梧里 李元翼의 청백리 정신과 관료적 리더십
(이영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 서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 명종 2 ∼ 1634 인조 12)은 조선시대 관료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는 격렬했던 당쟁의 시대에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의 외세 침략을 겪으면서 또 광해군대의 난정(亂政)과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정치 격변 속에서도 일호의 오점을 남기지 않고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관료 생활을 하였다.
그는 왜란 도중인 1595년(선조 28 )에 처음 우의정에 임명된 후 1634년(인조 12)까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40여 년간 정승의 지위에 있었고 여섯 차례나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 기간 중에 그는 잠깐씩 사직한 적도 있었고, 광해군 때는 4년간(1615〜1619) 유배 생활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권력의 핵심에서 퇴출된 적은 별로 없었다. 이러한 관료로서의 성공은 당시와 같은 당쟁의 시대에는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원익은 3대에 걸쳐 국왕들의 깊은 신임을 받았고, 동료와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사랑을 받았다. 당연히 그가 쌓은 업적도 많았다. 황해도 도사, 안주부사, 평안도 관찰사와 같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력의 기반을 다졌으며, 도체찰사로 전쟁을 수행할 때도 혼신의 힘을 다해 결국 7년에 걸친 왜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큰 공적은 많은 기득권층의 반대를 물리치고 시행한 대동법(大同法)이었다. 그의 건의로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처음 시행된 대동법은 효종․숙종 대를 거쳐 전국에 실시되었지만, 조선시대 공납(貢納) 제도를 근원적으로 개혁하고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한 것이었다.
이원익의 사상이나 정책은 다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의 청백리 정신과 공직 윤리로 생각된다. 이것이야 말로 그의 일생을 이해하는 키포인트가 되는 것이고, 그가 조선후기에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관료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조선시대 유학자 출신 양반 관료들의 성격을 대표하는 것이며, 현대의 공무원들에게도 큰 지침이 되고, 보통의 일반인들에게도 훌륭한 교훈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원익에 대한 연구는 그의 생애와 공적, 군사 활동, 정치 활동과 경제 정책 등에 대하여 미미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의 청백리 정신이나 공직 윤리와 그 실천에 대한 연구는 아직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1) 이 연구에서는 이원익의 관료 생활 전반을 통람하면서 그의 청백리 정신과 공직 윤리에 바탕한 관료적 리더쉽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이원익의 청백리 정신
1. 조선시대 청백리의 조건
조선시대에는 청렴하고 모범적인 관료의 표상으로 청백리(淸白吏) 혹은 염근리(廉謹吏)를 선발하고 포상하는 제도를 운영하였다.2)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된 사람은 승진이나 보직에 많은 특혜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관료로서의 큰 명예였으며, 가문을 빛내는 일이기도 하였다. 반대로 부정 부패한 관료는 탐관오리 혹은 장리(臟吏)라고 불렀다. 탐관오리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았거나 처벌받은 관리들은 장리안(臟吏案)에 수록되어 본인의 관직생활이 막히는 것은 물론 그 자손들이 과거를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3)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청백리와 탐관오리에 대한 관리제도가 엄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 안성(安星) 등 5인을 청백리로 뽑은 이래 태종 때 8인, 세종 때 15인,세조 때 8인, 성종 때 20인, 중종 때 34인, 명종 때 45인, 선조 때 26인, 인조 때 13인, 숙종 때 22인, 경종 때 6인, 영조 때 9인, 정조 때 2인, 순조 때 4인 등 모두 217인을 청백리 혹은 염근리로 선발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청백리 선발은 일정한 제도가 있어 정규적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어서 때로는 많이 뽑기도 하고 때로는 적게 뽑거나 뽑지 않기도 하였다. 효종-현종 때를 비하여 조선후기에는 한동안 청백리 선발이 중지된 때도 있었다. 또 ‘청백리’와 ‘염근리’의 분간이나 의미가 분명치 않은 것도 있고, 자료마다 명단이 다른 것도 있다. 비교적 잘 정리된 자료인 청선고(淸選考) 에는 186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밖에 자료에서 빠졌거나 비공식적으로 칭송된 청백리들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는 세종대의 황희(黃喜), 맹사성(孟思成), 성종대의 허종(許琮), 선조대의 이원익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태조 때의 심덕부(沈德符)처럼 청백리로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당대에 칭송되던 청렴한 인물들이 많았다. 반대로 청백리에 선발되기는 하였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선발된 사람들만을 청백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벼슬하는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던 과전법(科田法)은 16세기 초에 이미 무너졌고, 분기별로 품계에 따라 곡식과 베를 지급하던 녹봉(祿俸)은 그 액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에 의하면 정1품 의정급의 녹봉은 연간 총액이 중미(中米: 7분도 쌀) 14석,조미(糟米: 현미) 48석, 전미(田米: 산도) 2석, 황두(黃豆: 콩) 23석, 소맥 10석, 명주 6필, 삼베 15필, 저화(楮貨) 10장이었으므로 쌀과 잡곡이 97석, 명주와 삼베가 21필이었고, 저화는 16세기 이후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계산할 필요가 없다. 정2품 판서 급은 중미 12석, 조미 40석, 전미 2석, 황두 18석, 소맥 9석, 명주 5필, 삼베 14필, 저화 8장이었고, 정3품 당상․당하관은 중미 10석, 30석, 전미 2석, 황두 15석, 소맥 7석, 명주 4필, 삼베 13필 저화 8장이었다. 관직을 처음 시작하는 종9품은 현미 8석, 전미 1석, 콩 2석, 소맥 1석, 삼베 2필 저화 1장이었다.4) 대략 현재의 시세로 치면 의정 급이 연봉 2천 5백만원 정도, 판서 급이 2천만원 정도, 종9품 능 참봉은 3백만원 정도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조선시대 관료들의 녹봉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붕괴되고, 1647년(인조 25)에 다시 정비 되었는데, 대략 전기에 비하여 1/3 정도 감액된 것이었다.
이러한 관료들의 녹봉은, 특히 하위직의 녹봉은,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관료 자신들도 녹봉으로 생활할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녹봉이란 직무에 대한 보수라기보다 관료 신분의 상징적 의미에 지나지 않았고, 관직의 수행은 군주에게 충성하기 위한 일종의 자원 봉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사유재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상속 받은 재산이 많거나 극히 부유한 사람이 아닌 일반 관료들은 부정과 부패로 빠지기 쉬웠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부정은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지방 수령들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들은 일정하게 규정된 녹봉 대신에 고을마다 설치된 아록전(衙祿田)에서 각 고을의 형편과 관례에 따라 보수를 받도록 하였다. 수령과 가족들의 현지 생활에 필요한 식량이나 기타 물자들을 공급하기 위하여 관청색(官廳色)이라는 향리 부서가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 고을의 수령들은 그 지방의 규모나 재정 형편에 따라 지급 받는 보수가 달랐다. 이 때문에 부유한 고을과 빈한한 고을에 대한 선호도가 다르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지방의 수령들은 녹봉이 획일적으로 지급되는 서울의 중앙 관리들과는 달리 보수를 받는데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지방에는 환곡의 모곡(耗穀: 이자)과 같은 재원이 있어 수령들의 생활이 한결 윤택하였다. 또 지방에는 서울에 비해 견제나 감시가 적었으므로 수령들이 향리들과 결탁하게 되면 얼마든지 부정부패를 자행할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관료들 중에는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자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의 중앙 관료들은 명예를 중시하였고 또 출세를 하기 위하여서라도 자기 관리에 노력하였지만, 지방관들은 경제적인 실리를 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히 부정부패에 물들기 쉬웠다.
청렴을 해치는 부정이나 부패의 유형은 대체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위정자나 관리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을 남용하여 백성들에게서 직접 수탈을 행하는 일 즉 가렴주구이며, 또 하나는 직무와 관련하여 불공정한 특혜를 준다든지 불법이나 비위를 묵인해주고 이권에 개입하여 뇌물을 받아 사복을 채우는 일이다.
오늘날 공직자들의 부정은 대부분 후자의 경우가 많지만, 전통시대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대체로 전자의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극히 일부 행정기관의 말단 조직에서 대민 업무를 담당하는 하급 공무원들을 제외하면 국민들을 직접 착취하는 공직자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전근대시대에는 통치나 행정에 법률이나 행정규범들이 완비되지 않아 관리들의 재량에 맏겨진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법에 의한 통치라기보다 사람에 의하여 통치되는 성격이 강하였던 것이다. 특히 지방관들은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관리들의 품성에 따라 백성들에게 주는 혜택이나 고통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리들의 막대한 재량권에 비해 그들을 견제하는 장치는 미비하였기 때문에 위정자나 관료들의 개인적 인품 수양과 도덕성의 함양이 더욱 중시되었다. 따라서 전근대 시대 청렴의 주된 과제는 뇌물 수수의 방지보다 백성들에 대한 직접적 수탈의 방지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 때문에 지방관들에 대한 청렴도가 더욱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청렴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앞세워 조금의 융통성도 두지 않는 정치는 역시 비판을 받았다. 위정자로서 지나치게 엄격한 행동과 각박한 정사는 인정에 어긋나기 때문에 군자가 취할 정치 행태는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하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관리가 탐욕스러우면 백성은 그래도 살 길이 있지만, 너무 각박하게 청렴하면 살길이 막힌다”는 고사를 인용하고, 이 때문에 청백리의 자손 중에는 잘 되는 사람이 드물다고도 하였다. 다산은 지나치게 우직한 청렴보다는 행정에서의 명민한 판단과 융통성을 중시하였다.5) [목민심서]에는 바람직하지 않는 청백리의 사례로 명종 때의 관리 김현성(金玄成)의 고사를 들고 있다.
명종 선조 때 여러번 지방관을 지내고 고관이 되었던 김현성(金玄成)은 손을 씻은 듯이 깨끗하게 직책을 수행하여 청렴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성품이 소탈하고 방만하여 실무에 익숙하지 않았고, 매질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고 담담하게 거처에 앉아 종일토록 시를 읊조리면서 지냈다.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김현성이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였지만 온 고을 백성들이 원망하여 탄식한다. 티끌만한 것도 사사로이 범하지는 않았지만 관청 창고는 항상 바닥이 났다”고 하였다.6)
조선시대 청백리의 요건에는 청렴뿐만이 아니라 능력이나 업적도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그래서 국가에 상당한 공적이 남을 만큼 직무를 수행하는 능력과 성실성이 우수하여 동료들로부터 칭송받을 정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청백리나 염근리에 선발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당대에 고관을 지낸 사람들이었다.
공자가 정(正)과 직(直)을 강조한데 비하여 맹자는 공직자나 선비의 자세로 염치(廉恥)를 강조하였다. 염치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맹자는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이야 말로 부끄러운 일”7)이라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맹자는 사람의 인간 됨됨이에서 염치가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말하였다. 그것이 없이는 사회에서 존중받기 어렵다. 때로는 이것이 지나치게 사람들의 마음을 죄어서 사회활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조장하기도 하였지만, 위정자들이나 관료들에게는 이것이 욕심을 단속하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이 역시 전통시대 청렴정신을 기르는 한 사상적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청렴’은 유교에서 드러나게 표방하는 주요 교리의 조목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던 유학자들이 공직자의 윤리로서 매우 중시하였던 것이다.
유교에서는 위정자들의 부귀(富貴)를 무조건 배격한 것은 아니다. 공자에 의하면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부귀하게 되지 못하는 것이 수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나라에서는 도덕과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기 때문에 벼슬을 하고 부귀하게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라가 무도한 지경에 빠지게 되면 부귀하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그 자신도 무도하게 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8)
공자도 부귀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도를 굽히고 떳떳하지 못하게 얻으려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자는 “부귀는 사람마다 바라는 것이지만 그것을 정도로써 얻지 않으면 거기에 머물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빈천에 대하여는 “그것이 사람마다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도에 의해 그렇게 되지는 않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라”고 권고하였던 것이다.9)
2. 이원익의 청백리 정신
이원익은 1601년(선조 34)에 ‘염근리’로 선발되었다. 이때의 염근리 선발은 이조에서 먼저 대상자를 추천하고 의정부에서 최종적으로 심의하여 국왕에게 보고하는 절차를 거쳤다. 1차 심사에는 유성룡(柳成龍) 이원익 등 13명이 선발되었지만 최종 심의에는 이원익 유성룡 허잠(許潛) 이시언(李時彦) 4사람만 통과되었다.10) 당시 의정부에서 심사를 주관한 사람은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었다. 그들의 심사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실록(實錄)에 기록된 사관(史官)들의 평가는 아래와 같다.
이때에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여 한 점의 흠이 없는 자는 참으로 많이 얻을 수가 없었지만, 이원익 같은 사람은 성품이 충량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奉公)하는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의식(衣食)이 넉넉지 못하여 일생 동안 청빈하였는데, 이는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인데도 홀로 태연하였다.11)
그러나 이 염근리 선발에 대하여 이원익 자신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자신이 그다지 청렴하게 살아오지 않았으며, 사사로운 청탁을 한 적도 많았다는 내용이다.
신(臣)은 세업(世業)이 풍부하지 못한데다 전란 뒤에 더욱 피폐하였으니, 생활에 힘입을 만한 전택이나 노비가 없고 10년의 전쟁 속에 녹봉이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가족들이 춥지 않게 옷 입고 굶주리지 않게 밥 먹으며 편안히 살아 온 것은 어찌 스스로 농사를 짓고 어찌 스스로 길쌈을 해서이겠습니까? 자세히 따지만 터럭끝 만한 것도 모두 다른 사람의 물건인 것입니다. …… 친구로서 외직에 있는 자가 선물을 보내온 것도 일찍이 받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종시 한 바가 이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이런 이름이 신에게 가해 진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신이 탐욕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여 이 이름을 가했다고 하면,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이 선발에 참여되어야 마땅합니다. …… 신은 전후를 통하여 집안의 사적인 일을 가지고 남에게 요구하기도 하고, 청탁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남의 이목에 알려져 있으므로 신은 스스로 엄폐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청렴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신하들을 권장할 수 있겠습니까?12)
이러한 말은 이원익 자신의 겸양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대부 관료들의 경제생활의 한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원익이 동분서주하였던 임진왜란 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난이 끝난 후에도 국가의 재정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관료들이 제대로 녹봉을 받지 못하여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이원익은 물려받은 토지나 노비와 같은 기본 재산도 없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으며 상공업과 같은 영리활동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는 45세에 이조 판서가 되었고 49세에 정승이 되었으므로 상당한 녹봉을 받을 수 있었지만 국가의 재정 형편 때문에 그것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는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봉되었으므로 노비 9명, 전답 80결(24만평) 등을 받아야 하였지만, 역시 재정 형편 때문에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11명(3남 8녀)의 자녀가 있었으므로 그들을 양육하고 결혼시키는데 지출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승으로 있던 중년까지도 상당히 궁핍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원익 집안은 대대로 서울의 서소문 밖 유동리(楡洞里)에 살다가 중년에 동대문 근처 성균관미나리 밭 옆에 집을 마련하여 이사하였으나 폭우로 물이 넘쳐 축대가 떠내려가고 집은 왜란 때 허물어졌다. 아들인 이의전(李義傳)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이 집을 재건하였으나, 이원익은 부친의 종손이었던 이수함(李守諴)에게 주고 말았다.13) 그는 원주에 옛집(草家)이 있었으나14) 노년에는 주로 금천(衿川) 오리(梧里)의 선영 아래에 작은 초가를 짓고 살았다. 1631년(인조 9) 그가 85세가 되었을 때 인조는 여기에 좋은 집(正堂: 觀感堂)을 지어 주고, 아울러 받지 못한 공신 노비를 다른 예에 따라 내려주도록 하였다.15) 그는 이를 모두 사양하였지만 윤허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의 자손과 조카들도 문음으로 추천되어 관직에 나아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원익은 벼슬에서 은퇴한 노년에는 상당이 유복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원익은 그 자신의 말처럼 완벽히 청렴결백하게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관직에 있을 때는 대단히 엄격히 자신을 관리하였고 부당한 이익을 탐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친구들 사이에 관례적으로 행해지던 도움은 많이 받았다. 그리고 지방관들이 보내오는 연례적인 선물도 과도하지 않은 정도로 받았다.16) 심지어 그는 친한 사람들에게 사사로운 부탁을 하기도 하고 재물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생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나는 평생에 지론(持論)이 이치에 맞지 않을 때도 있었고, 재물에 다다라 능히 피하지 못한 적도 있었고, 의리를 보고 능히 용맹하게 나아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17) 이는 그가 곧이곧대로만 사는 꽉 막힌 인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사대부 사회에서 폭넓게 행해졌던 선물의 관행은 그들의 어려운 경제생활을 보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근래에는 이러한 관례적인 선물의 경제적 의의에 주목하여 이를 ‘증답경제(贈答經濟: Gift Economy)’라고 부르는 연구자들도 있다.18)
친지들의 도움은 물론 그가 높은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그것이 완전히 대가성이 없었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원익은 자신이 염근리로 선발되었을 때 차자를 올려 자신의 허물을 실토하면서 극구 사양하였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탐욕’에 빠지지 않은 정도의 관료로 자처하였을 뿐이다. 사실 조선시대에 이러한 관료들은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나 후대에 그를 청백리의 표상으로 칭송한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그가 오래 동안 고관대작의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빈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1591년(선조 24) 45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595년(선조 28) 49세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40여 년간 대신의 지위에 있었지만, 변변한 집 한 채가 없을 정도였다. 서울에 있는 집은 宗孫에게 주었고, 여주와 금천의 허술한 초가집에서 지내면서도 편안히 여겼다. 그는 천성적으로 검소하였고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을 싫어하였다. 실록에서 전하는 금천에서의 생활 모습은 아래와 같았다.
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衿川)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19)
이원익이 85세가 되던 1631년(인조 9)에 인조는 승지를 금천의 시골집으로 보내어 안부를 묻고 그의 만년 생활을 알아보게 하였다. 승지는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가 살고 있는 집은 몇 칸의 초가에 불과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대대로 선영(先塋) 아래에서 살아오면서도 한 두락의 밭이나 두어 명의 노비도 없이 그저 온 식구가 월봉(月俸)으로 겨우 입에 풀칠한다고 하였다. 이에 인조는 탄복하여 말하였다.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의 초가에 살면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이야말로 옛날에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그를 경모했던 것은 그의 공덕 때문만이 아니다. 이공의 맑고 검소한 삶의 태도를 여러 관료들이 본받는다면 백성이 곤궁하게 될까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의 검소한 덕행을 높이 표창하여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해도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주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무명이불과 흰 명주 요를 주게 함으로써 그의 높은 정신이 이어지도록 하라.20)
이원익은 상소를 올려 저택을 사양하였으나, 인조는 부드러운 말로 허락하지 않고, 아울러 공신에게 내리는 노비를 다른 예에 따라 주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도 사패(賜牌)로 주는 토지와 노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관직 생활로 관사(官舍)에 살 때도 일부러 좋은 건물을 버리고 누추한 집에 살기도 하였다. 1601년(선조 34)에 그는 3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평안도 성천(成川)에 막부(幕府)를 개설하였는데, 성천의 옛 관사가 크고 사치스럽다고 하여 여기에 거주하지 않고, 소박하고 누추한 하실(下室)을 택하여 거처하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을 누대인 강선루(降仙樓)에 마초(馬草)를 쌓아 두고 자신은 물론 군관(軍官) 자제들이 올라가 놀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1619년(광해군 11) 봄에 유배에서 풀려난 후 5년간 여주 앙덕리(仰德里)에 초가를 지어 살았는데,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이웃에 홍여순(洪汝諄)의 호화로운 별장이 있어 관
리인이 그에게 임시로 거처하도록 하였으나 그는 사치스럽다고 하여 따르지 않았다.21)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주는 것도 싫다고 하고 일부러 누추한 곳에 사는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이 매우 특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둘째, 그는 평소에 자기 관리에 철저하였지만, 관직에 있을 때는 더욱 조심하였다. 일체의 부정에 연루되지 않았고 사사로운 청탁을 행한 적도 없었다. 시장(諡狀)의 다음 구절이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公)은 사양하고 받는 것과 자신이 취하고 남에게 주는 것을 일체 의리에 입각하여 결단하였을 뿐, 조금도 뻐기거나 아까워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청렴한 절조가 너무도 높아, 뇌물 꾸러미를 들고서 감히 가까이 다가올 수 없었음은 물론이요, 열읍(列邑)에서 세시(歲時)의 예물로 으레 올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품목이나 수량이 조금 넘치기라도 하면 문에서 하인이 벌써 알아서 물리치곤 하였다. (중략)
시간이 나면 오직 친척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는데, 그러면서도 관직에 천거하여 임명하게 하거나 그들이 청탁하는 일을 들어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공은 언젠가 말하기를, “내가 일찌감치 장상(將相)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쯤 되면 나의 신분이 존귀해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의(時議)와 서로 어긋나는 때가 많아서 내 한 몸 도모하기에도 바빴으니, 어떻게 감히 친지(親知)와 고구(故舊)를 논하며 천거할 틈이 있었겠는가.22)
어떻게 보면 이원익은 꼭 청렴한 관리가 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여 그렇게 되었다기 보다는 타고난 천성과 수양의 내공으로 인해 생활 자체가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는 성품이나 처신이 본래 청백하였고 공직 윤리에 대한 의식도 철저하였다. 그는 품성이 명민하여 사리판단이 정확하였으며, 정사에 근면하고 정신을 집중하였으므로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인간적인 면이 풍부하였으므로 당대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대북파(大北派)의 정적들도 외경심을 가지고 함부로 그를 비난하지 못하였다.23) 이러한 그의 품성과 태도가 높은 평가를 받고 사랑과 존경을 받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3. 이원익의 관료적 리더쉽
1. 이원익의 공직 윤리
이원익의 공직에 대한 규범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는 생질(외손자?)인 이덕기(李德沂)와 손자 수약(守約)이 지방관으로 나갈 때 써서 준 두 편의 훈계서이다. 이덕기에 대한 훈계서는 30여 조항을 넘는 장문의 글이고 손자에게 수약에게 준 글은 10여조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조선후기 지방관의 마음 자세와 행정 실무에 대한 표준 지침서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이원익 자신의 공직 윤리와 행정 경험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 이덕기(李德沂)에게 준 훈계서24)
1. 일을 처리할 때 강경함과 유순함의 중도를 지켜라.
2. 인심이 근본이니 인심을 잃지 말라.
3. 백성을 사랑하고 물자를 아끼며, 신상필벌로 공평무사하게 하라.
4. 분노를 억제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라.
5. 여색과 말을 조심하라.
6. 술을 절제하라.
7. 분노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죄가 드러난 후에 공평하게 처리하라.
8. 백성은 사랑으로 대하고 관속(官屬)은 엄하게 대하라.
9. 관속의 폐단은 시정하고 과오는 용서하지만, 거짓말이나 작폐는 엄하게 다스리라.
10. 형벌은 신중하게 처리하라.
11. 자신을 바로 잡은 후에 남을 바르게 하라.
12. 사리사욕을 버리라.
13. 사사로운 정에 끌리지 말고, 관아의 내외를 단속하라.
14. 가정에서는 적서의 구분을 엄하게 하라.
15. 전관의 허물을 욕하지 말라.
16. 공개적으로 통하지 않고 샛길로 통하려는 자는 엄단하라.
17. 백성의 소장은 즉시 처리하라.
18. 백성의 호소는 전심하여 자세히 들으라.
19. 백성의 소장은 직접 확인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라.
20. 송사는 확실히 조사하여 법대로 판결하고 규정 외의 수수료를 받지 말라.
21. 중대한 소장은 서류함에 잘 보관하라.
22. 살인 사건의 범인과 공범은 신속히 채포하고 직접 검시하며, 무관한 자는 연루시키지 말라.
23. 도망간 노비 소송은 주인이 직접하게 하고, 숨긴 사람에게 찾아내도록 하지 말라.
24. 윤리 기강이나 풍속 범죄는 잡아들여도 좋다.
25. 향교 제사와 운영에 힘쓰고 유생을 예우하라.
26. 환곡의 수납은 추수 직후에 기간을 통지하여 하고 지연시키지 말라.
27. 관청 소요 물품은 직접 받아들이고 남징하거나 남용하지 말라.
28. 관청의 물자는 조심하여 절약해 쓰라.
29. 백성들의 집단 민원(등장)은 즉시 자세하게 조사하여 중요한 것은 감사에게 보고하고 경미한 것은 자신이 처리하라.
30. 유향소의 좌수를 잘 임명하여 자문을 구하라.
31. 각종 군적은 항상 가까이 두고 결루된 인원은 서서히 채우고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말라.
32. 도망간 군사의 친족 연대책임은 원근친소에 따라 명백히 정하고 함부로 침징하지 말라.
33. 연대 책임은 적절히 부과하고 누락분을 함부로 보충하려고 하지 말라.
34. 항상 직분에 충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라.
◇ 손자 수약(守約)에게 준 훈계서25)
1. 아버지의 청렴과 간명(簡明)을 본받으라.
2. 백성을 사랑하고 욕심을 적게 하라.
3. 일의 실정을 자세히 알아야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다.
4. 포악과 분노를 경계하고 일의 실정을 잘 파악하라.
5. 신상필벌을 시행하되, 상을 준 사람은 잊지 말고, 벌을 준 사람은 잊어버리라.
6. 성과를 이루려기보다는 폐단을 제거하는데 힘쓰고, 일을 만들기 보다는 일을 줄이라.
7. 일을 처리할 때 원로들에게 물어 인정에 합치기를 힘쓰고, 자신만 옳다고 오만하지 말라.
8. 백성은 잘 어루만지고 관속은 너무 각박하게 대하지 말라.
9. 모든 일은 그때그때 성심을 다하고, 시시콜콜히 지휘하지 말라.
이들 두 편의 훈계서에서 나타나는 이원익의 공직 윤리와 지방관의 바른 도리 그리고 행정 실무에 대한 지침을 정리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가. 윤리적 기초 확립
이원익이 가장 강조한 것은 관료로서 혹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윤리 확립을 통한 자기 관리의 문제였다. 즉 공직자의 기본적인 도리는 먼저 개인적인 수양을 통해 도덕적인 자세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심성의 수련을 통한 도덕적 기초의 확립은 유학자들의 보편적인 과제였지만, 공직자에게는 특별히 엄격한 자기 관리[律己]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상당히 수양된 사람이라도 실제로 일을 맡게 되면 초심을 지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원익은 관직에 나아가는 자손들에게 이 점을 특히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 훈계서에서 보는 것처럼 관직 생활에서의 청렴과 행정에서의 간명(簡明)함을 대강으로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물자를 아끼며 인심을 잃지 말고, 여색(女色), 언어(言語), 음주를 경계하며, 전관의 허물을 욕하지 말고, 항상 직분에 충실하며 국사에 마음을 다하라는 것은 양심적인 관료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바로 잡은 후에 남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며, 사리사욕을 버리고 사사로운 정에 끌리지 말며, 관아의 내외를 잘 단속하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나. 행정의 요체 : 정확 신속 간명(簡明) 그리고 현장 중심
이원익은 일을 처리할 때 그 실정을 정확히 파악할 것을 무엇보다 중시하였다. 그는 “천하의 사정에 정통하면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26)는 옛 교훈을 들기도 하였다.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또 그는 사리를 판단할 때 자신만 옳다고 독단으로 처리하지 말고 고을의 元老들에게 널리 묻기도 하고 유향소의 좌수를 잘 임명하여 자문을 구하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든 일은 그때그때 성심을 다하면 되고, 매사를 시시콜콜히 지휘하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이원익은 행정의 신속한 처리를 중시하였다. 백성들의 소장은 자세히 듣고 즉시 처리하며 범인은 신속히 채포하고, 환곡 수납은 지연시키지 말며, 백성들의 집단 민원[等狀]은 즉시 자세하게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지방관들이 사건 처리를 지연시키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한 데다 향리들에게 위임시키는 일이 많고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환곡 수납을 독촉하는 것은 가혹한 것 같지만, 곡식이 있을 때 받아들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을 지연시키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원익의 신속한 행정은 그가 안주 목사로 부임하였을 때 잘 나타나고 있다.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에는 그가 안주의 기민(饑民)들을 구제한 일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公은 임명받은 그날로 곧장 길을 떠났는데, 막상 가서 보니 온 경내(境內)가 기근(饑饉)으로 죽기 일보직전에 놓여 있었다. 즉시 조운선(漕運船)을 출발시켜 해읍(海邑)에 가서 미리 대기하도록 하고, 자신은 관찰사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하여 해읍의 곡식 1만여 석의 방출을 요청해 허락을 받은 다음에, 곧바로 해읍으로 말을 달려 창고에서 곡식을 꺼내 배에다 싣고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안주(安州)까지 운송하였다. 그리고는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고 종자를 나눠 주자, 백성들이 비로소 소생의 기미를 보이게 되었다. 모두 말하기를, “이번 정사(政事)가 조금만 지연되었더라면 우리들이 벌써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가 중시한 것은 행정의 신속함과 간명한 행정이었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면 처리하기도 어렵고 부정이 개입하기 쉽게 된다. 지방관들은 의례 성과를 올리는 일에 급급하기 쉽지만 그는 성과 달성보다는 누적된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그리고 새로 일을 만들기 보다는 일을 줄여 나가는 것이 행정의 요체임을 설파하였다.
조선시대 수령들은 향리들에게 의존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그들에게 위임시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원익은 가능한 한 수령이 직접 현장에 나가 사무를 처리하도록 요청하였다. 특히 백성의 소장이나 집단 민원 같은 것은 수령이 직접 확인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청의 소요 물품 수납과 같은 자잘한 일도 수령이 직접 챙기고 아전들에게 위임하지 말도록 하였다. 재정이나 회계를 향리들에게 맡겨두면 부정부패가 만연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원익이 안주부사로 있을 때 군량을 변경의 진영에 운송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은 의례 군관들이나 향리들이 담당하였기 때문에 운송과 수납 과정에서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자기가 직접 현지까지 운송을 지휘하여 납부하였기 때문에 현지 담당자들이 일체 농간을 부리지 못하였다. 현직 부사가 군량 운송까지 직접 담당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다. 공명정대함과 온건한 행정
관속과 백성들 중에는 일의 처리나 소장을 올릴 때 공개적인 방법으로 하지 않고, 샛길로 통하려 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인데, 이원익은 이러한 폐습을 통렬히 배척하고 엄단하도록 훈계하였다.
이러한 일은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길이 통하게 되면 부정부패가 쌓이기 마련이다. 또 군관(軍官)이나 향리와 같은 관속들을 다스릴 때는 신상필벌을 분명히 해야 하지만, 너무 각박하게 대하지 않도록 충고하였다.
또 그는 형벌을 처리하는데 신중히 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이 때 조심할 것은 지방관이 자기감정을 잘 통제하여 분노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죄가 드러난 후에 공평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사랑으로 대하고 관속은 엄하게 대하라고 한 것이다.
이원익은 행정의 달인이었으므로 매사를 강경하게 밀어 붙이기보다는 온건하게 추진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특히 민간에 소요가 일어나기 쉬운 군사 행정에서 그러하였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후에는 군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군적(軍籍)을 작성하고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였는데, 여기에서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결루된 군액(軍額)을 보충하고 군포(軍布)를 친척이나 이웃에 대신 부과하는 일을 강경하게 추진하면 민원과 소요가 일어날 여지가 많았다. 그래서 이원익은 수령이 군적을 항상 가까이 두고 결루된 군액을 사정을 보아가며 서서히 채우고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도록 훈계하였다. 도망간 군사에 대한 연대책임도 원근친소에 따라 명백히 정하고 함부로 침징하지 않도록 권고하기도 하였다. 이원익은 관료생활 초기에 황해도 도사가 되어 1576년(선조 9)에 도내의 군적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억울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또 8도에서 으뜸가는 성과를 올리기 하였다.27)
2. 관료적 리더십
오리 이원익은 조선시대에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한 관료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관료생활을 한 시기에는 당쟁, 임진왜란, 정묘호란, 광해군의 난정(亂政),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 미증유의 외침과 국가적인 변란들이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요직을 맡아 국난을 잘 극복하였고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4년간 귀양을 간 적이 있었고 때때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큰 풍파 없이 60여년의 관료생활을 훌륭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선조〜인조대의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관료생활을 성공적으로 유지해 나간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항상 유능하고 철렴한 관료로 칭송을 받았고 정적들로부터도 심한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는 그의 현명한 사리 판단과 고매한 인격 그리고 온건한 처신으로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았고, 적을 만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일을 추진하는데도 어려움이 적었다.
이원익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직업적인 관료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오래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지만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좌우한 때는 많지 않았다. 그는 당색(黨色)으로는 남인(南人)에 속하였지만 스스로 자기 세력을 키우지도 않았고 영수(領袖)로 자처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에 반정공신들은 대신들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정부(議政府)의 기능 회복을 주장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정승들이 의정부에서 국정을 처리하지 않아 의정부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원익은 “의정부의 권한을 폐지한 것은 이유가 있으니, 나라의 대권(大權)을 신하들이 천단(擅斷)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여 그 의논을 중지시켰다. 조선시대에는 공신들에게 많은 특권이 부여되고 형사처벌도 면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권세를 부리는 공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원익은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부원군(府院君)까지 되었지만 평생 이를 내세운 적이 없었고, 응당 받아야 할 노비와 토지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권세에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남인은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柳成龍)이 탄핵을 받아 물러간 후 인조 대까지 정국을 주도하거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선조 대 후반에는 小北 일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광해군 대에는 대북(大北)이 전횡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西人) 공신 세력들이 국정을 장악하였다. 이원익은 소수 정파에 속하였으면서도 3대에 걸쳐 40여 년간 정승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던 그의 무색무취한 관료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익이 6차례나 영의정에 임명되고 오래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충성심 때문에 국왕들의 신임이 깊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남인이었지만 당파적 색채가 적었기 때문에 반대파의 방해나 견제도 적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붕당을 보합하여 조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적이 없어서 정국을 주도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정승의 자리에서 실제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기간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선조 대에는 1595년(선조 28)부터 (선조 33)까지 5년간, 관해군 대에는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익년까지 1년간 및 1611년(광해군 3)부터 익년까지 1년간, 인조 대에는 1623년(인조 원년)부터 1625년(인조 3)까지 2년간 시임(時任) 정승의 자리에 있었고, 나머지 기간에는 대체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혹은 도체찰사(都體察使)와 같은 원임(原任) 정승의 자리에 있거나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이란 봉작만 가지고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래서 그가 실제로 정승의 권한을 행사했던 기간은 모두 9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원익이 시임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도 선조 대에는 임진왜란의 작전 지휘와 전후 뒤처리에 골몰한 외에 유성룡을 변호하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정책을 구현하기 어려웠다. 광해군 초기에는 그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법(大同法)을 실현할 수 있었지만 곧 대북파에게 밀려났고 폐모론에 반대하여 5년간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거국적 기대를 안고 영의정에 복귀하였지만 서인 공신들의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반정 초의 혼란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광해군과 그 추종자들의 처리를 완화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애매하게 연루되었던 기자헌(奇自獻) 일파의 처형을 막지도 못하였고, 국왕의 골육이었던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목숨을 보호하지 못하였으며, 삼공이 모두 반대하였던 원종(元宗: 定遠君)의 추존도 저지하지 못하였고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도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결국 그는 1년 만에 사직하고 물러났다가 다음 해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또 1년 만에 체직되었다. 그리고 1634년(인조 12) 1월에 고종명할 때까지 국가적 원로로서 융숭한 예우와 존경을 받기는 하였지만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인조는 그의 자질을 평하여 “재국(才局)은 비록 세상일을 주선하지 못하였으나, 청백과 충성은 미칠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28)
이원익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쟁으로 운신하기 어려웠던 중앙정계가 아니라 지방 행정가로 있을 때였다. 그는 황해도 도사로 있을 때 산적한 과제들을 명민하게 처리하여 관찰사 이이(李珥)의 칭송을 받고 중앙의 요직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안주 목사로 있을 때는 기민들을 신속하게 구제하였고, 방수(防守)의 제도를 4교대에서 6교대로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는데, 이것이 후일 국가의 제도가 되기도 하였다. 또 백성들에게 뽕나무를 심게 하고 양잠을 가르쳐 지역 경제를 부흥시켰는데, 이때 심은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렀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형조 참판에 승진되었다.29)
이원익의 관료 생활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것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선조 25) 4월에 平安道 都巡察使가 되었고 후에 관찰사를 겸하여 평안도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였다.30) 그는 倭軍이 평양을 점령한 직후 능라도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고 이후 순안 등 평안도 여러 곳을 방어하면서 적군을 평양에 묶어두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평안도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모집․조련하여 精兵으로 양성한 일이었다.31) 이 때문에 의주에서 불안하게 피난 생활을 하던 선조는 그에게 크게 의존하였고 또 총애하였다.32) 선조는 한 때 “중국에는 유총병(劉總兵: 劉綎)이 있을 뿐이고, 우리나라에는 이원익(李元翼)이 있을 뿐”33)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 겸 관찰사의 위치가 오늘날로 치면 수도 계엄사령관과도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가 전란 중 평안도에서 인심을 얻고 병사를 모아 훈련시킬 수 있었던 것은 4년간 안주 목사로 있을 때 쌓은 선정과 신뢰 및 성실성 때문이었다. 3년간에 걸친 평안도 관찰사로서의 훌륭한 경력은 이후 그의 출세에 기초가 되었다. 그는 1595년 2월에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고, 6월에는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나이가 49세였다.
이원익이 모범적인 성공한 관료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떠한 자질과 능력이 있었던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가 백성들이나 부하들에게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어려운 국난의 시기에 그들을 자발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요인 즉 그의 리더쉽에 대하여 살펴본다.
가. 학문과 수양
조선시대의 문관(文官)들은 대․소과의 과거를 통하여 선발된 정예 엘리뜨들이었고,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을 익힌 유학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유교적 교양과 도덕적 수양이 기본적인 소양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현직 관료들에게도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재충전 기회를 주었고, 집현전이나 홍문관에서 전문적인 학문 연구를 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유학자들이 관료가 되었고, 관료들이 학자가 되었다. 퇴계(退溪)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학문에 몰두하기 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원익도 학자 출신의 관료였지만, 그는 평생 관직생활에 메여 있었기 때문에 학문에는 깊이 몰두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관직과 학문을 병행하기보다는 직무에 더욱 정신을 집중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자신의 다음과 같은 회고를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정밀해지게 마련이고 기억도 잘 할 수가 있는 법이다. 나 역시 평상시에는 책 보기를 좋아하지만, 일단 하나의 관직을 맡게 되면 그동안 보던 책들을 묶어서 시렁에 올려 두고는 밤낮으로 공사(公事)만을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하나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도 계속 독서를 한다고 하니, 이것은 내 재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점이다.”34)
이 때문에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가 학문에 힘쓰지 않은 것을 걱정한 사람도 있었다. 정엽(鄭曄)이 신흠(申欽)에게 보낸 편지에 “완평(完平)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나 다만 글을 읽지 않는 것이 한이다” 하였는데, 신흠이 답하기를 “완평이 하는 일들은 모두 이치에 맞으니 이것이 바로 학문이다. 한갓 글만 배운다면 어디다 쓰겠는가?” 하였다고 한다.35) 이러한 표현은 이원익의 학문적 성격을 잘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은 국가의 정치 현실에서 보편타당한 정책을 궁리하여 실현하고,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윤리적 규범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전형적인 실무관료형 학자라고 할 수 있고 그의 학문도 무실(務實)을 중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원익의 문집인 오리집(梧里集) 을 보면 이른바 학문을 논한 성리설(性理說)이나 예학(禮學) 관련 논변서 등은 일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동료 친구들과의 서한에도 학문 토론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다. 그는 이른바 학통을 논할 만큼 저명한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한 흔적이 없으며, 대체로 가정에서 독학으로 과거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식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학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유학의 원리 원칙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였고 일생 동안 그 실천에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원칙과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이나 처신을 한 적이 없었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은 적도 없었다. 비록 학문 연구에 골몰하지는 못하였지만, 자신의 심성과 인격 수양에는 철저하였다. 이식이 지은 시장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公은 자신의 병통이 중도(中道)에 지나치게 강강(剛剛)하고 급격(急激)한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품을 함양(涵養)하여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덕기(德器)가 성취됨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모두 공이 독실하고 공손하고 순후하고 근실한 가운데 오직 지극하게 인후(仁厚)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만을 느낄수 있을 따름이었다.36)
이원익은 심성 수양뿐만 아니라 허약한 체력을 단련하는데도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년 시절에 공부에 몰두하다가 위장병을 얻어 오래 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꾸준한 약물 복용과 엄격한 자기 관리로 체력을 회복하고 88세에 이르기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 시장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나름대로 정기(精氣)를 보전할 방법을 강구하여 각종 약물(藥物)로 몸을 보양(輔養)하였으며, 주량 역시 상당하였는데도 일찍이 흠뻑 취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서쪽으로 여행하는 길에 우연히 여색(女色)에 한눈을 판 적이 있기도 하였지만, 그 즉시로 자신을 꾸짖고 반성하면서 그 뒤로는 더욱 사색(邪色)을 멀리하였다. 그리하여 상노인(上老人)이 다 되도록 건강한 체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으니, 이는 모두가 양생(養生)의 올바른 도리를 실천했기 때문이었다.37)
관료로서의 이원익에게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엄격한 자기 관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릴적부터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벼슬길에 들어선 후에는 더욱 자신을 안으로 수렴(收斂)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는 사람들이 처자(處子) 정자(正字)로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38) 그는 가난한 시절에 친구들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는 하였지만, 의롭지 않거나 부정한 재물이나 청탁에는 칼로 베듯이 단정하고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관료 생활에는 일체의 추문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엄격한 공직 윤리의 확립이나 자기 관리는 그의 관료적 성장에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 합리적 사고와 예지(叡智)
이원익의 심성에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합리적인 정신은 그의 묘지 조성에 관해 후손들에게 남긴 유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풍수설(風水說)을 철저히 배격하고 동족이 함께 묻히는 공동묘지를 조성하도록 훈계하고 있다.
풍수설은 허탄하고 방서(方書)는 각각 달라 저 사람은 길하다고 하고 이 사람은 흉하다고 한다. 세상에는 혹 저 말에 따라 장사지낸 사람이 또 이 말에 따라 이장을 하게 된다. 일찍이 듣건대 땅을 잘 골라 장사하여도 3-4대를 가지 못해 처소를 잃어버린다.39)
그는 사람은 날 때부터 운명이 정해지는 것이며, 묘지를 쓰는 것 때문에 길흉화복이 변하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손들이 지술(地術)에 현혹되지 말고 친족의 묘지를 같은 산에 써서 골육(骨肉)이 서로 분산되지 않게 하고 실묘(失墓)되지 않도록 훈계하였다. 또한 묘지를 넓게 하지 말고 빼곡히 붙여 써서 땅이 부족하지 않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상례와 장례 때 무당과 승려를 부르지 말고, 제사의 음식은 정결하게 하는데 힘쓰고 사치하고 풍부하게 하지 않도록 유시하였다.40) 이는 비록 상례와 제례에 관한 훈계이지만, 이러한 정신은 그의 관직 생활에서도 견지되었다.
이원익이 성공한 관료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천부적인 총명과 예지가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원래 명민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분석력과 판단력이 정확하였지만 지식이나 정보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는 “천하의 사정에 정통하면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을 처리할 때는 그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그는 남에게 일을 위임하지 않고 직접 나서서 처리하였고, 특히 백성들의 호소는 자세히 들으려 노력하였다.
이원익은 행정 실무에 밝고 문서처리에 민첩하기로 소문나 있었는데, 인명(人名)이나 지명(地名)은 물론 품목(品目)과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한번 보면 잊어버리는 적이 없었으므로, 아전들이나 종복(從僕)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래와 같은 회고를 보면, 이러한 기억력이 관료생활에 상당한 이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문서를 처리하는 면에 조금 재주가 있어, 소싯적이나 장년에는 곧잘 공사(公事)를 잘 마무리하곤 하였는데, 이는 단지 기억력이 남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늙어서는 금방 지난 일도 까마득히 잊곤 하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근무를 할 수가 있겠는가.”41)
그의 이러한 기억력은 업무에 대한 정신집중으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정밀해지게 마련이고 기억도 잘 할 수가 있는 법이다. 나 역시 평상시에는 책 보기를 좋아하지만, 일단 하나의 관직을 맡게 되면 그동안 보던 책들을 묶어서 시렁에 올려 두고는 밤낮으로 공사(公事)만을 생각한다”고 말하였다.42)
이원익은 사리 판단이 정확하고 대세의 추이를 예측하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뛰어났다고 한다. 허목(許穆)의 유사(遺事) 에 기록된 영의정 이홍주(李弘胄)의 회고에 아래와 같은 흥미 있는 구절이 있다.
“공이 나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나는 이제 늙었소. 동리(同里)의 여러분 중에 오 이조(吳吏曹: 吳允謙)가 마땅히 나를 이어서 정승이 될 것이고 그 후에 공이 또 정승이 될 것인데 국가가 위태하고 민생이 미란(糜爛)할 것이나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이제 상국이 이미 작고하고 오 상국 후에 내가 과연 정승이 되어 임금을 남한산성으로 수행했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요행이다. 지금도 상국의 그말이 귀에 쟁쟁하니 어쩌면 선견지명이 이렇게도 신묘한가.”43)
이원익은 또 꿈이 정확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리고 예언이 자주 적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는 국가에 무슨 사변(事變)이 일어날 때마다 번번이 꿈속에 드러났다고 한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그는 소현세자의 분조(分朝)에 있었는데, 병조참판 이명준(李命俊)이 이 일에 대해서 묻자, 그는 “내가 소싯적에는 실제로 그런 기이한 일이 있곤 하였는데, 지금은 워낙 쇠해져서 꿈도 이젠 예전 같지가 않다”고 하면서, 최근 꿈에서 본 조짐 두 가지를 말해 주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모두 사실로 드러나 일행이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44) 1633년(인조 11) 겨울에 이원익은 꿈속에서 절구(絶句) 하나를 지었는데, 봄이 오면 불길하게 될 조짐을 보여 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다음 해 정월에 그의 병이 위독해져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45) 이러한 일들은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의 특별한 총명예지와 정신력에 의해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 성실과 근면
관료로서 이원익의 성실과 근면은 유명하였다. 그는 초급 관료시절부터 고관직에 있을 때까지 직무를 철저히 수행하였고 성실하게 근무하였다. 매일 출근하는 일에 있어서도 남보다 뒤처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22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있을 때 한어습독관(漢語習讀官)에 뽑혀 중국어 회화를 익히게 되었다. 당시 외국어는 의례 중인(中人) 신분의 역관(譯官)들이 하는 것으로 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에 젊은 문관들은 습독관으로 뽑혀도 제대로 학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부지런히 학습하였기 때문에 시험 때마다 수석을 차지하여 표창을 받았다. 그의 중국어 실력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과 전략회의를 할 때나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46)
이원익의 직무에 대한 성실성이나 부지런함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였다. 선조는 그를 평하여 “이원익의 재략은 논할 필요가 없더라도 그의 부지런함은 누구도 미칠 수 없다” 하였고,47) “현재 나랏일에 자신의 마음을 모두 바치는 자는 오직 평안감사로 있는 이모(李某) 한 사람뿐”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원익은 관료 생활을 하면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말을 하였고, 말을 하면 반드시 전달하고 싶은 뜻을 모두 토로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연히 무익한 변론을 벌여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아무 탈도 없는데 괜히 사직서를 올린 적도 없었다. 다만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할 경우에는 완강히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원익은 남인에 속해 있기는 하였지만 대체로 편당에 치우치지 않고 불편부당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인(北人)들의 지나친 공격에는 정면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유성룡이 ‘주화오국(主和誤國)’의 죄로 탄핵받았을 때 그는 끝까지 유성룡을 옹호하였다. 그는 가능한 한 당파적 성향을 표출하지 않았지만 붕당을 불문하고 군자(君子) 소인(小人)의 분별은 엄격하였고 의리에 어긋나는 논의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배격하였다. 시장의 다음 구절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적에 일찍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점이 없었으며, 오직 명류(名流)를 아끼고 공의(公議)를 일으켜 세우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중략) 선악을 분별하는 일을 너무도 드러나게 하고, 지목하여 배척하는 일을 너무도 준엄하게 한 점이 있긴 하였어도, 사람들이 감히 한쪽의 당파를 편들었다고 공을 비난하지 못하였다. 공이 평생토록 홀로 우뚝 서서 사람들에게 사정(私情)을 개입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48)
이원익은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인자하게 포용하면서도 장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느끼면서도 감히 버릇없이 굴지 못하도록 하려 함이었는데, 이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리더쉽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형옥(刑獄)을 처리할 때도 관대함을 위주로 하였지만, 원칙을 무시하고 그냥 허술하게 넘어간 적은 없었다.
라. 따뜻한 인간미
이원익은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관료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따뜻한 인간미를 갖춘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이것이 상하 동료들과 백성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은 요인이 되었고 그의 관료적 성공에도 밑받침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보여준다.
“공이 부임하여 정사를 펼친 곳에는 모두 예외 없이 이민(吏民)들이 부모처럼 받들어 사모하였고, 공이 떠날 때에는 수레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이별을 하지 못하였다. 일단 떠나고 난 뒤에는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는 추모(追慕)하여 마지않았다. 특히 평양(平壤)에서는 백성들이 공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자, 공이 남몰래 사람을 보내어 사당을 허물도록 하였으나 그 뒤에 다시 세우기까지 하였다.”49)
백성과 부하들을 사랑하라는 것은 앞의 두 훈계서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의 관료 생활을 일관하여 흐르는 정신이었다. 이는 반대파에 대한 그의 포용성과 형벌을 시행할 때의 관대함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적들도 그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못하였고 존경하기까지 하였다.
이원익이 활동하였던 선조〜인조 대에는 붕당(朋黨)으로 어수선하던 때였지만, 당파를 불문하고 또 친한 사람이나 소원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그를 어진 정승이라 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직언을 싫어하고 폐모론 때문에 그를 유배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그를 ‘어진 相國’이라고 부르기는 하였다. 이이첨(李爾瞻)도 그를 원수처럼 여겼지만 겉으로 대우하기는 매우 융숭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그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자 탄식하며, “완평(完平)이 정승에 복위되었다면 우리 일족이 반드시 살아남게 되었을 텐데” 하고 탄식하였다는 것이다.
이원익의 이러한 품성은 친족들에 대한 태도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공은 인덕(仁德)을 베풀어 친족을 알뜰히 보살펴 주었는데, 심지어는 자신의 녹봉(祿俸)을 나누어 구제해 주기까지 하면서 항상 부족할까 걱정하곤 하였다. 시간이 나면 오직 친척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는데, 그러면서도 관직에 천거하여 임명하게 하거나 그들이 청탁하는 일을 들어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50)
그는 가정에서 적서(嫡庶)의 차별을 분명히 하였고 서파(庶派)가 적파에게 순종하고 능멸하지 않도록 훈계하여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기는 하였지만, 서얼들을 인간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았다.
그는 서숙부(庶叔父)였던 단천령(端川令) 이억순(李億舜)을 매우 존중하여 묘갈문(墓碣文)을 지었고,51) 서자였던 효전(孝傳)과 제전(悌傳)도 적자와 같이 사랑하였다. 그들에게 남긴 유훈에는 자신이 서얼 친족을 경시하지 않았고, 적장자 의전(義傳)도 자신의 뜻을 이어 받아 동기들을 대할 때 적서를 막론하고 애호하기를 지극히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52) 그는 노비들에게도 매우 따뜻이 대우하였는데, 특히 충복이었던 옥수(玉守)는 사대부의 풍도(風度)가 있어 그를 노예로 대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순(順)도 역시 그를 잘 섬겼기 때문에 그 정성에 감동하여 시를 지어주기도 하고 시축(詩軸)의 발문을 짓기도 하였다.53) 그의 따뜻한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원익은 젊었을 때 호방(豪放)하여 어디에도 매인 곳이 없었다. 그리고 집안에서 음률(音律)을 익혀 악보(樂譜)에 통달하였으므로54), 흥이 날 때마다 거문고를 가지고 낙봉(駱峯)에 올라가서 혼자 연주하고 혼자 노래를 부르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또 경치가 뛰어난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관직 생활 중에 틈이 나면 명승지(名勝地)를 두루 유람하였는데, 험준하고 궁벽한 곳을 끝까지 찾아다니면서도 의기(意氣)가 꺾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55) 이러한 예술적 취향이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그를 더욱 인간성이 넘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4. 결어
오리 이원익은 조선시대에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한 관료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관료생활을 한 시기에는 당쟁, 임진왜란, 정묘호란, 광해군의 난정(亂政),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등 외침과 변란들이 많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요직을 맡아 국난을 잘 극복하였고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광해군 때 4년간 귀양을 간 적이 있었고 때때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큰 풍파 없이 60여년의 관료생활을 훌륭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유능하고 철렴한 관료로 칭송을 받았고 정적들로부터도 심한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는 그의 현명한 사리 판단과 고매한 인격 그리고 온건한 처신으로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았고, 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도 많았고 일을 추진하는데도 어려움이 적었다.
이원익은 정치가라기보다는 직업적인 관료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오래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지만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좌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남인에 속하였지만 스스로 자기 세력을 키우지도 않았고 영수로 자처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속의 권력에 대해 비교적 담백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남인은 임진왜란 이후 仁祖 대까지 정국을 주도하거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선조 대 후반에는 소북(小北) 일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광해군 대에는 대북(大北)이 전횡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西人) 공신 세력들이 국정을 장악하였다. 이원익은 소수 정파에 속하였으면서도 3대에 걸쳐 40여 년간 정승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 이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던 그의 무색무취한 관료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익이 6차례나 영의정에 임명되고 오래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충성심 때문에 국왕들의 신임이 깊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남인이었지만 당파적 색채가 적었기 때문에 반대파의 방해나 견제도 적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붕당을 보합하여 조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적이 없어서 정국을 주도하는 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원익은 시임 정승의 자리에 있을 때도 선조 대에 임진왜란의 작전 지휘와 전후 뒤처리에 골몰한 외에 자신의 정책을 구현하기 어려웠다. 광해군 초기에는 그의 최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법(大同法)을 실현할 수 있었지만 곧 대북파에게 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원익은 거국적 기대를 안고 영의정에 복귀하였지만 서인 공신들의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원익은 1634년(인조 12) 1월에 고종명할 때까지 국가적 원로로서 융숭한 예우와 존경을 받기는 하였지만 현실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이원익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쟁으로 운신하기 어려웠던 중앙정계가 아니라 지방 행정가로 있을 때였다. 그는 황해도 도사로 있을 때 산적한 과제들을 명민하게 처리하여 관찰사 이이(李珥)의 칭송을 받고 중앙의 요직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안주 목사로 있을 때는 기민(饑民)들을 신속하게 구제하였고, 방수(防守)의 제도를 4교대에서 6교대로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는데, 이것이 후일 국가의 제도로 정착되었다. 또 백성들에게 뽕나무를 심게 하고 양잠을 가르쳐 지역 경제를 부흥시켰다. 이러한 공적이 높은 평가를 받아 그는 형조 참판에 승진되었다.
이원익의 관료 생활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것은 임진왜란 중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이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총괄한 일이었다. 그는 평양 주변의 전투에서 성과를 올렸지만, 정쟁 기간 중 평안도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모집․조련하여 정병(精兵)으로 양성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의주에서 불안하게 피난 생활을 하던 선조는 그에게 크게 의존하였고 또 총애하였다. 선조는 한 때 “중국에는 유총병(劉總兵: 劉綎)이 있을 뿐이고, 우리나라에는 이원익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가 전란 중 평안도에서 인심을 얻고 병사를 모아 훈련시킬 수 있었던 것은 4년간 안주목사로 있을 때 쌓은 선정과 신뢰 및 성실성 때문이었다.
이원익이 모범적인 성공한 관료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자질과 능력이 있었다. 이것이 그가 백성들이나 부하들에게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어려운 국난의 시기에 그들을 자발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
첫째, 그의 학문은 국가의 정치 현실에서 보편타당한 정책을 궁리하여 실현하고,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윤리적 규범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전형적인 실무 관료 형 학자라고 할 수 있고 그의 학문도 무실(務實)을 중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였고, 도덕적 실천에 노력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비록 성리학의 학문 연구에 몰두하지는 못하였지만, 자신의 심성과 인격 수양 그리고 체력 단련에 철저하였다.
둘째, 이원익은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합리적인 정신은 풍수설(風水說)을 철저히 배격하고 동족 공동묘지를 조성하도록 강조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그의 관직 생활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원래 명민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판단력이 정확하였지만 지식이나 정보를 넓히기 위한 노력도 중시하였다. 그는 “천하의 사정에 정통하면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을 처리할 때는 그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또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를 강조하였다.
셋째, 이원익의 공직 윤리에서 어뜸을 차지하는 것은 성실과 근면이었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매일 출근하는 일에 있어서도 남보다 뒤처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로부터 “이원익의 부지런함은 누구도 미칠 수 없다”는 칭찬을 받았다.
넷째, 이원익은 자기 관리에 철저한 관료였지만 또한 따뜻한 인간미를 갖춘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이것이 상하 동료들과 백성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은 요인이 되었고 그의 관료적 성공에도 큰 밑받침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이렇다 할 적이 없었고, 당파를 불문하고 또 친한 사람이나 소원한 사람이나 모두 그를 어진 정승이라고 칭송 하였다. 그는 음악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경치가 뛰어난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틈만 나면 명승지(名勝地)를 두루 유람하였다. 이러한 예술적 취향이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그를 더욱 인간성이 넘치는 관료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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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원익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는 대략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韓鍾萬, <韓國 淸白吏像 硏究-李朝의 代表的 淸白吏를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논문집 11, 1977)
이양희 <梧里 李元翼의 壬辰倭亂中 功績에 관한 연구>(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7)
이양희,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 韓國人物史硏究 4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5)
유호진, <李元翼 詩에 나타난 不動心과 仁에의 지향>( 韓國人物史硏究 4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5)
許捲洙, <梧里 李元翼과 嶺南南人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 韓國人物史硏究 4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5)
송양섭, <17세기 전반 梧里 李元翼의 정치활동과 정책구상>( 韓國人物史硏究 5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6)
金景淑, <家訓을 통해 본 17세기 士大夫家의 墳山守護>( 史學硏究 87, 韓國史學會, 2007)
이정철, <오리 이원익과 두 번의 貢物變通>( 朝鮮時代史學報 54, 2011)
2) ‘淸白’이라는 말은 ‘淸廉潔白’의 약칭으로 이는 청렴한 관리를 범칭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서 선발되어 淸白吏案에 명단이 올랐던 사람들을 말하였다. 또 정확히 말하자면 청백리는 작고한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고, 산 사람에 대하여는 보통 廉謹吏 혹은 廉吏라고 불렀다. “祖宗朝 淸白吏則於身沒後 公議旣定之後抄選, 廉謹則乃是生存時襃獎激勸之選 而非錄用子孫之典矣 ······ 今欲依明宣兩朝古事 已故之人 則以淸白吏爲目 時存之人 則廉謹爲目 隨多少選擇以啓 淸白吏則錄選於吏曹
廉謹人 則自上別施勸獎之道 似合事宜”( 備邊司謄錄 卷49, 肅宗 21년 5월 초2일)
3) 經國大典 卷1, 吏典 京官職 및 卷3, 禮典 諸科
4) 經國大典 권 2, 戶典, 祿科
5) 牧民心書 律己
6) 牧民心書 律己
7) 孟子 卷 13, 盡心 上
8)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빈천하게 사는 것은 수치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부귀하게 사는 것은 수치이다.”( 論語 卷 8, 「泰伯」)
9) 論語 卷 4,「里仁」
10) 宣祖實錄 137권, 34년 5월 16일(庚辰)
11) 宣祖實錄 137권, 34년 5월 16일(癸丑)
12) “臣世業不豐。亂後尤敗。顧無田宅臧獲之可以資賴。而干戈十年。廩料不繼之日許多。家累衣之食之。安然 過活者。是豈自耕而自織哉。細自思量。分毫皆他人之物。(中略) 其知舊之爲外職者。餽遺以物。亦未嘗不受。始終所爲。章章如此。不知緣何。以此名加於臣哉。若以臣爲不至貪饕而加此名。則在廷諸臣。皆當與是選。(中略) 前後以自家私事。干求於人。請囑於人者。不一而足。在人耳目。臣不得自掩。如是而謂之謹。何以爲人臣之勸哉”( 梧里先生文集 卷 2, 辭被選廉謹箚)
13) 梧里集 附錄 권 1, 逸事狀
14) “臣有驪江之舊廬。居處便好” ( 梧里集 續集 권 1, 乞收賜第及賜奴婢之命疏)
15) 仁祖實錄 24권, 9년(1631) 1월 11일(乙酉)
16) “열읍(列邑)에서 세시(歲時)의 예물로 으레 올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품목이나 수량이 조금 넘치기라도 하면 문에서 하인이 벌써 알아서 물리치곤 하였다.”(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17) 梧里集 附錄 권 1, 逸事狀
18) 李成妊, <朝鮮中期 어느 兩班家門의 農地經營과 奴婢使喚; 柳希春의『眉巖日記』를 중심으로>(報 80, 震檀學會, 1995)
19) 仁祖實錄 29권, 12년(1634) 1월 29일(丙辰)
20) 仁祖實錄 24권, 9년 1월 11일(乙酉)
21)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22)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23) 비록 소인들이 속으로는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품었더라도, 말을 할 때에는 “모(某)는 어진 재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어떤 일은 약간 잘못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하는 것으로 그쳤다.
24) 梧里集 補遺 雜著, 書贈李甥德沂之任
25) 梧里集 補遺 雜著, 書與孫守約赴延豐縣
26) “古訓曰: 通天下之情, 然後能成天下之務.”( 梧里集 補遺 雜著, 書與孫守約赴延豐縣)
27)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28) 仁祖實錄 38권, 17년(1639) 3월 3일(庚申)
29) 眉叟記言 권38, 梧里李相國遺事
30) 이때의 그의 활동에 대하여는 이양희,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 韓國人物史硏究 4,
31) “이때 李元翼이 평안 감사로 있었는데 백성이 매우 편안하게 여겼고 군사를 조련하는 일도 상의 뜻에 맞았으므로 특별히 표창하여 다른 사람의 표준이 되게끔 하였다.”( 宣祖實錄 49권, 27년(1594) 3월 28일(丙午) “이원익은 스스로의 몸가짐을 청렴하고 간소하게 하여 하루에 먹는 음식이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민폐를 살피고 무비(武備)를 잘 닦았기 때문에 비록 전쟁을 겪었어도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 宣祖實錄 52권, 27년(1594) 6월 24일(辛未)
32) “이원익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한 도의 인민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고, 군졸을 훈련시켜서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특별히 임금의 총애를 받아 이와 같이 승진시킨 것이다.”( 宣祖實錄 60권, 28년(1595) 2월 15일(戊午)
33) 宣祖實錄 45권, 26년(1593) 윤11월 21일(辛丑)
34)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35) 梧里集 附錄 권 1, 逸事狀
36)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37)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38)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39) 梧里集 附錄 권 1, 逸事狀
40) 梧里集 補遺 雜著, 遺戒子孫
41)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42)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43) 眉叟記言 권38, 梧里李相國遺事
44) 眉叟記言 권38, 梧里李相國遺事
45)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47) 宣祖實錄 52권, 27년 6월 26일(癸酉)
48)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49)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50)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51) 梧里集 補遺 雜著 端川令咸川君庶弟墓碣陰記
52) “余雖不肖, 遵先世之遺訓, 不敢失意於兄弟姊妹, 又不敢薄視庶屬, 爾等之所聞知也. 爾等之嫡兄義傳體余之意, 盡己之心, 待同氣, 無論嫡孼, 愛護深至, 爾等之所見知也. 爾等不遵父兄之誨, 不念天倫之至, 同氣之間,執些少事故, 爭曲直致乖戾, 則不但陷身於悖惡, 其不孝於先人大矣.”( 梧里集 補遺 雜著 書諭孼男孝傳傳)
53) 梧里集 補遺 雜著 書奴僕順所藏詩軸後
54) 이원익의 아버지 함천군(咸川君) 억재(億載)는 거문고에 능하였고, 서숙부였던 端川令 億舜은 長簫와 短篴에 능하였다고 한다.
55) 澤堂集 別集 권8,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