 있으면서 두 서너 칸 초가집에 비바람도 막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 게 살았다고 했다. 이에 인조는 “내가 한 평생 이원익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공로와 덕행 뿐 아니다. 그의 청백한 생활을 모든 관리들이 본받는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곤란하게 사는 것을 근심하겠는가?”하고 해당 도로 하여금 번듯한 집을 지어주게 하고 베 이불과 흰 요를 내려 주었다.326) 이원익은 그것도 사양했으나 인조가 설득해 겨우 들어가 살았다.327) 뒤이어 인조는 창고를 맡은 아전에게 녹봉을 실어다 주게 했으나 받지 않았다.328)
직위가 1품에 이르렀지만 녹봉은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어 때로는 식량이 떨어지고, 집 이 좁아 무릅을 제대로 펼 수 없었지만 태연하게 거쳐했다. 임금이 누차 집을 하사했으나 받 지 않았다. 임금이 오리동(梧里洞)에 집을 짖도록 했으나 그는 두 번이나 사양했다. 그리고 겨우 두어 칸 집을 지어 거처했다. 이에 인조는
“나는 들으니 옛날 정승 황희(黃喜)가 언젠가 술에 취해 누워 있을 때 비가 와서 집이 새니 우산을 받쳐 비를 막았으므로 세상에서 그 청렴을 알아주었는데, 지금 영부사(이원익)의 청 백이 어찌 황희에게 조금인들 양보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더욱 심복하는 바이다”329)
라고 했다. 그가 수령으로 있던 곳에서 생사당(生祠堂)이나 청덕비(淸德碑)를 세우면 사람을 시켜 밤에 몰래 헐어 버렸다.330) 한편 유생 남탁(南倬)이 상소해 이원익의 덕을 칭송하니 그 는 광해군에게 “나라의 체통이 존엄하지 못해 초야의 사람이 성상에게 맨 먼저 신을 등용해 영상을 삼은 것을 보고 감히 아첨하는 말을 지어 성상께 아뢰니 이것은 마땅히 법을 적용해 죄를 주고 또 칭찬을 받은 자도 죄를 받아야 마땅합니다”고 했다.331) 그러므로 사관(史官)도 “이원익은 몸가짐이 청백하고 소박하며, 언제나 나랏일을 근심한다”고 논평했다.332)
이러한 사례를 보건대 이원익은 3대 왕을 모시고 40년 동안 6번 영의정을, 4번 도체찰사를 역임했지만 청렴결백해 생활은 대단히 곤궁했음을 알 수 있다. 청렴이 인정과 덕치의 기본이 니 공직자로서 당연한 덕목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덕목을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게다가 이원익은 공직자로서 사명감과 소신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신이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가만히 앉아서 나라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전쟁터에서 죽음으로써 보답하기를 원합니다”333)
라고 하면서 목숨을 바쳐 진충보국(盡忠報國)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서생(書生)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해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를 겸임하게 했다.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난이 일어났을 때도 이원익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나라를 위한 일 에서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했다.334) 그리하여 도체찰사가 되어 국란을 타개하는데 목숨 을 걸고 앞장섰다. 그가 문신인데도 불구하고 국란을 당할 때마다 4 차례나 도체찰사로써 총 사령관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특유의 소신과 사명감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에 선조 도 “오직 이원익만 나라를 위해 성의를 다하고, 그밖에는 한 사람도 비슷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335) 그뿐이 아니었다. 이원익은 선조 말에 주화오국(主和誤國)의 혐의를 받고 있는 유성룡을 두 둔하다가 정인홍, 이이첨에게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한 적도 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명나 라에 사신으로 자청해 가서 왜와 공모해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으려 한다는 명의 오해를 불식 시켰다.336) 그리고 임해군 옥사, 영창대군 옥사, 인목대비 폐비 때에도 전은론(全恩論)을 내세 워 목숨을 걸고 북인의 전횡을 몸으로 막다가 홍천으로 귀양가 죽을 뻔 하기도 했다. 그는 친 청파인 김자점(金自點)을 붕당을 지었다는 죄로 제거했다. 인조는 이 말을 듣고 “뜻 있는 약석 (藥石)의 말이로구나! 진실로 오늘날 듣지 못한 바로다. 내가 감히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337) 그리고 비록 왕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원로대신으로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광해군이 북인만 두둔해 정국이 혼란해지자 이원익은
“전하가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상벌이 명확한 뒤에야 규율이 서는 법입니다. 전하는 마땅히 사사로운 뜻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338)
라고 바른 소리를 했다. 또한 인조의 어머니 계운궁(啓運宮) 구씨가 죽었을 때도 인조가 주상 (主喪)으로서 3년복을 입으려는 것을 예법대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39) 또 인조 반정 직후에 인목대비가 기어코 광해군을 죽이려 하자, 광해군은 자기가 모시던 군주이니 그 가 난정을 베푼 것은 신료들이 잘못 보좌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비롯한 신료들이 먼저 물러가야 한다고 맞서 강화도로 귀양보내는데 그쳤다. 그리고 광해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던 날에는 광해군을 모신 바 있는 신료들을 거느리고 남쪽 교외에 가서 “임금으로 하여금 이 지경이 되게 한 것은 저희들의 죄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전송하가까지 했다.340) 왕이나 대 비가 좋아하지 않아도 공론에 어긋나면 따르지 않거나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2) 안민책(安民策)
이원익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 만큼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게 마련이므로,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백 성들의 먹는 문제를 풍족하게 해야 된다”341)
라고 한 바 있다. 유교의 민유방본(民惟邦本) 정신이었다. 백성이 임금을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은 임금이 백성을 학대하느냐 어루만지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342) 이원익이 연풍현감으 로 부임하는 손자 이수약(李守約)에게 써 준 글에
“왕소소(王昭素)가 평소 송나라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했으 니 비록 사대부에게도 사리는 마찬가지다”343)
라고 했다. 이원익은 이러한 원칙에 의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가 1587년(선조 20) 10월 안주목사로 가서 보니 백성들이 관청의 착취와 기근으로 굶어죽 은 시체가 즐비했다. 이에 이원익은 감영으로 달려가 곡식 만 여섬을 달라고 해 굶는 백성을 구제하고 조선(漕船)을 멀리 있는 바닷가 고을에 보내 세곡(稅穀)을 직접 실어오게 했다. 그리 고 종자를 나누어 주고 가을에 갚으라 했더니 대풍이 들어 곡식이 창고에 그득했다. 또한 법 을 제정해 도적을 엄단하고 뽕나무를 심어 잠업(蠶業)을 장려하니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졌 다.344) 평양감사 윤두수는 이러한 선정을 왕에게 보고해 선조는 이원익에게 옷 한 벌을 하사 했다. 특히 안주는 군액의 결원이 많아 족징(族徵) . 인징(隣徵)이 횡행했다. 이원익은 창고에 있는 곡식으로 군포를 사서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가을에 갚도록 해 간교한 아전들의 농간을 방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 일을 그가 직접 가서 해결해 줌으로써 아전들이 감히 작간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술과 기생을 준비해 이원익을 환대하고자 했으나 물리치고 받 지 않았다.345)
이 때문에 임기가 찼는데도 이원익은 그 자리에 유임시키고 전임시키지 않았다. 여기서 이 미 이원익은 재상이 될 신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원익을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로 삼아 관서(關西)의 병마를 관장하게 한 것 이다. 선조는 이원익을 보내면서
“경은 전에 안주를 다스릴 때 관서백성들의 민심을 크게 샀던 관계로 지금까지 잊지 않는다 고 한다. 경은 평안도로 가서 늙은이들을 타일러 인심을 수습하라. 적군이 남쪽지방으로 깊이 처 들어와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연이어 함락되는데, 만약 적이 수도 가까이 들어닦 치면 응당 서쪽으로 옮겨가야 할 형편이다. 이런 의사를 경은 잘 알아야 할 것이다”346)
라고 해 이원익이 안주목사로서 백성을 안정시켜 관서백성의 인기를 얻고 있는 점을 이용해 선조가 장차 평안도로 피란갔을 때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이원익은 비변 사로 하여금 강변 고을 토병(土兵)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고 무명을 주어 잘 돌봐 주어야 한 다고 했다.347) 백성을 사랑해야 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군량을 조달할 수 있기 때 문이다. 전쟁 중에는 명군에게 제공할 군량을 준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이러한 군량은 백 성들로부터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반해 명군의 작폐가 심했다. 이 때문에 민란의 조짐 이 상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원익은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군량을 모으고 부교를 놓는 등 백성을 동원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하여 선조의 신임을 받아 1593년(선조 26) 10월 선조가 서울로 돌아가면서도 이원익은 계속 관서에 남아서 군민을 진무하게 했다. 유성룡도 이원익을 대신해서 평양감사를 맡을 사람이 없다고 해 유임을 지지했다.348) 이에 이원익은 부 역을 탕감해 주고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써 백성을 안정시켰다. 1600년(선조 33) 8월에 3도 (평안 . 함경 . 황해)도체찰사가 되었을 때도 그는
“지금 해야 할 일은 임진년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황폐하고 혼란한 때인 만큼 반드시 경 비를 줄여야만 무슨 일이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말이 ‘재물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비용을 절약해야만 나라의 근본이 공고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란으로 재해 를 입은 백성에게서 어떻게 함부로 거두어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백성들의 힘을 덜 어 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Brando 그렇게 해야만 백성들이 살아가는 낙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것이 제일 앞세워야 할 문제입니다”349)
라고 한 바 있다. 선조는 이러한 언행을 보고 “평양감사 이원익은 재주가 있을 뿐 아니라 검박하게 처신하고 ,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하며, 무기와 군무에 대해서도 다 극진히 조치를 취 하면서 밤낮으로 애쓴다고 하니, 만일 8도에 다 이런 사람을 얻어서 임명한다면 힘을 드리지 않고서도 성과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350)고 했다.
이러한 안민책은 서애 유성룡과 유사하다. 1594년(선조 27) 4월에 올린 유성룡의 진시무차 (進時務箚)에서
“오늘날 급한 일은 또한 여러 말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급히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정책을 쓰고, 또 수시로 변통해서 양향을 조치하고, 정용(精勇)한 군사를 불러 모아 주야로 훈련을 시키는 것 뿐입니다. 대개 먹는 것이 부족하면 사람을 모을 수 없고, 사람을 모을 수 없으면 군사를 훈련시킬 수 없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라”351)
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유성룡과 이원익은 같은 남인으로서 정치노선도 같고 함께 임진왜란 을 대처하는데 협력해 공을 세운 바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물(貢物) · 부역(賦役) 제도의 개혁도 안민책의 일환이었다.
세종대의 공법(貢法)은 정전제(井田制)의 공법에 토지의 등급을 나누는 전분육등제(田分六等 制)와 년분구등제(年分九等制)를 결합한 새로운 수조법이었다. 공법은 풍년에는 농민에게 유리 하지만 흉년에는 세금부담이 많아서 농민에게 불리했다. 조선중기에는 공납의 불균형을 해소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수미법(收米法)이 대두된 것이었다.352)
공물부담은 연산조 이래로 크게 늘어나 토지세보다 무거워졌다. 공물은 개인당 부담이 명시 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토산물로 납부하므로 부담이 불균등하고 아전의 농간의 여지가 많았 다. 이에 방납(防納)이 횡행해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그리고 조선전기에 사족층이 군역을 지지 않고 그 부담을 평민들에게 전가하며 군역을 지지 않는 노비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소민 (小民)의 군역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방군수포(放軍收布: 군인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 포를 챙기는 것) · 황구첨정(黃口添丁: 어린 애를 군정에 편입해 군포를 걷는 것) . 백골징포 (白骨徵布: 죽은 사람에게 계속 군포를 거두는 것)의 폐해가 만연했다.
이이(李珥)는 1569년(선조 2)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공물을 토지세로 전환해 1 결(結)에 쌀 1 말을 거두어 방납의 폐단을 막고자 했다. 수미법(收米法)이다. 그러나 그는 실상 공안개 정(貢案改正)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쳤다. 그후 유성룡(柳成龍)은 1594년(선조 27)에 공물작 미의(貢物作米議)를 발의해 각사 관원으로 하여금 정부에 필요한 물자를 시전(市廛)에서 구매 하도록 했다. 안민책 . 군량확보책의 일환이었다. 이 수미법은 1599년(선조 32)에 폐지되었지 만 후일에 실시된 대동법(大同法)의 전신이 되었다.353)
이원익도 안민론의 일환으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는데 일조를 했다. 대동법을 경기도 에 처음으로 실시하고 이 일을 담당할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게 한 공이 있었다. 1608년(광 해군 즉위년) 2월 26일에 영의정 이원익은
“삼가 듣자옵건대, 공물(貢物) . 군역(軍役) 등의 일이 백성에게 걱정을 끼친다는 전교가 반 포된 지 이미 오래인데도 신이 사직원을 제출하고 있고, 좌상과 우상도 서로 잇달아 연고가 있었으므로 일을 맡은 사람이 아직까지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합니다. 무릇 백성은 나 라의 근본이니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없게 됩니다. 예로부터 백성을 걱정하는 임금의 경우 는 그 나라가 항상 번창했고, 백성을 잊은 임금의 경우는 그 나라가 항상 망했습니다. 지 금 백성들이 곤경에 처해 주검이 가까이 닥쳤으니, 신은 매우 송구스러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속히 명하셔서 백성의 일을 잘 아는 사람 4-5 명을 정밀하게 뽑아 별도로 한 국(局)을 설치해 그 일을 전담시키고 시기와 실지를 조사해 궁한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 게 하소서”354)
라고 해 안민책의 일환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고 이를 담당할 국(局)을 하나 설치하자고 제안해 선혜청이 탄생되게 했다. 그러나 1609년(광해군 1) 2월 9일 광해군은
“지난날 승지 유공량(柳公亮)이 말하기를, 공물을 쌀로 거두는 일은 어려운 점이 많으니 오 래 행할 수 없다고 하기에 나도 이것은 본디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겼다. 건국 이래로 지역에 따라 공물을 바치게 한 것은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다. 방납(防納: 공물을 대신 바치 고 그 대가를 곱절로 받는 행위)과 조등(..: 간교한 꾀를 써서 물가를 오르게 하는 일)의 폐단을 고치려고 공물을 쌀로 거두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만일 폐단을 고쳐 백성을 편하 게 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먼저 기강을 세우고 혹 기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무거운 법으로 다스릴 것이나 옛 법을 변경하는 일은 삼가지 아니할 수 없다. 가령 이 일이 폐단은 없고 이익만 있다고 하더라도 궁한 봄에 쌀을 내게 하는 것은 시기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조사(詔使)가 돌아가고 가을이 되어 곡식이 흔할 때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으니, 이 뜻을 대신들에게 말해 아뢰라!” 355)
라고 해 가을에 작미(作米)하는 일은 다른 대신이 출사할 때까지 연기하기로 했다.356)
인조 초에 이원익이 제기한 경기 선혜법은 1623년 9월 23일에 충청 . 전라 . 강원 3도 대 동법으로 확대되고, 낭청 4 명을 두어 우의정 신흠(申欽)의 건의대로 경상도를 제외하고 대동 법을 시행했다.357) 이것은 방납 . 공납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실시되었지만 흉년, 호강(豪强) 의 반대, 방납자의 반발, 보관과 운송의 문제 등의 문제로 대동법 실시가 여의치 않았다. 게다 가 1624년(인조 2) 1월 24일 이괄난으로 재정이 궁핍해지자 이 틈을 타 공물 등의 수취가 가 중되었다. 이에 호강들이 우선 반대동(半大同: 중앙에만 대동법을 실시하는 것)의 폐해를 들어 대동법을 강력히 반대했다.358) 그후 이괄난이 진압되자 1624년(인조 2) 8월 29일에 경외의 모 든 잡역을 포함시키는 응행사목(應行事目)이 만들어졌다.359) 이전의 진상이나 잡역을 대동미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반대동 단계에서 진상이나 잡역 등을 모두 포함시키는 대동법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대동미의 부담을 가중시키기 때문에 공안개정과 양전을 통한 균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2월 17일 삼도대동청은
“큰 읍이나 작은 읍이나 서울로 상납하는 9두 이외에 1결당 5두를 받아 본읍 소수(所需) . 각영 소용(所用) 및 각양 진상방물(進上方物)을 모두 여기에 포함시켜 지급해도 만석이 남 습니다. 이렇게 하면 서울에 상납하는 9두 외에 외방에서 받는 것은 단지 5두로 모든 역을 그 가운데 있게 하고 다시는 더 받지 않으면 매우 편할 것 같습니다.360)
라고 해 모든 잡역을 포함하는 대동법 실시를 건의했다. 그러나 서성(徐.) . 최명길(崔鳴吉) . 심열(沈悅) 및 호강들이 반대해 2년 만인 1625년(인조 3) 2월 7일에 제안자인 이원익이 대동 법을 폐지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361) 게다가 정묘호란 등 국가의 대사가 겹쳐 대동법 부활을 미루어 오다가 1633년(인조 11) 9월 사헌부가 고 판서 권분(權目+分)이 공청감사로 있을 때 준비해 놓은 공안에 따라 공충도에서라도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했다.362) 그리고 사헌 부에서는 1634년(인조 12) 12월에 양전을 하자고 했고,363) 1635년(인조 13) 6월에 삼남지방 에 양전을 실시했다.364)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무산되었다가 1637년(인조 15) 11월에 사헌부가 다시 공안을 개정하 고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365)그리고 1638년(인조 16) 9월 27일 충청감사 김육(金堉) 은
“선혜청의 대동법은 실로 백성을 구제하는데 절실합니다. 경기와 강원도에 이미 시행했으니 본도에 행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신이 도내 결부(結負)의 수를 모두 계산해 보건 대, 매 결마다 면포 1필과 쌀 2말씩 내면 진상하는 공물값과 본도의 잡역인 전선(戰船) . 쇄마(刷馬) 및 관청에 바치는 물건이 모두 그 속에 포함되어도 오히려 남는 것이 수만입니 다. 지난날 권분이 감사가 되었을 때 도내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법을 시행하려고 하다가 하지 못했습니다”366)
라고 해 경공물(京貢物)만 수미(收米)하던 반대동을 지방 잡역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대동법을 충청도에 실시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367) 이와같이 이원익이 제기한 대동법은 정묘 . 병자 호란을 겪은 뒤 군자(軍資) 마련의 방편으로 효종 때 김육(金堉)에 의한 전국적인 대동법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대동미 16두만 내면 모든 공물의 부담이 해결되게 된 것이다.
이원익은 군병의 방수제도(防守制度)도 개편했다. 종래에는 병졸들이 1년에 3개월씩 4번 입 번(入番)하게 되어 있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입번하도록 고쳤다. 그만큼 백성들의 부담을 줄 여준 것이다. 이 제도는 뒤에 황해감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으로 실시하기에 이르 렀다.368)
3) 당쟁관
이원익은 당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보건대, 수십 년 이래로 조정에 당파가 분열되어 서로 공격해 하나의 전쟁터가 되어 나라 일은 관심 밖에 두고 있습니다. 신은 가슴을 치며 뼈에 사무치게 비통해 합니다. 만 약 신 또한 편당을 짓는 마음이 있어 차자를 올려 임금을 속였다면, 그 죄는 죽임을 당해 마땅합니다”369)
그는 당쟁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되도록 편당을 짖지 않고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 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쟁은 사림정치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적인 필요악이기도 했다. 사 림파가 막강한 훈구파와 대결할 때는 일치단결했으나 선조 조 이후 사림정치 시대가 되자 스 스로 분열해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당쟁이 생기게 된 것이다. 같은 사림이지만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동 . 서 . 남 . 북당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이 시대에 정객이라면 누구나 자의건 타의건 간에 어느 당파에나 소속되게 마련이다.370) 이원익은 동 . 서 . 남 . 북당이 생긴 내력 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옛부터 대대로 당을 나눈 적은 있었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당초 당을 세 울 때에는 동(東)과 서(西)로 이름을 붙였었는데, 서쪽이 이미 물러간 뒤에는 동 속에서 남 (南)이 생기고 또 북(北)이 생기며, 북 속에서 또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이 생겼습니다. 이 것은 바로 항간에서 붙인 이름이어서 매우 조잡하고 부끄러운 명칭이지만 그 명칭 또한 그 들이 하는 것과 서로 부합했기 때문에 진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갈라져 번갈아 나아가고 물러가니 어찌 나라 일이 피폐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371)
선조-광해 조에 동서분당, 남북분당의 상황을 왕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이원익은 이들 붕 당 중에서 분류한다면 남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물론 이원익은 재상으로서 어느 당에도 속 하지 않는 불편부당한 처사를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당론에 휩싸이지 않고 독자 적인 활동을 전개한 결과 그의 불편부당한 마음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40 년간 재상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372) 그러나 세 상 사람들은 그를 남인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정황은 다음과 같은 선조와 이원익의 대화를 통 해서도 감지할 수 있다.
선 조: 남(南)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원익: 유성룡(柳成龍) 때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유성룡 때 사람들이 쫒겨난 뒤에는 조정이 더욱 무너져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선 조: 경은 매번 유성룡을 가지고 말하니, 경의 주된 뜻은 유성룡을 내쫓은 것을 잘못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원익: 유성룡의 하는 일이 어찌 다 옳은 것이며 그 때 사류들이 어찌 다 착한 사람들이겠습니까? 그 사이에는 좋지 못한 습관과 치우치고 사사로운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 에 신은 그 당시에 매번 그들의 허물을 헐뜯었던 것입니다. 작년에 그들이 쫒겨난 뒤에 만일 대신 일어나 나라를 돕는 자들이 모두 어진 사람과 올바른 선비로서 바 른 도를 넓히고 나라 일을 정리한다면 신도 또한 마땅히 훌쩍 뛰어 일어나서 협심 해 봉직할 것입니다. 유성룡 때 사람들은 마음에 잊은 지 오래인데, 그 대신 일어난 자들이 사람들의 온건하지 못함을 크게 누르지 못하고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신은 매번 전일의 사람들이 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중약) 남인이 국정을 맡을 때에는 사(私)가 본디 많았고, 공(公)도 또한 10분의 3- 4는 있었으나 북인이 일어난 뒤에는 공도가 멸절하고 사정(私情)이 크게 행했습니다. 북인이 대북, 소북으로 갈린 뒤에는 오히려 사류로 자처한 자들이 많이 있었으 나 대북의 경우는 대부분 사당(私黨)이어서 순전히 사사로운 정을 쓰니 이들이 일어나 일을 본다면 국사는 끝장입니다.373)
이 대화를 보면 이원익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신진사류 로서 선배당인 서인 보다는 후배당인 동인에 소속되어 있었고, 급진파인 북인보다는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1591년(선조 24) 대사헌이 되었을 때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너무 부풀려 동인을 일망타진한 서인 정철(鄭澈)을 탄핵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며374), 1595년(선 조 28)에 원균을 배격하고 이순신을 지지한 것375)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1599년(선조 32)에 유성룡이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책임을 지고 쫒겨났을 때 그의 억울함을 상소한 것도 같은 맥 락이다.376) 물론 사리에 합당해서 남인의 주장을 지지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같은 정치 적 입장을 가진 당인(남인)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다. 어떻든 이원익은 조선왕조 초유의 전란인 임진왜란을 당해 유성룡과 뜻을 같이해 난국을 헤쳐 나가는데 뜻을 같이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준경의 유소(遺疏) 때에도 유성룡의 견해를 지지했고 임진왜란 때도 유성룡의 명에 따라, 또 는 유성룡의 뒤를 이어 남인의 종장으로써 정국을 헤쳐 나갔다.
이이(李珥)가 동 . 서인을 조정했다고 한 데 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언덕 아래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사람(이이)이 언덕 위에서 타일러 말리다가 두 사람(동 . 서인)을 뜯어 말리려는데, 결국 같이 끌리고 밀리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377)
라고 논평했다. 이이의 동 . 서인 조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서인의 우두머리로 지탄을 받은 사실을 비유한 말이다.
그는 특히 북인을 미워했다. 광해군이 적자(嫡子)도 아니요, 장자(長子)도 아니었기 때문에 북인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무리한 행위를 할 뿐 아니라 이를 밀어붙이기 위해 독재정치 를 했기 때문이다. 임해군옥사, 영창대군옥사, 인목대비 폐비 때마다 전은론(全恩論)을 내세워 급기야는 홍천으로 귀양을 가기까지 했으며, 정인홍, 이이첨, 홍여순 등 북인을 미워한 것도 그 때문이다.
4) 이원익과 임진왜란
이원익은 평양과 관서지방을 잘 다스린 공으로 재상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1587년(선조 20) 10월에 이원익은 안주목사에 임명되어 잘 다스렸다. 그런 경험 때문에 1592년(선조 25) 4 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평양으로 피란가게 되자 이원익을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 사를 겸임시켜 관서의 병마를 점검하게 했다.378)
이원익은 우선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량을 마련하며 군사를 모집하는 일에 급급했다. 이원익은
“각 고을에서 군대를 징발해 대기한 지 오래입니다. 각 고을로 하여금 계속해서 군량을 지 급하게 하고 있으나 도로가 멀기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많습니다. 비변사에서 강변의 토 병(土兵)에게 술 . 고기와 면포를 주어 구휼한다는 뜻을 보였으나 유독 내지(內地) 군대에 게는 남의 나라 사람 보듯 하고 있으니 호조로 하여금 전세미나 창고에 저장된 쌀과 콩을 지급하게 하소서”379)
라고 해 군사들에게 군량을 지급할 것을 요청했다. 영의정 유성룡도 적을 막는 데 가장 중요 한 것은 1) 양향(糧餉), 2) 군병(軍兵) 3) 성지(城地), 4) 기계(器械)라고 했다.380) 이를 보면 당 시에는 군량 조달이 가장 급했던 것 같다. 중종 조에 200-300만 석에 이르던 국가의 저축미 가 임진왜란 때에는 50만 석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 왜군이 점령한 지역에는 양곡이 불타거 나, 약탈당했다. 다행히 이순신 때문에 전라도가 온전했으나 실어오기가 어렵고, 관리가 제대 로 되지 않았고, 관군이나 의병들이 무절제하게 허비하고 있었다.381)
그러나 난초(亂初)에는 그래도 조정에서 파견한 조도사(調度使)와 사민(士民)들의 모곡(募穀) 활동으로 관병, 의병, 명병에 대한 군량 조달이 비교적 원활하게 될 수 있었다. 이들에 의해 모아진 양향은 바다 길로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관서 지방으로 옮겨져 국왕을 봉양하고 명군 의 양식을 대는 데 쓰였다. 1592년 11월 평양 이서의 적이 침입하지 않는 지역에는 쌀이 5만 석, 콩이 4만 석이 있어서 군량 보다는 훈련된 병사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많은 명나라 원 병이 도래하자 이제는 군사는 명병으로 대체하면 되었지만 군량 조달이 문제되었다. 이에 조 선정부는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해 양곡을 바치는 자에게는 군공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 관직 을 주도록 했다. 그리고 호남 양곡을 옮기는 책임자의 직급을 당상관으로 올려 운송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382) 또한 명병이 올 때는 군사만 온 것이 아니라 무기와 군수, 군량도 왔다. 그 러나 그 군량은 의주까지만 운송되었기 때문에 이를 명군에게 실어다 주는 것은 조선의 책임 이었다. 명군이 가져 온 양곡과 은(銀)은 은 5.832.000양(兩), 교역미두(交易米豆) 300만 양, 실용양미(實用糧米) 수십만 곡(斛), 제장상은(諸將賞銀) 3.000양, 산동양(山東糧) 20만 곡이었 다.383) 양곡운송에는 처음에 육로로 했기 때문에 연노자, 부녀자를 포함한 민간인과 훈련이 덜 된 조선군, 의병, 승군까지 동원되었다. 명군이 남쪽으로 진격해 오랫 동안 주둔하게 되자 군량 운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리하여 정유재란 이후에는 해로운송을 택했다. 이에 따 라 운량선을 급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량이 제때 되지 않으면 국내 양곡으로 대치할 수밖 에 없었다. 부족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곡식을 바치는 자에게는 관직을 주거나 천인 을 양인으로 신분 상승시켜 주거나, 서얼을 허통해 주거나, 과거합격증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분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384)
이러한 상황에서 이원익은 군량의 조달과 군병의 모집 . 훈련, 왜적 방어를 동시에 해결해 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에 이원익은 별장 고언백(高彦伯)과 출신 김진 등에게 토병 수 백 명을 이끌고 밤중에 능라도에 있는 적진을 공격해 약간의 전과를 올렸으나 왜군의 추격을 받아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더구나 군사들이 돌아오는 길에 수심이 얕은 왕성탄(王 城灘)으로 건너와 적들이 그곳을 통해 들어와 평양을 함락시키고 말았다.385) 평양성 함락 이 후 이원익은 순안으로 가서 패잔병을 모으고 전력을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정부 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은 처음에 오랑캐들끼리 싸우게 놔두려 했으나 왜군을 조선에서 막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원병을 보내게 되었다.386)
그리하여 1592년 7월 17일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명군 3천 명이 평양을 서둘러 공격했 으나 대패했다. 이에 1592년 12월에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5천군을 보내 조선을 구하게 했 다. 이 때 요동을 방비하는 비왜경력(備倭經歷)은 우시랑(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이었고, 병부 상서는 형개(邢.)였다.387) 그러나 명군은 빨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이 여송에게 평양지도를 건네 주고, 정주(定州)-안주(安州)-평양(平壤)으로 이동하는 명군을 위해 대정강(大定江)과 청천강(淸川江)에 부교(浮橋)를 놓아 주기도 했다.388) 그런데 평양지도를 만 들고 군사를 동원해 부교를 놓을 수 있었던 것은 평안도도체찰사인 이원익의 도움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명군은 강화 교섭에 매달렸고, 일본은 화전(和戰) 양면 작전을 쓰고 있었다. 조선정부는 왜 군을 완전히 축출할 때까지 강화 교섭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에 유성룡 . 이원익 . 이중 . 홍 성민 . 한응인 등은 이여송을 찾아가 조속히 진군할 것을 촉구했다.389)
10월에 선조는 환도했다. 그러나 이원익은 여전히 진무관서사(鎭撫關西使)로서 서북지방을 계속 통활하고 있었다. 이즈음 송응창과 이여송이 조정을 속이고 대일강화를 했다고 해서 행 인(行人) 사헌(司憲)을 보내 일본군이 철병하지 않고 남해안에 남아있는가를 조사하게 했다. 사헌이 명으로 돌아갈 때 이원익을 만났는데, 이 때 이원익은 일본군의 사정을 말해주고, 조 속히 군대를 출동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390) 결국 송응창과 이여송이 소환되고, 계요보정총독 (.遼保定總督) 고양겸(顧養謙)이 새 경리(經理)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의 완전 철 수를 약속한 일본 관백(關白)의 항표(降表)가 심유경의 위조임이 들어났다. 이에 고양겸은 조 선정부에게 일본을 대신해 명나라에 봉공을 청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조선은 본의 아니게 명 . 일의 강화교섭에 말려들게 되었다. 이에 명은 1595년(선조 28) 정월에 도독첨사(都督僉 事) 이종성(李宗城)을 보내어 도요도미 히데요시에게 봉왕(封王)하고자 했다가 이종성이 왜영 에서 위협을 느껴 도망쳐, 도지휘(都指揮) 양방형(楊方亨)을 대신 보냈다. 그러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속은 것을 알고 정유재란을 일으켰다.391)
이원익은 유성룡이 교체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해 평안도도관찰사에 유임되었다. 그는 조세 를 감면하는가 하면 향교를 수리해 유교교육을 강화하고 군졸을 훈련시켜 정예병을 확보했다. 392) 이원익은 총병(摠兵) 유정(劉綎)과 만나 군량조달이 어렵지만 일본군을 몰아낼 수만 있다 면 사력을 다해 군량을 조달하겠다고 약속했다.393) 또한 조선정부는 이원익으로 하여금 평안 도의 조련군을 모아 중국사신 앞에서 대대적인 사열을 하도록 했다.394)
선조는 평양탈환의 공이 있는 이원익에게 숭정대부를 제수했다. 선조는
“이원익은 평안도 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한 도의 인민들이 부모처럼 사 랑했고, 군졸을 훈련시켜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특별히 임금의 총애를 받아 이와 같이 품계를 올린 것이다”395)
라고 극찬했다. 이와 같이 이원익은 전란의 와중에서 평안도순찰사 겸 관찰사로서 다양한 시 책을 통해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고, 지역의 군사제도를 개편하며, 군사훈련, 식량조달 등 다방 면에 공로를 남겼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평안도를 지켜내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이원익의 덕이었다.396)
왜군은 남해안에 웅거해 전력을 비축해 호시탐탐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1595 년(선조 28) 6월에 이원익은 유성룡의 추천으로 우의정 겸4도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397) 체찰 부사는 김륵(金.), 종사관에는 남이공(南以恭)이 임명되었다. 이원익은 이순신을 한산도로 방 문해 완벽한 군비태세를 보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이 때 잔치를 벌인 봉 우리를 정승봉(政丞峯)이라 했다.398)
이원익은 호남지방을 돌아보고 성주로 와 그곳에 체찰부를 열었다.399) 그는 군율을 엄격히 집행했다. 예컨대 권율(權慄) . 송언신(宋彦信)과 같은 거물도 잘못하면 여지없이 처벌했다.400) 그는 영남을 좌 . 우도로 나누고 금오(金烏) . 용기(龍紀) . 부산(富山) . 공산(公山) . 황석(黃 石) . 화왕(火王) 등의 산성을 보수하도록 했다.401) 그리고 이순신은 거제도를, 곽재우는 해변 을 지키게 했다. 산성 수축은 영남출신인 정경세(鄭經世)를 기용했고, 이시발에게는 별군(別 軍)을 육성하게 했으며, 파직된 권율을 다시 기용했다.402) 그는 특히 선조가 원균을 지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비호하는데 앞장섰다. “신의 생각에는 경상도의 여러 장수들 중에 이 순신이 제일입니다”“원균에게는 미리 군사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는 말만 들어봐도 알 수 있 다.403)
1596년(선조 29) 지루하게 계속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었다. 그러자 이원익은 다시 남부 지 방으로 파견되었다. 이원익은 선조에게 “고생하는 백성들을 생각해 항상 평안도 피난시절과 같이 생활하시면 백성들에게 미치는 혜택이 클 것입니다”404)라고 충고했다. “또한 유사시에 임금이 파천하면 민심은 더욱 동요되고 중국에게만 의지한다면 국가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내전(內殿)만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임금은 끝까지 서울을 지켜야 한다”405)고 건의하기도 했다.
1596년(선조 29) 11월 일본군의 재침 조짐이 보이자 조선정부는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의 지휘 하에 이덕형(李德馨) . 김수(金粹)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창설케 하고 병력을 모집하도록 했다. 한편 정기원(鄭期遠)을 고급청병주문사(告急請兵奏聞使)로 삼아 명나라에게 강남병과 수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원익 등은 평지전보다는 산성전(山城戰) . 청야 전(淸野戰)을 준비했다.406)
그런데 서인들과 선조는 이순신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잡아가두고 원균을 대신 파견했다.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의 작간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원익은 “이순신과 원균은 그 맡은 바가 각각 있으니 처음에 가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죄될 것이 무엇인가?”407) 라 고 해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편들었다. 이 때 도원수 권율이 체찰부의 허가 없이 병력을 파견 한 적이 있었다. 이원익은 선조에게 자기가 잘 다스리지 못했으니 처벌해 달라고 요구해 권 율을 복종시킨 바 있다.408) 이원익은 스스로 성주의 금오산성(金烏山城)을 지키면서 관찰사들 의 산성전 . 청야전을 감독하고, 한편으로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을 한산도에 보내어 수군을 한산도와 운도에 나누어 주둔하게 했다.409)
한편 1597년(선조 30) 3월에 병부좌시랑 형개(邢.)를 경략어왜겸리양향(經略禦倭兼理糧餉) 으로, 우첨도어사(右僉都御使)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도독(都督) 마귀(麻 貴)를 도독비왜총병관(都督備倭總兵官)으로 임명해 5만 5천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410) 당시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3,000 명을 거느리고 남원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원익이 양국 군대를 총동원해 적을 공격할 것을 촉구했다.411) 원균이 칠전량 해전에서 패해 전사하자 왜군 은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진주, 남원, 전주로 진격해 왔다.412)
그러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해 남해안의 제해권을 되찾고, 가토 기오마사군은 곽재우에게 화왕(火王) 산성에서 패한 뒤 다시 성주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에게 패하자 왜군의 북상이 어려워졌다. 양호는 군량조달을 독촉했으나 현실적인 조건이 맞지 않아 왜군에 대한 대공세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후 조 . 명연합군이 울산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것이 제1차울산성 전투이다.413)
그런데 형개의 참모인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가 패전을 속였다고 양호를 탄핵했 다. 이에 선조는 7월에 진주사 최천건(崔天健)을 보내 양호를 변명해 주었으나 양호는 소환되고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파견되었다.414) 당시 정응태는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요동 땅을 회복하려 한다느니, 참람하게 왕의 묘호로 조(祖)와 종(宗)을 쓴다느니 하는 무고를 했다. 선조 는 이를 변파하기 위해 영의정 유성룡이 사신으로 가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는 노모가 있 다는 이유로, 좌의정 김응남은 몸이 아파서 갈 수 없다고 했다. 이원익은 유성룡에게 자원해 자기가 대신 가게 해 줄 것을 자청했다.415) 그리하여 이원익이 양경리변무사(楊經理辨誣使) 로 갔다. 정응태는 압록강에서 이원익 일행에게 돌아가라고 협박했다. 이원익은
“우리들은 국왕의 명을 받들어 천자에게 아뢰려는 것인데, 이제 만약 중지하면 이것은 임금 의 명을 어기는 것이다. 너희들이 힘으로 우리 일행을 묶어서 거꾸로 실어 돌려보낸다면 우리들은 국왕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416)
라고 하면서 끝까지 버텼다. 정응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명황에게
“신이 조선에 도착해 길가에 떨어져 있던 작은 책을 주섰는데, 모두 조선이 왜를 섬기는 절 목이었으며, 또 국왕의 선대는 다 조(祖)니 종(宗)이니 하는 칭호를 썼습니다. 지금 왜구가 왔는데, 수상 이원익이 국왕과 함께 길을 빌려 유인했으니, 이제 이원익을 금의옥(錦衣獄) 에 가두고 엄하게 문초하면 그 실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417)
라고 모함했다. 위기일발이었다. 이에 이원익은 1598년(선조 31) 9월에 연경에 도착해 통정 사(通政司)에 주본(奏本)을 올려 정응태가 조선을 모함한 정황을 낱낱이 진술했다. 이원익은
“소국은 황상께서 두 번 살려주신 은혜를 입어 임진년에 망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으니, 소국 군신은 비록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가 된다 하더라도 황상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망하지 않는 나라, 죽지 않는 백성이 실낱같이 연명해 온 지 이제 7년인 데, 이제 다시 사람들로부터 밀침을 당해 악역의 구덩이에 떨어져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 으니, 단지 소국의 사정이 참으로 애통할 뿐만 아니라, 황상께서 여러 해 동안 적극 구제 해 주신 은혜가 끝내는 한 역적을 보호한 데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배신들은 몹시 가슴이 아픕니다”418)
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원익은 부사 허성(許筬), 서장관 조정립(趙正立)과 함께 6부과관(六 部科官)과 13도 어사에게 머리를 땅에 짓찌어 피가 흐르도록 간절히 변론했다. 각노들도 “이 일은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예부도 “황상께서 정응태의 상소를 접어두고 쓰지 않 으니 이것이 바로 억울함을 씼어준 것이다”라는 해명을 듣고 귀국했다.419)
귀국하자 이이첨(李爾瞻) 등이 유성룡이 사신으로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화오국(主和誤國) 의 죄명으로 탄핵해 파직시켰다. 이원익은
“유성룡은 정사를 도운 지 10년 동안에 한 가지의 도움도 드리지 못했으니,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사로운 무리를 널리 박아 놓았다느니, 표창과 형벌에 대한 권한을 훔쳐 갔다느니, 하는 말로 공격하면서 죄악을 한두 가지만 늘 어놓은 것이 아닙니다.(중약) 그 중에 화의를 주장했다는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비난한 사 람의 의견은 물론 정당하겠지만, 그 문제의 내막도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적지 않습니 다”420)
라고 유성룡의 억울함을 변호했다. 이는 선조가 자신의 잘못을 유성룡에게 뒤집어 씌워 쫓아 내는 것을 옳지 않게 여긴 데서 나온 행위였다. 또한 화의가 명 ․ 일간에 부득이 해서 진행된 것이고 그 화의에 조선을 배제하고 있었으니, 화의의 죄를 논하려면 명 ․ 일에게 책임을 물어 야 할 것이다. 유성룡과 이원익은 온몸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극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한 데 비해 선조가 한 일은 무엇인가? 의주로 피란갔다가 여차하면 명나라에 귀의(歸依)하려 한 뿐이고,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을 감옥에 잡아 가두었다가 죽이려 한 것 밖에 더 있는가? 적반 하장(賊反荷杖)이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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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全州는 신라 景德王때부터 붙여진 지명인데 본래 백제의 完山이었다. 完山은 府남쪽 3리에 있는 小山(一名南福山. 혹은 客舍뒤의 造山을 완산이라 했다고도 한다) 으로 이 때문에 이곳을 完山이라 고 부르기도 했다. 대개 공민왕 때부터 다시 完山이라 칭해 전주이씨를 완산이씨라고도 했다. 그리하 여 度祖의 제3자 子宣을 完山伯에 봉하고, 桓祖를 完山君을 삼았으며, 太祖의 庶弟李元桂도 完山君 이라 했다. 그러나 1403년(태종 3)에 다시 완산을 전주부 고친 이후로 『璿源譜略』이나 先賢文集에 서 이씨의 본관을 전주로 쓰고 있다.(『全州李氏益寧君派譜』卷上, 源派記, 1994.)
2)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1980.1-3, 157-163쪽. 承恩(義泉君) 貞恩(秀泉君) 女+金信女+元謹禮女+朴禎女+鄭之推
3) 『전주이씨익령군파보』(回想社) 1980. 1-2쪽.
4) 동상 및 李壽長立, 昭剛公一子正義大夫義泉君墓碣陰記,(『全州李氏益寧君派譜』, 1994.) 卷上, 21-22쪽.
5) 李存道, (秀泉君)行錄(『全州李氏益寧君派譜』) 1994. 32-33쪽.
6) 沈喜壽, 昭剛公二子崇憲大夫秀泉君墓碣銘幷序(『全州李氏益寧君派譜』)1994. 24-28쪽.
7)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1980. 2쪽.
8) 『全州李氏益寧公派譜』1994. 27쪽.9) 眉.許穆, 遺事(『全州李氏益寧君派譜』1994.28-29쪽.
9) 眉.許穆, 遺事(『全州李氏益寧君派譜』1994.28-29쪽.
10) 李存道,(秀泉君)行錄(『全州李氏益寧君派譜』1994.) 33-35쪽.
11) 동상, 36쪽.
12) 동상.
13) 『全州李氏益寧君派譜』1980. 2쪽
14) 동상, 2쪽.
15) 동상, 7쪽.
16) 동상, 8쪽.
17) 동상, 2쪽.
18) 許穆,贈純忠積德補助功臣顯祿大夫行正義大夫咸川君墓誌銘(『全州李氏益寧君派譜』卷上, 1994.) 39-42쪽.
19) 동상, 40-41쪽.
20)『全州李氏益寧君派譜』1980. 3쪽.
21) 鄭蘊, 東萊郡夫人鄭氏墓誌銘幷序(『全州李氏益寧君派譜』1994.) 42-44쪽.
22)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全, 1980. 4-5쪽.
23) 동상, 5쪽.
24) 李元翼, 端川令墓碣陰記(『全州李氏益寧君派譜』, 上卷) 1994. 46-47쪽.
25)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全1980. 6쪽.
26) 동상.
27) 李元翼, 端川令墓碣陰記(『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 1994. 47쪽.
28)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全, 1994. 6쪽.
29) 동상, 6-7쪽.
30) 동상, 2-4쪽.
31) 李元翼, 通訓大夫行.谷縣令李公墓碣陰記(『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 1994. 48-49쪽.
32) 동상.
33)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全1980. 2-3쪽.
34) 『全州李氏益寧君派譜』全上卷1994. 54쪽.
35) 동상, 3-4쪽.
36) 동상.
37) 許穆, 資憲大夫完善君李公墓表陰記(『全州李氏益寧君派譜』全上卷1994. 66-69쪽.
38)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全, 1980. 158쪽.
39) 동상.
40) 『全州李氏益寧君派譜』全, 1994. 157-163쪽.
41) 許穆, 通訓大夫行宗親府典籤李公(守約)墓誌銘(『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 1994. 70-71쪽.
42) 동상, 71쪽.
43) 동상, 72쪽.
44) 동상, 73쪽.
45) 동상.
46) 동상,73-74쪽.
47) 『全州李氏益寧君派譜』全, 1994. 158쪽.
48) 許穆, 通訓大夫行宗親府典籤李公(守約墓誌銘,(『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 1994. 74쪽.
49) 동상, 157-161쪽.
50) 『全州李氏益寧君派譜』(回想社) 1980. 162쪽.
51) 동상, 162-163쪽.
52) 동상, 158쪽.
53) 동상.
54) 동상.
55) 동상, 159쪽.
56) 동상, 161쪽.
57) 동상, 161쪽.
58) 동상.
59) 동상, 157-158쪽.
60) 동상.
61) 李存道影幀(『오리 이원익 종가의 이야기』, 충현박물관) 2005. 18-19쪽.
62) 동상,158쪽.
63) 동상,157-158쪽.
64) 李元翼, 『國譯梧里先生文集』(驪江出版社) 續集附錄第1卷年譜721쪽. 앞으로는 “연보”라고만 쓰 겠다.
65) 『李相國行錄』(奎4250-49A)
66) 양원철 편저, 『梧里李元翼』- 民의 정치를 추구한 經世濟民의 실천가-(광명문화원) 17쪽.
67) 李埈, 完平府院君李元翼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1955. 850쪽. 앞으로는 神道碑銘 이라고만 표기하겠다.
68) 『李相國行錄』(奎4250-49A)
69) 양철원 편저, 『梧里李元翼』(광명문화원) 18쪽.
70) 동상.
71)神道碑銘, 852쪽.
72) 양철원 편저, 『梧里李元翼』(광명문화원) 28쪽.
73) 이양희,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韓國人物史硏究』4) 2005. 58쪽.
74) 양철원 편저, 『梧里李元翼』(광명문화원) 29쪽.
75) 동상, 28쪽.
76) 동상.
77) 동상.
78) 『李相國行錄』(奎4250-49A)
79) 연보, 722-723쪽.
80) 『李相國行錄』(奎4250-49A)
81) 연보, 723쪽.
82) 동상.
83) 李植, 諡狀(『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1995. 864쪽.
84) 『李相國行錄』(奎4250-49A)
85) 『선조수정실록』권 10, 선조 9년 정월 병신
86) 연보. 및 『선조실록』권 9, 선조 8년 12월 병술.
87) 연보, 724쪽.
88) 연보 724쪽 및 『선조실록』권15, 선조 14년 3월 신사.
89) 동상.
90) 연보, 724-725쪽. 및 『선조실록』권17, 선조 16년 8월 을묘.
91) 연보, 725쪽.
92) 동상.
93) 『선조수정실록』권 21, 선조 20년 4월 경신
94) 동상.
95) 연보, 726쪽.
96) 『李相國行錄』(奎4250-49A)
97) 연보, 72쪽.
98) 李存道, 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 監事世子師完平府院君行錄撮略(『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 1994. 55쪽.
99) 『선조실록』권 25, 선조 24년 7월 기사
100) 『선조실록』권 25, 선조 24년 9월 기축
101) 연보, 726쪽.
102) 『선조실록』권 26, 선조 25년 4월 정사
103) 『선조실록』권 26, 선조 25년 5월 갑신
104) 『李相國日記』券第一宣祖朝二十五年壬辰(奎4250-49A) 1쪽.
105) 연보, 727쪽.
106) 『선조실록』권 27, 선조 25년 6월 기해
107) 『선조실록』권 28, 선조 25년 7월 신유
108) 『선조수정실록』권 26, 선조 25년 8월 무자
109) 연보 727쪽.
110) 동상.
111) 『李相國日記』卷第1 宣祖朝二十五年壬辰(奎4250-49A)2-3쪽.
112) 『李相國日記』卷第1(奎4250-49A) 宣祖朝二十五年壬辰, 2-4쪽.
113) 『선조수정실록』권 27, 선조 26년 5월 갑인
114) 동상, 4-5쪽.
115) 동상.
116) 『선조실록』권 37, 선조 26년 4월 경인
117) 權愈, 梧里李元翼行狀(『梧里先生文集』續集附錄第2卷803쪽.
118) 『선조실록』권 37, 선조 26년 4월 무술
119) 『선조실록』권 45, 선조 26년 11월 신축
120) 동상.
121) 『선조수정실록』권 29, 선조 28년 3월 갑술
122) 權愈, 行狀, 803쪽.
123) 『선조실록』권 50, 선조 27년 4월 을축
124) 『李相國日記』(奎4250-49A) 卷第1, 宣祖朝二十五年壬辰, 5-7쪽.
125) 『선조실록』권 57, 선조 27년 11월 경진
126) 『선조실록』권 57, 선조 27년 11월 경인
127) 『선조실록』권 60, 선조 28년 2월 무오
128) 『선조수정실록』권 29, 선조 28년 3월 갑술
129) 權愈, 行狀, 804쪽.
130) 『선조실록』권 60, 선조 28년 2월 계해
131) 權愈, 行狀, 804쪽.
132) 동상.
133) 『선조실록』권 65, 선조 28년 7월 을유
134) 『선조실록』권 67, 선조 28년 9월 무술
135) 權愈, 行狀, 804쪽.
136) 동상.
137) 동상
138) 동상, 805쪽.
139) 동상.
140) 동상, 729쪽.
141) 『선조실록』권 81, 선조 29년 10월 무진
142) 동상.
143) 동상.
144) 동상,
145) 『선조실록』권 81, 선조 29년 10월 갑신
146) 『선조실록』권 82, 선조 29년 11월 기해.
147) 동상.
148) 『선조실록』권 82, 선조 29년 11월 기해.
149) 연보, 729쪽.
150) 『李相國日記』(奎4250-49A) 卷第1, 宣祖朝二十五年壬辰, 8쪽.
151) 동상.
152) 연보, 730쪽.
153) 『선조실록』권 90, 선조 30년 7월 계묘
154) 『선조실록』권 90, 선조 30년 7월 경술
155) 동상.
156) 동상.
157) 權愈, 행장, 808쪽.
158) 權愈, 行狀, 809쪽.
159) 『梧里先生文集』권 2, 奏文, 丁應泰의 誣告를 변명하는 주문(驪江出版社) 1995. 77쪽.
160) 權愈, 行狀, 811쪽.
161) 神道碑銘, 855쪽.
162) 『梧里先生文集』권 2, 奏文, 정응태의 무고를 변명하는 주문(驪江出版社) 1995. 82쪽.
163) 연보, 730-731쪽.
164) 權愈, 行狀, 812쪽 및 연보, 730쪽.
165) 『선조실록』권 99, 선조 31년 4월 병자.
166) 『선조수정실록』권 33, 선조 32년 9월 정미.
167) 『선조수정실록』권 33, 선조 32년 정월 병오
168) 『선조실록』권 108, 선조 32년 정월 303-304쪽.
169) 동상.
170) 『선조실록』권 113, 선조 32년 5월 갑인
171) 權愈, 行狀, 816쪽.
172) 『선조실록』권 99, 선조 31년 4월 정축.
173) 연보, 731쪽.
174) 『선조실록』권 124, 선조 33년 4월 무인
175) 『선조실록』권 124, 선조 33년 4월 기묘
176) 『선조실록』권 124, 선조 33년 4월 신사
177) 『선조실록』권 125, 선조 33년 5월 신유
178) 『선조수정실록』권 33, 선조 32년 11월 병오
179) 權愈, 行狀, 817쪽.
180) 『선조실록』권 131, 선조 33년 11월 기유
181) 『선조실록』권 140, 선조 34년 8월 병자
182) 『선조수정실록』권 34, 선조 33년 8월 신미
183) 權愈, 行狀, 818쪽.
184) 『선조실록』권 141, 선조 34년 9월 경자
185) 동상.
186) 동상.
187) 權愈, 行狀, 818쪽.
188) 『선조실록』권 142, 선조 34년 10월 경진 처음에는 14인을 뽑았으나 대간이 “많이 뽑으면 혼란하 기 쉽다”고 해 4 명으로 줄였다고 한다.(연보, 732쪽)
189) 연보, 733쪽.
190) 『선조실록』권 147, 선조 35년 2월 을미
191) 『선조실록』권 151, 선조 35년 윤 6월 신해.
192) 『선조수정실록』권 35, 선조 34년 정월 경자
193) 『선조실록』권 159, 선조 36년 2월 임진
194) 동상.
195) 동상.
196) 『선조실록』권 175, 선조 37년 6월 갑진 2등 공신에게는 화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를 2 등 급 올려 주었다.(『선조실록』권 180, 선조 37년 10월 기해)
197) 『선조실록』권 176, 선조 37년 7월 임자
198) 『선조실록』권 182, 선조 37년 12월 신해
199) 연보, 734쪽.
200) 『광해군일기』권 1, 광해군 즉위년 2월 신미
201) 연보, 734쪽.
202) 『광해군일기』권 1, 광해군 즉위년 2월 무신.
203)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1,(아름다운 날) 2007. 152쪽.
204) 동상.
205) 李埈, 李元翼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驪江出版社) 1995. 858쪽.
206) 權愈, 行狀, 819쪽.
207) 權愈, 行狀, 821쪽.
208) 權愈, 行狀, 820쪽.
209) 동상.
210) 『광해군일기』권 1, 광해군 즉위년 2월 무인
211) 『광해군일기』권 2, 광해군 즉위년 3월 계묘
212) 『광해군일기』권 3, 광해군 즉위년 4월 무인
213) 『광해군일기』권 12, 광해군 1년 임진
214) 『광해군일기』권 19, 광해군 1년 신유
215) 『광해군일기』권 44, 광해군 3년 8월 신묘
216) 『광해군일기』권 46, 광해군 3년 10월 임신
217) 동상.
218) 『광해군일기』권 46, 광해군 3년 10월 경진
219) 동상.
220) 동상.
221) 權愈, 行狀, 821쪽.
222) 『광해군일기』권 75, 광해군 6년 2월 임인
223) 연보, 737쪽.
224) 동상.
225) 『광해군일기』권 79, 광해군 6년 6월 을사
226) 연보, 737쪽.
227) 『광해군일기』권 87, 광해군 7년 2월 임오
228) 동상.
229) 연보, 737쪽.
230) 『광해군일기』권 89, 광해군 7년 4월 신사
231) 權愈, 行狀, 825쪽.
232) 연보, 738쪽.
233) 李埈, 李元翼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驪江出版社) 1995. 858쪽.
234) 『광해군일기』권 133, 관애군 10년 10월 무오
235) 『광해군일기』권 140, 광해군 11년 5월 병신
236) 연보, 738쪽.
237) 동상.
238) 『인조실록』권 1, 인조 1년 3월 병오.
239) 『인조실록』권 1, 인조1년 3월 임자
240) 무술훈련과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 가장 급합니다.(『인조실록』권 1, 인조 1년 3월 계축)
241) 동상.
242) 동상.
243) 연보, 739쪽.
244) 동상.
245) 『인조실록』권 1, 인조 1년 4월 신유
246) 權愈, 行狀, 828-829쪽.
247) 『인조실록』권 1, 인조 1년 4월 병자
248) 『인조실록』권 1, 인조 1년 4월 병술
249) 『인조실록』권 2, 인조 1년 7월 신묘
250) 『인조실록』권 2, 인조 1년 7월 임진
251) 『인조실록』권 2, 인조 1년 7월 갑오
252) 연보,740쪽.
253) 李埈, 李元翼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驪江出版社) 1995. 859쪽.
254) 연보, 740쪽 및 『개관5주년기념 충현박물관 소장유물도록』(충현박물관) 2008. 18쪽.
255) 『인조실록』권 4, 인조 2년 1월 기묘
256) 『인조실록』권 4, 인조 2년 2월 갑오
257) 연보, 740쪽.
258) 權愈, 行狀, 831쪽.
259) 동상, 832쪽.
260) 동상.
261) 연보, 741쪽.
262) 權愈, 行狀, 832쪽.
263) 『인조실록』권 5, 인조 2년 3월 정묘
264) 연보, 741쪽.
265) 權愈, 行狀, 833쪽.
266) 『인조실록』권 7, 인조 2년 11월 을묘
267) 『인조실록』권 7, 인조 2년 11월 경신. 박홍구(朴弘.의 옥사에 그의 조카인 박윤장(朴允章)은 공 초에서 李大溫은 張晩의 군관으로 李适의 무리들과 반역음모를 꾸미다가 체포되었다.
268) 『인조실록』권 8, 인조 3년 2월 갑진
269) 『인조실록』권 9, 인조 3년 8월 계미
270) 연보, 742쪽.
271) 동상.
272) 『인조실록』권 11, 인조 4년 1월 무오
273) 李成茂, <17세기의 禮論과 黨爭>(『朝鮮兩班社會硏究』, 一潮閣) 1995. 453쪽.
274) 『인조실록』권 11, 인조 4년 1월 무오
275) 동상.
276) 『인조실록』권 11, 인조 4년 1월 신유
277) 동상.
278) 李成茂, <17세기의 禮論과 黨爭>(『朝鮮兩班社會硏究』, 一潮閣) 1995. 457쪽.
279) 『인조실록』권 11, 인조 4년 1월 신유
280) 『인조실록』권 14, 인조 4년 12월 무신
281) 權愈, 行狀, 837쪽.
282) 『인조실록』권 14, 인조 4년 12월 계해
283) 權愈, 行狀, 839쪽.
284) 『인조실록』권 15, 인조 5년 1월 을유
285) 동상.
286) 연보, 743쪽.
287) 『인조실록』권 16, 인조 5년 4월 을묘
288) 연보, 744쪽.
289) 『인조실록』권 24, 인조 9년 1월 을유
290) 동상.
291) 연보, 745쪽. 이 집을 관감당(觀感堂)이라 했다. 편액은 1693년(숙종 19) 10월에 근곡(芹谷) 이관징 (李觀徵)이 썼다. ‘관감’이란 ‘보고 느낀다“는 뜻으로 인조가 ”내가 집을 하사하는 이유는 신민들이 그대의 청백리의 삶의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집은 1630년(인조 8)에 하사했는데,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이원익의 증손 이상현(李象 賢)이 이원익 서거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오리영우(梧里影宇)와 함께 복원했다. 관감당과 오리영 우는 1996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61호로 지정되었다. 오리영우의 편액도 이관중이 썼다.(『오 리 이원익 종가의 이야기』(충현박물관) 관감당과 오리영우 2005. 119쪽.
292) 『인조실록』권 24, 인조 9년 1월 을유
293) 『인조실록』권 24, 인조 9년 4월 정사
294) 李埈, 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驪江出版社) 1995. 860쪽.
295) 『인조실록』권 25, 인조 9년 7월 병자
296) 『인조실록』권 25, 인조 9년 7월 정축
297) 權愈, 行狀, 841쪽.
298) 동상.
299) 『인조실록』권 27, 인조 10년 12월 정묘
300) 『인조실록』권 29, 인조 12년 2월 경오
301) 연보, 747쪽.
302) 權愈, 行狀, 843쪽.
303) 연보, 746쪽 및 李埈, 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 文館春秋館觀象監事完平府院君李公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驪江出版社) 1995. 851쪽.
304) 『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1994. 4쪽.
305) 연보, 747쪽.
306) 日記는 두 종류가 남아 있다. 하나는 표지에 <稗林> <李相國日記>라고 쓰여진 古4250-49와 표 지에 <梧里日記>라고 쓰여진 古4250-49A가 있다. 후자의 경우 1 책 서두에 <李相國家錄>이 있 어 梧里의 생애를 개관하고 있다. 전자는 1930년에 일인들이 간행한 <稗林>에 수록된 <李相國日 記>를 재록한 것이다. 이 책들은 병자호란 때 다 타버렸는데 오리의 庶女가 암송해 남아있는 것이 라 한다. 선조 . 광해군 . 인조 조에 정승을 지낸 오리 이원익이 쓴 일기이니 만치 이 시대를 연구 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한명기 해제)
307) 逸事狀(『梧里先生文集』附錄卷1, 驪江出版社) 1995. 263쪽.
308) 遺書(『오리 이원익 종가의 이야기』, 충ㄴ현박물관) 2005. 56-57쪽.
309) 子孫等成文(『오리 이원익 종가의 이야기』, 충현박물관) 2005. 50-51쪽.
310) 權愈, 影堂記(『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驪江出版社) 1995. 848-849쪽.
311) 초상화(『오리 이원익 종가의 이야기』, 충현박물관) 2005. 10-17쪽.
312) 『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1994. 4쪽.
313) 副提學李廷馨에 대한 祭文(『국역 오리선생문집』, 驪江出版社) 권 1, 祭文, 61쪽.
314) 李埈, 李元翼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驪江出版社) 1995. 860-863쪽.
315) 權愈, 行狀, 844-847쪽.
316) 동상, 844쪽.
317) 神道碑銘, 862쪽.
318) 逸事狀(『梧里先生文集』권 1, 附錄, 驪江出版社) 1995. 260-261쪽.
319) 『李相國行錄』(奎4250-49A)
320) 이영춘 외, 『조선의 청백리』(가람기획) 2003. 18쪽.
321) 許穆, 資憲大夫完善君李公墓表陰記(『全州李氏益寧君派譜』上卷) 1994. 70-71쪽.
322) 『선조실록』권 141, 선조 34년 9월 경자.
323) 李埈, 神道碑銘(국역 『梧里先生文集』, 驪江出版社) 1995. 860쪽.
324) 연보, 733쪽.
325) 『인조실록』권 24, 인조 9년 1월 을유
326) 동상.
327) 연보, 745쪽.
328) 『인조실록』권 24, 인조 9년 4월 정자
329) 權愈, 行狀, 841쪽.
330) 李埈, 神道碑銘(『梧里先生文集』卷2, 續集附錄, 驪江出版社) 1995. 860쪽.
331) 權愈, 行狀, 821쪽.
332) 『선조실록』권 159, 선조 36년 2월 임진
333) 연보, 726쪽.
334) 『인조실록』권 4, 인조 2년 1월 기묘
335) 『선조실록』권 45 선조 26년 11월 신축
336) 연보, 730-731쪽.
337) 연보, 742쪽.
338) 『광해군일기』권 46, 광해군 3년 10월 임신
339) 『인조실록』권 11, 인조 4년 1월 무오
340) 權愈, 行狀, 828-829쪽.
341) 『인조실록』권 25, 인조 9년 7월 병자
342) 筵中論事(『國譯梧里先生文集』권 4, 驪江出版社) 1995. 147쪽.
343) 書與孫守約赴延豊縣(『오리 이원익 종가의 이야기』(충현박물관) 2005. 52쪽.
344) 연보, 726쪽.
345) 동상.
346) 『선조실록』권 26, 선조 25년 4월 정사
347) 『선조실록』권 26, 선조 25년 5월 갑신
348) 『선조실록』권 57, 선조 27년 11월 경진
349) 『선조실록』권 141, 선조 34년 9월 신미
350) 『선조실록』권 50, 선조 27년 4월 을축
351) 西厓先生年譜(『西厓全書』권 3, 附錄) 261-262쪽.
352) 池斗煥,仁祖代의 大同法논의(『歷史學報』第155輯) 63-64쪽.
353) 이헌창, 서애 류성룡의 경제정책론(『유성룡의 학술과 경륜」, 태학사) 2008. 122-130쪽.
354) 時務를 진달하는 차자 (『국역 오리선생문집』, 驪江出版社) 권 3, 疏箚118쪽.
355) 선혜청에서 쌀 거두는 일을 정파하지 말라고 청하는 啓辭(『국역 오리선생문집』, 여강출판사) 권 3, 485쪽.
356) 동상, 486쪽.
357) 設三道大同廳置郎廳四員分掌其事(『인조실록』권 3, 인조 1년 9월 경술)
358) (前略) 京貢物防納之弊雖除而外方橫斂猶自依舊此其所以未盡者也而外方人所以有半大同之說不 免於怨苦者也然則民之不便者也(『浦渚集』권 14, 論大同啓辭, 『韓國文集叢刊』85책) 243-244쪽.
359) 『인조실록』권 4, 인조 2년 1월 기묘
360) 『인조실록』권 7, 인조 2년 12월 정유
361) 李廷喆, 17 세기 朝鮮의 貢納制改革論議와 大同法의 成立(高麗大學校大學院史學科博士學位論 文) 2004. 27-28쪽.
362) 『인조실록』권 28, 인조 11년 9월 경자
363) 『인조실록』권 30, 인조 12년 12월 갑진
364) 『인조실록』권 31, 인조 13년 6월 신사
365) 『인조실록』권 35, 인조 15년 11월 임신
366) 『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9월 병술
367) 金堉, 『潛谷全集』(대동문화연구원) 권 6, 書狀請行本道大同狀1975. 140쪽.
368) 姜周鎭, 『梧里大監李元翼小傳』(探究堂) 1990. 157-158쪽)
369) 양철원, 『梧里李元翼』(광명문화원) 30쪽.
370)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아름다운 날) 2007. 29쪽.
371) 引見할 때의 啓辭(국역 오리선생문집』, 驪江出版社) 권 2, 2005. 100쪽.
372) 이양희,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韓國人物史硏究』) 83쪽.
373) 동상, 100-101쪽.
374) 李存道, 李元翼行錄撮要(『全州李氏益寧君派譜』) 上卷1994. 55쪽.
375) 『선조실록』권 82, 선조 29년 11월 기해.
376) 『선조수정실록』권 33, 선조 32년 정월 병오.
377) 李肯翊, 『국역 연여실기술』(고전국역원) 권 13, 선조고사본말
378) 연보 727-728쪽.
379) 『선조실록』권 26, 선조 25년 5월 갑신
380) 柳成龍, 『懲毖錄』卷16, 軍門謄錄, <移京畿巡察使文>
381) 李章熙, 「壬辰中糧餉考」-明兵의 軍糧調達을 중심으로-(『史叢』15 . 16 金學燁敎授華甲紀念論 叢』) 1971. 551-552쪽.
382) 동상, 359쪽.
383) 동상 360쪽.
384) 동상,360-369쪽.
385) 이양희,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韓國人物史硏究』4) 64쪽.
386)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사비평사01999. 34쪽.
387) 동상, 35-39쪽.
388) 한명기, 「임진왜란 시기 류성룡의 외교활동」(역사비평사) 2008. 278쪽.
389) 『선조실록』권 36, 선조 26년 3월 을해
390) 『선조실록』권 46, 선조 26년 12월 신유384) 동상,360-369쪽.
391) 이양희 앞의 논문 71-72쪽.
392) 『선조실록』권 52, 선조 27년 6월 신미
393) 『선조실록』권 56, 선조 27년 10월 신해
394) 『선조실록』권 56, 선조 27년 10월 신유
395) 『선조실록』권 60, 선조 28년 2월 무오
396) 이양희,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韓國人物史硏究』4호) 73쪽.
397) 4도는 강원 . 충청 . 전라 . 경상이요 당시의 도체찰사는 전쟁수행의 책임자로서 도원수 이하의 인 사권을 가지고 있었다.(車文燮, 「朝鮮中期倭亂期의 軍令. 軍事指揮權硏究」, 『韓國史學』5,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1983. 11쪽)
398) 『선조실록』권 63, 선조 28년 7월 정해
399) 『선조수정실록』권 29, 선조 28년 8월 신축
400) 權愈, 행장 728쪽.
401) 동상.
402) 동상.
403) 『선조실록』권 82, 선조 29년 11월 기해
404) 『선조실록』권 82, 선조 29년 11월 기해
405) 『선조실록』권 82, 선조 29년 11월 을사
406) 柳成龍, 『西厓集』권 15, 山城說.
407) 柳成龍, 『懲毖錄』권 2. 李舜臣의 下獄과 水軍의 覆沒
408) 李元翼, 『梧里集』別集권 2, 引見時奏事體相時從事官引對이원익은김해부사 백사림에게 안음의 黃石山城을 지키게 했는데 권율이 이원익의 허락을 받지 않고 兩湖의 군사로 언양 . 양산을 차단하 고, 백사림으로 의령을 방어하도록 했다.(『선조실록』권 46, 선조 26년 12월 무진)
409) 孫鍾聲, 「講和會談의 決裂과 日本의 再侵(『한국사』29, 국사편찬위원회) 1995. 113-114쪽.
410) 崔永禧, 『壬辰倭亂』(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175쪽.
411) 이양희, 앞의 논문, 79쪽.
412) 동상.
413) 崔永禧, 『壬辰倭亂』(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179-186쪽.
414) 李肯翊, 『燃黎室記述』권 17, 宣祖朝故事本末楊鎬劾去遣使辨誣.
415) 동상.
416) 동상.
417) 『선조실록』권 105, 선조 31년 10월 경신
418) 『국역오리선생문집』속집부록 권 2, 奏文, 丁應泰의 誣告를 변명하는 奏文,(驪江出版社) 1995. 77 쪽.
419) 연보, 730쪽.
420) 『선조수정실록』권 33, 선조 32년 정월 병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