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대동법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1. 머리말
이원익은 『宣祖修正實錄』때에 관계에 진출하자 이이, 윤두수, 유성룡과 같은 뛰어난 관료의 인정을 받았고 유성룡이 실각한 후에는 조정의 최고 원로로서 활동하였고 선조 광해군 인조의 3대에 걸쳐 영상을 지내면서 군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명신 중의 명신’이었다.[1] 그는 광해군 초기에 이미 ‘當代名相’의 평판을 가졌다.[2] 이원익이 사망한 후에 인조는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은 선조(先朝)의 원로인데다가 청렴결백한 덕이 비교할 수 없으므로 내가 마음으로 열복하여 귀서(龜筮)처럼 신임하고 종정(鍾鼎)처럼 중시하였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갑자기 어진 사부(師傅)를 잃었으니 생각하면 비통하여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고 했다.[3] 당파가 생긴 선조대 이래 이원익처럼 당파를 초월하여 폭넓은 존경을 받은 정치인 내지 관료를 찾기 어렵다.
이원익은 조정과 사회의 신임을 받은 명신이 될 만한 여러 업적을 가졌다. 그것은 정치·경제·군사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이원익은 경제적으로도 여러 업적을 거두었는데, 그중 대동법의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대동법도 명신 이원익을 빛내주는 여러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실 이원익의 공헌 중 경제정책만을 분리해서 고찰하기는 곤란하고 대동법을 포함한 여러 업적이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상통하는 정책이념에 입각해 있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이원익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그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인 대동법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이원익의 인물 탐구인 동시에 대동법의 정책사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양반은 학문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신하이자 인민의 治者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학이 추구하는 修己治人이었다. 요사이 용어로 표현한다면, 과거 급제 후에 관료가 되고 나아가 조정의 고위 관료로서 정치에 참여하였는데, 기술 관료가 정치 관료로 성장한다고 하겠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관료와 정치인이 구별되지 않고 일체적인 존재였다. 이 글에서는 학자이자 관료이자 정치가인 이원익이 대동법의 정착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대동법의 내용과 의의에 관해서는 3절에서 설명하겠는데, 그것은 조선시대 조세제도의 공평성과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개혁이었다. 필자는 17세기 시행된 대동법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시행된 과전법, 그리고 왕조말기에 시행된 갑오개혁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개혁이라고 평가한다. 대동법은 1571년 율곡 이이에 의해 처음 모색되었고, 1608년부터 1708년간에 순차적으로 전국적으로 시행된 장기간에 걸친 개혁이었다. 금속 주화의 통용책은 훨씬 오랜 역사를 가졌으나, 추진과 좌절을 반복하다가 1678년 추진 이후 짧은 기간에 성공하였다.
대동법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1960년대 전반 한영국과 田川孝三의 연구를 통해 이미 대동법의 시행과정에 관한 전모가 대부분 밝혀졌다.[4] 이들 연구를 통해 대동법의 성립과 추진, 그러한 가운데 이원익의 기여가 많이 밝혀져 있다. 그런데 여전히 대동법의 성립과 정착에서 이원익의 활동에 대한 정리와 평가가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 미흡함을 메우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 과제이다. 이원익의 대동법 추진을 그 이전의 업적과 관련지우고 그의 경제정책을 관통하는 사상을 탐구하는 것이 이차적 과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리를 통해 조선시대 정책이 결정되어 추진되는 과정과 체제에 관한 정책사 연구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 세 번째 과제이다.
2. 이원익의 업적과 대동법
이원익의 업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 임진왜란 동안,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원익은 선조 7년(1574) 9월 황해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그 후 “軍籍을 처음 반포하였는데, 여러 도(道)의 사무 담당자 중 어떤 이는 소략하게 하고 어떤 이는 각박하게 하여 백성의 원망이 많았다. 그런데 황해도에서 만든 군적만이 최고로 일컬어지니, 이원익은 이 일로 이름이 드러났다.” 당시 황해도 관찰사이던 율곡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와 원익의 재기(才器)와 조행(操行)이 쓸 만하다고 말하여” 이원익은 1576년 정언으로 임명되었다.[5] 이원익을 세상에 처음 알린 이 업적은 그의 뛰어난 행정력을 보여준다.
1587년 이원익은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임명되었는데, “국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기지인 안주가 여러 차례 재해를 겪고 기근이 들어 조폐(凋弊)되어 명망이 중한 문신을 정밀히 골라 그 지방을 다독거려 수습하게 하되 구임(久任)시켜 공을 세우도록 책임지웠던 것이다.” 그는 “단기(單騎)로 부임하여 먼저 조곡(糶穀) 1만 석을 감사(監司)에게 요청하여 종자를 주어 경작을 권하였더니 가을이 되자 큰 풍년이 들어 조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 드디어 군정(軍政)을 변통하고 잡역을 감면하여 몸소 변진(邊鎭)에 양세(粮稅)를 납입하게 하여 조등(刁蹬)의 폐단을 없앴다. 안주는 서로(西路)에서 누에치기를 힘쓰지 않았다. 이원익이 백성에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니, 사람들이 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불렀다.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하여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승질(陞秩)하여 환조(還朝)하기에 이르렀으니, 공보(公輔)의 명망은 여기에서 기초되었다.”[6] 조곡으로 종자를 주어 기근을 극복한 것은 경제안정책이라 할 수 있고, 양잠업을 권장한 것은 경제안정책이자 경제발전책이라 할 수 있다. 이원익이 명망의 토대를 쌓은 안주목사로의 업적은 경제적 업적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지방관으로서 이원익보다 높은 평판을 얻은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그의 사후 실록의 평가에 의하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치적(治績)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고, 평안도에 두번 부임했었는데 서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라고 하여, 지방관으로서의 업적을 특히 높게 평가하였다.[7] 물론 중앙 정계에서의 명망이 높았으므로, 지방관으로서의 업적이 더욱 빛났다고 보아야 한다. 1798년 안성택이 올린 농서에 양잠을 장려하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정조는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 의식(衣食)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는데, 곡식은 식량의 근본이 되고 누에는 옷감의 근원이 된다.”며 “어찌 일곱 가지 이점을 가진 뽕나무 농사에서 완평(完平) 이상(李相)에게만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겠는가.”라고 하여 양잠업의 육성으로 본받아야 할 대표적인 인물로 이원익을 들었다.[8]
이원익이 지방관으로서의 업적은 임진왜란 때에 중책을 맡은 토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이원익이 안주목사로 있을 때 그 정치교화가 한 도를 덮었으니 士民들이 그를 보면 반드시 따르기를 생각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조판서 겸 평안도 도순찰사로 임명하였다.[9] 1596년 “이원익을 조정으로 소환하였는데, 그는 지나는 곳마다 백성의 고통을 살펴 그들의 과중한 부역을 경감시킬 것을 계청(啓請)하는 등 백성들을 위하는 일에 전념하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10] 그러자 사헌부는 “조석으로 변란에 대비하는 이때에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가장 근본이 됩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이 남방으로 내려간 뒤에 백성이 울며 애모(愛慕)하였고 이번에 올라와서는 오로지 민폐를 덜어 주었으므로 도탄에 빠진 백성이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이제 만약에 문득 서울에 머무르고 내려가지 않게 한다면 민심이 의지할 데가 더욱 없어져서 다들 흩어질 생각을 품을 것이고 적이 오기도 전에 민심이 먼저 흔들릴 것이니, 남방 천리는 장차 싸우지 않고도 빼앗기는 땅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11] 이원익은 민생 안정 등에 성과를 거두어 국난의 극복에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원익이 정유왜란이 끝나자마자 1599년 좌의정에 오르고 1600년 영의정이 된 데에는 국난 극복의 공로가 작용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은 난후 이원익의 중요한 업적에 포함된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 이원익의 활동이 대동법 시행을 위한 토대가 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임진왜란 중의 공로로 임금의 절대적 신뢰와 사회적 명망을 쌓은 것이 대동법 시행의 힘이 되었다. 둘째, 임진왜란 중의 민생안정책이 대동법과 연결된다. 이 두 번째 점을 살펴보자.
이원익은 전란으로 위협받는 민생의 안정을 위해 환곡, 요역 등 공적 부담의 경감을 위해 노력하였다. 1596년 10월 5일 도체찰사로서 선조에게 요역과 환곡과 공물의 부담을 경감해주기를 건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환곡제도를 문의한 선조에 대해 이원익은 중국의 환곡 제도와 환곡의 현실적 대책을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 이원익은 조세제도에 대해 널리 공부하고 깊이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원익은 공적 부담의 경감으로 “민력(民力)을 조금이라도 여유있게 해준 뒤라야”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지론을 피력하였다.[12] 그달 21일 경연의 자리에서 이원익은 호남 “요역이 번중하여 인심이 흩어져서 호령(號令)과 기강이 무너져 서지 못하니, 혹시라도 변고가 있게 된다면 이런 사졸들을 끌고서 장차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우려하였고 기인 대책도 “방해와 장애로 인하여 행하기가 어렵습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충청도의 공물 납부 문제를 논의한 다음, 영남의 원정공물(元定貢物) 외에도 갖가지 잡역(雜役)의 감면 조치를 요청하였다. 그해 11월에는 공물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역(身役)·요역(徭役) 등의 역이 민폐가 되는 점을 지적하였다.[13]
1596년에 이원익은 조정에서 공적 부담의 경감책을 활발히 거론하는데,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그중에도 공물, 그중에도 其人의 공물 대책에 점차 집중하였다. 인민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공적 부담이 공물이고, 그중에도 기인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이원익은 공납제를 개혁한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요역도 묶어서 해결하였다. 이원익은 환곡제도에 대해서는 문제점이 있으나 흉년과 기근 구제책으로 필요하니 존속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선조가 “중국에는 환자가 없는가?”라고 물은 데에 대해 이원익이 “그렇습니다.”라고 아뢰니, 선조가 “우리나라도 환자제도를 없앨 수는 없겠는가?”라고 다시 물었다. 이에 대해 이원익은 “환자는 예전부터 전하여 내려온 구법(舊法)입니다. 백성들이 혹 원려(遠慮)도 없이 모조리 먹어버리고 남음이 없다면 달리 구황(救荒)할 방법이 없을 것이므로 환자의 법을 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던 것이다.[14]
3. 대동법의 내용과 의의
대동법이란 무엇이며 조세제도의 개혁상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지 정리해보자. 조선왕조는 고려의 수취제도를 계승하여 전조(田租), 공물(貢物) 및 역(役)을 부과하였는데, 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하기 위해 각 세목의 내용은 개혁하고 정비하였다. 고려의 토지제도를 개혁한 과전법(科田法)은 토지세인 전조를 수확의 10%로 잡았는데, 세종 때에 제정된 공법(貢法)은 수확의 5% 수준으로 경감하였다. 노동력을 징발하는 요역의 부담도 줄어드는 추세였으나, 공물의 부담이 늘어나 이원익이 관직에 있을 때에는 가장 무거웠다.
조선은 중국 고대의 임토작공(任土作貢) 이념에 충실한 조용조법을 만들고자 조(調)를 토산 공물로 설정하였다. 관부에 바치는 것은 공물이라 하였고, 왕실에, 그리고 국가 제사를 위해 바치는 것은 進上이라 하였고, 지방관이 특수한 행사에 바치는 진상물을 方物이라 하였는데, 이것들은 실로 다양한 물자를 포괄하였다. 공물은 각 군현을 단위로 부과되었다. 1469년에 경작지를 부과 기준으로 삼게 되었으나, 그것은 과세 지침에 불과하였다. 민호(民戶)에 대한 공물 부과 기준이 제도화되지 않아서 그 징수가 지방관의 재량에 맡겨졌고, 납부하는 공물의 품질을 둘러싸고 중앙 관리의 횡포가 심하였다. 진상과 방물도 결국 민호에게 기준이 없이 부과되어 폐단을 낳는 점에서는 공물과 다를 바 없었다.
토산물이 아닌 공물의 조달을 위해, 또한 공물을 수납하는 관리의 횡포를 피해 관리 상인 등이 공물을 대신 납부하고서 지방관청에 가서 쌀이나 직물로 받는 방납(防納)이 15세기 후반부터 확산되었다. 방납은 공물과 마찬가지로 부담이 불공평하였을 뿐만 아니라, 방납인의 중간 횡령을 포함하여 부담은 과중해져서 1결당 쌀 수십두에 달한 곳도 있었다. 세조 때에 농민 부담 중 공물이 이미 60% 정도를 차지하였다 하는데, 연산군은 공물을 늘렸다. 그리고 정부가 징수하는 공물을 규정한 공안(貢案)은 장기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므로, 부과된 공물이 지역의 특산물과 괴리되거나 경지면적이 변하여 지역간 부담이 불공평해졌다. 지주의 토지집중으로 빈부차가 심해질수록, 호 단위로 부과된 공물의 부담은 더욱 불평등해졌다. 이처럼 부담이 과중하고 불균등한 공납제를 개혁하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이 1608년 경기도부터 시작되어 1708년에는 전국에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대동법은 가호를 대상으로 국가의 수용 물자를 현물로 직접 수취하는 대신에 경지를 대상으로 쌀·직물 동전으로 통일하여 정해진 양을 거두고, 그것을 받은 선혜청이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국가의 수용물자를 조달하게 하는 제도이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대동미는 1결당 쌀 12두(단 황해도는 15두)로 정해졌다.
논·밭에 관계없이 1결당 쌀 12두를 징수한 결과 밭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무거워진 점은 있으나, 대동법은 다음의 점에서 공평과 효율을 함께 실현한 제도 설계였다. 첫째, 종래 호별로 부과하는 기준이 없었고 잡다한 토산물의 표준 품질을 정할 수 없었으나, 대동법으로 1결당 쌀 12말이라는 단순명확한 과세 기준이 성립하였다. 둘째, 대동세는 공물과 대부분의 진상을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역, 그리고 대부분의 과외(科外) 잡세(雜稅)를 포괄하여, 조세체계가 현저히 단순해졌다. 셋째, 대동법에 규정된 외에 공물과 요역을 징수하지 않는 방침이 채택되어, 조세법정주의에 접근하였다. 넷째, 종래 지방 관부가 공물의 징수에 편승하여 불법적으로 잡세를 거두어 지방재정에 충당하였는데, 대동세의 상당 부분을 지방 지출에 충당함으로써, 지방재정의 제도화를 진전시켰다. 대동세는 공물·진상물의 마련을 위한 상납분(上納分)과 해당 도·군의 각종 경비를 위한 유치분(留置分)으로 배분되었던 것이다. 다섯째, 납세자 부담이 공평해졌다. 공물과 요역은 경지 규모를 참작하였지만 가호를 대상으로 부과된 점에서 인두세의 요소를 가졌으나, 대동법은 경지의 소득에 대체로 비례하여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17세기 대동법의 보급으로 방납인과 관리에 의한 중간 수탈을 막을 수 있어서, 인민의 부담이 평균적으로도 줄고 공평해지면서도 재정은 더욱 충실해졌다. 공물을 부과하는 경우에 그 항목의 결정과 품질의 심사 과정에서 개재되던 자의적 농간이 쌀 12말을 일률적으로 수취하는 대동법에서는 사라졌다. 이상의 장점들로 대동법은 10%의 토지세율로 균등하게 과세하는 유학의 이상에 근접하였고, 인민이 그것을 매우 편하게 여겼다. 일곱째, 다양한 현물로 받는 공납제 대신에 물품화폐와 금속화폐로 징수하는 대동법을 통해 정부는 세입의 양적 파악을 진전시켜 수용물자의 조달을 기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재정기획력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여덟째, 대동법은 토산물의 자의적인 수탈을 막아 생산의 발전을 촉진하고, 대동미의 방출로 시장을 성장시켰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바람직한 과세 원칙으로서 평등성, 명확성, 편의성, 징세비 최소화를 제시하였는데, 대동법은 이 원칙들을 잘 충족한다.
대동법은 인두세적 성격을 가진 공물을 토지세로 전환시켰을 뿐만 아니라 재정의 제도화를 진전시켜 조세법정주의에 접근한 점에서 근세적 조세국가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런 점에서 대동법의 시행은 과전법과 갑오개혁 사이에서는 조선왕조 최대이자 최고의 개혁이었다. 과전법은 왕조 교체로 이루어졌고, 갑오개혁은 일본의 외압에 힘입어 가능하였는데, 대동법은 양난의 격변에 뒷받침되었다 하나 기본적으로 내부적 개혁이란 점에서 특성을 가진다. 이처럼 공평하고 효율적인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에 1세기나 걸린 요인으로 토산물을 바쳐야 한다는 임토작공의 이념, 시장의 미발달, 방납인·대토지소유자·지방관리의 저항 등을 들 수 있다.[15] 달리 보면, 여론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력·권력층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민[小民]에 유리한 대동법의 추진이 진전된 것은 위민(爲民)과 안민(安民)이라는 유교 정책이념의 힘이라 하겠다.
4. 선조대 대동법의 태동과 이원익의 활동
『조선왕조실록』,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만기요람(萬機要覽)』등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정책 논의가 잘 정리되었고 정책 실명제는 충실하게 지켜졌고 그 역사적 평가가 엄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등 관찬 사료에서 드러나듯이, 특히 통치 기록의 정리가 훌륭하였으며, 정책 제안을 글로 써서 올린 것이 관찬 사료와 개인의 문집에 잘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문화의 덕분에 우리는 대동법 등 조선시대 정책사에 관한 연구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의 정책사를 연구하려는 사람보다 조선시대 정책사의 연구자가 관찬 자료와 정책 참여자의 기록으로부터는 더 많은 혜택을 볼 것이다. 대동법을 예로 들더라도 『만기요람』 재용편(財用編) 3, 대동작공(大同作貢) 항목에서는 조선시대 공물제도의 정비, 폐단의 발생, 그 개혁론의 대두,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는데, 그런 가운데 대동법을 제안하고 추진한 주요 인물의 업적을 명기하였다.
국초(國初)에 여러 가지 토공(土貢)은 대략 고려조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비로소 공부(貢賦)를 제정하고, 세종(世宗) 때에 또 공안(貢案)을 제정하여 그 읍(邑)의 소산(産)을 따라 토민(土民)으로 하여금 서울의 관청에 직접 납부하게 하였다. 용도(用度)가 점점 넓어지고 복정(卜定)한 것이 일정한 규례가 없어서 밖으로는 아전(衙前)이 사처(私處)에 유치(留置)하여 물종이 부패하게 되고, 안으로는 힘있는 사람들이 방납(防納)하고 이서(吏胥)가 주구(誅求)하므로 온갖 폐단이 번다하게 일어나 백성이 견딜 수 없으므로, 중종 때에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가 공안을 개정하자고 의논하였다. 선조 때에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수미법(收米法)을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며, 1592년 이후에는 우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역시 쌀로 거두는 편리함을 말하였으나, 일이 모두 성취되지 못하였다. 1608년에 이르러 이원익의 건의로 대동법을 비로소 시행하여 민결(民結)에서 미곡을 거두어 경공(京貢)으로 이작(移作)하게 했는데, 먼저 경기도에서 시작하고, 드디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였다. 인조 2년(1624)에 이원익이 다시 건의하여 강원도에도 시행하게 되었다. 효종 3년(1652)에 우의정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에도 시행하게 되었으며, 효종 8년(1657)에는 김육이 또다시 청하여 전라도 연읍(沿邑)에도 시행하였으며, 현종 때인 1662년에는 형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청하여 산군(山郡)에까지도 아울러 시행하였다. 숙종 3년(1677)에는 도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청하여 경상도에도 시행하였으며 숙종 34년(1708)에는 황해도관찰사 이언경(李彦經)의 상소에 의하여 황해도에도 시행하게 되었다. 그 방법은 경기·삼남(三南)에는 논밭을 통틀어 1결에 쌀 12말을 거두고 강원도도 이와 같게 하되 양전(量田)되지 않은 읍(邑)에는 4말을 더하며, 대관령 동쪽에는 2말을 더하고, 황해도에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여 15말을 거두니, 통틀어 명칭하기를 ‘대동’이라 하였다. 전국 각지의 토산물 공물을 경공(京貢)으로 만들고 경공주인을 정하여, 거두어들인 미곡으로써 그 가격을 측정하고 공인(貢人)에게 지급하고 국가의 각종 수용물자를 진배(進排)케 하였고, 나머지는 각읍(各邑)에 저치(儲置)하여 공용(公用)의 자금으로 삼았다.
오늘날 대동법을 공부한 연구자라도 이렇게 요령 있게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원익은 대동법이 조선국가에 뿌리를 내리게 한 인물이었다. 그 전에 대동법을 태동시킨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은 이원익의 선배로서 조정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이원익을 높게 평가하여 밀어주었다.
15세기 후반부터 관청의 胥, 세력가의 奴僕 등이 주도하여 농민으로부터 쌀이나 직물로 받아 공물로 납부하는 방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6세기에는 이러한 과정에서 방납자의 폭리와 횡포를 막기 위해 지방관이 직접 쌀이나 직물로 받아 공물을 납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16] 선조 2년(1569) 율곡은 막 즉위한 선조에게 당시 조선이 취해야 할 종합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는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제출하면서 공물 방납의 폐단을 구제하는 安民의 방안으로서 國用에 절실하지 않은 공물을 적당히 줄이면서 1결당 쌀 1말을 거두자는 수미법(收米法)의 시행을 제안하였다. 그는 해주(海州) 지방관이 공물에 대신하여 1결(結)에 쌀 1말을 거두어 직접 공물을 조달하여 상납하는 것을 거론하면서 그것이 방납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좋은 제도라고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만언봉사(萬言奉事)」 등을 보면 공안 개정을 공물제도의 폐단을 시정하는 주된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공안 개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물을 줄이고 재조정하는 일이고, 수미법은 그것을 쌀로 환산하여 농민에게 거두는 일이니, 양자는 상호보완적이라 하겠다.
해주에서처럼 쌀이나 직물로 거두는 법은 16세기 후반부터 지방관 차원에서 점차 확산되었다. 그것은 중앙정부의 공인을 받지 않는 한, 방납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私)대동의 확산은 대동법의 시행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정철은 선조 13년(1580)에 강원도관찰사로서 수령에게 쌀을 거두어 공물을 조달할 뿐만 아니라 지방재정에도 충당하라고 지시하였다. 중앙정부가 일시적으로 공물을 쌀로 대신 받기도 했는데, 중종 10년(1515)부터 그런 사실이 확인된다. 대동법은 이러한 조치를 상시적 제도로 만들어 공납제를 변혁한 것이었다.[17]
율곡이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공납제의 개혁 방안을 제시한 직후인 1571년에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은 “민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정공도감(正貢都監)을 두어 삼공이 이를 관장하고 재주와 학식이 있는 조정의 선비를 뽑아 낭관에 임명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하였다.” 이 사실은 율곡이 『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宣祖) 3년 11월 조(條)에 기록해둔 것이다. 훗날 유성룡이 수미법을 추진하다 좌절된 후에 “정승 이준경이 일찍이 정공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여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고 피력하였다.[18] 1571년 9월 전라감사가 정공도감을 활용하여 영암 강진 해남의 공부(貢賦)를 덜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이준경은 그해 5월에 영의정을 사직하였고, 1572년 7월 붕당의 폐단 등을 거론하면서 사망하였다. 이준경의 사망 직후 정공도감은 별다른 성과가 없이 해체되었다.[19] 선조대 공물 개혁의 주장은 이이→이준경→유성룡으로 이어졌고, 그것을 계승한 인물이 이원익이었다.
선조대에 사림정치가 시작되면서 동·서인간 분당과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공물제도의 개혁은 당색을 초월하여 추구된 과제였다. 1581년에 율곡이 민생의 안정을 위해 공안의 개정과 방납의 두절을 요구하자, 유성룡은 “이 일은 서둘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라며 동조하였다.[20] 서인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이이와 남인의 영수로 부상하는 유성룡이 수미법을 제안하고 시행한 것은 그것이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추진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유성룡의 뜻을 계승한 한백겸, 이원익 등, 그리고 이이의 경제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조익, 김육 등이 대동법의 추진에 동참하였다.
율곡이 주장한 수미법을 유성룡이 국가 전체로 처음 시행하였다. 유성룡의 공납제 개혁 노력은 이원익이 대동법에 관여하게 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자. 1592년 일본의 대군이 쳐들어온 후, 조선정부에게 명나라와 자국 군대를 위한 식량의 확보가 긴급하고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래서 1592년부터 공물 등을 쌀로 징수하여 군량에 보충하였다. 이것은 이전에 공물을 일시적으로 쌀로 대신 받는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전란으로 공물 장부인 貢案이 일부 분실되고 인민이 공물 납부를 회피함에 따라, 공납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1594년에 대기근이 일어나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참상까지 나타났다. 1594년 1월 선조는 무너진 土産物의 공납제를 정비하기 위해 공안을 詳定하라고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공물을 쌀로 바치는 “貢物作米의 논의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를 의미한다.[21] 그러자 유성룡은 영의정으로서 그해 4월에 「진시무차(陳時務箚)」를 올려 힘든 결단을 요구하는 개혁안은 평상시에는 시행되기 어려우나 위기의 시점에 시행될 수 있다며 각종 개혁안을 주장하였는데, 그중 수미법이 포함된다. 유성룡은 토지세는 낮은 반면 공물의 부담은 불공평하고 무거운데, 관리의 농간과 중간수탈이 심하여 백성에게는 심한 고통인 반면 국가재정으로 흡수되는 부분은 적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1결당 균일하게 쌀을 거두어 각사 관원으로 하여금 공물을 시전에서 구매하도록 하는 제도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였다.[22] 율곡의 수미법은 민생안정책이었는데, 서애의 수미법은 민생안정책일 뿐만 아니라 군량 확보책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일시적인 공물작미가 아니라 ‘공납제의 부정·혁신’이었다. 유성룡은 공물뿐만 아니라 진상과 방물도 아울러 토지를 기준으로 쌀이나 직물을 일정량 징수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선조의 반대로 진상과 작물은 제외하고 공물에만 국한하여 1결(結)에 쌀 2말을 거두는 제도가 확정되었다.[23] 훗날 정약용은 “유성룡이 말한 바가 곧 대동이었다.”고 했다.[24]
유성룡은 1594년 수미법이 제도화되기 전인 1592·3년에는 인민이 공물 대신에 1결당 쌀을 7 8두까지 내기도 했으므로, “호조에서 쌀을 1결당 2말씩 내는 항식(恒式)을 정하여 민정(民情)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고 보았다. 그런데 1595년 9월 24일 좌의정 金應南은 1결당 쌀 2말 과세가 그 외에도 많은 부담을 지는 전란중의 농민에게 무거운 부담이고 정부가 시전에서 물자를 구입하는 데에 가격 결정에 폐단과 불만이 나올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民情이 익숙한 공납과 방납의 제도로 복귀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9월 28일 비변사는 “호조의 조치가 혹 미진한 바가 있고 중국의 사신과 장수들의 접대가 번거로워 민간에 별도로 현물 납부를 명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시장에서 무역하도록 독책(督責)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의논이 혹 그것을 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의심하기도 합니다.”라며 앞으로 계속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까 염려하여, “지금 곡식이 쌀 때에 비변사로 하여금 금년에 납입해야 할 작미(作米)의 원수량을 기한 안에 독납(督納)하도록 하고, 이미 거두어들인 뒤에 계속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바야흐로 다시 의논하여 그 중에 변통할 것이 있으면 또한 뒤따라서 자세히 참작하여 구처해야 합니다.”고 건의하였다.[25] 공물작미법은 시행된 지 1년만에 반발에 부딪쳐 계속 시행 여부의 논의에 들어갔던 것이다.
1600년 정언(正言) 이성록(李成祿)은 “지방의 공물을 거두어들일 때 이른바 작지(作紙)라는 것을 호조에서 목면으로 대신 징수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을 괴롭히는 폐해로서 평상시에 시작이 된 것이나 난리를 겪은 뒤 이런 따위의 폐습은 모두 없앴는데 지난해부터 옛날의 법을 되살렸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이 지금처럼 심할 때가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는데,[26] 田川孝三은 이 기사를 논거로 수미법이 1599년에 폐지되었다고 보았다.[27] 그런데 이 기사는 공물 수납에 관련된 작지의 징수 문제로 국용(國用)과도 무관한 것이다.
1596년 10월 21일 경연의 자리에서 이원익은 충청감사가 지금도 종전처럼 각 군현의 공물은 목면(木綿)으로 값을 매겨 사주인(私主人)에게 지급하여 상납하게 하는데, 목면이 매우 귀하기 때문에 목면을 마련할 길이 없으니, 별도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공물 가격을 계산하여 변통해주도록 요청한 사실을(“前則各官貢物, 準以木綿, 給於私主人, 使之上納矣. 今亦依前規督納, 而木綿極貴, 故百計無出木綿之理. 以此別定差使員, 計其價物, 使臣有所啓達而變通也.”) 보고하였다. 선조가 “본색(本色)으로 상납하게 할 수는 없는가?”라고 물으니, 이원익은 “전복(典僕) 등이 상사(上司)에 납부할 때 인정(人情)을 바치는 것을 고달파하여 이와 같이 남징(濫懲)한다.”고 하면서 “본색(本色) 납부가 매우 온당하지만 형편상 할 수가 없다.”고 아뢰었다. 이원익은 차사원의 폐단도 우려하며, 고육지책으로 “납부하는 자와 차사원을 일시에 상경(上京)시키되 만일 인정을 남징하는 자가 있거든 호조에 호소하게 하여 자연히 규찰(糾察)하도록 하고 법사(法司) 또한 드러나는 대로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사신은 이원익이 극에 도달한 사주인의 폐단에 대해 미봉책을 제시하였다고 비판하였다.[28] 이 기사는 수미법이 1595년 9월 이후의 논의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1596년에는 공납제가 부활하였음을 드러낸다. 1594년 4월 유성룡이 「진시무차」를 올려 공물과 진상을 쌀로 받는 것을 건의한 데에 대해 선조가 그것을 강구하기를 원하지 않아 폐지되었다고 『선조수정실록』은 전하고 있다.[29] 선조는 현물 상납을 선호하였던 것이다.
김응남의 箚子는 수미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당시 전란으로 시전이 복구되지 못해 정부 물자의 조달에 애로가 컸고 값을 넉넉히 치러줄 재원도 없었고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추가로 인민에게 부담지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쌀 징수에 수반된 부담, 지방 수요를 위한 공물 등에 대한 대책도 없었다. 그런데 김응남의 부족한 식견은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거나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는 구래의 제도로 복귀하자고 주장한 데에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당시 정책결정의 한계가 드러난다.
유성룡은 수미법 존속 여부의 논의에서 그 반대론이 우세해진 1595년말 조정에 건의한 것으로 보이는 「공물작미의(貢物作米議)」에서, 수미법으로 공물 대신 쌀 2말로 거두어 이전보다 인민의 부담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설(民情不便之說)”은 조세부담이 증가한 호족들, 이권을 상실한 방납인, 그리고 지방 재원을 상실한 감사·수령에게서 나온 것이니, “분분한 논의에 迷惑되지 말고 과단성 있게 시행할 따름이다.”고 건의하였다. 결국 수미법이 폐지된 데에 대해 유성룡은 “식견이 부족한 사대부들이 동조한” 점을 들었다.[30] 이러한 점들은 이후 대동법의 시행에도 계속 심각한 난관을 안겼다. 수미법은 짧은 기간에 시행된 데에 그쳤지만, 후일에 실시된 대동법은 그 실시과정에서 빚어진 시행착오를 보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31]
유성룡의 수미법이 폐지된 후에 그 불씨를 살리려고 노력한 중심적인 인물이 이원익이었다. 그는 광해군·인조 때에 대동법의 시행을 관철하고 그 뿌리를 내렸다. 유성룡의 수미법이 폐지된 1596년에 이원익은 공납제의 폐단을 거론하였고 이러한 자세는 광해군 때에 대동법의 시행으로 이어졌다. 그해 10월 5일 충청·전라도의 공물을 경감하였으나 인민이 소생할 가망이 없고 수령은 빙공영사(憑公營私)의 잘못을 저지른다고 했다.[32] 그 달 21일에는 공물을 현물 본색(本色)으로 납부하는 일은 형편상 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33] 유성룡은 「공물작미의」에서 당시 공물을 본색으로 상납하는 비중이 10 20%에 불과할 정도로 방납은 대세가 되었다고 했다.
이원익은 공납제 중에도 가장 폐단이 심한 其人 문제에 집중하였다. 기인이란 원래 향리의 자제로서 수도에 올라와 소속 지역 일의 고문으로 삼은 자였다. 그런데 고려말의 혼란기에 이들은 잡역을 담당하게 되었고, 전시과의 폐지로 관료에 시지(柴地)가 지급되지 않자 연료인 소목(燒木)을 바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기인역도 직물로 대신할 수 있었다.[34] 1596년 4월에 유성룡은 이원익이 “기인의 폐단이 극심하다. 기인의 가포(價布)가 1달에 무명 8필인데, 금년에는 무명이 귀하고 쌀이 천해서 8필의 목을 비납(備納)하기가 극히 어려우니, 쌀로 그 가격을 정하면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다. 또 조예(皂隷) 1달의 가목(價木)이 6필인데 봉납(捧納)이 극히 민망하다 하니, 이것 또한 쌀로 상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주장을 선조에게 아뢰었다.[35] 그해 10월 17일 호조는 각도 향리가 기인제도로 인한 피해가 심각함을 지적하면서 이원익의 건의를 상사도 체찰사(上四道體察使) 유성룡과 함께 의논한 다음 공조(工曹)와 상의하여 그 대책으로서 은자(銀子) 700냥을 제급(題給)하도록 하고 은자 값은 장차 외방(外方)에서 올라올 쌀로 대신 공급하여 군량을 보충하는 방안을 기획하였다고 보고하였는데, 선조는 “우선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다만 은자로써 제급할 수는 없다.”는 비답을 내렸다.[36] 기인 폐단을 구제할 재원이 문제였던 것이다. 11월 7일에 이원익은 왜적보다도 “기인의 일이 백성을 더욱 심하게 괴롭히니, 이것을 변통하지 않으면 백성이 명을 견디어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유성룡이 “기인이 방납(防納)하는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반드시 속히 변통해야 백성을 보전할 수 있을 터인데, 이토록 구습만 따르는 것이 몹시 답답합니다.”라며 후원하였다.[37] 그달 17일에 이원익은 “이번에 백성들이 조정에서 체찰사를 불렀다는 말을 듣고는, 백성의 힘을 더는 것을 아뢰어 신으로 하여금 각사(各司)의 기인 공물을 반드시 품보(稟報)하여 변통하게 할 것을 바라고, 곧 와서 바치지 않고 사세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 원수(元數)를 조금 줄이기를 요청하여 왕의 윤허를 얻었다. 이어서 “공물의 방납(防納)은 조정이 금지하기는 하나, 방납을 하지 않으면 외방(外方)에서 직납(直納)하는 것도 오지 않으므로 형세가 장차 낭패하게 될 것입니다. 호조와 비변사에 들이는 물건을 일체 줄여서 군량(軍糧)을 만든다 하는데, 군량을 만들면 공물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수미법이 유리함을 주장하고 수미법이 아니면 방납은 회피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38] 유성룡의 수미법이 폐지된 1596년에는 이원익이 공납제 중에 가장 심각한 현안인 기인제도의 문제점과 그 개혁 필요성을 앞장서서 거론하고 유성룡이 그것을 후원하는 것은 흥미롭다. 폐지된 유성룡의 수미법을 이원익이 되살리고 유성룡이 그것을 지원하는 조심스러운 전략이 엿보인다. 이원익은 이후 수미법을 부활할 기회를 기다리다가, 광해군이 즉위하는 시점에 그 타이밍을 잡았다.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추진하던 광해군 원년(1609)에 이원익은 “작미(作米)의 일은 전부터 여러 번 시험해보려고 하였다.”고 술회하였다.[39]
전란이 종식된 직후인 1601-1604년간에 量田이 행해지고 1605년 貢案의 수정이 완료되었다. 그러자 공물의 加定이 이루어지고, 방납의 폐단이 확산되었다.[40] 전란으로 향리(鄕吏)가 거의 사망하자 기인의 가포(價布)를 부득이 인민에게 나누어 배정했는데 인민이 이것을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1602년 이원익이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 향리에게 기인역을 다시 맡기고, 그 부족분을 민결(民結)에서 보충하게 했다.[41] 그러다 광해군 때에 이원익이 주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기인의 공가(貢價)도 대동미에 흡수하였고 기인시탄공물주인(其人柴炭貢物主人)이 정부의 땔감 조달을 맡도록 했다.[42]
5. 광해군·인조대 대동법의 정착과 이원익의 공헌
광해군·인조대에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서는 지두환, 이정철 등이 정리하였는데, 필자가 재정리하고 그 의미를 재평가해본다. 광해군은 즉위하던 1608년 3월 2일에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내려 민생 안정의 대책을 널리 구하였다.
해묵은 포흠(逋欠:조세 체납), 급하지 않은 공부(貢賦), 군졸들의 도고(逃故:도망이나 사망), 세도를 부리는 호강(豪强)들의 침릉(侵凌:불법을 일삼고 수령을 깔보는 것)은 물론, 인민을 병들게 하는 모든 폐단은 일체 줄이고 개혁해서 혹시라도 폐단이 되는 일이 없게 하라. 공상(供上)하는 방물(方物)과 내수(內需)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감하겠다. 그리고 중외(中外)로 하여금 (각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다 아뢰게 하여 … 이런 내용으로 대신에게 이르라.[43]
韓百謙의 「貢物變通疎」는 여기에 응하였음이 분명하다. 『東國文獻備考』 田賦考12, 大同1에서는 “광해군 초에 戶曹參議 한백겸이 상소하여 공물의 폐단을 논하며 作米의 법을 시행하기를 요청하였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 한백겸은 임란 중에 유성룡에 의해 수령으로 추천된 바 있었고, 유성룡이 수미법을 추진할 때에 戶曹佐郞으로서 그 전모를 잘 알고 있었다(“亦嘗預聞首末”). 한백겸은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에 수미법을 건의하면서, 유성룡의 수미법이 폐지된 원인으로 첫째, 1결마다 쌀 2말의 부담은 가벼우나 산군(山郡)의 운반비가 무거웠으며, 둘째, 관청이 값을 깎아 시전상인이 원망하였고, 셋째, 서울을 수복한 지 오래지 않아서 물화 구매가 어려웠고, 넷째, 이익을 봉쇄당한 방납의 무리가 불평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 개선안을 제안하였다.[44] 『동국문헌비고』에서는 한백겸의 공물 상소를 거론한 다음 “영의정 이원익이 大同詳定條式을 설계하기를 覆奏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원익은 한백겸의 상소에 지적된 개선 방안을 대동법에 반영하였다.
광해군은 위의 비방기를 내리기 직전인 2월에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원익이 영의정이 된 데에 대하여 사관은 “이원익은 어진 재상이었다. 일시의 사류들이 景仰하여마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소 미워하고 원망하던 이들도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왕위를 이은 처음에 영의정의 자리에 앉히니 흡족히 여기고 사림은 서로 축하하였으니, 이는 바로 크게 할 수 있는 시기였다(李元翼, 賢相也. 非但一時士類景仰之不暇, 雖平日所憎怨者, 莫不歎服. 而嗣服之初, 擢置首揆, 人心洽然 士林相賀, 此正大有爲之時也).”[45]
이원익은 3월 26일에 다음과 차자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진달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민폐를 극복하는 기구를 설치하여 그 일을 전담시키자는 주장이었다. 이 제안은 선혜청으로 귀결되었다.
삼가 듣자옵건대 공물·군졸 등의 일이 인민에게 걱정을 끼친다는 전교가 반포된 지 이미 오래인데도 신이 사직서를 내고 집에 물러나 있었고, 좌상과 우상도 서로 잇달아 사정이 있어서 담당 관리[有司]가 아직까지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합니다. 무릇 인민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인민이 없으면 나라가 없게 됩니다. … 지금 인민이 곤경에 처해 주검이 가까이 닥쳤으니, 그들을 구제할 일이 몹시 급한데 신의 병으로 (주상의) 큰 은혜가 지체되게 하였으니, 신은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주상께서는) 속히 명하여 백성의 일을 잘 아는 사람 4~5명을 정밀하게 뽑아 별도로 한 기관[局]을 설치하여 그 일을 전담시키고, … 궁한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게 하소서.[46]
이원익의 상소를 받고 광해군은 이조·예조·호조의 당상들이 그의 집에 가서 의논한 후 보고하라고 곧바로 지시하였다.[47] 이들은 이원익의 집을 방문하여 “그 절목(節目)을 마련하는 것에서는 본래 다른 대신들이 있으니 신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는 말을 듣고 이원익의 건의대로 “인민의 일을 잘 아는 관원 4 5명을 뽑아 회의하여 절목을 마련해서 시행하게 하소서.”라고 건의하였다.[48] 광해군이 施政 초기에 민폐의 개혁 건의를 받은 데에 대하여 이원익은 그 제안에 앞서 민폐를 개혁할 관서를 설치하여 그 제도를 설계하도록 건의하고 유도하였던 것이다. 일회성의 시혜가 아니라 민생 안정을 위한 항구적 대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점이 광해군의 즉위초 비망기에 대한 여러 관료의 대응 중 이원익을 돋보이게 한다. 이원익은 정치 관료로서뿐만 아니라 행정 실무에 소상한 기술 관료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앞서 이준경이 공납제의 폐단을 막고자 1571년 정공도감을 설치하였음을 언급한 바 있는데, 율곡도 1581년 공납제 등의 국정의 폐단을 시정할 經濟司 설치를 건의한 바 있다.[49] 이원익의 기구 설치론은 선배 관료의 유지를 계승한 것이다.
3월의 비망기에 포함된 구절 “조그만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쓴다(務宣一分之惠)”를 따서 새로운 제도를 宣惠法이라 했다. 4월에 선혜청이 설치되어 29일 “공상지(供上紙)의 일은 본디 횡간(橫看)에 실린 바도 아닌데, 지금에는 제일가는 백성들의 폐단이 되어버렸다.”며 “이후부터는 길이와 넓이, 품질과 색깔을 조종조(祖宗朝)의 횡간대로 따를 것을 즉시 각도에 행회(行會)하여 시행토록 하겠습니다.”고 건의하였는데, 광해군은 두꺼운 종이가 필요하다면서 관례의 수정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왕조실록』의 편찬자는 “왕위를 이은 처음에는 조그만 민폐도 제거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민폐로서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은 공상지보다 더한 것이 없었는데 두세 번씩이나 논계하여도 오히려 윤허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50] 공물과 진상을 쌀로 거두면 왕실이 원하는 품질에 미달하는 물자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후 광해군이 대동법에 호의적이지 않은 데에는 이러한 점도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선조도 본색 상납을 선호하였다.
5월부터 이원익은 선혜청을 통해 공납제의 개혁에 착수하였는데, 다음 기사는 그것을 보여준다.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했다. 처음에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경)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몇 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경기도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관청을 설치하여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서 거둔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적·사적 경비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지나다니는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예전대로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이를 따랐다.[51]
유성룡의 수미법은 1결당 쌀 2말인데, 이원익의 대동법은 16말로 증가하였다. 그 첫째 요인은 방납인에게 가격을 넉넉하게 지급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은 한백겸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둘째,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은 예전대로 하였지만, 각종 잡역을 대동법으로 거둔 쌀로 지출하였다. 셋째, 지방 경비로 쌀 2말을 배정하였다. 경기도 선혜법은 공물과 진상뿐만 아니라 요역의 대부분과 지방 경비의 일부도 포괄한 점에서 진전을 이루었지만, 쌀 2말로는 지방 경비의 일부밖에 충당할 수 없는 한계를 가졌다.[52] 효종 때에 김육이 주도로 만든 절목에 이르러서는 요역과 지방경비 대부분을 대동법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이런 한계를 가지기는 했지만, 이 새로운 제도는 “혼란하고 붕궤된 공납·요역제를 함께 혁신하는 동시에 문란한 지방관부 경비를 확립하는” 의의를 가졌다. 그것은 노동력의 강제 징발에 의한 요역제를 돈을 주고 노동력을 부리는 雇役制로 전환하게 만들었다.[53] 방납인에게 공물 조달권을 주는 것은 그들의 반발을 막을 뿐만 아니라 관이 직접 물자를 구입할 때 발생하는 폐단을 줄일 수 있었는데, 서애의 수미법에서 얻은 교훈이 반영된 것이었다.
조선 초부터 세입예산표라 할 공안은 계속 정비되었고 1464년에는 세출예산표라 할 횡간橫看이 정비되었다. 그 결과 『경국대전』 「호전戶典」은 그 첫머리에 “경비經費는 횡간과 공안에 의거하여 지출한다”라고 명시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속대전』에는 “대동사목大同事目을 참용參用한다”고 했는데, 대동법이 정착되고 그 절목이 정비되면서 예산제도는 더욱 정비되었던 것이다. 이 대동법 제도는 유성룡에 의해 처음 마련되고 이원익에 의해 정비되고 김육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원익은 “성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맨 먼저 백성을 근심하는 전교를 내리시니, 백성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기를 큰 가뭄에 비를 바라듯이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방납 등의 일이 오늘날의 극심한 폐단이 되었으므로 변통해서 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제거하고 덕의(德意)가 선포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또 사세에 구애될까 염려하여 감히 결단해 행하지 못하고 우선 기전(畿甸)에 시험할 내용으로 사목(事目)을 만들어 계청(啓請)해서 윤허를 받았습니다.”라고 했다.[54] 이해관계 집단의 반발이 심한 대동법과 같은 개혁은 임진왜란과 같은 위기의 시기에 가능하다고 유성룡이 말했음을 앞서 언급하였는데, 이원익은 새로운 군주가 업적을 이룰 필요성이 절박한 즉위 초의 시점에 대동법을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인조 즉위라는 타이밍을 맞추어 이원익 등이, 효종 즉위라는 타이밍을 맞추어 김육 등이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하였다.
애초에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시행할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1608년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었는데, 시행된 지 반년 정도 지나 그 폐지 여부가 논의될 정도로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래서 이원익은 “1년 동안 계속 시행해서 마감한 뒤에야 바야흐로 민간의 장·단점[利病]의 대략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여 조정의 논의를 거쳐 1609년 가을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되었다.[55] 1609년 2월 광해군은 “승지 유공량(柳公亮)이 선혜청 작미(作米)의 일이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니 “매우 두려운 생각이 든다.”며 “송(宋)나라의 신법(新法)이 그 뜻이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데 있었겠는가마는 마침내 구제하기 어려운 화를 불렀다.”는 점을 경계하였다.[56] 이처럼 폐지될 운명에 처한 대동법의 구제에 큰 힘이 된 것은 1609년 4월 경기도 사민(士民) 263명의 연명정장(連名呈狀)이었다. 이들은 대동선혜(大同宣惠)법으로 “우리 백성이 넓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1년 동안 경영하여 백성을 이롭게 한 좋은 법을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하루아침의 모의로 이를 다시 고치고자 하니, 사민들은 그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쳐 끝이 없습니다.”라며 청원하였다.[57] 이 청원에서 ‘대동선혜’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조세를 균등하고 간편하게 부과·징수하는 취지가 바로 대동사회의 정신인 것이다.
1610년 방납 세력이 대동법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내의원(內醫院)이 “각읍에서 진상하는 약재(藥材)를 대신 쌀로 받는다고 핑계하여 하나도 진상하는 것이 없으니, 전례대로 제 철에 생산되는 약재를 채취하여 달마다 진상하게 하소서.”라고 건의하자, 광해군은 “임금께 진상하는 약재는 공물에 비할 것이 아닌데, 선혜청이 모두 쌀로 대신 받게 하였으니, 사체(事體)의 경중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변통하게 하라.”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항복마저 끝내 행하지 못할 것을 헤아리고 의논하여 파하려고 하였으나, 이덕형이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여 거의 죽게 된 백성이 조금이라도 은혜를 입게 하소서.”라고 주장하여, 폐지론을 막았다.[58] 1610년과 1614년에 대동법을 확대시행하자는 주장에 대해, 광해군은 조종전장(祖宗典章)인 임토작공(任土作貢)을 준수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편리하고 토산물의 상납으로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면 된다고 보아 그것을 거부하였다.[59] 현물 본색 상납의 임토작공의 논리가 힘을 발휘한 데에는 시장의 미발달도 작용하였다. 광해군 때까지 대동법의 성립을 면밀하게 고찰한 田川孝三은 경기도 대동법의 정착이 “의정대신 이원익·이덕형을 비롯하여 유근(柳根)·박이서(朴彝敍)·서성(徐渻) 등이 신법을 단단히 견지한 노력에 크게 힘입었을 뿐만 아니라 위로는 臺諫으로서 신진 사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지방의 사민(士民)과 청원이 강한 지주가 되었다.”고 보았다.[60]
1614년 사헌부가 대동법을 팔도에 시행하자고 청할 때 호조가 동조하면서 보고한 내용 중에는 “쌀 16두를 거둔 뒤로는 경기 지방의 요역이 모두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공물 사주인들도 그것을 바탕으로 생활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경비도 궁핍하지 않아 경기 지방의 백성들이 그것에 힘입어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으므로 모두가 성상의 은혜를 우러러 보았는데, 이는 실로 이미 시험해 본 명백한 징험이다.”고 평가하였다.[61] 여기서 드러나듯이, 경기도에서 대동법이 정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경기도의 요역 부담이 무거웠던 점이다. 그리고 경기도는 쌀의 운반이 쉽고 서울과 개성의 존재로 시장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라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대동법은 경기도에서 성과를 거둔 이후 확대 시행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인조는 반정 직후인 1623년 3월 13일에 첫 영의정으로 이원익을 임명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의 다음 기록은 그에 대한 조정과 사회의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후광이 대동법의 추진을 후원하였던 것이다.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先朝)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62]
그 달 22일 인조반정 후의 첫번째 조정회의에서 인조가 민폐의 제거와 인재의 등용에 대해 염려하자, 이원익은 “현재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의 재정이 고갈되었습니다. 반드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며 용도를 절약하고 인민을 사랑하며, 모든 요역(徭役)도 인민에게 부과하지 말아서 그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펴게 해야겠습니다.”라며 평소의 지론을 펼쳤다. 이원익의 경제 시책은 모두 이런 목표에 귀결된다. 이에 대해 인조는 “경의 말이 옳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요역과 부세를 경감하여 우선 민심을 집결시키는 것이 제일이다.”며 동조하였다.[63] 그 다음날 인조는 영의정 이원익, 호조 판서 이서와 참판 권반(權盼)을 만나 “오늘날의 급선무는 安民,用人,詰戎 등의 일이다.”고 했다. 이서가 “貢物의 蠲減이 곧 安民의 근본이다.”고 하고 방납의 폐단을 거론하였다. 이에 이원익은 “국가의 용도가 호번하니, 만약 이를 헤아리지 않고 먼저 견감한다면 국가의 용도가 필시 어려울 것입니다. 당상과 낭청 각 한 사람씩을 선택해 차임하여 전담시켜서 낭비를 줄이고 공물을 견감하는 등의 일을 호조 병조와 상의하여 잘 요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신의 근력이 미치지 못하여 결코 서무(庶務)를 겸하여 살필 수 없습니다. 주관할 관원을 차출하여 그로 하여금 자세히 헤아려 의정하게 한 후 신이 그 대강을 들어 아뢰어서 처리하면 일에 조리가 있어서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여 왕의 윤허를 받았다.[64] 광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이원익은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시점에서 개혁의 전망이 높은 즉위초에 공납제에 대한 문제점이 거론되자 나서서 그 개혁 작업을 할 기구나 인력이나 절목과 같은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면서 신중하게 접근하였다. 이원익은 정책 이상을 실현하는 능력이 탁월한 관료였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명분인 공물의 견감론이 제기되자, 이원익은 그런 수입의 감소를 지탱할 수 있는 국가지출의 절감책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栽省廳이 4월부터 국가지출의 절감책을 추진하였다. 국가지출을 절약하여 공물이 견감되면, 공물 대신에 부과되는 쌀의 양이 줄어들어 대동법의 추진에 대한 반발이 줄어든다. 여기까지는 양출위입(量出爲入)의 원칙이 작용된다. 그래서 대동법 제도가 정착한 다음부터는 양입위출(量入爲出)의 원칙에 따라 재정을 운용하면 되는 것이다. 성호 이익은 먼저 국가 지출을 헤아려 세입의 규모를 정하고, 일단 세입이 정해지면 그것에 맞게 지출을 하면, 규정 외 잡세 등의 수탈이 없어져 안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65] 이원익이 그런 전략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4월 4일 호조는 다음과 같이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건의하였다.
“선혜법(宣惠法)을 경기 지방에 실시한 지 지금 20년이 되어 가는데, 인민이 매우 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팔도 전체에 통용시키면 팔도 인민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폐조 때에는 각사(各司)의 하전(下典)과 이익을 독점하는 세가(勢家)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저지시켰으므로, 그 편리한 점을 알면서도 시행하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현재 갖가지 부역이 중첩되고 인민이 도탄에 빠졌으니, 반드시 대대적으로 경장(更張)하여 민심을 위안시킬 소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비록 일시에 모든 도에 실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선 2 3개 도에 먼저 실시하여 봄·가을로 1결(結)당 10두씩의 미곡을 거두면 60만 석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 남 북도의 군수용 및 영남 하도의 왜관(倭館)의 비용을 제하더라도 나머지가 또한 40만 석은 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조용(調用)한다면 부족할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대신과 상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戶曹啓曰: “宣惠之法, 行於京畿, 今將二十年, 民甚便之. 通行八道, 則八道之民可蒙其惠, 而廢朝時, 則各司下典及牟利勢家, 百般沮撓, 知其便而不得行久矣. 卽今百役稠疊, 生民塗炭, 必須大叚更張, 以爲慰悅民心之地. 縱不得一時竝擧, 姑爲先施於二三道, 春秋各收一結十斗之米, 可至六十萬石, 雖除西南,北道軍需所用及嶺南下道倭館所費, 其餘亦可四十萬石, 以此調用, 似無不足之患. 與大臣相議停當, 故敢啓.”)[66]
인조가 이원익과 더불어 민폐를 논의한 지 11일 만에 호조가 대동법을 건의할 정도로 논의가 빠르게 진전된 것은 이원익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동법이 경기도에서 거둔 성과가 그 확대시행을 지원하였다. 인조는 호조의 건의를 “대신과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는데, 4월부터 대동법을 설계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원익은 재생청을 활용하여 대동법을 추진하였다. 4월에 재생청이 하사도(下四道)의 작미사목(作米事目)이 이미 계하(啓下)되었으니, 각 고을로 하여금 계묘년 양전(量田)한 뒤에 개간 실태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67]
대동법을 남부 지방으로 확대시행하면서 경지 실태에 대한 철저한 조사 보고에 관한 지시를 먼저 내렸는데, 공물 대신 쌀로 거두는 개혁이 성공하기 위한 중요한 요건은 과세 경지의 철저한 파악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직전 토지대장인 양안에 올라간 경지가 150만결이었는데, 과세 경지는 80만결이 넘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경지가 황폐화되고 국가의 경지 파악력이 약화되어 1601년에는 과세 경지가 30만결, 1611년에는 54만결에 불과하였다. 인조 때의 경지 측량사업인 양전으로 1634년 양안에 오른 경지가 125만결에 달하였다. 그래서 양전사업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1623년 남부 곡창지대에서 대동법을 추진하는 데에 중대한 제약점이었다.[68]
이원익이 영의정으로서 조정회의에 처음 참여한 것이 1623년 3월 22일인데, 6월 24일 이전에 작미사목이 확정되어 각 지역에 시달되었으니, 정책의 결정과 제도의 설계가 신속하였다.
작미사목이 각 지역에 시달된 다음 달의 경연에서 知事 이정구(李廷龜)는 개혁 정치에 대하여 “의심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직도 많다.”고 아뢰자, 인조는 “이번에 선혜청에서 하는 일은 군량의 마련에는 도움이 있겠지만 서민[小民]과 이익을 서로 다투는 듯하여 서울 시민의 원망이 가득하다. 지방도 불편하게 여기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이정구와 조존성(趙存性) 등이 “듣건대 남쪽 사람들은 경지가 많은 까닭에 싫어하지만, 강원도는 상당히 편리하게 여긴다고 합니다.”고 답하였다.[69] 방납을 주로 맡은 서울 시민의 원망이 가득하였고, 경지가 많은 충청·전라·경상도에서는 대토지소유자의 반발이 심하였으나, 경지가 적은 강원도는 편리하게 여겼는데, 인조대에 대동법의 확대 시행이 강원도에만 국한되는 운명은 이 무렵에 정해졌다고 하겠다. 호를 대상으로 토산물을 부과하는 공물 대신에 경지를 기준으로 쌀 등을 부과하는 대동법은 경지를 많이 가진 부자에게 불리하여 부자가 많은 충청·전라도보다 경지가 적고 공물 부담이 무거운 강원도에서는 시행되기가 용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대동청을 설립하여 작미사목을 집행하려고 하자, 그 반대론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조익(趙翼)이 9월 3일에 소장을 올려 대동청의 설립에 대한 편의 절목(便宜節目)을 조목별로 진술하니, 인조가 “그대가 이해 득실을 소상히 개진하여 나의 의혹이 풀렸으니, 참으로 가상하고 기쁘다. 상소의 사연은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70] 작미사목을 집행하려는 기구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경기도의 선혜청과 다른 대동청이라는 명칭으로 의견이 수렴된 모양이어서, 조익의 상소부터는 선혜법이 아니라 대동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조반정 후에 이조정랑이 된 조익은 재생청이 기능하기 시작한 1623년 4월에 이원익에 의해 그 낭청으로 임명되어 재생청의 사무를 전담하면서 충청·전라·경상·강원 4도의 대동법을 주관하는 이원익을 도와 대동법의 사목을 만드는 일 등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충청·전라도에 내려가서 대동법의 장단점을 문의하였다. 이원익의 사후 조익은 이원익의 문하로 자처하였고 이원익이 그를 아들 또는 조카처럼 대하였다고 회고한다.[71]
9월 9일 조정회의에서 조익의 상소에 힘입어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대세가 기울어졌는데, 그래도 대동법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은 현실을 고려하여 2품 이상 宰臣들의 獻議를 받기로 했다.[72] 그 결과 9월 23일에는 강원·충청·전라 3도의 대동청이 설치되었다.
인조가 이원익과 안민의 방도를 처음 본격적으로 논의하던 때에, 서인 산림의 중심인물인 김장생金長生은 이귀李貴·김류金鎏·장유·최명길에게 보낸 글에서 “난리 후 백성을 괴롭히던 폐정과 잡세를 모두 제거하고 공안을 고치고 방납을 막은 후에야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이 위로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건의하였다. 그 후 재신의 헌의를 받을 때 그는 대동법의 신중한 추진을 요청하였다. 대동법에 규정된 부담이 가볍지 않은데다가 추가 징세가 불가피하고 운반비가 무겁기 때문에, 오히려 인민에게 더 큰 고통을 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먼저 경지를 측량하여 농민의 부담을 균등히 하고 공안을 개정하여 재정 지출을 절약한 다음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주장하였다.[73] 그는 스승인 율곡이 제시한 공안개정론과 대동법의 선후관계를 명백히 하였다. 그의 논리는 설득력을 가지나, 인조대뿐만 아니라 효종대까지 대동법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사실 재생청을 통해 지출을 절감하면서 공물 대신 쌀로 거두는 이원익의 전략은 김장생이 궁극적으로 목표로 삼은 바를 일거에 추진하는 것이었다.
서애의 수미법 때부터 손해를 입는 방납인, 대토지소유자, 지방관리 등이 대동법에 반발하였다. 방납 세력이 반대할 것은 자명하고, 경지를 많이 가진 대호大戶의 부담이 늘었다. 공물 부과에서 자의적 수탈의 기회를 가진 지방 관리도 싫어했다. 게다가 “대동법은 (1) 실시되던 해에 흉년이 들고 그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목(事目)이 자주 변하였으며 지방관이 사목을 준수하지 않아 소위 ‘半大同’의 폐가 생겼다는 것, (2) (충청·전라도의 경우) 전결수(田結數)가 많아 상납·조운의 난폐(難弊)가 있었다는 것” 등의 이유로 불편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74]
대동법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고 그 제도적 미비점이 불만을 낳자, 정책 결정에 참여한 고위 관료들이 대동법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하였다. 1624년 3월에는 인조도 “대동청의 일은 어쩌면 이토록 어지러운가?”라고 걱정하고 “법을 만든 지 1년도 못 되어 다시 폐지하게 될 터이니, 법을 만든 본의가 아니다.”라며 우려하였다. 이에 대해 이원익은 “인민의 공적 부담을 균등하게 부과하는 데에는 이 법만한 것이 없습니다. 공물의 규칙을 상세히 정해놓으면 큰 고을, 작은 고을이 똑같이 될 것인데 이 법의 시행을 원하는 것은 작은 고을이고 원하지 않는 것은 큰 고을입니다.(均一民役, 莫如此法貢物之規. 旣已詳定, 則大邑小邑, 如畫一矣. rendrich2017.blogspot.com 此法之行, 願之者小邑也; 不願者大邑也.)”라며 대동법을 변론하였다.[75] 그해 7월에 신흠은 대동법에 대해 “대가大家와 거족巨族이 불편하게 여기며 원망하는 일이라면 이 또한 쇠퇴한 세상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라 하였다.[76] 조익은 강원도에는 호강豪强 세력이 없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고 충청도·전라도에는 호강 세력이 원망한다고 보았다. 그래도 소민이 모두 좋아하였고 좋아하는 양반도 많다고 했다. 그리고 ‘반半대동’이 된 것을 제도의 미비점으로 보았다.[77] 효종 때에 이경석李景奭은 대읍大邑과 대호의 반대로 대동법이 좌절하였다고 증언하였다.[78] 대가와 거족, 그리고 대읍 등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의 거센 반대를 받아가면서 대동법을 추진해간 정치 관료들은 평가받을 만하다.
1624년 12월에 삼도대동청은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1결당 쌀 5두씩 받아들이면, 본읍(本邑)의 수요와 각영(各營)의 비용과 각종 진상하는 방물(方物)을 모두 이 5두로 마련하여 지출하고도 남습니다.(邑無大小, 每一結捧米五斗, 本邑所需各營所用及各樣進上方物, 皆以此五斗磨鍊支用, 而餘萬石矣.)”라고 하여 지방재정의 대책을 제시하였으나, 인조는 5두를 추가로 거두지 말라고 명하였다.[79] 삼도대동청의 제안은 국가가 수요물자를 현물로 징수하는 폐단을 전반적으로 개혁하는 대책이었으나, 인조는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공물 외에 추가로 5두를 거둔다고 문제가 있다고 보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거두는 것이 단지 京貢物에만 그칠 뿐 지방의 다른 부담의 대책이 결여되어 지방에서는 ‘반(半)대동’이라며 불평하였다.[80] 대동청의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재직하던 최명길은 민간이 ‘반대동’이라며 소란하자,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고 차자를 올려 대동법을 폐지하였다고 회고하였다.[81] 이 때 이원익은 인조의 자문에 응하면서 대동법으로 “방납(防納)을 방지하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중외의 폐해를 구제하려고 한 것인데, 절목(節目)을 반포하고 난 다음에는 불편하다는 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분분하였다.(初意欲以杜防納均賦役, 以救中外之弊, 而節目頒布之後, 不便之說, 不勝其紛紜.)”고 했다.[82]
1625년 2월 이원익은 차자를 올려 “신이 조정에 있어 온 이래 중외(中外)의 폐단이 대부분 부역(賦役)이 균등하지 못하고 멋대로 방납(防納)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동법을 신이 실제로 처음 착안하여 제신(諸臣)들과 뜻을 결정한 뒤 먼저 경기에서 시험해 보았는데, 몇 년을 시행해 보니 자못 효과가 있기에 강원도에도 병행하려 하다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반정 초에 부름을 받고 올라와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 진실로 백성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시기에, 신은 이 법을 먼저 강원도에 시행하고 이어 다른 도에도 적용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백성의 병폐를 제거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성상의 뜻에 보답하려고 했습니다.”며 대동법을 추진한 경위를 피력한 다음 “지방의 民情이 날이 갈수록 더욱 어긋나고 있는 형편이니…어찌 억지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다음 “바라건대 본청(本廳)에 명하여 즉시 혁파하도록 하고, 이미 거둔 쌀과 베는 잘 조처하여 모두 민역(民役)의 대가(代價)로 충당하게 하여 중간에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그러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라며 대동법의 폐지를 요청하였다. 이에 묘당에서 의논하여 비변사가 민정에 순응하여 대동법을 폐지하되 강원도에서는 민정이 모두 편하게 여기므로 대동법을 유지하자고 건의하였다. 이어서 호조판서 심열(沈悅)이 “신이 강원도 공물의 원수(元數)와 전결(田結)의 총액을 계산해 보건대 1결당 쌀 16두(斗)씩 받으면 각종 공물 값을 충당해 줄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인조는 강원도 감사에게 민정을 탐문하여 “인민 모두 시행하기를 원한다”는 보고를 듣고 강원도 대동법을 존속시켰다.[83]
이원익은 대동법이 폐지될 운명에 처한 때부터 21차례나 영의정의 사직을 요청하여 대동법의 시행이 중단될 무렵에 허락을 받았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이원익은 조정에 있었던 3년 동안 경세제민하는 계책을 별로 내놓은 것은 없었지만 일국의 원로로서 조야(朝野)의 신망을 깊이 받았으므로 그가 해직하자 실망하는 사람이 많았다.(李元翼在朝三年, 別無經濟之策, 而以一國元老, 深繫朝野之望. 故及其解職, 人多缺望.)”고 했는데, 그 편찬자는 대동법을 강원도에 정착시킨 의의를 과소평가하였던 것이다.[84] 그 해 6월에는 벼슬을 그만둘 것을 요청하였는데, 실록의 편찬자는 이미 노쇠하여 사공(事功)에 뜻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때 이원익은 79세였다. 이에 대해 인조는 “비록 힘써 반열에 나올 수 없다 하더라도 집에 누워서 도(道)를 논함으로써 어진 이를 존경하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雖不能陳力就列, 亦可臥閤論道, 用副予側席之望.)” 며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85] 이원익은 인조반정 후에 광해군 때에 이루지 못한 대동법 등을 통한 경제제민의 포부를 실현하고자 조정에 나왔다가, 그 결말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자 했다.
이처럼 이원익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 인조 때에 강원도에 대동법의 시행에 최대의 공로자였다. 대동법을 정착시키면서 이원익은 그 제도의 구체적 내용을 정비하였다. 광해군 때와 인조 때에 대동법의 事目이 있었는데, 그것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 제도적 진전은 알 수 있다. 유성룡의 수미법은 중앙으로 올라오는 공물과 진상만을 쌀로 거두는 데에 그쳤으나, 이원익의 대동법은 요역을 상당 부분 포괄하였고, 지방재정 대책도 마련하였다. 이 점에서는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김육의 충청도대동절목에서 한층 정비된다. 그리고 이원익은 방납인에게 공가를 넉넉히 지급하는 등의 대책도 세웠다.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이원익의 장기는 좋은 제도의 추진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잘 정비하는 것이다.
정묘호란을 당한 직후 인조가 민심 안정책의 일환으로 “만약 공물을 줄인다면 마땅히 어떤 공물을 줄여야 하겠는가?”라고 신하에게 자문을 구하자, 이원익은 “먼저 근본부터 다스려야 합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서는 공물을 줄이더라도 모두 구차스러울 뿐입니다.”라고 아뢰었다.[86] 이원익이 대동법을 근본으로 보아 그 시행을 은근히 촉구한 것으로 보인다.
6. 이원익의 유산이 충청도 대동법의 성립에 미친 영향
효종 때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정착하는 데에 이원익의 유산이 가볍지 않게 작용하였다. 충청도 대동법의 정착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김육은 1638년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전임자인 권반(權盼)이 도의 경지세[田役]을 고르게 제정하여 작성한 문서를 보고 “인민을 풍요하게 하는 방도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여 더욱 정밀한 제도를 마련하고 정부에 실시를 요청하였다.[87] 권반은 1623년 대동법이 추진될 때 호조 참의였고 충청도관찰사로서 자신이 정한 규례에 따라 대동법의 시행을 의도하기도 했으니, 김육은 인조대 대동법 논의의 성과를 계승한 셈이었다. 이에 대해 비변사는 공사(公私) 모두 이익이고 경외(京外) 모두 편안한 방도로 평가하면서도 1결에 무명 1필과 쌀 2말을 거두는 방안으로서는 허다한 잡역을 충당할 수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88]
1649년 우의정에 임명된 김육은 70이라는 나이 등을 이유로 10차례의 사직 상소를 올리다가 대동법의 시행을 전제로 조정에 나아갔다. 그해 11월에 김육은 “왕도정치는 안민(安民)보다 우선할 것이 없습니다.…대동법(大同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인민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道)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만약 또 양호(兩湖)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王者之政, 莫先於安民.…大同之法, 均役便民, 實救時之良策. 雖不能遍行於諸道, 畿甸關東旣行而得力, 若又行之於兩湖, 則安民益國之道, 無大於此者.)”고 하며 그 추진을 주장하였다. 김육이 대동법을 추진한 동기는 이원익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효종이 대동법의 이해관계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을 때, 김육은 “이것은 선혜법(宣惠法)과 차이가 없습니다. 선혜법은 고상(故相) 이원익이 건의한 것인데 먼저 경기 강원도 두 도에서 실시하고 충청도에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此與宣惠之法無異. 宣惠之法, 故相臣李元翼所建白, 而先行於京畿,江原兩道, 未及行於湖西)”며 이원익의 유지를 계승할 뜻을 명백히 하였다. 마침 효종은 조익을 좌의정으로 삼았는데, 그도 대동법의 추진을 주장하였다.[89]
그 해 12월에 인조가 상이 대신大臣 및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에게 대동법에 대한 의견을 묻자, 우의정 김육이 “왕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이니, 더 의논할 일이 없습니다.”고 아뢰었고, 훗날 김육의 신도비명을 써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은 자신이 인조 초에 사관(史官)이었음을 말하면서 신중한 시행을 주장하며 “이원익이 편리 여부를 민간에 물어서 차자를 올려 파하기를 청한 것입니다.”며 여론 수렴이 필요함을 아뢰었다. 그러자 좌의정 조익은 “당시 여러 의논이 시끄럽게 들끓어서 심지어 왕안석(王安石)에게 비교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이원익이 부득이 파한 것이지 본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고 했다.[90] 충청도 대동법이 추진되자, 이번에도 반발이 거세었다. 1652년 正言 이만웅(李萬雄)은 상소에서 당시 추진되던 동전 통용책과 대동법에 대해 민간의 불평이 많음을 전하고 사업이 신중하게 처리되지 못함을 비판하면서 인조 때에 이원익(李元翼)이 그 논의를 주장하다가 그것이 불가하다는 주장이 비등하자 이원익이 그 법을 취소하자고 아뢰었으니, 이원익으로 모범을 삼자고 주장하였다.[91] 효종 때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자고 주장한 김육과 조익이나 그 신중한 추진을 주장한 이경석이나 그 시행을 중단하자고 주장한 이만웅 모두가 이원익이 어떻게 주장하고 처신하였던가를 자신의 주장의 논거로 삼았다. 이원익은 관료이자 정치인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김육은 이원익을 존경하여 대동법을 추진하면서 꿈속에 그를 본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여 다음의 시를 지었다.[92]
임금 사랑과 나라 걱정에 인생을 바쳤다네(愛君憂國死生同).
다행히도 오늘밤 꿈에 공을 보았네(何幸今宵夢見公).
왕안석과 같다는 끝없는 당시 비방을(無限當年安石謗),
지금까지 아이들이 소리높이 읊조리누나(至今吟誦在兒童).
이원익의 유산이 충청도 대동법의 성립에 미친 공헌을 요약해보자. 첫째, 이원익이 주도하여 만든 대동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권반→김육’을 거쳐 더욱 정비되어 대동법의 정착에 기여하였다. 둘째, 이원익을 학습한 김육과 조익은 대동법을 추진하고 이경석은 대동법을 후원하였다.
광해군, 인조, 그리고 효종의 즉위 직후마다 대동법 논의가 활성화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안민을 위한 조세의 경감과 균등화는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고, 대동법이 그러한 과제에 부응한다고 믿는 세력이 새 왕은 그 힘든 개혁에 적극적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서 왕이 의욕적 출발하는 시점을 적기로 보아 개혁을 요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이란 위기의 순간에 수미법의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런 전략을 변형하여 이원익이 광해군과 선조의 즉위 초에 대동법을 추진하였고, 이원익의 전략을 김육이 계승하였던 것이다.
7. 이원익의 경제정책 이념
임진왜란 이전 지방관으로서 활동, 국란 극복 활동,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의 활동을 관통하는 관료·정치인으로서 이원익의 목표는 安民이라는 유학의 기본 정책 이념으로 관통된다. 그 정책 이념은 1596년 평안도 체찰사로서 조정에서 펼친 지론에 드러나 있다. 특히 10월 21일 공물 등 민폐를 논하면서 말한 다음의 구절에 이미 잘 드러나 있다.
사람들에게 즐겁게 살려는 마음이 있은 연후에야 윗사람을 친애하며 국가를 위해 목숨이라도 버리는 법입니다. 이미 항심(恒心)이 없으면 아무리 그들을 엄중한 법으로 묶어놓는다 해도 태연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떠나버릴 계획만 갖고 정착해 있을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니, 한번 고향을 떠나고 나면 바로 도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인민의 생활이 곤핍하다는 말은 곧 선비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고 성상께서도 필시 이 일을 보통일로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신이 직접 자세히 보고 왔는데 왜가 물러간다 하더라도 국가의 근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크게 걱정스럽습니다. 일체 민생 안정을 염두에 두소서.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갓 일처리에 급급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다스리는 것이니, 인민의 마음이 이와 같고서야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人有樂生之心, 然後親上死長. 旣無恒心, 則雖繩之以重法, 恬莫動心, 皆有流散之計, 莫存奠居之意. 一離故土, 便爲盜賊. 民生困悴之說, 乃儒者常談, 聖上亦必以爲尋常矣. 今臣親見甚悉. 倭雖退, 邦本至此, 大可憫慮. 一切以安民爲慮. 不念於此, 徒汲汲於事爲之間, 是棄本而治末. 民心如此, 何事可爲? 守令之不善者, 臣每加檢勑矣.)[93]
전란 등으로 인민의 생활이 궁핍하니, 공적 부담의 경감책 등으로 民力을 회복하여 恒産을 가지게 만들어 사람들이 즐거운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安民策이 국난 극복뿐만 아니라 국가 경영의 근본 대책이라는 것이다.[94] 이것은 공자와 맹자가 제시한 유학의 고전적인 대책이다. 훗날 정묘호란 때에 영중추부사로서 이원익이 올린 차자의 내용은 “民力을 펴게 해주고 민심을 수습하고 장사(將士)를 선발하는 이 세 가지가 오늘의 급선무이다.(寬民力, 收民心, 選將士, 此三者, 爲今日之急務.)”라고 했는데,[95] 항산이 바로 민력을 펴주는 것이다. 민생 안정의 안민은 바로 인민을 보호하는 保民의 방도인데, 이원익은 “인민을 보호하는 일이야말로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保民, 實是爲國之本)”고 했다. 안민은 인민을 편안하고 즐겁게 살도록 하는 便民이기도 했다.[96] 이원익은 광해군과 인조에게 “인민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합니다(民惟邦本, 本固邦寧.)”라는 『書經』의 구절을 상기시켰다.[97] 이원익은 안민의 방도로써 ‘재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節用而愛人]’라는 『논어』의 가르침을 중시하고,[98] 그러지 않으면 안민 내지 보민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99] 죽음을 예감하는 85세의 이원익이 변보(邊報)를 듣고 입조하였다가 돌아가면서 차자를 올린 말 중에도 『書經』의 구절을 상기시키면서 “인민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어지고 먹을 것이 없으면 인민이 없어지니, 민력을 펴주고 인민의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제왕의 급무입니다.(無民則無食, 無食則無民, 寬民力, 裕民食, 帝王之急務也.)”며 “지극한 정성을 언제나 인민의 보호에 두소서(至誠常在於保民).”라고 아뢰었다.[100] 사실 이러한 주장은 유학 이념으로 무장한 조선시대 치자들이 단골로 하는 말들인데, 이원익의 훌륭한 점은 이러한 주장을 대동법과 같은 제도로서 구현하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데에 있다.
이원익은 안민의 실현을 위해 한편으로는 피치자의 민심을 살펴 民情에 순응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치자에게 공과 사의 준별을 요구하였다. 그는 “천하의 치란(治亂)과 국가의 존망이 오로지 공과 사의 구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안으로 조정과 밖으로 고을이 모두 공도(公道)는 없고 사욕만 가득합니다.”고 하면서 사욕이 가득하면 인민을 보전할 수가 없고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101]
이원익은 대동법을 추진한 동기를 “방납(防納)을 방지하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중외의 폐해를 구제하려고 한 것(欲以杜防納均賦役, 以救中外之弊)”이라고 했고,[102] “인민의 공적 부담을 균등하게 부과하는((均一民役) 데에는 이 법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103] 이원익이 대동법을 추진한 목표는 안민을 구체화하는 내용으로서 모든 인민을 균등하게 대하는 유학의 ‘均’ 이념의 실천이었다.
필자는 대동법의 두 사상적 원류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104] 율곡은 철저한 주자학자로서 안민 이념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부국富國의 공리를 배제하지 않고 개혁에 적극적이었다. 율곡의 경제사상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여 안민지상주의자가 된 김장생, 김집, 송시열 등은 공안개정론을 지론으로 삼으면서 대동법의 시행에 소극적인 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안민부국론安民富國論을 주창한 조익, 김육 등은 대동법을 적극 추진하였다. 율곡에게 수미법은 압도적으로 왕도 실현의 안민책이었고 그 자체가 재원확보책이라는 의식은 없거나 약하였으나, 유성룡은 균부세均賦稅라는 대동법의 안민이념을 진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미법을 재원확보책으로 설정함으로써 대동법이 안민부국책이라는 사상의 원류를 제공하였다. 1594년 9월 20일 비변사는 수미법, 제염생산·유통촉진법 등을 건의하면서 ‘재화를 생산하는 방도(生財之道)’라고 하였다.[105] 이것은 『대학』의 전문(傳文) 10장에 나오는 말인데, 유성룡에게 수미법이란 소극적으로 민생 안정과 군량 확보를 도모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합리적 조세제도로 생산을 촉진하여 민생 안정과 군량 확보를 도모하는 항구적 대책을 마련한다는 의미였다.
이원익은 정치적으로는 유성룡과 더욱 가까웠으나, 그가 대동법을 추진한 정책 이념은 율곡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민생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효종과 달리 부국강병을 추구하지 않았던 인조도 대동법을 적극 추진한 이원익보다 재정 확보를 더욱 중시하였다. 1631년 이원익이 “지금 수령 가운데 인민을 돌보지 않고 가혹하게 조세를 걷는 자에 대해서는 잘 다스린다고 하고, 인민의 어려움을 돌아보면서 차마 가혹하게 징수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명예를 구한다 하여 관직을 지키지 못하게 하니, 이는 지금의 폐단입니다.”라고 아뢰자, 인조는 “수령 7사는 인민을 다스리는 큰 원칙인데, 지금의 수령 가운데 혹은 이를 전혀 행하지 않고 다만 명예만 일삼는 자가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응대하였던 것이다.[106] 그래도 이원익은 안민지상주의자와는 달리 재정 대책에는 관심을 기울이고 깊은 식견을 가졌다. 이 점은 앞서 소개한, 1623년 4월 호조가 재정의 충실화도 고려하면서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건의한 글에 드러난다. 이원익은 부국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안민지상주자와는 달랐던 것이다.
이원익의 문하라 자처하고 인조 초에 이원익을 도와 대동법을 추진한 조익은 이이와 유성룡을 거치면서 구체화되어 간 대동법의 정책이념을 다음과 같이 완성하였다. 왕도의 인정仁政은 반드시 제도로 규율해야 하고, 안민의 제도로 항산恒産을 제공해야 한다. 항산을 확보하는 방도는 농업 장려와 10% 적정 세율이다. 조선은 이재理財의 법도가 없어서 전조田租의 세율이 1/50∼1/40에 불과한 반면 공물은 폐단이 많고 무겁다. 보통의 논이 벼 20∼30석을 수확하므로 대동법을 시행하여 경지에 부과되는 조세가 모두 쌀 20여 말이라 해도 세율이 10% 미만으로서 삼대三代의 제도이며, 맹자가 말하는 선왕의 인정에 부합한다. 대동법은 호세인豪勢人과 소민 사이에, 그리고 지역간에 조세를 균평하게 부과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인민의 부담은 가벼워지면서도 국가재정은 더욱 충실해진다. 그리고 경지 측량이 이루어지면, 세율을 더욱 낮출 수도 있다.[107] 조익은 安民富國論을 뚜렷이 제시하였고, 이런 정책 이념은 김육의 대동법 이념으로 연결된다. 조익의 상소에서 또한 주목되는 내용은 유성룡보다 조세균평화 이념을 정밀화하고 소민보호론을 뚜렷이 내세운 점과, 대동법으로 유가의 이상인 10% 세율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 점이다. 세종의 공법은 소민의 보호를 표방하였지만 대토지 소유자에게 더 큰 이익을 제공하였고 전조 수입의 감소에 따른 공물 부담의 증가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에 반해 호나 인정을 단위로 부과된 잡다한 부담을 경지세로 전환한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균평화를 도모하여 소민에게 혜택을 주었다.[108]
이러한 정책 이념의 편차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연산조 이래 안민이 위협받는 현실의 개혁이 우선 과제였고, 유성룡은 국난을 당하여 민생 안정과 식량 확보를 동시에 도모해야 하였다. 이원익은 국난 후에, 그리고 인조반정 후에 민정안정이 우선 과제로 대두된 시대적 상황에서 안민책으로 대동법을 추진하였다. 안민의 시급한 과제가 어느 정도 충족된 김육의 시대에는 북벌론 등 군사적 수요에 의해 재정의 충실화를 동시에 도모할 필요가 발생하였고, 김육은 안민부국론의 정책 이념을 내세웠다.
흥미롭게도 대동법을 추진한 주요 인물인 유성룡, 이원익, 김육이 모두 왕안석 같다며 비방을 받았다. 조선전기에 경연의 가장 중요한 교재인 『대학연의』가 왕안석을 소인이자 간신의 대표적 인물로 설정하고 왕안석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진 송대 이학으로 무장한 사림이 대두함에 따라, 왕안석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 굳어졌다.[109] 그에 반해 구법당의 대표 인물인 사마광(司馬光)은 충신의 표본으로 간주되었다. 공납제의 개혁으로서 공안의 개정은 小變通이라면 대동법은 대변통, 달리 말해 근본적인 개혁이었다. 그것은 물질생활에 관련된 事功의 개혁이었다. 그 개혁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여러 집단들의 반발이 격심하고 이들이 여론 형성이 힘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사회적 반발과 여론의 비방이 심한 개혁이었다. 왕안석 등 新法黨은 대동법처럼 사회적 반발과 여론의 비방이 심한 사공의 개혁으로 구법당과 대립하였다.
1599년 실각되어 정치적 공세의 표적인 된 유성룡에 대해 이원익이 변호하자, 兩司는 모두 사마광이 왕안석의 간사함을 모른 것에 비유하였다.[110]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수미법 등 공리의 개혁을 적극 추진한 유성룡은 왕안석에 비유된 반면, 그런 개혁론을 내세우지 않고서 원만한 인품으로 폭넓은 존경을 받던 이원익은 사마광에 비유된 것이다. 그러다가 이원익이 광해군대에 이어 인조대에도 대동법을 추진하자 왕안석에 비유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원익이 대동법 추진을 중단하였다고 훗날 조익이 회고한 바 있다.[111] 1625년 이원익이 벼슬을 그만둘 것을 요청한 것을 두고, 실록의 편찬자는 이미 노쇠하여 사공에 뜻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는데,[112] 이원익은 사공을 중시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효종대에 대동법의 추진으로 대간의 비방 상소가 올라오자, 김육은 우의정의 사직을 요청하는 상소에서 “만약 어진 이를 업신여기고 변법(變法)을 하였다면서 왕안석에 견주어서 신을 공격한다면, 전하께서 아무리 신을 구원하고자 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라는 했다. 이 때 김육은 자신처럼 왕안석 같다는 비방을 받은 이원익을 꿈에서 본 시를 읊었던 것이다. 안민의 방도로 일반적으로 인식된 대동법을 그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다고 해서 왕안석처럼 공리만 추구하는 인물로 비방을 받기까지 하는 현상은 유교의 도덕 명분론이 특히 강한 힘을 발휘한 조선에 독특한 현상이다.
8. 이원익의 정책 성공을 낳은 修己安民의 힘
이원익의 사상과 실천은 기본적으로 修己治人이고 치인은 곧 安民이라는 유학의 기본 이념으로 집약된다. 안민이 되면 經世濟民이 되는 것이다.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조선시대에서 수기치인을 잘 실현한 대표적인 인물이 공교롭게도 대동법의 시행과 정착에 최대의 공헌을 한 이원익과 김육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두 인물이 대동법 등 뛰어난 정책적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유학의 수기치인을 잘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인류사에 유교 이념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조선왕조시대에 치자가 되려는 士는 누구나 수기치인을 통한 경세제민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뛰어난 수기치인의 업적을 거둔 사람은 적었고, 정치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 유학자가 많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교 도덕을 표방하지만 사리사욕을 채우는 위선자가 많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적대적인 도덕절대주의자가 적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당파의 폐단이 커졌고 정치 발전이 저해되었다. 둘째, 수기와 독립적인 치인의 공부가 부족하였다. 정약용이 『목민심서』 「自序」에서 “군자의 배움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이다.”고 하고 자신은 “수기의 학문을 익혔으니 이미 배웠다고 하지만 반만 배웠을 뿐이다.”고 했다. 조선시대 유학자의 대부분은 치인의 공부가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점은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그에 반해 이원익이 수기치인의 탁월한 업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수기를 제대로 하고 치인의 공부에도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이원익이 도덕적 수양과 처신을 누구보다도 잘 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잘 드러난다. 『조선왕조실록』은 도처에서 이원익의 인품을 높게 평가하였는데, 그 예를 들면, 인조 1년 3월 16일(병오)의 기사에는 그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先朝)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고 했고, 인조 3년 6월 14일(경인)의 기사에는 그의 “청명(淸名)과 아망(雅望)은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인사조차도 그의 도덕성을 비판하지는 못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치적 공세의 표적인 된 유성룡을 변호하는 이원익에 대해 북인은 왕안석의 간사함을 모르는 사마광이라고 비웃었는데, 사마광은 도덕적 모범의 인물이었다. 이원익과 같은 정치적 입장인 윤선도는 상소문에서 “이원익은 우리나라의 사마광(司馬光)입니다.”고 했다.[113] 이원익은 선조와 광해군과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에게 이원익을 중용하라는 유지를 남겼고, 광해군은 폐모에 반대하는 이원익을 홍천(洪川)으로 귀양 보내는 데에 그쳤는데,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114] 이원익의 사후 인조는 “반정 초기에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이 세상에 있어서 흠모하기에 만족함이 있었다. 재국(才局)은 비록 세상일을 주선하지는 못하였으나, 청백과 충성은 미칠 사람이 없었다.”고 하여, 그의 능력보다 인품을 높게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115] 인조가 이원익을 극진하게 우대한 중요한 동기는 관료와 정치인의 모범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원익은 단지 조정의 원로임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원로였다. 이것은 인조반정 직후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자,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고,”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서울 시민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는 사실에 잘 드러난다.[116] 해방 이후 역사에서 이원익만한 원로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원익은 고매한 인품과 현명한 처신 덕분에 인민이 그를 믿고 따라 지방관으로서 치적을 이루었고 국난 극복에 이바지하였으며, 북인이 주도권을 장악한 광해군 때와 서인이 주도권을 장악한 인조 때에 그렇게 힘든 대동법을 경기도와 강원도에 정착시킬 수 있었다.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에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仁者無敵]”고 하고 민심을 잡는 것이 군사적으로 성공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권력자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원익은 맹자의 이러한 가르침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인민이 이원익을 믿고 따르고 3대에 걸쳐 군주가 그를 신임한 것은 그의 인품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행정·정치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원익은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와 달리 치인의 공부도 충실히 하였다. 1578년에 이원익이 경연관 송(宋)나라 문천상(文天祥)의 문산집(文山集)의 간행을 요청하자, 선조는 “문산은 백이(伯夷) 숙제(叔齊) 이후로 유일하게 만세토록 남의 신하가 된 자들의 표준이 된다.”며 그 간행을 지시하였다.[117] 여기서 드러나듯이, 이원익은 훌륭한 관료·정치인이 되는 공부를 중시하였던 것이다. 1596년 환곡제도를 문의한 선조에 대해 이원익이 중국의 환곡 제도와 환곡의 현실적 대책을 조리 있게 설명한 데에서,[118] 그가 경제제도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가짐을 엿볼 수 있다.
『梧里先生文集補遺』 雜著에는 수령으로 재직하는 생질 이덕기에 보낸 「서증이생덕기지임書贈李甥德沂之任」과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이수약에게 보낸 「서여손수약부현풍지현書與孫守約赴延豐縣戊辰」이 있다. 이것들은 지방 통치를 위한 절실한 지침서이다. 전자에서는 중용이라야 일을 이룰 수 있고 “天下萬事가 人心이 근본이고,” “나의 마음을 먼저 인민을 사랑하고 재물을 아끼는(仁民愛物) 데에 위주로 삼고 상벌과 호령을 공평무사하게 하면 인심이 저절로 기뻐한다.”는 통치의 기본원리를 제시한 다음 철저한 자기 수양, 현명한 처세, 소송의 처리 등 행정을 자세히 적었다. 후자에서는 아들이 수령으로서 청렴과 간명함으로 인민을 보전(以廉簡保民)한 자세를 손자가 계승하기를 바라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인민을 사랑하는 이상의 일은 없고 몸을 닦는 데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이상은 없다(治世莫若愛民.養身莫若寡欲.),” “천하의 인정에 통하라(通天下之情),” “이익이 되는 일보다 폐단의 제거가 중요하고 일을 만드는 것도 줄이는 일이 중요하다.(興一利不如除一弊.生一事不如省一事”라는 선인의 교훈 등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수기치인으로 집약된다. 모두가 지방 통치에 절실하고 긴요한 일로서, 이원익은 요령을 잘 알고 잘 실천하였기 때문에 지방관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방을 다스리는 요령을 연장하면 바로 국가를 다스리는 요령이 된다. 이들 지방 통치 지침서는 조선시대 목민서의 발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정책가로서 이원익의 뛰어난 점은 자신의 정책 이상을 제도로 구현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황해도사(黃海都事) 시절에 軍籍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전국에서 최고로 일컬어져 그의 이름이 드러났다.[119] 이것은 제도를 세밀하게 정비하는 역량을 보여준다. 1595년 비변사는 “이원익이 평안도에 오래 있으면서 모든 연병(鍊兵) 둔전의 조치 節目을 이미 조리있게 만들었는데 평안도의 인심도 모두 편하게 여깁니다.”고 하였다.[120] 절목은 제도의 운용 규정이라 하겠다. 1626년 호패청(號牌廳)에서 인조에게 호패사목을 보고하면서 그것은 “영상 이원익이 대부분 산정(刪定)한 것”이라며 “이원익에게 다시 하문하시어 조처하소서.”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이원익의 제도기획력은 조정의 평판을 얻고 있었다.[121] 이처럼 합리적인 제도를 기획하고 구체화하는 능력이 잘 발휘된 것이 대동법이었다.
7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원익이 정책 이념으로 삼은 내용은 『논어』에 나오는 ‘安人’과 ‘節用而愛人’, 『맹자』에 나오는 ‘恒産’과 ‘保民’, 『서경』에 나오는 ‘民惟邦本, 本固邦寧’, 주자 등이 강조한 公私觀 등과 같이 유학자에게는 널리 알려지고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도학적·성리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122] 이원익이 학문적·사상적으로 기여한 바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원익과 같이 활동한 사람이 그의 명성이 비해 학문이 높지 않다고 말하는 기록은 몇 군데 남아 있다. 광해군 때에 정엽이 “이원익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나 다만 글을 읽지 않은 것이 한이다.”라는 편지를 보내니, 신흠이 “이원익이 하는 일은 모두 이치에 맞으니 그것이 바로 학문이다.”고 답하였다고 한다.[123]
吳光運은 ‘隨錄序’에서 삼대의 道=도덕과 器=政制가 秦·漢 이래 천수백년간에 걸쳐 붕괴하였다가, 程子·朱子라는 大賢이 도를 상술하되 기를 闕하였던 바, 유형원 비로소 전제 등의 政制, 곧 기를 천리에 부합하게 상술함으로써, 도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고 유학사상을 완성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달리 말하면, 주자가 유학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다면, 반계는 경세론을 체계화하였다는 것이다. 주자가 수기의 학문, 유형원이 치인의 학문을 정립하였다면, 이원익은 수기치인의 실천에 업적을 거둔 셈이다. 대동법은 유학의 이상인 안민을 제도로 구현하여 경세제민이라는 치인의 업적을 이룬 것이었다.
이원익의 업적은 정치·군사·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경세제민의 이념으로 종합될 수 있다. 이원익이 임진왜란에 대처하는 목표는 왕조를 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경세제민의 爲民·安民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런 자세는 대동법의 추진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경세제민의 차원에서 국난 극복에 임한 위정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왕조가 전란에서 살아남고 이후에도 장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공자는 “자기를 수양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堯舜께서도 부족하게 여기셨다(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고 했다(『논어』 憲問第十四). 다산 정약용은 만년에“공자의 도가 수기와 치인일 뿐이다.(孔子之道 修己治人而已).”고 했다. 다산은 만년까지 수기와 치인의 공부를 학문적으로 집대성하였는데, 이원익은 비록 학문적 집대성은 없었으나, 수기와 치인의 학문을 공부하여 그 구현에 성공하였다. 이원익의 업적은 ‘수기치인’의 위대한 힘을 잘 보여준다.
9. 맺음말
필자는 종전 김육의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정책사를 엿보았고,[124] 이번에 이원익의 연구를 통해 다시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대동법은 조선시대 조세제도의 단순성·효율성·공평성을 높인 훌륭한 제도개혁이었다. 그런데 그 이해관계를 둘러싼 대립이 사회 전반적으로 첨예하여, 그 정착이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래서 장구한 세월에 걸쳐 모색되어 정착되었지만,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공의 요인은 무엇일까? 첫째, 권력층에 연계된 방납 세력, 경지를 많이 가진 지주, 경지가 많은 군현들, 지방관과 아전들, 임토작공의 고대 이념에 집착하고 변혁을 두려워하는 다수의 관료들이 반대하고 왕도 이런 반대를 우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이 정착된 기본 힘은 유교의 民本·爲民·安民이념이었다. 민생 안정에 긴요하다는 입장에서 추진되었고, 그 성과가 증명되자 지지자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둘째, 조정에서 개방적인 정책 논의가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여론에 힘을 가진 방납 세력, 大戶와 大邑의 입장뿐만 아니라 小民의 여망도 정책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개방적인 정치 논의와 치열한 논쟁이 당쟁이라는 역기능뿐만 아니라 견제와 균형을 낳고 권력과 재력이 없는 사람의 입장도 논의되는 순기능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원익과 김육이 활약하던 시대에는 숙종대 이후와 달리 당쟁이 격화되지 않았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셋째, 정책의 평가와 계승이 잘 이루어졌다. 유성룡은 이이와 이준경을, 이원익은 유성룡을, 김육은 이원익을 계승하여 대동법을 정착시켰던 것이다. 유성룡은 다른 정파인 이이의 공납제 개혁을 지지하였고, 한당의 영수인 김육이 추진한 충청도 대동법이 성공을 거두자 산당의 영수인 송시열이 그에 유보하는 입장에서 지지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다. 각자의 주장은 상소 등의 기록으로 남겨져 그들의 문집에 수록되었고, 『조선왕조실록』·『동국문헌비고』 등은 정책 논의를 잘 정리하였다. 4절에서 인용하였지만, 『만기요람』은 대동법의 성립·정착과정을 잘 집약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史評·卒記 등은 각 정책가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많은 사람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관료·정치인의 위민관과 정책 계승의식, 그리고 정책 논의를 정리하고 그 관련 인물을 평가하여 기록에 남기려는 자세가 조선왕조시대보다 나아졌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넷째, 유성룡·이원익·김육 등은 적절한 시점에 개혁론을 제기하여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이원익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부터 자신의 인품과 공적에 힘입어 국가 원로가 되었고, 그런 정치적·사회적 위상이 광해군·인조 때에 대동법의 시행에 힘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이원익에 비견할 만한 국가원로가 있었던가 하고 생각해보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는 이러한 강점뿐만 아니라 심각한 약점과 결함도 적지 않게 가졌는데, 균형감을 가지고 양면을 모두 보면서 그 시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효종 때에 김육 등 관료 출신으로 경세를 중시하는 정치인들의 한당(漢黨)과 김집·송시열 등 산림 출신의 정치인들의 산당(山黨)이 정책적으로 대립하였으며, 전자는 이항복 계열이고 신흠-김육으로 이어졌고 후자는 김장생 계열이었다는 학설이 있다.[125] 그런데 한당의 최초 영수라 간주되는 신흠은 임진왜란 때부터 이원익과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활동하고 이원익과 사상적으로 교감하였으며, 인조 때 이원익이 영의정일 때 우의정으로 지내면서 정책활동에 보조를 같이 하였다. 그는 “일찍이 영상의 舍人이었다”라고 인조에게 아뢴 적도 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김육이 대동법을 추진할 때, 본받을 선배 정치인으로 상정한 인물은 이원익이었다.[126] 이원익과 이항복은 국난 극복을 위해 협력하며 활동한 명신들이었다. 그리고 국난 극복 때에 이원익 및 이항복과 함께 국정을 주도한 인물이 유성룡이었고, 신흠은 유성룡의 휘하에서 그 일을 도우면서 그의 행정 능력에 탄복하기도 했다.[127] 경세 관료 출신으로서 정책 결정을 주도한 인물의 계열로서 ‘유성룡→이원익·이항복→신흠→김육’이라는 기본 계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유성룡의 선배로 이준경, 이원익과 같이 활동한 조익과 이덕형, 김육과 같이 활동한 이시방·이경석 등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한당 대 산당의 대립보다 시야를 더욱 넓혀 조정의 政派를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즉, 경세 관료 출신으로서 중앙 정치인으로 활약하면서 치인의 사공을 중시하는 세력이 선조대에 형성되어 이후 이어지고 있었고, 효종 때부터 산림이 정계에 들어와 주자성리학의 도덕론에 충실한 정치를 구현하자고 노력하면서 양자간 대립구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후자는 수기의 도덕에 절대적 우위를 두는 정치와 안민지상주의의 정책 이념을 추구한 반면, 전자는 대체로 수기의 도덕과 치인의 사공을 조화롭게 추구하면서 안민과 부국의 동시 달성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128] 숙종대에 노론과 남인 사이 사생결단의 대립이 있기 이전에는 이러한 정책 논쟁 구도는 당색을 초월하는 면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사상가이면서 정치인인 율곡은 양자 모두의 연원을 이루고 있다.
유학은 수기치인을 도모하는 점에서 실학이라고 자처하였다. 주자학은 유학을 실학으로서 발전시키려는 의식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주자성리학은 그 고도의 형이상학성과 도덕절대주의로 인해 관념화·교조화·독선화되는 문제점을 가졌다. 조선후기 실학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학문적·정책론적 성취를 이루었다. 수기의 도덕과 치인의 사공을 조화롭게 추구하면서 안민과 부국의 동시 달성을 추구하는 정책론은 조선후기 실학과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채제공은 ‘퇴계 이황→寒岡 鄭逑→眉叟 許穆→성호 이익’이라는 학통을 제시한 바 있는데,[129] 허목은 이원익의 손서(孫壻)로서 이원익의 정책 활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였고, 그것은 ‘정치하는 도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자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130] 예컨대 1675년 경연에서 특진관(特進官) 오정위(吳挺緯)가 인조 때에 이원익이 호패법(號牌法)은 항심(恒心)이 있는 자가 나온 뒤에야 시행할 수 있다고 말한 데에 대해. 허목은 “신이 듣기로는 이원익은 그럴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라 합니다.”라고 정정하였다. 그러자 “오정위가 부끄러워서 더 말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허목은 곧 이원익의 손자 사위여서 자세히 알고 있었다.”고 평가하였다.[13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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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姜周鎭, 『梧里大監 李元翼 小傳』, 探求堂, 3쪽. [2]) 『光海君日記』35권, 2년(1610) 11월 2일(계묘). [3]) “李領府事, 以先朝元老, 淸德無比, 孤心悅誠服, 信之如龜筮, 重之如鍾鼎. 邦運不幸, 奄失賢師, 言念悲痛, 無以爲心. 聞訃之日, 卽欲擧哀, 而因病未果, 此亦孤之至恨也. 遣官致祭, 不可以常規擧行, 特遣承旨設祭, 以表孤敬慕之意.”『仁祖實錄』29권, 12년(1634) 2월 13일(경오). [4]) 韓榮國, 「湖西에 實施된 大同法」, 『歷史學報』 13, 1960;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高錫珪, 「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 『韓國史論』 12, 서울대 국사학과, 1985; 池斗煥, 「宣祖·光海君代 大同法 論議」, 『韓國學論叢』 19 국민대, 1996; 배우성,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2003; 이헌창 「김육의 경제사상과 경제업적」 『잠곡潛谷 김육金堉 연구』, 태학사, 2007; 이헌창 「조선시대 공물제도와 경제정책이념」 『韓國儒學思想大系 經濟思想編』 한국국학진흥원, 2007;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2010, 역사비평사; 李廷喆, 「오리 이원익과 두 번의 貢物變通」, 『朝鮮時代史學報』 54, 2010, 163-194쪽. [5]) “以黃海都事李元翼爲正言. 元翼少登科, 恬靜自守, 人無知者. 由成均館直講, 爲黃海都事. 監司李珥, 察其才局不凡, 委以營務. 珥還朝言: “元翼材器,操行可用.” 遂錄弘文選. 俄拜正言, 大臣見除目喜曰: “此人勤謹有才, 而沈滯下僚, 今始通顯, 朝廷有公論矣.” 時, 軍籍初頒, 諸道任事者, 或踈或刻, 多有民怨, 惟海西所籍稱最, 元翼以此著名.“『宣祖修正實錄』10권, 9년(1576) 1월 2일(병신). [6]) 以李元翼爲安州牧使. 元翼罷散, 丁憂服闋, 而猶未復官. 時以安州關防重鎭, 累經災害, 飢饉凋弊, 請極擇名重文臣, 撫字收拾, 久任責效. 名官皆憚避圖免, 上責吏曹必得人, 判書權克禮欲因此起廢, 以元翼爲請, 上許之, 有是拜. 金悌甲亦拜昌城府使. 元翼單騎赴任, 首乞糶萬石于監司, 給種勸耕. 及秋大熟, 償糶而倉廩實. 遂變通軍政, 減免冗役, 躬納糧稅於邊鎭, 以省刁蹬之弊. 安州在西路, 獨不事蠶繭, 元翼課民種桑養蠶, 人稱李公桑. 勤敏廉幹, 吏畏民懷, 治績大著. 屢蒙褒賞, 至陞秩還朝, 公輔之望, 基於此矣.『宣祖修正實錄』21권, 20년 4월 1일(庚申) [7]) 『仁祖實錄』29권, 12년(1634) 1월 29일(병진). [8]) 『正祖實錄』 50권, 22년(1798) 11월 30일(기축). [9]) “上以公之爲安州也.政化覆一道.士民見公必懷附.”(梧里先生續集附錄卷之二, 行狀, 798쪽). [10]) “朔甲午/召李元翼還朝. 元翼所過, 採訪民隱, 啓請蠲減濫役, 專務安集, 民情大悅.”『宣祖修正實錄』30권, 29년 9월 1일(갑오). [11]) 『宣祖修正實錄』30권, 29년 9월 1일(갑오). [12]) “令戶曹蠲減, 少寬民力, 然後其事庶可爲也.”『宣祖實錄』81권, 29년 10월 5일(무진). [13]) 『宣祖實錄』82권, 29년 11월 17일(기유). [14]) 『宣祖實錄』81권, 29년 10월 5일(무진). [15]) 이헌창 『韓國經濟通史』(제5판), 해남, 2012, 92-3쪽. [16]) 田川孝三, 앞의 책, 730-744쪽. [17]) 田川孝三, 앞의 책, 751-753쪽. [18]) 『西厓先生文集』 권14, 雜著, 「貢物作米議」. [19]) 『선조실록』4년 5월 28일(기축); 9월 12일(신미); 5년 7월 7일(경인); 10월 6일(기미). [20]) 『선조실록』14년 5월 丙戌. [21]) 『宣祖修正實錄』28권, 27년 1월 1일(경진) [22]) 『선조수정실록』 27년 4월 己酉. [23]) 田川孝三, 앞의 책, 759-760쪽. [24]) 『經世遺表』 권11, 地官修制, 賦貢制7, 邦賦考. [25]) 『宣祖實錄』67권, 28년 9월 24일(계사); 9월 28일(정유). [26]) “外貢收納時, 所謂作紙, 該曹代徵木綿. 侵民之弊, 在平時, 已爲濫觴. 喪亂之後, 此等弊習, 竝爲蕩滌, 而自上年, 仍復舊規. 生靈困悴, 未有甚於此時, 雖係進上正供之物, 亦多蠲除以優恤之. 況此作紙, 初不關國用, 而徵督甚急, 下吏因緣刁蹬, 民之怨苦日甚. 限數年蘇息間, 姑依亂後規, 一切停罷, 以施一分之惠.”『선조수정실록』33년 9월 15일(을묘). [27])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765쪽. [28]) 『宣祖實錄』81권, 29년 10월 21일(갑신). [29]) 貢物進上作米, 上意不欲皆講究, 未擧而罷.『宣祖修正實錄』28권, 27년 4월 1일(기유) [30]) 『西厓先生文集』권14, 雜著에서 「貢物作米議」는 1596년 정월에 작성된 「沈遊擊求通使倭國議丙申正月」의 바로 전에 수록되어 있다. [31]) 金玉根, 『朝鮮王朝財政史硏究[Ⅲ]』, 一潮閣, 1997(重版), 13쪽. [32]) 『宣祖實錄』81권, 29년 10월 5일(무진). [33]) 『宣祖實錄』81권, 29년 10월 21일(갑신). [34]) 韓▩劤 『其人制硏究』 一志社 1992, 4장. [35]) 『宣祖實錄』74권, 29년 4월 2일(무술). [36]) 『宣祖實錄』81권, 29년 10월 17일(경진). [37]) 『宣祖實錄』82권, 29년 11월 7일(기해). [38]) “今次下民, 聞朝廷之招體察使, 願以寬民力, 有所啓聞, 令臣以各司其人貢物, 必稟報, 使之變通, 不卽來納, 以觀事勢云. …貢物防納, 雖朝廷所禁, 然不然, 則外方直納, 亦不來, 勢將狼狽. 戶曹,備邊司所入之物, 一切減省, 而除作軍糧云, 除作軍糧, 則愈於貢物矣. 且近來天兵, 下去南方耶, 亦天朝將救我南邊乎, 臣不能知.”『宣祖實錄』82권, 29년 11월 17일(기유). [39])『梧里先生續集』권1 啓事 請勿罷宣惠廳收米啓辭 (광해군 1년 2월 9일). “臣敢於聖上嗣服之初 伏奉惻怛憂民之敎 竊不勝感聳激昂之意 敢以愚見 箚請設局.冀以小祛民瘼 以答聖意.而識暗計拙 施措無策.環顧茫然 不知所爲.作米之事 自前欲試之屢矣.而嚮日以來 復有此議.或慮事勢難行 或慮別有弊端. 持難累日 久而不決 遂有先試畿甸之議.” [40]) 田川孝三, 앞의 책, 765-6쪽; 韓▩劤, 앞의 책, 169쪽. [41]) 『宣祖實錄』 151권, 35년 6월 22일(임자). [42]) 韓▩劤, 앞의 책, 170-1쪽. [43])『光海君日記』2권, 즉위년 3월 2일(己丑) [44]) 이 상소는 『久菴遺稿[下]』에 나오고 『東國文獻備考』 田賦考12, 大同1에 요약되어 있다. [45]) 『光海君日記』3권, 즉위년(1608) 4월 22일(무인). [46])『梧里先生文集』권3 疏箚 陳時務箚. [47])『光海君日記』2권, 즉위년 3월 26일(癸丑) [48])『光海君日記』2권, 즉위년 3월 27일(甲寅)“臣等伏承下敎 往于領議政家, 則以爲: ‘頃日傳敎之事近聞, 有司以「臣在告, 迄未擧行」 故斯速擧行之意 別陳矣. 其節目磨鍊, 則自有他大臣, 臣不可獨當. 況臣告病在家, 尤不可擅斷.’ 云.… 積年逋欠,不急貢物凡干病民之弊, 一切蠲革痛禁事, 有傳敎. 故箚中請設一局, 專主其事, 此則依箚辭, 知民事者四五員差出後, 會議磨鍊施行.” [49]) 『宣祖實錄』, 14년 14년 10월 16일(병오). 상이 천재로 11월 17일(기유). [50])『光海君日記』3권, 즉위년 4月 29日(乙酉) [51])『光海君日記』4권, 즉위년 5월 7일(壬辰). 設宣惠廳. 初 領議政李元翼議 “以各邑進上貢物爲各司防納人所搪阻, 一物之價倍蓰數十百, 其弊已痼, 而畿甸尤甚. 今宜別設一廳, 每歲春秋收米於民, 每田一結兩等例收八斗, 輸納于本廳, 本廳視時物價, 從優勘定, 以其米給防納人, 逐時貿納, 以絶刁蹬之路. 又就十六斗中兩等, 各減一斗, 給與本邑, 爲守令公私供費, 又以路傍邑多使客, 減給加數, 兩收米外, 不許一升加徵於民. 惟山陵,詔使之役, 不拘此限, 請劃一施行.” 從之. 以傳敎中有宣惠之語, 以名其廳. 以議政爲都提調, 戶判兼爲副提調, 置郞廳二員. [52]) 이정철(2010), 43-4쪽에서는 경기도 선혜법이 지방재정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한계를 지적하였는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지방재정을 포함하는 의미 있는 첫 발을 내디뎠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53]) 田川孝三, 앞의 책, 768-9쪽. [54]) “聖上嗣服之初, 首下憂民之敎, 民皆引領, 若大旱之望雨. 如防納等事, 爲今之極弊, 欲爲變通, 冀以少袪民弊, 宣布德意, 而又慮事勢之拘礙, 不敢斷然行之, 以先試畿甸之意爲事目, 啓請允下矣.”(『光海君日記』14권, 1년(1609 기유 37년) 3월 5일(병술). [55]) 같은 기사. [56]) 『光海君日記』13권, 1년(1609) 2월 5일(정사). [57]) 『光海君日記』15권, 1년(1609) 4월 27일(무인). [58]) 『光海君日記』26권, 2년 3월 22일(무술). [59]) 池斗煥, 앞의 논문(1996), 63-9쪽. [60]) 田川孝三, 앞의 책, 770쪽. [61]) 『光海君日記』80권, 6년 7월 3일(계축). [62]) 『仁祖實錄』1권, 1년(1623) 3월 16일(병오). [63]) “上曰: “板上似冷, 就席而坐. 予欲除去民弊, 收拾人才, 而未知除某弊而民悅, 擧何人而適用, 日夜徒自爲慮耳.” 元翼曰: “凡處事循塗守轍, 似難聳動, 必有大擧措, 可以服人心. 前頭備禦奴賊, 接濟天兵等事, 極爲難處. 目今民生塗炭, 國計虛竭, 必須量入爲出, 節用愛民, 而凡干徭役, 不責於民, 少紓其力, 則百姓至靈, 使之支供唐兵而無怨, 征討奴賊而不憚. 君臣大義, 雖未必知, 而皆感壬辰再造之恩故也. 向者群奸滿朝, 誰肯與天兵合勢討賊乎? 近聞聖斷, 多有聳動之擧, 人心固結, 則可以制梃禦敵矣. 我國素稱天下强兵, 苟得民心, 人皆樂爲之戰, 何難乎此賊! 何憂乎備禦!” 上曰: “卿言是矣. 爲今計, 莫若輕徭薄賦, 先結民心矣.” 『仁祖實錄』1권, 1년 3월 22일(임자) [64]) 『仁祖實錄』1권, 1년 3월 23일(계축). [65]) “稅貢旣定宜量入爲出.當其未定亦量出爲入. 有土則有民 有民則有國. 須先參酌國用多少而定其稅入. 然後不復徵斂 可以抒民之力也. 不然科外雜賦 駸然繁興而莫之禁耳.”(『星湖先生全集』 권46, 「論經費」). [66]) 『仁祖實錄』1권, 1년 4월 4일(계해). [67]) 『仁祖實錄』2권, 1년 6월 24일(계미). [68]) 이헌창 『한국경제통사』(제5판), 해남, 2012, <표 2-1> 참조. [69]) 乙未/上晝《講論》語于文政殿. 知事李廷龜曰: “今承大亂之後, 悉革弊政, 中外人心, 宜皆歡悅, 而危疑怨咨者尙多. 此由更張而不能就緖故也. 且我國之於虜賊, 自前羈縻而已, 今則釁已兆矣. 秋冬脫有犯境之患, 則未知何以爲計. 近見西路狀啓, 則龜泰以東, 儲峙已罄. 當今之計, 掃却萬事, 惟以糧餉器械爲急務而已.” 上曰: “軍務與安民, 有如水火之不相濟, 糧餉器械之措備, 率皆貽害於民. 況今懸磬之患方極, 將何以爲措也? 今者宣惠廳之事, 補益於軍餉則有之, 而似與小民爭利, 都民之怨咨盈路, 未知, 外方亦以爲不便耶?” 廷龜,趙存性等曰: “聞南方之人, 田結多故厭之, 而若江原道則頗以爲便矣.” 上曰: “予意京畿與外方懸殊, 京畿則所捧雖或不足, 可以隨便處之; 外方則所捧旣竭之後, 事甚難處矣.”(『仁祖實錄』2권, 1년 7월 7일(을미). [70]) 吏曹正郞趙翼上疏, 條陳大同廳設立便宜節目. 上答曰: “爾詳陳利害, 解予疑惑, 良用喜悅. 疏辭當留念焉.” 『仁祖實錄』3권, 1년 3년) 9월 3일(경인). [71]) 이정철 조선시대 공물변통론에서 蒲渚 趙翼의 위치와 역할 『대동문화연구』 70, 2010, 266-7쪽. [72]) 『仁祖實錄』3권, 1년 9월 9일(병신). [73]) 『仁祖實錄』, 원년 3월 癸丑; 『沙溪先生遺稿』, 卷一 「還鄕後辭職兼陳所懷疏」, 『仁祖實錄』원년 10월; 『沙溪先生遺稿』, 卷一 「仍陳十三事疏」, 『仁祖實錄』2년 6월. [74]) 『仁祖實錄』7권, 2년 11월 3일(계축). [75]) 『仁祖實錄』5권, 2년 3월 8일(임술). [76]) 『仁祖實錄』, 2년 12월 丁酉. [77]) 『浦渚集』, 권14, 論大同啓辭. [78]) 『承政院日記』, 효종 즉위년 7월 10일. [79]) 高錫珪, 앞의 논문, 216-221쪽. [80]) 高錫珪, 앞의 논문, 216-221쪽. [81]) 『仁祖實錄』47권, 24년 7월 19일(계해). [82]) 『仁祖實錄』7권, 2년 4년) 12월 17일(정유). [83]) 領議政李元翼上箚, 請亟罷大同之法. 其箚曰:臣立朝以來, 目見中外之弊, 多在於賦役不均, 防納恣行. 大同之規, 臣實首事, 與諸臣決意, 先試於京畿,而行之數年, 頗有其效, 欲竝行於江原而未及焉. 反正之初, 承召上來, 伏見聖明, 誠切保民, 臣欲以此規, 先行於江原, 仍及他道, 以祛一分民瘼, 以答聖意之萬一., 而議定之初, 水旱連仍, 歲將大無. 臣在告中, 深以爲慮, 通于同僚, 使之啓達. 後又上箚, 請更議處, 而自上不許更議, 仍遂行之. 頃日湖疏沓至, 中外民情, 大以爲不便, 臣又通於同僚, 又承命陳達, 而至於今日, 行罷未的, 結末未明, 規例多更, 號令多掣, 遠外民情, 愈久而愈拂. 兩湖同然, 而湖南爲甚, 愁嘆騷屑, 比比皆是. 國家作事, 當先察民情, 而民情如此, 豈可抑勒而行之? 乞命本廳, 登時停罷, 其所收米布, 善爲區處, 悉充民役之價, 毋使中間浪消, 不勝幸甚. 上令廟堂議處, 備邊司回啓曰: “大同一事, 初欲均役便民, 而旣設之後, 中名民情, 不便者多. 故朝議皆以爲當罷. 又領相陳箚如此, 當依箚停罷, 以順民情. 外方雖有捧未捧納未納之處, 而已上納者, 着令戶曹收貯, 以給貢物之價, 在本官未捧者及已捧而未上納者, 令本道監司, 明白査覈, 一聽該曹分付施行, 俾無中間花消之弊. 至於江原道, 民情皆以爲便, 猶恐或罷云, 此一道似當合於京畿宣惠廳, 一體行之.” 答曰: “依啓. 關東民情, 若以此法爲便, 則仍行可也. 然不可不商度處之, 更令該曹量處.” 戶曹判書沈悅回啓: “以爲臣將江原道貢物元數及其田結, 通融計價, 每一結捧米十六斗, 則諸船貢物之價, 可以充給, 而其外又有內醫院藥材及本邑公需,衙祿,人夫,刷馬等役, 如是而猶且樂爲, 則可以仍行.” 上令本道監司, 詢問民情. 監司以民皆願行啓聞, 乃命勿罷, 仍令戶曹兼管, 不合於宣惠廳.(『仁祖實錄』8권, 3년 2월 7일(병술). [84]) 『仁祖實錄』8권, 3년 2월 21일(경자). [85]) 『仁祖實錄』9권, 3년 6월 14일(경인). [86]) 『仁祖實錄』15권, 5년(1627) 3월 26일(계사). [87]) 『增補文獻備考』 권152, 田賦考 大同 인조 16년. [88]) 『仁祖實錄』 16년 11월 戊寅. [89]) 효종 2권, 즉위년(1649) 11월 5일(경신). [90]) 효종 2권, 즉위년 12월 13일(정유). [91]) 효종 8권, 3년(1652) 4월 1일(임인). [92]) 『潛谷遺稿』 권2, 詩 「夢見完平 李元翼」. [93]) 『宣祖實錄』81권, 29년(1596) 10월 21일(갑신). [94]) 이러한 생각은 함께 국난 극복에 기여한 유성룡의 생각과 같다, 유성룡은 “난리를 평정하여 정상을 되찾게 하는 방법이 충분한 식량과 군사에 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민심을 얻는 근본은 달리 구할 수 없고 다만 요역(徭役)과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며 더불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고 했다(『西厓集』 5, 「陳時務箚」; 선조수정실록』27년 4월 己酉에도 나온다). [95]) 『仁祖實錄』16권, 5년(1627) 4월 7일(계묘). [96]) 『光海君日記』50권, 4년(1612 2월 15일(경진). [97]) 『光海君日記』50권, 4년 2월 15일(경진); 『仁祖實錄』24권, 9년 4월 4일(정미). [98]) 『宣祖實錄』141권, 34년 9월 6일(경자). [99]) 『光海君日記』46권, 3년 10월 14일(경진). [100]) 『仁祖實錄』25권, 9년 7월 4일(병자). [101]) 『光海君日記』46권, 3년 10월 14일(경진). [102]) 『仁祖實錄』7권, 2년 12월 17일(정유). [103]) 『仁祖實錄』5권, 2년 3월 8일(임술). [104]) 이헌창 「조선시대 공물제도와 경제정책이념」(2007), 341-2쪽. [105]) 『宣祖實錄』55권, 27년 9월 20일(을미). [106]) 『梧里先生文集別集』 권2, 「領府事時引見奏事」(1631년 4월 5일) 『國譯梧里先生文集』 687-8쪽; 배우성, 「사회경제정책 논의의 정치적 성격」,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2003, 334쪽. [107]) 『浦渚集』, 권2, 論宣惠廳疏 癸亥(『仁祖實錄』, 원년 9월 庚寅에도 나온다). [108]) 이헌창 「조선시대 공물제도와 경제정책이념」((2007), 348-9쪽. [109]) 池斗煥, 「朝鮮前期 君子·小人 論議」 『泰東古典硏究』 9, 1993. [110]) 『宣祖修正實錄』33권, 32년 1월 1일(임오). [111])『孝宗實錄』2권, 즉위년 12월 13일(丁酉) [112]) 『仁祖實錄』9권, 3년 6월 14일(경인). [113]) 『光海君日記』110권, 8년 12월 21일(정사). [114]) 『仁祖實錄』29권, 12년 1월 29일(병진). [115]) “上曰: “反正初, 完平在世, 有足歆慕. 其才局, 雖不能斡旋世務, 而淸白,忠誠, 人無有及之者矣.”『仁祖實錄』38권, 17년 3월 3일(경신). [116]) 『仁祖實錄』1권, 1년 3월 16일(병오). [117]) 『宣祖實錄』12권, 11년 6월 20일(경자). [118]) “令戶曹蠲減, 少寬民力, 然後其事庶可爲也.”『宣祖實錄』81권, 29년 10월 5일(무진). [119]) 『宣祖修正實錄』10권, 9년 1월 2일(병신). [120]) 『宣祖實錄』64권, 28년 6월 2일(계묘). [121]) 『仁祖實錄』13권, 4년 윤6월 7일(정미). [122]) 이원익과 더불어 불멸의 업적을 거둔 김육도 “신은 몹시 고루하여 기모(奇謀)와 비책(秘策)을 알지는 못합니다. 오직 『서경』의 “서민을 보살펴 보호하라”, 『시경』의 “애처로운 이 외로운 자들이여”, 『논어』의 “절약하고 인민을 사랑하라”, 『맹자』의 “화합 만한 것은 없다”, 『중용』의 “서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라”, 및 『대학』의 “대중을 얻으면 국가를 얻는다”는 구절이 만세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道)로 여겨, 조세를 고르게 부과하고 인민을 편안히 하여 국가의 근본을 굳건히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潛谷先生遺稿』卷4, 「辭右議政疏 第二疏」(1650.1.10)국역본1: 306-7)”라고 하여 이원익처럼 유학자에게는 평범한 구절을 정책 이념으로 삼았다. [123]) 『梧里先生文集附錄』 권1, 「逸事狀」. [124]) 이헌창 「김육의 경제사상과 경제업적」. [125]) 鄭萬祚, 「17세기 후반 漢黨의 정치활동과 國政運營論」, 『韓國文化』 23, 1999. [126]) 『梧里先生文集別集』 권2, 「領相時引見奏事」(1624년 5월 28일). 『國譯梧里先生文集』 646쪽 [127]) 이항복은 “지금 우리 조정의 신하 중에서 총명하고 민첩하여 사무에 숙달하며 옛 책의 의리를 알고 외교를 잘 하는 사람은 유성룡뿐이다”고 했다(이재호 번역·감수, 국역 징비록(懲毖錄)』서애선생기념사업회, 2001, 307쪽). 신흠은 보좌관으로서 모신 고관들 가운데 유성룡이 행정 능력[吏才]가 가장 뛰어나고 이덕형과 이항복이 그 다음이었는데, 유성룡이 ‘참으로 천하의 奇才’라고 평가하였다(西厓先生記念事業會, 『西厓 柳成龍의 經世思想과 救國政策』(下), 2005, 311-2쪽). [128]) 이헌창 「김육의 경제사상과 경제업적」 147-154쪽. [129]) 『樊巖集』, 「星湖李先生墓碣銘」. [130]) 金彦鍾, 「『經說』을 통해 본 眉叟 古學의 性格」, 『島山學報』 5, 1996, 50-1쪽. [131]) 『肅宗實錄』 1년(1675) 14년) 윤5월 9일(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