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元翼의 학자관료적 생애와
조선후기 남인학계에 미친 영향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1. 서설
이원익(1547-1634)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이다.
그는 종실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였지만 그 성품은 온유했고, 그 지위가 수상에까지 이르렀지만 그 삶은 지극히 검박(儉朴)․질실(質實)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진 역사적 시간은 결코 평탄한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 삶도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예컨대, 미증유의 국난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광해조의 정치적 질곡,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은 그가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물리침보다는 ‘감싸안음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국리민복을 우선시하는 공인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다.
이원익의 삶에 녹아내리는 유교적 덕목 내지는 공적 가치의 정수는 ‘충(忠)’, ‘절(節)’, ‘덕(德)’이고, 이에 근거하여 그는 목릉성세(穆陵盛世)를 빛낸 정통관료의 표본적 존재, 국난극복과 종사안녕에 이바지한 중흥현상(中興賢相), 청덕에 바탕하여 ‘상하소통(上下疏通)’을 추구한 초시대적 인격자로 일컬어져 왔다.1)
이원익의 본심과는 상관없이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처럼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평가가 관료적 측면에 지나치게 치우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원익의 삶에는 ‘행(行)’만 있고, ‘학(學)’은 없는 것인가? 물론 이원익은 일생 학자를 자처하지 않았지만 용케도 후진들은 그의 언행 속에서 학적(學的) 요소를 찾아냈고, 또 그것을 이어가려 했다.
이 글은 이원익을 종사로 하는 학통 설정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작성되었다.
그 대상은 이원익이 속해 있었고, 또 그를 추종하며 계승의식을 강하게 표출했던 조선후기 근기남인 학계가 된다.
2. 이원익의 교유관계와 공인(公人)으로서의 면모
1) 초당적 교유와 영남포용론: 경남(京南)’․‘영남(嶺南)’의 정치학문적 제휴의 단초
외적 수직를 추구하는 부화함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질실성(質實性)을 강조했던 이원익의 성정(性情)은 사귐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특히, 그의 너그러운 인품은 좀체 남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대신 그 어떤 사람도 포용할만큼 넓고 깊었다. 그런 탓에 그의 사귐은 아래로는 종[奴]에서2) 위로는 임금에까지 미쳤고, ‘한 사람의 아래요 만 사람의 위(一人之下 萬人之上)’라는 수식어조차도 그에게는 재상으로서의 존귀한 지위보다는 상하융통하는 교유의 폭을 대변하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실정에 맞을 것 같다.
이원익은 종실의 자손으로 서울서 나고 자란 도회(都會) 사람이었다. 그의 선대는 종실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정치적 활동에는 제약이 따랐지만 서울의 선진화된 고급 문물을 향유하는 혜택을 누렸고, 격조로운 문학에 음률(音律)까지 알았던 고상한 가풍(家風)은 당대 유수의 사대부들이 이 집안을 주목하는 이유가 되었다. 호학의 정신과 음률에 대한 조예는 증조 수천군(秀泉君:貞恩)에 의해 배태되었고, 아들 청기군(靑杞君:彪), 손자 함천군(咸川君:億載)을 거쳐 증손 이원익에 이르러서는 그들만의 특별한 가풍이 되었다.
한 때 (세인들이) 수천군을 칭도하기를, ‘학(學)을 하되 이(理)를 먼저 하고 문(文)을 뒤에 하며, 덕(德)을 하되 안을 먼저 하고 밖을 뒤에 하며, 시(詩)를 하되 격(格)을 먼저 하고 사(辭)를 뒤에 한다.’ 하였다.…음률(音律)에 널리 통하여 거문고를 잘 탔는데 거문고 곡조가 간결하고 절조에 맞았으며 염우(廉隅)롭고 직상(直上)하여 뛰어난 소리라고 칭하였다.3)
늘 한사(寒士)를 자처하며 교제에 있어 충애(忠愛)를 중시했던 수천군의 덕스런 면모 때문이었을까. 남효온(南孝溫)은 사우전(師友傳) 을 저술하면서 수천군을 첫머리에 올렸고, 행의가 고결하고 성품이 까다롭기로 이름난 김시습(金時習)마저도 그를 몇 안되는 지기(知己)의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4)
수천군의 의표(儀表)는 아들 청기군과 손자 함천군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되었다. 특히, 함천군은 공평·온화하면서도 그 기풍이 사뭇 엄정했고, 효성과 덕행으로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그는 학문에 주력하여 시서(詩書)와 경사(經史)에 정통했고, 고악보(古樂譜)의 곡(曲)에 통달하여 그가 부르는 노래는 모두 절주(節奏)에 맞았다고 한다.5)
이처럼 이원익은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고, 화평·검소·법도를 중시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던 것이고, 종실의 자제로서 은덕군자(隱德君子)를 자처했던 부조의 격조 높은 삶은 경중의 유수한 사대부 집안들과 통교하는 바탕이 되었다. 모름지기 이원익은 소년시절부터 선대가 교유하는 대상, 교유하는 방식을 눈여겨 보면서 교유의 미덕을 깨우치며 자신의 인격을 함양해 나갔을 것이다. 후일 그가 격랑의 시대를 살면서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면서도 중정을 잃지 않고 여러 사람들을 포용하며 국리민복을 이끌어낸 동력도 좋은 집안세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었다. 아래 두 인용문은 바로 이 점을 매우 적실하게 표현한 실어(實語)이자 신필(信筆)이라 하겠다.
① 익녕군(益寧君) 이래로 여러 대 동안 덕을 쌓아 사치를 배격하고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몸소 학문을 쌓아 사대부의 집안이 되더니 거문고를 타고 경쇠를 두드리며 날마다 선왕의 기풍을 읊조렸다. 공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져 이에 상공을 탄생시켜 여러 조정의 주석(柱石)과 같은 신하가 되었다.6)
② 수천군은 절의가 높았으니 秀泉高節
그 벗은 추강이었네 其友秋江
함천군은 학문을 좋아하였고 咸川好學
성률을 마음으로 터득하였네 聲律心通
상하의 그 사이에 上下其間
청기군은 부끄러움이 없네 靑杞無愧
완평의 부조(父祖)에 完平祖禰
또한 마땅히 한 잔 술을 올리네 亦宜一觶7)
오리연보(梧里年譜) 등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원익은 13세 되던 1559년(명종14) 동학에 입교하면서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18세 때인 1564년(명종19)에는 이이(李珥)가 주관한 사마시에서 생원으로 입격했고, 1567년에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당시 요승으로 지목된 보우(普雨)의 처단을 요청한 ‘청참보우소(請斬普雨疏)’에 참여하여 선비로서의 기개를 떨쳤다.
1569년(선조2)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첫 걸음을 내디딘 이래 1634년 88세로 사망하기까지 조선의 국운과 그 명운을 함께 했다. 이처럼 그의 사회적 활동 기간은 무려 75년에 이르고, 직위가 수상에까지 이르렀으니 그가 맺었던 인간관계의 폭과 범위는 결코 한 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어찌보면 선조∽인조에 이르는 조선의 ‘관료사회’ 및 ‘선비사회는 이원익을 중심’축으로 하여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정파나 학파를 초월해 있었다.
이원익이 살던 시대는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불리는 인재의 극성기였다.
학계에서는 이황(李滉)·조식(曹植)·서경덕(徐敬德)·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이 등장하여 조선의 사상계에 깊이를 더했고, 관계에서는 이준경·노수신·류성룡 등이 관료적 자세와 처신의 모범을 제시해 나갔다.
비록 이원익은 이황·조식·서경덕 등 사상계의 거장들과 직접적인 학연을 맺지는 못했지만 그 문인들과 친밀하게 교유했고, 이이의 경우는 1574년(선조7) 황해도 도사 재임시 상관과 하관으로서 함께 근무한 인연도 있었다.
이 때 이이는 이원익의 탁월한 공무 수행 능력을 몸소 체험한 뒤 조정에서 그를 적극 천거하게 된다.8)
이후 그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국을 누비며 동분서주했고, 이 과정에서 관료학자는 물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교유하며 인적 관계망을 더욱 확충하게 된다. 그리고 광해∼인조연간에 이르러서는 명실공히 일국의 원로(元老)로서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들의 든든한 격려자이자 후원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점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원익의 교유관계는 학파나 정파를 초월해 있었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인계[南人·北人]와의 관계가 더욱 긴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적 관계망은 그의 정치적 입장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원익이 관료생활을 시작한지 15년째 되던 1583년(선조16) 이른바 동서분당이 발생하여 조선의 정치사는 당쟁 국면으로 돌입하게 된다.9) 조선의 당파는 학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동인이 퇴계남명화담학파, 서인이 율곡·우계학파를 모태로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원익은 동서분당 때는 동인을, 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질 때는 남인을 표방했고, 그의 이러한 정치적 입장은 후일 그의 자손들이 근기남인의 핵심 집안으로 역할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가학(家學) 외에는 뚜렷한 사승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행보가 학연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원익이 동인·남인을 표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정치적 소신과 류성룡과의 관계에서 구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오리연보(梧里年譜)」 <경오조>(1570)에는 이원익과 류성룡 사이의 교계(交契)의 일단을 보여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승진했다. 이 때 문관 다섯 사람을 별도로 뽑아서 중국어를 익히게 하고 임금이 친히 와서 시험을 보였는데, 공이 매번 우등을 차지하여 여러 번 포상을 받았다. 공은 매양 퇴근해 돌아오면 문을 닫고 혼자 앉아 있었으니 남들이 그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으므로 ‘처자정자(處子正字)’라 일컬었다. 류성룡 공이 와서 보고 크게 탄복했다.10)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직분에 충실하는 이원익의 관료적 책무의식을 높이 평가한 이 기사는 향후 펼쳐질 류성룡과 이원익 사이의 정치적 유대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로부터 13년 뒤인 1583년 동서분당이 현실화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시 좌부승지였던 이원익은 박순·(朴淳)이이(李珥)를 탄핵하다 곤경에 처한 도승지 박근원을 비호하다 파직되는 곡절을 겪었다. 당시 이이의 탄핵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동인으로 지목되었는데, 그 중심에 류성룡·송응개·이발·허봉 그리고 이원익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파동에서 보여준 이원익의 곧고 바른 처신은 류성룡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11) 이를 계기로 두사람 사이에는 더욱 강고한 신뢰가 형성되었다.12)
이이와 이원익은 1574년 각기 황해감사와 도사로서 함께 봉직한 인연이 있었고, 더구나 이이는 이원익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 추천한 일도 있었지만 이원익은 이러한 사정(私情)에 개의치 않았다.
(황해도사 재임시) 순찰사 이공 이(珥)가 와서 공이 물정을 알아 일을 잘 처리한 것을 보고 매우 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어서 처결하였고, 돌아갈 때에 임해서는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러나 공은 잘 보아주었다 해서 이공에게 사사로운 정을 보인 적은 없었다.13)
이후 이원익은 1591년(선조24) 형조참판 재직시 기축옥사(己丑獄事) 처리의 과람성을 이유로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을 논죄하여 마침내 강계에 유배시킴으로써 동인으로서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하게 되었고, 1594년에 류성룡정경세 등과 함께 북인계인 이산해(李山海)·경전(慶全) 부자의 전횡을 제어하는 하는 과정에서는 남인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14)
이런 흐름 위에서 이원익은 영남권 동인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맺게 되었고, 임란 당시 체찰사로 활동하는 과정에서는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갔다. 영남권에 미친 이원익의 영향력은 퇴계·남명학파권을 망라하고 있었고, 특히 1595년(선조28) 8월 도체찰사로서 성주에 체찰부를 설치한 뒤로는 당시 영남의 지명지사(知名之士)의 대부분이 그의 친교 범위 속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을 이루는 사람은 곽재우·정구·김우옹·정경세·이준·정온·노경임 등이었다.
조식의 외손서이자 문인이었던 곽재우는 이원익이 이순신과 더불어 가장 믿었던 장수였다. 특히, 그는 곽재우를 명장으로 일컫는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고, 곽재우는 전공으로서 그 믿음에 충분히 답했다.
처음에 공이 한 쪽 방면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추천한 자는 오직 이순신과 곽재우였는데, 두 사람은 결국 남쪽 변방에서 공을 세웠다.
이순신이 적을 대파한 뒤로는 해로에 적의 배가 없었다. 곽재우는 의리를 좋아하고 전수(戰守)를 잘 했으며, 기이한 꾀를 많이 냈으므로 적이 두려워서 피하였으니 강우의 여러 고을들은 이에 힘입어 편안할 수 있었다.15)
이 때 쌓인 신뢰감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변함없이 이어졌고, 특히 1600년(선조33) 2월 곽재우는 경상병사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이원익을 영상에서 체직시킨 것을 실정으로 비판하는 가운데 이 문제를 자신의 거취와 연계시키는 결기를 보였다.
전하께서 지난번에 이원익(李元翼)을 영상(領相)에 제수하자 일국의 사람들이 전하께서 사람을 얻은 것에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체직시켰으니 신은 실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어진 정승이 시대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대저 이원익의 재능이 국인(國人)의 소망에 부응한지는 진실로 알 수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난날 그가 체찰사로 있을 적에 신이 그의 언론을 들었고 그의 조처하는 것을 보았는데,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성(至誠)에서 나왔고 공평하고 청렴 근신한 행동은 천성으로 타고 난 것이었습니다.
우매한 신은 생각하기를, 참으로 조용히 죽음을 마쳐 나라를 지킬 사직신(社稷臣)이라고 여겼습니다.
조정에서 편안히 있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원익의 진퇴에 대한 의리는 옛사람에 견주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만 국사는 어찌할 것입니까.
신은 삼가 안타까와 합니다. 안타까와 하면서도 국가에 도움을 줄 수가 없으니 이것이 신이 물러가야 할 세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16)
그런데 전하께서 가까이하지 않고 신임하시지 않아 이외에도 두 사람 사이의 특별한 교계는 오리집 과 망우집 에 실린 서간 및 시고에서 확인이 된다.17) 다만 이원익이 전형적인 경세관료로서 세상과 밀착된 삶을 살았다면 곽재우는 난진이퇴(難進易退)를 추구하는 처사적 성향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인생의 지향이 서로 달랐고, 정치적 사안에 따른 시국관도 늘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옥사에 대한 입장이었고, 이 때 이원익은 전은론을, 곽재우는 강경론을 주장했다.18) 그러나 이러한 시국관의 차이가 의리를 함께 하고 심기가 상통했던 저간의 친교까지는 결코 희석시킬 수 는 없었다. 아래의 시는 흉금을 드러내며 서로를 이해하고자 했던 두 석인(碩人)의 아량의 미덕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교유의 고사가 될만하다.
이완평 원익에게 주다
마음 같은데 자취 서로 다른 게 무슨 상관인가 心同何害迹相殊
성시는 시끄럽고 산 속은 고요하다 城市喧囂山靜孤
이 마음 담연한 건 피차가 같으니 此心湛然無彼此
하늘의 밝은 달이 빙호를 비친다 一天明月照氷壺19)
망우당 곽재우의 시에 차운하다(경술년: 1610)
속객과 신선은 본디 길이 다르니 塵客仙曹道自殊
나는 영달을 구하고 그대는 고고함을 택했다 我求榮達子枯孤
의미가 서로 다른 곳을 알려고 한다면 欲知意味相同處
가을 달 밝을 때 술 한 병이 바로 그것이지 秋月明時酒一壺
나는 본래 글을 할 줄 모르므로 평생 동안 남에게 시 한 귀를 지어준
적이 없었는데, 그대를 송별하노라니 섭섭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기에 이렇게 시를 지으니, 가소로울 뿐이다.20)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원익은 1594년(선조27) 이산해 부자로 대표되는 북인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임으로써 남인적 성향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임란 당시 그가 보여준 교유망은 초당적이었음에 분명했다. 이런 정황은 정인홍의 문인이었던 정경운(鄭慶雲)이 이원익의 공무 수행 자세에 대해 극도의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원익(元翼)과 김륵(金玏)이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이상공(李相公)의 성품은 본디 담박하여 시대의 폐단을 힘껏 고치고자 했다. 행장을 꾸린 것이 보잘것 없었으며, 한 필의 쇄마(刷馬)도 거느리지 않고, 단지 군관(軍官) 한 쌍만 대동하였다. 난리 뒤에 성사(星使)로서는 없던 바였다. 경내에 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되살아날 수 있게 하되,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기가 밀어내 버린 것 같이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봉황이 나타나 세상을 상서롭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순찰사(巡察使) 서성(徐渻)도 군(郡)에 왔으나, 조심스러워 하여 단지 군관(軍官) 두 명만 거느리고 왔으며, 술을 마시는데 소고기가 있으니,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 정승(李政承)이 알게 하지 말라 고 거듭거듭 다짐하였다.’ 아! ‘탐욕스러운 이가 청렴해지고 게으른 자가 뜻을 세운다.’고 하더니 참으로 빈말이 아니구나!21)
이원익은 체찰사로 활동하는 동안 영남지역에 많은 은덕을 베푸는 한편으로 수다한 명사들의 협조를 통해 본연의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 한편으로 영남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갔다. 1596년(선조29) 3월 정경세와 인동의 금오산(金烏山)에서 회합하여 국난 타개책을 함께 모색했고,22) 같은 달에 예안으로 가서 조목을 방문하여 화의론(和議論)에 대해 자문했으며,23) 동년 4월에는 강원감사 정구(鄭逑)를 성주 체찰부로 불러 군무(軍務)를 논의키도 했다.24) 그리고 1597년(선조30) 4월에는 의병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다시 예안으로 가서는 퇴계문인 금난수(琴蘭秀)와 함께 이황의 자취가 서린 도산 천연대(天淵臺)를 심방하는25) 한편 역시 퇴계문인 김부의(金富儀)의 집을 들러 시를 차운하는26) 등 퇴계학파와의 유대를 크게 증진시켰다.
이런 노력의 결과 영남의 명사들이 그의 활동에 호응하여 방문 또는 서간을 통해 격려해마지 않았고,27) 박성(朴惺)·김용(金涌)·최현(崔晛)·노경임(盧景任) 등은 체찰부의 종사관으로서 막하에서 그를 직접 보좌하며 국무수행의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성명 | 본관 | 거주 | 관력 | 사승 | 교유내용(전거) | |
---|---|---|---|---|---|---|
퇴계학파권 | 柳成龍 | 풍산 | 안동 | 영의정 | 退溪門人 | 교류빈번(典據略) |
류성룡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이원익의 대영남 교유는 임난을 거치면서 영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영남인사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게 된다.
나는 체찰사로서 영남에 있은 지 오래다. 정승 류성룡은 내가 공경히 섬긴 분이며, 노경임은 명민독경(明敏篤敬)하고, 곽재우는 더러 잘못한 일이 많지만 호협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는데, 나의 책망을 받으면 얼른 깨닫고 종시 나를 섬겼다. 김우옹은 유아직량(儒雅直諒)하였는데, 정인홍을 멀리 피하여 기전(畿甸)에 떠돌아 다녔다. 이상 몇 몇 군자는 지금 다 볼 수가 없으니 때로 생각이 떠올라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28)
이 가운데 김우옹에 대한 인식은 허목의 ‘동강관(東岡觀)’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29) 비록 위 인용문에는 빠져있지만 이원익은 한강학파의 종사 정구에 대해서도 깊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원익에 있어 류성룡이 관료로서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존재였다면 정구는 하나의 사범(師範)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정구는 이원익의 손서이자 문인으로서 근기남인학통의 형성에 있어 요추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허목의 또 다른 스승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육 해이하고 경서는 쇠잔하여 성인의 학문 없어졌는데 敎弛經殘聖學湮
유교에 어찌 다행히도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斯文何幸有斯人
조정에서 벼슬할 땐 충성스러웠고 立朝致用忠而正
학교를 세워 후생을 가르칠 땐 독실하였네 建塾開來篤且純
산골에서 몇 해나 그리워 했었던가 峽裏幾年思不歇
영남의 천리길에 만나볼 인연 없었다 嶺中千里接無因
후일에 지하에서 만일 가르침을 받는다면 他時泉下如承誨
평생 동안 우러러 사모한 뜻 펼 수 있으리 景慕平生志可伸30)
퇴계남명하파를 망라하던 이원익의 교유망도 남인북인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점차 퇴계학파 쪽으로 기울게 된다. 1599년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세력이 류성룡을 비난하자31) 이원익은 붕당의 폐해를 극론하면서 사실상 남인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류성룡을 적극 두둔함으로써 대북과 팽팽한 공방전을 펼친 바 있었다.
① ‘고대(古代)로 부터 붕당(朋黨)의 일이 있어 왔지만 지금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당초에 당을 만든 자가 동인(東人)·서인(西人)으로 이름하더니, 서인이 물러난 후에는 동인 가운데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이 생겼으며, 북인 가운데서 또 소북(小北)과 대북(大北)이 생겨 분열되고 이합집산하여 번갈아 진퇴(進退)하니, 어찌 나랏일이 망쳐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인이란 누구를 가리키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류성룡(柳成龍)과 그와 같이 행세한 사람입니다. 성룡과 그의 일파가 배척을 당한 후에 조정의 기강이 더욱 무너져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고 했다.32)
② 신들이 말씀드린 사류(士類)는 류성룡 한 사람만을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성룡의 행위가 꼭 다 옳다고 할 수도 없고 그 이른바 사류들도 모두 꼭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멸사봉공의 자세로 직무를 수행한 것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월등했는데도 횡의(橫議)가 일제히 일어나 까닭없이 모두 배척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져 국가의 체통을 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오늘날의 일을 논하면서 전날의 일까지 언급한 것인데, 당시의 일에 대해서는 성감(聖鑑)께서 이미 환히 아시는 바이거늘 신들이 어찌 감히 두려워하여 발설하지 않겠습니까.33)
이런 흐름 속에서 1608년 임해군의 옥사가 발생했을 때는 정인홍과도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원익이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전은론자(全恩論者)였음에34) 반해 정인홍은 처단을 주장한 강경론자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원익은 정인홍으로부터 호역(護逆), 즉 역적을 비호한 사람으로 지목되는35) 수난을 겪게 된다.
이어 1611년에는 정인홍이 ‘회퇴변척(晦退辨斥)’을 단행하여 물의를 빚었을 때는 그의 주장을 사설(邪說)로 간주하고 변척할 것을 건의했고,36)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癸丑獄事) 때는 대북의 멸륜적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한 정온(鄭蘊)을 극력 두둔하는37) 과정에서 대북과는 빙탄간이 되었으며, 급기야 1615년(광해군7)에는 인목대비를 구호하다 홍천에 유배되고 말았던 것이다.38) 이처럼 이원익은 선조 후반에서 광해조에 이르는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 정인홍으로 대표되는 남명학파권 인사들과는 사실상 정적화 되었다.
이런 관계의 악화상은 당초 그를 봉황에 비기며 현상(賢相)으로 칭송해마지 않았던 내암문인 정경운(鄭慶雲)의 일기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들으니, 선생(鄭仁弘:필자주)께서 초나흘에 환산(還山)하셨다. 조정에 계시면서 이호민(李好閔)을 죄줄 것을 청하셨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 논의하여 두 마음을 품은 이원익(李元翼)의 무리가 역모를 꾸민 임해군(臨海君)을 죽이지 말자고 주장하였다.39)
조목·류성룡·김우옹·정구·금난수·곽재우·이로 등 퇴계·남명문인들이 이원익과 교유한 영남지역 ‘선배그룹이라면, 정경세·이준·정온은 대표적인 후배 그룹이었다. 정경세·이준은 서애고제라는 점에서 류성룡과의 관계적 확장이었고, 내암문인이었던 정온은 정인홍 및 남명학파에 대한 일종의 관계적 개선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정온은 이른바 계축옥사를 거치면서 정인홍과 의절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원익은 정온에게서 정인홍과는 차별되는 ‘남명의 곧은 기풍’을 체감하게 되면서 그를 매우 애중했던 것 같다. 결국 이원익은 정온 한 사람을 통해 남명학파와의 교유의 끈을 이어갔던 것이다.
정경세는 1607년 류성룡의 사망 이후 영남사림의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하는 가운데 인조반정 이후 중용되어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는 과정에서는 영남남인의 영수로서 그 위상이 확고했던 인물이다. 이 무렵 근기남인의 정신적 지도자가 바로 이원익이었으니, 두 사람은 남인사회의 쌍두마차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경세는 이원익을 일국의 원로로 존경하며 중대사를 항상 자문했고,40) 이원익은 정경세의 학식과 경륜을 깊이 신뢰했다.
문충공 오리 이원익과 같은 분은 강연을 마치고 물러 나올 적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경세는 참으로 시강(侍講)의 인재이다. 어찌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에서만 제일이겠는가. 옛날 사람 가운데에도 이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41)
한편 이준은 이원익이 가장 살갑게 여긴 사람으로서 문장과 품행 또한 뛰어나 이원익의 신뢰가 자못 깊었다. 이준에 대한 허물없는 마음은 <금장화 초첩(錦障花草帖)>의 서문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서자(賤豚) 효전(孝傳)이 나에게 시도 짓고 글씨도 써달라고 청했다.
이 아이는 내가 본래 한묵(翰墨)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요청한 것은 조상을 공경하는 뜻에서였다. … 그가 후일에 장차 이것을 가지고 나를 사모하고 또한 장차 이것을 가지고 나의 끼친 몸을 신중히 가져 한 발짝 떼는 동안에도 조심할 것을 알았다. 따라서 부자간에 주고 받는 것은 본디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창석공은 나와 인척간이고, 내가 평생에 그의 글과 품행이 일치된 것을 존경해 왔는데, 다행히 그의 화답한 시를 얻어 각 폭의 머리에 썼으니, 그것은 그 시의 중요함을 힘입어 집안 대대로 전하는 보물로 삼게 하려는 뜻에서였다.42)
이준을 인척이라 한 것은 이원익의 서자 제전(悌傳)이 곧 이준의 서녀사위(庶壻)였기 때문이다. 비록 서자녀이기는 했지만 이원익과 이준은 서로 사돈을 맺을 만큼 그 관계가 자못 돈독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후일 이준은 이원익의 묘지와 신도비명을 짓게 되는데, 둘 다 이원익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43)
하루는 공이 윤영(尹鍈)을 불러 말하기를, ‘내 나이 이미 다 되었으니, 나의 사업은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없으나 자손들이 만약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남의 이목을 그르친다면 그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생각컨대, 평소에 서로 다정하게 지냈던 이로는 오직 이숙평(李叔平:李埈)이 있을 뿐이니 명지(銘誌)를 그에게 부탁한다면 나는 유감이 없겠다고 했다. 윤영이 상공의 명을 받고 와서 그 뜻을 자세하게 이야기 했다.44)
정경세․이준은 이원익과의 교계를 바탕으로 인조반정 이후 동조하는 동안 여러 사안에서 입장을 함께 했고,45) 특히 이원익은 인조 정권의 초대 영의정으로서 영남 인사의 수용에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46)
앞에서 언급한 정경세(1563-1633)․이준(1560-1635)이 학문적 후배 내지는 관료적 하관의 입장에서 이원익(1547-1634)과 교유했다면 지금 살펴볼 정온은 이원익[師]에 대해 ‘제(弟)’의 자세를 취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그리고 정경세․이준이 이황⇒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통과의 유대였다면 정온은 조식⇒정인홍으로 이어지는 남명학통에 대한 선별적 수용이었다. 특히 정경세․정온은 윤휴 등 근기남인의 인식에서 보듯 이원익과 함께 서인정권에 맞설 수 있는 남인의 기둥이었음에 분명했다. 이 점에서 이원익과 이들과의 교유는 서울권 오리계와 영남권 퇴계․남명계의 정치적 연대와 세력 증강의 과정이기도 했다.
공(尹鑴)이 말하기를, ‘청음(淸陰:金尙憲)은 실로 절의를 지키고 결백한 지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논의에 있어서는 실제로 편파적이고 남을 해치는 논의를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완평(李完平)은 노성한 원로로서 정대(正大)하고 충직하며, 정우복(鄭愚伏)은 학식이 깊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정동계(鄭桐溪)는 곧은 지조를 지녔고 성품이 강직 과감하였는데 어찌 그의 농락을 받겠는가. 이런다고 이 원로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머리를 돌릴 것이겠는가.’고 했다.47)
정온과 이원익 사이의 만남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5년(선조28) 경에 이루어졌다. 당시 유생 신분이었던 정온은 성주의 체찰부(體察府)로 찾아가 이원익의 업적을 칭송하는 한편 정인홍과 곽재우를 각기 훌륭한 정승 및 장수감으로 천거한 바 있었다. 물론 이원익이 그의 건의를 모두 수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년 정온의 우국충정에 깊이 감복했다고 한다.48)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정온은 32세 되던 1600년(선조33) 서울로 가서 이원익에게 제자로서의 정중한 예를 올리게 된다.
이에 낙동강 왼쪽으로 가서 월천(月川:趙穆)을 뵈었고 낙동강 오른쪽으로 가서 한강(寒岡:鄭逑)을 뵈었으나 유독 한양에서는 아직 상국(相國)을 뵙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온(蘊)이 상국을 뵙는 것은 그 형세가 앞의 두 선생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만약 상국께서 태부(台府)에 올라 한나라의 인재를 출척(黜陟)하는 때를 당하였다면 온(蘊)의 발걸음은 반드시 상국의 문장(門墻) 근처에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상국께서는 병 때문에 벼슬을 그만둔 지가 여러 해 되어 조정의 의논이 미치지 않고 있으니, 비록 도성 안에 계시지만 실로 산림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상공의 청광(淸光)을 가까이하여 한마디 말씀을 들음으로써 제 자신을 장대하게 하지 않는다면 천 리 밖의 외로운 몸으로서는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으니, 3일 동안 먼 길을 걸으며 흘린 땀이 어찌 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감히 편지로 예폐(禮幣)를 삼아 문밖에서 명을 기다립니다.49)
정온의 곧고 바른 처신과 추향(趨向)에 감복한 이원익은 그를 지기로 대하였고, 포의(布衣)를 예대(禮待)하는 한 상심의 겸하의 미덕은 정온으로 하여금 그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전에 저를 거절하지 않으셨기에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미 자리를 내어 주시고 또 반가운 기색을 보이시며 마치 심히 용렬하지 않은 자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못난 제가 어찌 이런 대접을 받는단 말입니까. 덕을 만끽하고 돌아오면서 마음속으로 되뇌이기를, ‘이번 걸음에 얻은 것이 많지 않은가. 선현(先賢)의 마음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었으니 첫 번째 다행이요, 양강(陽剛)한 군자의 덕을 볼 수 있었으니 두 번째 다행이다. 이 두 가지 다행스러움을 얻었으니, 죽더라도 서운함이 없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와서 부로(父老)를 만나자, 교만한 기색이 있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50)
앞의 인용문에 정인홍의 존재는 빠져 있지만 정온은 이원익을 사사하기 전에 정인홍․조목․정구 등 당시 영남학계 석학들의 문하를 두루 출입하며 학문과 행의를 배우고 견문을 넓혀오고 있었다.51) 조목․정구가 이원익과 독실한 교분을 맺고 있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결국 정온은 정인홍에게서는 남명학(南冥學)의 전통을, 조목에게서는 퇴계학(退溪學)의 요체를, 정구에게서는 양문의 절충적 지결(指訣)을 배웠던 것이다.52) 당대 영남 최고 석학의 문하를 출입했던 그가 이원익에게로 눈을 돌린 것은 영남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학문세계에 대한 여망, 학식과 덕망 그리고 경륜을 갖춘 경세관료를 향한 포부와 무관치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정온은 순수 학자보다는 학식과 식견 그리고 치도의 방략을 겸비한 학자관료가 되어 세상을 경영하고 싶은 바램이 컸던 것 같다. 이런 정황은 그가 이원익을 정식으로 사사한 이듬해인 1601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이로부터 9년 뒤인 1610년에 문과에 합격한 사실에서도 방증된다.
결국 정온은 정인홍․조목․정구로부터는 학자적 소양을, 이원익으로부터는 경세가적 역량을 배우고자 했던 것인데, 이 과정에서 경[京:治人的 吏道]과 향[鄕:修己的 省察]의 자연스런 절충이 수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제의 연(緣)은 정치적 동지관계로 어어졌고, 정온의 관료 생활에 있어 이원익은 모범적 지침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1611년(광해군3) 사간원 정언에 재직하던 정온이 경운궁(慶運宮) 이어(移御)의 부당성을 극론하다53) 광해군의 분노를 촉발시킨 바 있었다. 이에 광해군이 정온을 경성판관으로 출보하는 특단의 조처를 내리자 이원익은 자신의 거취를 걸고 명을 거둘 것을 건의했다.54) 물론 이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이원익이 정온의 정치적 외원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정치적 공조성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1614년 (광해군6)2월 10일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교동에 안치되어 있던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자 동월 21일 부사직 정온이 상소하여 정항을 참시(斬屍)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55) 흔히 ‘갑인봉사(甲寅封事)’라 불리는 이 상소의 표면적 주장은 정항의 처벌이지만 그 본질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패륜성을 정면으로 규탄하는데 있었다. 격분한 광해군은 정온을 임금을 업신여기는 역적으로 규정하고 극형을 내리고자 했다.
이에 이원익은 차자를 올려 관대한 처분을 앙청하였으나 광해군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나마 정온이 극형을 면하고 제주에 위리안치될 수 있었던 것도 이원익의 적극적인 변호의 결과였다.
이원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정온의 말이 전도되고 망령되어 큰 죄에 빠졌습니다마는, 어찌 처음부터 임금을 업신여기고 역적에 가담하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성인은 죄를 처단함에 있어 그 정상을 참작하여 형벌을 의논하였으니, 성상께서는 덕의를 넓히시어 특히 너그러운 법을 따라 처리하소서.’하였다.56)
그러나 이 사건은 이원익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듬해인 1615년(광해군7) 서궁유폐와 관련하여 이원익이 인목대비 보호론을 개진하였을 때 광해군은 저간의 불편했던 심기를 격하게 드러내고는 홍천(洪川) 유배라는 형벌로서 그를 단죄했다.
군신의 대의는 삼척동자도 모두 아는 것인데, 역적 정온(鄭蘊)은 앞에서 창도하고 완평(完平:李元翼)은 뒤에서 이어받아 감히 불측한 악명을 함부로 임금에게 가하였다. 정온은 일개 시골 서생일 뿐이지만 대신이 이러하니 국사가 더욱 한심하기 그지없다.57)
이처럼 이원익과 정온은 사제관계에 바탕하여 정치적 연대를 이어갔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둘 다 복직되어 각기 남인의 원로와 중진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런 관계성은 문자교유로까지 진전되어 1633년 이원익이 정온에게 아버지 함천군(咸川君)의 묘지명을 청했는데, 이는 정온에 대한 신뢰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숭정(崇禎) 계유년(1633, 인조11) 봄에 원임(原任) 영의정 완평부원군 이노야(李老爺)가 심부름 하는 사람을 통해 편지와 행장(行狀)을 주어 남쪽으로 600리를 보내 선대의 묘지명을 팔계(八溪)에 사는 나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끝까지 다 읽지 못하고 놀랍고 황공하여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명공(名公)과 거경(鉅卿)이 문장으로 이름이 난 자가 조정에 얼마나 많은가.”하였다. 그런데 상공(相公)이 그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멀리 떨어진 지방의 보잘것없는 나에게 요구하니 이는 그 의도를 헤아릴 수가 없으나 이미 명을 받았으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58)
이원익과 정온의 인연은 허목을 매개로 더욱 굳건하게 다져져 근기남인학통의 형성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원익은 류성룡․곽재우․김우옹․노경임․정경세․이준․정온 등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활동한 영남의 명사들과 학문 정치적 교계를 맺고 있었고, 이 중에는 통혼을 매개로 집안간에 세의로 발전된 경우도 있었다. 이원익과 영남인사와의 교유는 근기․영남남인의 정치학문적 제휴의 단초로 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컸다. 후일 전개되는 유형원(柳馨遠)과 배상유(裵尙瑜), 조경․허목과 이현일(李玄逸), 이익(李瀷)과 권상일(權相一)의 교유와 채제공․정약용의 대 영남 교유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59)
2) 공익(公益)․질실(質實)의 추구와 중흥현상론(中興賢相論): 남인계 학자재상론(學者宰相論)의 17세기적 모델
이원익이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과 조명이 가능하지만 가장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은 역시 관료로서의 업적, 특히 상업(相業)이다. 그는 선조·광해군·인조조 3대에 걸쳐 6차례나 수상을 역임하며 임진왜란 때는 국난 극복에 앞장섰고, 살제폐모 정국에서는 절개와 의리를 온전히 했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는 청덕과 경륜을 지닌 중흥재상으로서 조야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원익이 설정했던 관료적 모토는 사리가 아닌 ‘공익(公益)’, 부화함보다는 ‘질실(質實)’이었다.60) 물론 이 때문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를 학습할 때도 치용(致用)만을 추구하여 학문이 깊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질실을 강조하며 현실의 문제를 염두했던 그의 이런 정신은 조정에서는 물론이고 일상 및 문자생활에서도 종신토록 한결같이 지켜졌다.61)
누군가 말하기를 “공은 평소에 경사를 읽을 때 치용(致用)만을 구하였고, 관직을 갖자 곧 책을 묶어 두고 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두가지를 다 하다가는 생각을 상하게 할까 염려된다’고 했다”고 했다.… 글에는 화려한 것도 있고 질박한 것도 있는데, 공은 화려한 것이라면 아예 짓지도 않고 자처하지도 않았다.62)
이원익의 관료적 가치관은 수십년에 이르는 관직생활의 과정에서 정립되었겠지만 그 기본 정신의 일단은 1569년 문과 시험에서 작성한 답안[試券]에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것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다(明良相遇)’는 물음에 대한 논술 문제였다. 이 물음에 대한 이원익의 답은 명쾌했다. 그 골자는 도덕․인의에 바탕한 군신간의 ‘협심공리(協心共理)’였고 이를 위해 어진인재를 가려서 등용할 것을 역설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신하의 역할이 지니는 시대성[時宜性]이었다.
주자로 말하면, 학(學)에는 성정(誠正)의 공이 있고, 도(道)에는 정일(精一)의 순수함이 있으며, 강론한 것은 성현의 학문이었으나 시무(時務)에는 적당한 것이 아니었고, 진달한 것은 요순의 도였으나 시군(時君)에는 합당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어찌 효종(孝宗)의 마음을 얻어 후한 예우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63)
이원익은 아무리 좋은 주장과 견해라 할지라도 시의성(時宜性)이 없으면 무용하다는 것이 이원익이 주장하고자 했던 ‘신하역할론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문과 시험에서 제시한 이런 기조(基調)는 약 60년의 관직생활을 마감하고 치사하는 그날까지 일관되게 유지되었던 것이다.
질실에 바탕한 공익의 추구, 선조∼인조조에 보여준 관료적[상신으로서의] 리더십, 청빈한 삶의 실천으로 대변되는 이원익의 삶은 그 당대에는 동료들에 의해, 사후에는 후학들에 의해 하나의 ‘상징(象徵)’으로 굳어져 갔다.
그것은 곧 ‘중흥현상론(中興賢相論)’이었다. ‘나라의 중흥을 이끈 어진재상’이란 이 말은 ‘충’[忠信:선조조], ‘절[’節義:광해조], ‘덕’[淸德:인조조]이 혼융된 표현이었고, 점차 남인계 ‘학자재상론(學者宰相論)’의 모델로 정착되어 갔다.
이원익의 상업(相業)에 대해서는 초당적인 평가와 찬사가 따랐지만 본절에서는 주로 남인계의 인식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상업과 관련하여 이원익을 수식하는 대표적 용어는 ‘3이(三李)’ 또는 ‘4이(四李)’이다. ‘3이’는 광해조에 절의를 세운 이원익․이항복․이덕형을 통칭하는 말이고,64) ‘4’이는 선조조의 중흥을 이끈 이준경․이항복․이덕형․이원익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후자는 국초의 황희(黃喜)․허조(許稠)와 더불어 국조의 대표적 현상을 입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65)
이준(李埈)의 경우는 이원익을 선조․광해조의 ‘제일명상(第一名相)’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66) 이런 인식은 그가 남긴 기록의 곳곳에서 확인된다.67) 서애고제였던 이준이 류성룡을 정몽주에 비견되는 학자재상(學者宰相)으로 자리매김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임을 고려할 때,68) 그의 이런 평가 속에는 류성룡과 이원익을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개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인조조 영남의 제일인물로 평가받았고, 인물에 대한 논평이 인색하기로 정평이 있었던 김영(金坽)조차도 자신의 일기에 이원익을 청백․충절․겸공을 겸비한 근대의 어진재상[近世賢相]으로 기술하고69) 있음을 고려할 때, ‘오리현상론(梧里賢相論)’은 사실상 그의 당대에 이미 남인 내부에서는 하나의 공의(公議)이자 공론(公論)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리현상론(梧里賢相論)’은 17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이준경․류성룡과의 관계성이 강조되면서 남인계 재상론도 그 가닥이 잡혀가게 된다.
① 정미(1547) 연간에 선생(李浚慶)께서 자색 기운이 성 안에 들어옴을 보고 ‘보필할 인재가 태어난다’고 하셨는데, 과연 이정승 원익이 출생하였다.
… 하루는 선생이 검은 기운이 성 안에 들어옴을 보고 ‘보필이 위태하다고’ 하셨다. 급히 입궐해서 이원익에게 약재를 하사하도록 청하면서 ‘원익이 지금 홍역으로 아주 위태합니다. 보필한 인재는 얻기가 쉽지 않으니 급히 구하소서’라고 했다.…임금이 처음에는 마음 속에 노기가 있었으나 비로소 깨달아서 ‘원익이 참으로 보필할 인재이고, 내가 원로(李浚慶)의 천거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고 했다.70)
② 선생이 치사하고 있을 때, 오리와 서애 두 상공이 와서 뵈었다. 선생이 자기 배를 쓰다듬고 탄식하면서, ‘그대들은 태평 재상의 배가 부럽지 않는가. 모든 일을 조심조심하게 하였다. 선생께서 두 분에게 지수(指授)한 방책이 많이 있었다.71)
위 두 인용문에 따르면, 이준경이 이원익의 기국을 미리 알아보고 종사를 감당할 인재로 육성했고, 자신을 이를 상임(相任)으로 류성룡과 이원익을 지목하고 상신이 지녀야 할 방략과 지모를 전수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 기사는 이준경의 동고유고(東皐遺稿) 에만 나타날 뿐 조선왕조실록이나 오리집 등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자료적 검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혹 이 기록이 당대의 실정과 일정한 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준경⇒류성룡⇒이원익으로 이어지는 남인계 상업계승론이 일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원익이 이준경의 문인록에 해당하는 <연원문생록(淵源門生錄)>72)에 수제(首題)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원익의 재상으로서의 역할과 위상은 가끔 류성룡과 비교 평가되기도 했다. 아래에 제시한 정엽(鄭曄)․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김장생(金長生) 등 당대 명사들의 언설은 이원익의 위상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광해조에 공이 홍천에 있었는데, 정엽이 신흠에게 편지를 보내 ‘완평은 참으로 쓸만한 사람이지만 독서를 하지 않은 것이 흠이다고 했다. 신흠이 답서에서 ‘완평이 한 일은 모두 이치에 맞으니 이것이 곧 학(學)인데, 헛된 문(文)을 어찌 쓰겠는가라고 했다. 이항복이 일찍이 김장생에게 ‘완평과 서애’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라고 묻자 김장생이 ‘완평의 상업은 서애에 비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 이항복이 ‘서애는 문집이 있어 이름을 남길만 하다’고 하자 김장생이 ‘그것은 그저 보잘 것 없는 문사일 뿐이다’고 했다.73)
이 기사는 이원익 본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관성이 개입된 한계는 있으나 당시 서인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학자․관료들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당시 서인계 사림들은 상업(相業)에 있어서는 이원익이 좀 더 높이 평가했던 것 같고, 배움과 공부가 부족하다는 ‘불학(不學’)’의 혐의 또한 행의의 실효성으로서 일정 부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원익의 학문이 결코 굉박․심오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행합일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은 그의 배움을 매우 값지게 평가했던 것이다.
‘오리현상론은 그의 손서이자 문인이었던 허목을 통해 한층 더 강조되었다. 허목은 이원익과 관련된 여러 편의 글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특필·강조했다.
① 이상국은 선조를 섬겼는데, 국가가 전란을 당했을 때 몸 바쳐 사직을 보존하였다.…인조 원년(1623)에 다시 중흥 정승이 되었다. 국가 안위를 담당하고 국가를 돌본 지 40년, 88세로 세상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상국은 세 임금을 보좌하면서 치체(治體)와 유술(儒術)을 존중하고, 절약과 검소를 좋아하였으며, 진퇴(進退)의 의에 밝아 사방 인심이 쏠리니 ‘선조ㆍ인조의 회복명신이라고 일컬었다.74)
② 상국(相國)의 명성과 공업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사방에 두루 미쳤는데, 그 마음을 찾아보면 바로 한결같음이다.…비록 붕당(朋黨)으로 어수선하던 때였으나 친한 사람과 소원한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진 상국이라고 말하였다. 광해군이 무도(無道)하여 상국의 충성을 원수로 여겨 어떻게 하면 더욱 멀리 물리칠 수 있을까 하였지만, 그래도 ‘어진상국’이라고 하였다.75)
③ 대개 88년 사이에 상국이 하신 일로 비추어 보면 시대의 편안하고 어지러움과 국사의 잘되고 못된 것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명백하니, 후세를 위하여 크게 권장(勸奬)이 될 것이요, 또한 국가의 중흥한 고사(古事)를 말함에도 도움이 있을 것이다.76)
허목에게 있어 이원익은 ①유술(儒術)을 존중하고 출처의 의리가 밝은 선비, ②나라가 어려울 때 몸을 바쳐 사직(社稷)을 보존한 명신, ③그리하여 학파와 당파를 초월하여 존경을 받은 ‘어진재상[賢相]’이었다. 허목의 이러한 평가는 단순히 처조부이자 스승이었던 이원익에 대한 맹목적 찬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남인재상으로 화려하게 입조한 허목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할 때, 이러한 일련의 평설은 이원익에 대한 계승의식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정조조 남인재상이었던 채제공에게로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후술하겠지만 채제공이 이원익의 상업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추양사업에 열정을 다하게 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3. 조선후기 남인학계의 동향과 이원익의 학통적 위상
1) 근기남인 학통의 형성과 이원익: 허목(許穆)․윤휴(尹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원익은 일생 학자를 자처하지도 않았으므로 강학이나 문답 등을 통해 문인을 육성한 일도 없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학자관료 중에는 이원익의 문인을 자처하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 이는 집경수업(執經受業)이나 청학(請學)․청업(請業)․문업(問業) 등으로 일컬어지는 학문적 수수보다는 장자(長者)․덕인(德人)에 대한 인격적 감화가 사제관계로 연결된 측면이 있었음을 뜻한다.77) 물론 그 어떤 경우에도 이원익 그들에 대해서 사도(師道)를 자처한 적은 없었다.
이원익에 대해 문인을 칭한 인사는 남인을 중심으로 서인 일부에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후자의 대표적 인물로는 김상헌(金尙憲)․조익(趙翼)․윤방(尹昉)․강석기(姜碩期) 등을 들 수 있다. 김상헌은 이원익을 위해 지은 만사에서 이원익의 상업(相業)을 으뜸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문인을 자칭하며 애도의 마음을 애절하게 표현했다.78) 김상헌은 이원익의 백부 보천부정(甫川副正)의 외손자였으므로 이원익과는 5촌의 척분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평소 집안간에 왕래하는 사이였고, 이 과정에서 이원익으로부터 상당한 훈도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서인계 인사 가운데 이원익에 대한 경모심이 가장 높은 사람은 조익(趙翼)이었다. 그는 1634년 이원익이 사망하자 제문 및 만사를 지어 ‘사(師)’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마음을 표했다.
저는 선계(先契)의 옛 정을 이어받고 돌보아주시는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또 구구한 어리석음을 살피어 문하에 거두어주셨으니, 단지 공적인 면에서 사업을 가지고 기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사적인 면에서도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해주셨습니다.79)
어리석은 나는 다행히 문하에 끼었으니 愚蒙幸忝門生後
이 날 애사에서 눈물 흘리며 상심하네 此日題詞淚滿裳80)
그리고 이원익을 향한 조익의 특별한 마음은 17세기 사림사회에서는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아래 인용문은 윤휴․송시열․송준길․윤선거 등이 회합하여 학문을 토론하고 시사를 논평하는 자리에서 윤선거(尹宣擧)가 이원익에 대한 조익의 존경심을 간접 증언하는 내용이다.
길보(吉甫:尹宣擧)가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조포저(趙浦渚:趙翼)의 학문과 덕행에 대해서 매우 감복하였는데, 그는 늘 완평의 공정하고 충직하며 학식이 풍부한 것에 감복하여 말하기를, ‘완평은 뛰어난 인물로서 한 번 만나보면 그의 덕행과 도량이 깊은 것을 알 수 있고 나 자신이 훈훈한 기운 속에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분이야말로 우리나라의 훌륭한 재상들 중에 으뜸가는 분이다.’고 하였다고 했다.81)
근기남인 학통의 형성과 이원익의 역할을 조명함에 있어 남인계가 주된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본 절에서는 17세기 남인계의 양대 석학이었던 허목(許穆)․윤휴(尹鑴)를 중심으로 논의 구조를 압축하기로 한다.
본디 허목과 윤휴는 화담연원(花潭淵源)으로서 북인에서 남인으로 전향한 계열이고,82) 남명․퇴계 정구(鄭逑)와도 학통상으로 연결되는 공통점이 있었다.83) 그리고 이들은 이원익과도 사우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비중이 높은 쪽은 물론 허목이다. 하지만 윤휴 또한 이원익과 중첩적인 집안 및 사회적 관계로 얽혀 있었다. 탁남계였던 윤휴는 1680년(숙종6) 경신환국 이후 남인 사회의 기피 인물로 치부되기 시작했고, 이런 인식은 채제공 대에 이르러 더욱 고착화되어 근기남인학파에서 중요한 위상을 학보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84)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었던 학문적 위상과 정치적 입지는 이원익과 그 후손들의 학문정치적 성향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윤휴와 이원익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1631년이었다. 당시 윤휴는 약관 15세의 청년이었고, 이원익은 85세의 원로(元老)․석덕(碩德)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이원익과 윤효전 사이의 세의에 바탕하는 것이었고, 이 때 윤휴는 이원익으로부터 ‘명성과 도의(道義)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인물’이란 극찬을 받았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상공에게 가서 문후하였다. 선생은 오리 이상공이 선친의 벗이었으므로 가서 문후하였다. 이 상공이 매우 칭찬하며 말하기를, ‘나는 전에 그대 선친의 의표(儀標)를 존경하였는데, 지금 그의 아들을 보니 필시 명성과 도의로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하였다.85)
따지고 보면, 두 집안은 참으로 절밀한 관계에 있었다. 윤효전은 이순신의 서녀를 취해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들이 곧 이원익의 서녀 사위가 윤영(尹鍈)이다. 서자녀이기는 하지만 결국 이원익과 윤효전은 사돈관계였고, 윤휴에게 이원익은 선친의 벗인 동시에 서형의 처부였던 것이다.86) 비록 윤영은 서자의 신분이었지만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고87) 지도학(地圖學)에도 밝아 이원익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원익이 이준(李埈)에게 묘지를 부탁할 때 심부름을 한 사람도 바로 윤영이었다.88)
옛 적에 윤영(尹鍈)이란 사람은 윤씨 집안의 서자로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외손이며, 이완평(李完平)의 서녀를 아내로 삼았다. 그는 완평의 총애를 특별히 받았고 본실에서 난 아우도 ‘형의 문장은 나보다 낫다.’고 했다.89)
이런 관계로 인해 윤휴는 이원익의 존재와 역량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직간접적인 관계를 통해 상당한 가르침을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윤휴가 숙종조에 경연에 출입하면서 이원익의 주장 및 견해를 원용하고,90) 이원익의 증손 이상현(李象賢)이 1680년(숙종6) 경신환국 당시 윤휴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누대에 걸친 학문․정치적 세의의 결과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상현(李象賢)에게 말하기를, ‘참살의 화가 닥칠 터인데, 그대는 어째서 피하려고 하지 않는가?’하니, 이상현이 개탄하며 말하기를, ‘나를 죽이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나를 금고(禁錮)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찌 종신토록 금고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번에 이 어른[尹鑴]이 떠나가는 길을 전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91)
후술하겠지만, 이런 세의도 경종연간 남인이 문외(門外)․문내(門內)․과성파(跨城派)로 분파할 때 이인복이 윤휴 및 목민류(睦閔柳) 3가(家) 등 탁남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허목을 종주로 내세운 문외파를 창도함으로써 더 이상 이어지는 못했다.
한편 허목은 근기남인 학통의 형성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인물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근기남인 학통은 ①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계보92) ②정구⇒허목⇒이익⇒채제공으로 이어지는 계보93) 등으로 정리되며, 이 중에서도 ①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가장 일반화 된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떤 견해든 정구와 허목의 사승관계가 남인학통 형성의 골자가 된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고, 이 학통의 형성에 있어 이원익의 역할 또는 영향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원익과 허목의 학문․사회․인척적 관계 등을 고려할 때, 근기남인 학통의 형성에 있어 이원익의 존재가 간과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주장의 요지이다. 비록 이원익의 역할이 학통 형성의 주된 요소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당대의 실상보다는 후대의 인식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고,94) 허목의 ‘한강적전설(寒岡嫡傳說)’ 또한 미수문인 내부에서조차 의견이 합치되지 못한 사실을95) 고려할 때, 이원익의 영향성에 대한 검토는 당대의 실상에 한걸음 더 다가서는 계제(階梯)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원익에 있어 허목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허목은 이원익의 손녀를 아내로 맞아 ‘미수가(眉叟家)’가 ‘오리가(梧里家)’의 ‘외손그룹’에 편입되는 단초를 마련했고, 이 과정에서 그는 이원익의 학문정치적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후일 허목이 ‘청론(淸論)’을 주창하며 남인사회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는 바탕이 되었다.
허목이 이원익의 손서가 된 것은 19세 되던 1613년인데, 이 혼사는 평소 외우(畏友)하던 이원익과 허교(許喬) 사이의 교분의 확대 과정으로 해석된다.96) 혼인 이후 허목은 상문(相門)의 손서로서 그 지위가 전과 같지 않았고, 이원익 또한 ‘뒷날 내 자리에 앉을 자 반드시 이 사람이다’97)고 하며 특별한 기대를 보였다. 혼인한 지 3년째 되던 1617년 허목은 근친차 거창으로 갔다가 회로에 성주에 들러 정구를 사사하였는데,98) 이 사승이 이원익의 주선에 의해 맺어졌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허목의 학문을 면려했고, 애중히 여기는 마음을 시에 담아 표현하는99) 등 조손간의 정리가 자못 돈독했다.
사인(士人) 허목은 우리집에 장가들어 과업을 일삼지 않고 사우(師友)를 따라 옛 사람의 학문을 하였는데, 자질이 순후하였으므로 나는 일찍이 그를 사랑하고 공경했다. 하루는 그가 공책을 가지고 와서 나의 필적을 구했다. … 그래서 나는 소학 가운데 사친(事親) 및 지신(持身)에 관한 몇 장을 써서 주었으니 역시 사랑하고 공경하며 서로 권면하는 뜻이다.100)
또한 이원익은 비갈의 건립, 유고의 정리 등 자신의 후사(後事)를 허목에게 부탁하였고,101) 허목은 그 뜻을 잘 받들어 ‘오리현양사업’을 주도하게 된다. 아래는 이원익의 죽음을 애도한 허목의 제문인데, 허목에게 각인된 ‘오리관(梧里觀)’의 요체는 ‘백대종사론’[百代宗師論: 사회적측면]과 ‘사제론’[師弟論:개인적 측면]이었다.
벼슬에 나아가면 절의를 다하여 자기 몸을 잊어버리고, 물러나면 전원생활에 만족하여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셨으니, 맑은 풍격(風格)이 풍속을 면려(勉勵)하여 백세(百世)의 스승이 될 만한 분이었는데, 이제는 다시 세상에 없게 되었습니다. 어리석고 비루한 내가 외람되이 인정을 받아 매우 많은 가르침과 아름다운 말씀이 귀에 남아 있으므로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가슴에 새겨 잃어버리지 않아서 교육하신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동시에 또한 감히 평생 공경히 섬기던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102)
이런 흐름 속에서 허목은 이원익 사후 연보(1661)․유사(1664)․유권서(1667) 등 주요 현양문자의 대부분을 직접 찬술편찬하였으며, 조경(趙絅)에게 ‘오리시장(梧里諡狀)’의 찬술을 촉탁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나아가 그는 이원익의 유문을 수습편차하여103) 梧里集 (1691:咸興本) 출간의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이것은 허목이 이원익의 학문․정치적 계승자임을 거듭 천명하는 과정이었다.
<표2> 이원익 현양 관련 문자
구분 | 문자명 | 찬자 | 연도 | 비고 |
---|---|---|---|---|
묘문․전기 | ||||
이원익의 학문․정치적 계승자로서의 허목의 존재감은 숙종초 남인정국의 출범과 함께 보다 구체화 되었다. 104)그는 서울에 있을 때는 건덕방(建德坊) 소재 ‘오리구거(梧里舊居)’에 기거하는가 하면105) 1678년(숙종4)에는 정승의 신분으로 ‘오리묘소’를 참배하며 경모심을 각별하게 표했다.106)
이런 허목의 모습은 흡사 한유(韓愈)와 그 사위 이한(李漢)의 관계를 연상케 했고, 숙종 또한 이원익의 고사에 의거하여 허목에게 궤장(几杖)과 제택(第宅)을 하사함으로써 그런 면모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107)
오직 경(許穆)은 경세제민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문장 필묵은 하찮은 말기(末技)의 여사(餘事)였다. 일찍이 이름 있는 재상의 문하에 종유하여 마치 창려(昌黎:韓愈)와 이한(李漢)의 사이와 같았다.108)
이원익과 허목의 사제관계는 단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이원익의 손자 이상 이상현(1635-1705)은 미수문하를 출입하여 ‘오리가’와 ‘미수가’의 학통적 순환구조를 이루게 했고109) 그 아들 이존도(1659-1745)는 「미수연보(眉叟年譜)」를 편찬함으로써110) 양가의 학연을 더욱 강고하게 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원익과 허목 사이의 사승관계가 하나의 학통으로 설정될 수 없었던 데에는 이만부의 견해가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발단이 된 것은 「미수연보(眉叟年譜)」였다. 「미수연보」는 ① 「이존도본(李存道本)」, ② 「이택본(李澤本)」, ③ 「강박본(姜樸本)」 등 3종의 초본을 취합하여 1772년에 간행되었지만 편찬 과정에서 일부 기술을 두고 이봉징․이만부 등 미수문인들 사이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위 3종 가운데 어느 본을 지칭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111) 당초 「미수연보」 가운데 <기미조>(1619)에는 허목이 이원익을 종유하며 질문한 사항을 수록하려 했으나 이만부는 이 대목을 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그리고 <갑술조>(1634)에는 이원익이 임종시에 허목에게 불후(不朽)의 역사(役事)를 부탁했다는 내용을 기재하려 했으나 이만부가 이 또한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제시했다.112) 위 두 조항을 「미수연보」(1772년본)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완전 삭제되었고, 후자는 연조를 바꾸어 <을해조>(1635)에 ‘완평 이문충공의 묘비를 썼다.(세주) 문충공이 유언을 남겨 선생에게 부탁했다. 이 때에 이르러 선생이 복상 중이었지만 묘비를 썼다’로 기록되어 있다.
일견 이러한 삭제와 수정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지만 당 사림들의 미묘한 문자 관행을 고려할 때, 결코 심상한 것으로 치부할 수 만은 없을 것 같다.
이상의 서술을 종합할 때, 이원익은 허목의 학문적 스승이자 정치적 멘토로 역할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허목의 학통 나아가 근기남의 학통을 입론함에 있어 이원익의 영향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고 본다.
2) 남인학계의 이원익에 대한 인식과 학통상의 지위: 채제공(蔡濟恭)의 계승의식을 중심으로
갑인예송(甲寅禮訟)과 남인정권의 창출, 허목의 입상(入相)과 정치적 비중의 증대는 이원익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증손 이상현(李象賢)의 미수문하 입문, 현손 이존도(李存道)의 「미수연보」 편찬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리가’는 허목을 종주로 하는 청남계의 핵심 가문으로 도약하게 된다.
<표3> 숙종조 근기남인의 주요 가계(尹鍈, 「同朝錄」, 肅宗 17년 기준)
가문 | 현조 | 사승/연원 | 비고 |
---|---|---|---|
특히, 이원익의 5세손 이인복(李仁復:1683-1730)은 1722년 경 남인이 문외(門外)․문내(門內)․과성파(跨城派)로 분립할 때 심단(沈檀:尹善道의 외손자)․이중환(李重煥:李瀷의 종손자) 등과 함께 문외파의 영수로 활약했다. 숙종초 허목을 종주로 한 청남(淸南)의 정론을 계승한 문외파는 남인의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 윤휴 및 목민류[泗川睦氏驪興閔氏晉州柳氏] 3가로 대표되는 탁남과의 절연을 단행했던 것인데.113) 그 정점에 이인복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인복은 이원익의 직계 자손으로서는 문과에 합격하여 당상관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의형(儀形)이 이원익을 쏙 빼닮았을114) 뿐만 아니라 정치적 위상에 있어서도 그에 준하는 위상을 확보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1724년 경종의 상에 대비의 복제를 참최(斬衰)로 할 것을 주장하다 허목의 당여로 지목된 것에서115) 보듯 그는 철저한 ‘미수계승론자’였다. 특히, 1724년(경종4) 허목을 제향하는 서원의 훼철 파문에 즈음에서는 그러한 인식의 절정을 보여주게 된다.
① 갑진년(1724)에는 승지의 직임으로 소환되었다. 그 때 권병(權柄)을 잡은 신하로서, 중복하여 설립된 허미수(許眉叟) 선생의 서원을 훼철(毁撤)할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는데, 말한 내용이 무척 패악(悖惡)스러웠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공박하였다. 당시에 또 상소한 사람이 있었는데, 겉으로는 미수(眉叟) 선생을 위하는 척하면서 실상으로는 윤휴(尹鑴)를 편들었으니, 심지어 ‘두 분의 현인(賢人)’이라고 일컫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이 또 소를 올려 ‘얼음과 숯’ ‘흑(黑)과 백(白)’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변백(辨白)하였다.116)
② (이인복이) 어제 또 허목(許穆)의 서원을 훼철하는 데 대한 일을 상소로 논하면서 이에 ‘선정(先正)’이라는 두 글자를 가하여 쓰는가 하면, 또 ‘근래의 선정으로서 허목처럼 티없이 순수한 사람이 있느냐?’라고 말하면서 은연중 한 시대의 명현(名賢)을 속이려는 뜻을 두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敍用)치 말게 하소서.117)
이런 결기와 과단성으로 인해 이인복은 노론․소론은 물론이고 남인 내부에서조차 경원시된 측면이 있었지만118) 그의 정치․사회적 행보가 오리가의 청망(淸望)을 이원익 당대의 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은 분명했다.
한편 오리가는 이증현․사현․상현∼존도∼인복에 이르는 3대 동안 남인의 명가들과 광범위한 혼맥을 형성하며 학문적 결속과 신장을 도모했다. 특히 주목되는 인물은 이상현의 사위 정도제(丁道濟)이다. 그는 정시윤(丁時潤:丁若의 5대조)의 아들로서 정시한(丁時翰)119)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독행(篤行)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 혼인은 오리가와 나주정씨[정약용 선대]와의 첫번째 통혼으로서 후일 정약용이 이원익의 화상찬(畵像讚)을 짓는 계기가 되었다.120) 아울러 이인복의 손자 이겸환(李謙煥)이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蔡弘遠)을 사위로 맞음므로써121) 오리가는 채제공․정약용이라는 정조조 근기남인학계의 리더들과 척분을 확보하게 된다.
이제 이원익에 대한 채제공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채제공의 경우, 이원익에 대한 인식은 관료․학자적 측면으로 양분된다. 관료적 측면에서는 본받으며 계승해야 할 ‘상신의 모범’ 그 자체였다. 번암집에 실린 ‘우사에서 감회를 읊다(寓舍感吟)’란 시는 재상으로서의 원대한 포부와 자부심 그리고 육중한 책무감을 은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황희(黃喜)․허조(許稠)․이준경(李浚慶)․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을 국조의 으뜸가는 현상(賢相)으로 평가했는데,122) 이 시를 관통하는 대의는 선현에 대한 수사적 찬사가 아니라 그들에 부끄럽지 않는 지금의 나를 채근하고 연마하는데 있었다. 여기서 그가 ‘4이(四李)’로 칭한 네 사람 가운데 이항복을 빼면 모두 남인계 재상이며, 이 중에서도 그가 가장 철저하게 계승코자 한 인물이 바로 이원익이었다. 예컨대, 평양에 소재한 이원익의 생사유허비(生祠遺墟碑)의 건립은 그런 계승의식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평양은 임란 당시 이원익이 체찰사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건립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각종 은택을 끼친 유애처(遺愛處)였다. 그리하여 평양 부민들은 그 은택을 기리기 위해 1598년 6월 생사당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영정 봉안시의 제문은 당대의 문장가 최립(崔岦)이 지었다.123) 그러나 생사당의 존재를 마땅찮게 여긴 이원익은 1599년 그곳에 봉안된 자신의 영정을 되찾아오는 등 각종 조처를 취했지만124) 사당의 기능은 그대로 유지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생사당은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선정을 베푼 역대 감사들의 열향처(列享處)로 변질되었고, 제향에 따른 민폐가 지적되어 조명으로 훼철하였다.
이에 1775년(영조51)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한 채제공은 생사당을 복원하는 대신 유허비를 세워 이원익의 옛 자취를 기린 것이다. 이 때 그는 직접 비문을 지어 ‘일방을 재조(再造)한 공업’, ‘공보(公輔)․왕좌(王佐)로서의 탁월한 업적’을 극도로 칭송하며 흠모의 정을 여과없이 표출한 바 있다.125) 이원익에 대한 채제공의 ‘현상론(賢相論)’적 평가는 기존의 허목의 인식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그가 각종 추양사업을 통해 이원익을 특별히 기념코자 했던 것은 단순히 경모하는 마음을 넘어 이원익⇒허목을 거쳐 자신에게로 연결되는 남인계 ‘상통(相統)’의 계승구조를 의식한 조처로 해석된다.
학자적 측면에서 드러난 채제공의 ‘오리인식’은 ‘오리와 미수의 사제계승론’으로 요약된다. 1794년(정조18) 정조는 존현의 취지에서 허목의 초상[眉叟小眞: 82세시 肖像]을 열람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고, 이 사안은 전적으로 채제공에게 위임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사림과 협의하여 어람 채비를 서둘렀는데, 그 이봉 과정이 자못 기획적이었다.
우선 채제공은 연천 은거당(恩居堂)에 봉안된 ‘미수소진’을 서울로 이봉한 다음 화사 이명기(李命基)로 하여금 이모(移摸)하게 했다. 그가 서울의 임시 이봉처로 삼은 곳은 다름 아닌 이원익의 고택이었고,126) 이 무렵 ‘미수소진’을 참배하기 위해 방문한 후학만도 수백에서 수천을 헤아렸다고 한다.127)
이런 과정을 통해 제작된 이모본을 봉진하자 정조는 다시금 이명기를 시켜 이모본을 한 본 더 제작하여 대내에 보관함으로써 어진이를 높이는 뜻을 천명하고는128) 당초 어람용으로 봉진한 이모본은 후손에게 되돌려줄 것을 명했다.
당시 사림의 중론은 ‘미수소진’(이모본)을 순흥의 소수서원에 봉안하자는 쪽으로 모아졌는데, 그 까닭은 그곳에 이원익의 영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29)
그러면 정조는 왜 채제공에게 ‘미수소진’의 열람을 명했고, 채제공은 왜 하필 이원익의 고택을 이봉처로 택한 것일까? 일찍이 숙종이 허목을 이원익의 계승자로 공인시켜 주려고 제택과 궤장을 하사한 것처럼 정조는 채제공을 허목의 학문․정치적 적통으로 대외에 인식시켜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미수소진’ 이모 및 봉진의 제반 절차를 채제공에게 위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채제공은 허목의 학문․정치적 계통이 이원익에게서 연원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리고택’을 임시 이봉처로 삼은 것이다. 이원익과 허목의 연원적 관계성이야 부연을 필요치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채제공은 이 참에 이런 면모를 더욱 강렬하게 주지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근기남인 학계에서 차지하는 채제공 자신의 위상을 제고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채제공에게 있어 이원익과 허목은 사우(師友)이자 지기(知己)로서 근기남인 학통의 근원으로 인식되고 있었고,130) 그 도도한 물주기를 이어받은 사람이 곧 자신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이런 인식과 신념은 ‘미수소진의 어람’과 관련된 일련의 일을 끝낸 다음에 지은 시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도성 서쪽의 교목이 광채를 발하는 건 城西喬木有輝光
오리옹과 미수옹이 한곳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지 梧老眉翁復一堂
언제나 세도와 인재를 염려했으니 世道人才平昔念
응당 서로 마주한 채 길이 대화하리라 也應相對話言長
신선의 옷은 혼탁한 물에 물들지 않고 銖衣不染濁流渾
도덕과 문장은 백대토록 존숭 받으리라 道德文章百代尊
예나 지금이나 미천은 변함없이 청징하거늘 今古尾泉淸不盡
머리 허연 노인네는 어디에서 연원을 찾을까 白頭何處覓淵源131)
여기서 ‘머리 허연 노인네’가 채제공 자신을 지칭하고, 그가 찾고자 하는 ‘연원(淵源)’이 허목을 통해 이원익으로 소급되는 ‘근기남인학통’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4. 맺음말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원익은 문학(文學)과 예악(禮樂)에 취향이 깊었던 종실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나 자신의 당대에 친진됨으로써 사대부로 편입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유학을 통해 발신했고, 나아가 유학적 가르침에 충실한 경세관을 제시․적용함으로써 일가의 가풍을 ‘귀한 신분으로 한적하게 살며 예학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것의 실천을 추구하는 학자․관료집안’으로 변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② 이원익은 특정 학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학문적 지향성이 퇴계학파에 가까웠다. 이런 성향은 그가 류성룡과의 교계를 매개로 동서분당 때는 동인, 남북분당 때는 남인을 표방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곽재우․정온 등 남명학파의 핵심 인사들과도 교 유가 깊었는데, 그 바탕에는 남명학이 추구하던 경의사상과 절의를 강조했던 이원익의 처세관의 교합적 정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③ 이원익은 비록 동인남인을 표방했고, 더러는 서인․북인계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원만한 성격과 포용적 리더십으로 인해 정파․학파를 초월한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그는 정경세, 이준, 정온 등 17세기 초반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명사들과 정치․학문적 유대를 굳건히 하였는데, 이는 이원익 자신의 정치․사회적 운신의 폭을 넓히는 과정인 동시에 그가 영남․남인의 정치적 외원으로 역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가운데 이준과는 사돈을 맺어 인척적 관계로 발전했고, 정온과는 사제관계를 맺음으로써 후일 그가 근기남인 학통의 주된 연원으로 인식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영남 인사들과의 교유는 조선후기 ‘경남’과 ‘영남’의 정치․학문적 제휴의 시원을 이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컸고, 이런 전통은 유형원허목이익체제공정약용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었다.
④ 임진왜란, 광해조의 정치적 질곡, 인조반정을 통해 드러난 그의 재상으로서의 공업(功業)은 국조의 역대 재상 중에서도 그를 으뜸으로 평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평가는 ‘중흥현상론(中興賢相論)’으로 발전하여 17세 남인계 ‘학자재상론’의 표준적 모델로 정착되었다.
⑤ 이원익은 일각으로부터 ‘배움이 깊지 않다(不學)’, ‘치용(致用)만을 추구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그의 학문과 경세론은 허목에게 계승되어 조선후기 근기남인의 학문․정치적 모토로 확립되었다. 특히 이원익의 손서이자 문인이었던 허목의 존재는, 학문적으로는 이원익⇒허목으로 이어지는 근기남인 학통의 근간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이준경⇒이원익⇒허목으로 이어지는 남인계 ‘상통인식(相統認識)’을 착근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인식은 정조조에 채제공에게 전승되어 더욱 공고하게 다져지게 된다.
⑥ 철저한 ‘미수존숭론자였던 채제공은 이원익⇒허목으로 이어지는 ‘학통(學統)’ 및 ‘상통(相統)’ 체계를 재천명하면서 ‘청론(淸論:淸南)’ 중심으로 남인 세력을 재편해 갔다. 이런 일련의 노력상은 이원익⇒허목⇒채제공으로 이어지는 근기남인학통의 체계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채제공이 이원익과 허목의 관계성을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이익의 묘갈명에서 이황⇒정구⇒허목⇒이익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설정한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조선후기 근기남인학통의 형성 과정에 반영된 당대성과 실체성을 고려한다면, 이원익의 존재와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고 또 부각되어야 한다고 본다.
참고문헌 및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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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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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류완상이양희, 「경세가로서의 오리 이원익 연구」, 장안논총 18, 장안전문대학, 1998. ; 이양희, 「오리 이원익의 임진왜란기 군사활동」, 한국인물사연구 4, 한국인물사연구회, 2005. ; 許捲洙, 「梧里 李元翼과 嶺南南人의 관계에 관한 연구」, 한국인물사연구 4, 한국인물사연구회, 2005. ; 송양섭, 「17세기 전반 오리 이원익의 정치활동과 정책구상」,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 이정철, 「오리 이원익과 두 번의 공물변통」, 조선시대사학보 54, 조선시대사학회, 2010.
2) 이원익에게는 玉守라는 종이 있었는데, 그는 성격이 淳謹할 뿐만 아니라 선비의 풍도가 있었다. 이에 이원익은 그를 천시하지 않고 매우 애중히 여겼고, 옥수 또한 유배지유람지 등 이원익이 가는 곳이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주인을 지성으로 섬겼다. 옥수가 죽자 그 아들 順伊 또한 아비가 하던대로 충심을 다해 주인을 섬김으로써 이원익은 玉守順伊 부자와 주종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적 신의를 이어갔다. 마침내 이원익은 이들 부자에 대한 저간의 속 깊은 정리를 정중하면서도 살가운 문자를 통해 표하였으니, 이는 신분을 초월한 사귐의 매우 드문 예가 될 것이다.(李元翼, 梧里集 補遺, <書付箕城奴順伊>(謫洪川時丁亥遊楓岳時順伊之父玉守携琴從之) “露梁春水野 洪峽夏雲天 跋涉來尋再 多渠繼父賢” ; 梧里集續集 卷2, <題奴順所藏詩軸後> “舊奴奚 名玉守 性質淳謹 忠於所事 … 渠之死 其子名順性度器識 酷似其父 常以其父之事我者事之 余亦以待其父者待之”)
3) 許穆, 記言 卷45, <秀泉君遺事> ; 沈喜壽, 一松集 卷8, <秀泉君墓碑銘> “長於音律性所獨得 布爪指運掌 掔屈折愉繹 神妙不滯 有時悲彈慷慨 聞者必泣 與茂豐正摠齊聲異調 評者相爲伯中焉”
4) 李肯翊,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故事本末「靖難死節諸臣」<金時習>.
5) 鄭蘊, 桐溪集 卷4, <贈純忠積德補祚功臣顯祿大夫咸川君墓誌銘幷序> “ 公心平氣和不事矯飾 待物以誠 接人以敬 至見其有過誤處 則歷數而峻責之 遇人之不善 疾之如仇讎避之如蛇蝎 宗黨子弟 敬而畏之 蓋其天性然也 事親盡其誠 靑杞末疾沈綿者累年 藥餌之
奉 必躬自爲之 未嘗少懈 凡公家朝請 進退惟謹 未嘗以病言 蓋其德行之美 得於秀泉者爲 生而富貴 能力學問 詩書經史無不貫通 八十之後 猶能成誦 不錯一句 音律亦高 古樂譜諸曲 無一不通 吟詠歌唱 皆中節奏”
6) 鄭蘊, 桐溪集 卷4, <贈純忠積德補祚功臣顯祿大夫咸川君墓誌銘幷序>.
7) 正祖, 弘齋全書 卷23, 祭文5 <秀泉君貞恩靑杞君彪咸川君億載墓致祭文>.
8) 李元翼, 梧里集 「年譜」<1574年>.
9) 李成茂 ․ 鄭萬祚 外,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2.
10) 李元翼, 梧里集 「年譜」<1570年>.
11) 후일 이원익의 5세손 李仁復이 梧里集 의 판본을 안동의 屛山書院(류성룡 제향처)에 보관할 수 있었던 것도 양가의 굳건한 世誼에 기반한다.(李元翼, 梧里集續集, <後識(李仁復撰)> “不肖蒙恩宰永嘉 則兩處板本 咸卽運來 而落板缺字甚多 遂略加訂校 拾遺詩文書牘若干篇 亦爲添刻 合三百三十四板 然尙有未盡校改者 姑藏諸屛山書院以竢 壬寅季冬 五世孫仁復謹識”
12) 許捲洙, 「梧里 李元翼과 嶺南南人의 관계에 관한 연구」, 한국인물사연구 4, 한국인물사연구회, 2005, 4-5쪽 참조.
13) 李元翼, 梧里集 續集 附錄 卷2, <行狀[權愈]> “巡察使李公珥至 見公宣物而和於政 甚重之 凡疑事必咨以決 及還 薦言之朝 然公未嘗爲屬其慶者而私致+懷於李公也”
14) 허권수, 앞의 논문, 5쪽 참조.
15) 李元翼, 梧里集 續集 附錄 卷2, <行狀[權愈]> “又言郭再祐名將 召置京無爲也 請令居邊備不虞…始公之以爲可當一面 奬許稱進者 唯李舜臣郭再祐而二人 卒立功南邊 自舜臣之折敗賊而海路無賊船 再祐好義善戰守 多出竒擧 賊畏辟 江右諸縣倚以安”
16) 선조실록 권122, 선조 33년 2월 20일(갑오).
17) 李元翼, 梧里集 補遺, <答郭忘憂再祐書(丙午)> ; <答郭忘憂堂(庚戌)> ; <答郭忘憂再祐書> ; 郭再祐, 忘憂集 , <龍蛇別錄>.
18) 郭再祐, 忘憂集 「年譜」<萬曆三十六年戊申> “二月 宣廟昇遐 光海卽位…九月又召 特令本道監司給衣馬護送 上疏乞寢召命 乃擧春秋討逆之義 請正臨海之罪 十一月又被召 上疏極斥全恩讓位之說 不赴”
19) 郭再祐, 忘憂集 卷2, <贈李完平元翼>.
20) 李元翼, 梧里集 補遺, <次郭忘憂再祐韻庚戌> “生本不文 平生不曾向人吟一絶 送子之行 不勝情有此 可笑也已”
21) 南冥學硏究院, 譯註 孤臺日錄 (上) 卷2, <甲午8月19日>.
22) 鄭經世, 愚伏集 「年譜」 <萬曆二十四年>(1596) “三月 與體察使李相國元翼會于金烏山城
23) 趙穆, 月川集 「年譜」 <二十四年丙申>(1596) “體察使李元翼來訪 語及和議 先生奮然曰 自今日觀之 則秦檜是而諸葛非矣云”
24) 裵尙龍, 藤庵集 「年譜」 <萬曆二十四年>(1596) “四月 迎拜師門於本州客舘 時師門(鄭逑筆者註)以江原監司 將會議軍務於體察使梧里李相國元翼幕府 來到本州”:
25) 琴蘭秀, 惺齋集 「年譜」 <萬曆二十五年>(1597) “四月 會軆察使梧里李相公元翼于天淵臺 受守城將帖 差琴潔柳誼孫興孝李慶元收募軍粮 時饑饉荐至 天兵南下 蜚輓不繼 先生先出若干斛 通諭一邑 隨力出穀 多方拮据 又條陳於軆察使及調度使 不疲民力而庶事以就” 이원익과 琴蘭秀 사이의 교분은 후일 아들 琴愷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이원익은 1619년부터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1623년 봄까지 여주 仰德里에 우거했는데, 마침 琴愷가 여주목사로 부임함으로써 재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무렵 이원익이 금개에게 보낸 서간에는 그 옛날 도산 天淵臺에서의 회동이 아련한 추억으로 묘사되어 있다.(李元翼, 梧里集 續集 卷2, <答琴驪州愷簡(退溪門人蘭秀之子)> “數十年前 相遇於先賢之鄕 今復邂逅於江村 玆豈偶然”
26) 李元翼, 梧里集 續集 卷2, <次後凋堂韻二首 禮安金富儀 退溪門人 自號後凋堂>
27) 趙靖, 黔澗集 「年譜」 <丙申>(1596) “以白衣從事 赴晉陽都體察使幕 時李完平元翼爲都體察使” ; 李魯, 松巖集 卷3, <上梧里李體相元翼> ; 曺好益, 芝山集 「年譜」 <己亥>(1599) “李體察元翼來訪”
28) 李元翼, 梧里集 附錄 卷1, <逸事狀> “余仍以體察入嶺中久 柳相成龍余所敬事 盧景任明敏篤敬 郭再祐或多妄作 而豪俠好義 受余呵責 飜然覺悟 終始事余 金宇顒儒雅直諒 遠避仁弘 漂泊畿甸 此數君子 今皆不得見矣 時復思想 不堪悽惋云”
29) 허목은 金宇顒의 東岡集 서문에서 ‘문충 이원익은 선생을 일컬어 확고하고 청렴함이 옛날 곧은 이의 유풍이다.’고 하여 이원익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했다.(許穆, 記言 卷10, <東岡先生文集序>)
30) 李元翼, 梧里集 卷1, <鄭寒崗挽庚申>
31) 선조실록 권108, 선조 32년 1월 16일(정유).
32) 선조수정실록 권33, 선조 32년 11월 1일(병오).
33) 선조실록 권119, 선조 32년 11월 17일(임술).
34) 광해군일기 권1, 광해군 즉위년 2월 14일(신미).
35) 李元翼, 梧里集 續集 附錄 卷2, <行狀[權愈]> “仁弘等益疾公箚言全恩之論 乃護逆也公累箚乞解 不許”
36) 李元翼, 梧里集 續集 附錄 卷2, <行狀[權愈]> “仁弘上疏 詆訾文元文純兩賢 公與諸原任大臣上箚言 任叔英直言 不宜削料 仁弘邪說宜卞斥 光海不省”
37) 광해군일기 권79, 광해군 6년 6월 24일(을사) ; 李元翼, 梧里集 續集 附錄 卷2, <行狀[權愈]> “前弼善鄭蘊上䟽訟㼁寃曰 殿下不斬沆 何面目入先王之廟乎 光海大怒 命拿鞫 召諸大臣議罪 公辭不赴 箚言鄭蘊斷無他意 乞原寛 光海雖不納 怒少解 宥配濟州”
38) 광해군일기 권91, 광해군 7년 6월 23일(무술).
39) 南冥學硏究院, 譯註 孤臺日錄 (下) 卷4, <戊申8月5日>.
40) 鄭經世, 愚伏集 卷9, <與李完平元翼 > “只祝上爲聖眷 下爲輿望 加護鼎茵 弘濟艱難”; 卷9, <與李完平(甲子)> “今早有人來言台慈以經世爲憂 至有欲同禍福之意云 未知審否果爾則甚非平日所望於相公也 經世以一言不合之故 爲人所攻而去 只欲存士夫廉恥而已非有爭於國家大計也 相公當凝然自持 不動聲色 以爲鎭定朝論之計 喬嶽不言 而其澤自然及物矣 萬一辭氣之間 有一毫不平之形 則士論必有携貳之虞 而國事將不可收拾 豈不大可憂哉 竊計經遠之慮必不出此 而或恐平日見愛之深 不欲坐視 故不免驚動於或人所傳 敢此仰布 此乃赤心憂國之見 不但爲經世與相公一時身已之計也 萬一他日事機或變 經世將陷於不測之地 則于時相公出而一言 乃爲千鈞之力也 未由面罄 只冀台慈心鑑”
41) 鄭經世, 愚伏集 別集 卷9, <神道碑銘(趙絅撰)> “李文忠梧里公每自講筵出 語人曰 鄭某眞侍講才 豈惟今之第一 古亦難得”
42) 李元翼, 梧里集 卷1, <錦障花草帖六首幷敍> “賤豚孝傳請詩及筆跡於我 渠非不知我素不從事於翰墨 而猶請之者 卽敬祖先之意也…知渠他日將以此思我 而亦將以此敬我之遺體 戰兢自持 如臨如履 不忘於跬步之頃也 仍念父子間相贈 固不可以示於人 第蒼石公與我爲姻親 余平生愛敬其文行相契 幸得其所和詩 以冠於各貼之首 欲藉重以爲傳家之翫云蒼石卽李公諱埈字叔平” ; 李埈, 蒼石集 卷1, 梧里李相公花草障後跋
43) 李元翼, 梧里集 續集 附錄 卷1, 「年譜」 <癸酉>(1633) “使子弟。記族出歷官始終。屬李副學埈撰墓銘”
44) 李埈, 蒼石集 卷15, <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完平院府院君李公神道碑銘> “一日 召尹鍈詔之曰 吾年已至 吾事業無可以傳後 然子孫等若托之不相知者 張皇無實 以誤瞻聽 非我志也 顧平日許以相厚者 惟李叔平在 銘誌之托吾無憾矣 尹鍈以相公命來 其意丁寧”
45) 예컨대, 이원익과 정경세는 인조의 생모 啓運宮의 상례 때 3년상이 朞年服을 함께 주장하였고( 인조실록 권11, 인조 4년 2월 30일), 인성군의 옥사 때도 둘 다 온건론을 주장하는( 인조실록 권6, 인조 2년 5월 17일 ; 인조실록 권10, 인조3년 10월 18일) 등 여러 사안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
46) 이원익은 인조에게 인재의 수용에 있어 朋黨에 구애되지 말 것을 항상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야당으로 전락해 있던 남인(특히 영남․남인)을 고려한 조처였으며( 인조실록 권1, 인조 1년 3월 26일), 金長生朴知誡와 함께 반정 직후 산림으로 부름을 받은 張顯光의 징소 또한 이원익의 지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인조실록 권5, 인조 2년 3월 5일)
47) 尹鑴, 白湖全書 附錄 卷2, <行狀>(上).
48) 허권수,「 국역 동계집』해제」, 민족문화추진회, 2000, 9쪽.
49) 鄭蘊, 桐溪集 續集 卷1, <上李相國元翼>.
50) 鄭蘊, 桐溪集 卷2, <上李相元翼書> “秋氣淸爽 伏惟台候若序以健 區區瞻慕 懷不自抑前承不拒 獲登龍門 旣賜之坐 又假之色 若待以不甚庸陋者然 不佞何以得此 飽德歸來 以心語口曰 此行所得不旣多乎”
51) 문헌상으로 정온이 정인홍을 사사한 것은 31세 때인 1599년이지만 실제 그가 내암문하를 출입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20대였을 가능성이 높다(鄭蘊, 桐溪集 「年譜」 <己亥>(1599) “六月往倻山 初鄭仁弘受業南冥之門 負山林重望 號爲來菴接引後進 繩墨嚴截 先生往來其門 仁弘亦敬重焉”) 조목을 사사한 것은 21세 때인 1589년이고(鄭蘊, 桐溪集 「年譜」 <己丑>(1589) “春之禮安 拜陶山尙德祠 見月川趙生”), 정구를 사사한 시기도 20대로 추정된다(鄭逑, 寒岡全書 (下),「檜淵及門錄」 卷2, <鄭蘊> “弱冠遊先生門 聞退陶之統”)
52) 김학수, 「桐溪 鄭蘊의 學脈」, 南冥學報 4, 남명학회, 2005.
53) 광해군일기 권47, 광해군 3년 11월 26일(신유).
54) 광해군일기 권48, 광해군 3년 12월 1일(병인).
55) 광해군일기 권75, 광해군 6년 2월 21일1(계묘).
56) 광해군일기 권76, 광해군 6년 3월 5일(정사).
57) 광해군일기 권87, 광해군 7년 2월 21일(무술).
58) 鄭蘊,『桐溪集』卷4, <贈純忠積德補祚功臣顯祿大夫咸川君墓誌銘幷序> “崇禎癸酉春原任領議政完平府院君李老爺 以書若狀 選授使者 南走六百里 求先世誌銘於八溪鄭蘊 蘊讀未終篇 驚惶起拜曰 方今名公鉅卿以文名者 在朝何限 相公不求於彼而求之遐方眇末之人 是其意不可窺測 而旣已命之 不可以不文辭”
59) 李樹健, 「朝鮮後期 ‘嶺南’과 ‘京南’의 提携」, 碧史李佑成敎授定年退職紀念論叢 , 1989.; 金鶴洙, 「葛庵 李玄逸 硏究 -經世論과 學統關係를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6.
60) 공물 변통 등 사회경제적 제도의 개선 및 보완책은 자기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던 이원익의 경세관료로서의 자세와 식견을 잘 보여주고 있다(이정철, 「오리 이원익과 두 번의 공물변통」, 조선시대사학보 54, 조선시대사학회, 2010)
61) 이원익은 비문행장 등 墓道傳記文字의 찬술을 극도로 제한하여 庶叔 端川令의 묘갈음기만 지었을 뿐이다. 이 외 타인을 위해 지어준 전기문자로는 姜緖의 언행기인 <執友姜承旨言行記>(李元翼, 梧里集 卷1) 한 편만 전한다. 그가 유독 이글만 집필한 것은 강서가 평소에 절친하게 지낸 친구였을뿐더러 그 사람됨이 淸白質直하고 재국 또한 굉박하여 자신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이원익은 ‘自撰行狀’을 짓는 심경으로 강서의 언행기를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質實을 추구했던 그의 관료적 자세는 청백한 삶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원익은 1601년(선조34) 류성룡김장생 등과 함께 廉謹吏[淸白吏]에 선발되었고, 이후로도 청백한 관료의 표상으로 칭송되었다. 이원익에 있어 청백은 公道의 실현과 忠의 또 다른 표현, 廉恥·辭受 의식에 바탕한 行儉의 일상화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청백 정신은 治家의 준칙이자 家風으로 전승정착됨으로써 이원익가문은 청백을 世業化하게 된다.(김학수, 「梧里 李元翼 선생과 淸白吏 思想」, 오리문화제 청백리 심포지엄 발표자료집 , 광명문화원, 2011)
62) 李瑞雨, 松坡集』卷11, <梧里先生續集序>.
63) 李元翼, 梧里集 卷1, <對策>(己巳別試).
64) 李埈, 蒼石集 卷14, <漢陰集跋> “一時稱梧里與弼雲竝公爲昏朝三李”
65) 蔡濟恭, 樊巖集 卷19, <稀年錄>(下) <寓舍感吟> “朝亦坐默默 暮亦坐默默 默默豈吾欲 旅寓少來客 峩峩光化門 瞻仰在咫尺 疇昔我列聖 垂衣坐此中 賢相佐煕運 廊廟鬱穹崇光化待曉開 赤芾照葱珩 從容獻訏謨 協氣扇八紘 … 離立慶會柱 似欲撑宇宙 英考駕每臨撫玆文昭基 小臣獲陪從 古事前說之 雲鄕今渺邈 白首徒涕洟 人才日以降 此物玷台司 光化爾應見 黃許與四李[東臯鰲城漢陰完平] 安得起此人 使我元首喜”
66) 李埈, 蒼石集』卷14, <李相公花草障後跋> “梧里相國李公盛德淸風 爲兩朝第一名相”
67) 李埈, 蒼石集』卷3, <挽李完平> “邦運中衰嶽降申 神凝秋水氣如春 銀漢早毓天枝秀 玉陛仍攀月桂新 德澤惠風兼愛日 儀容威鳳與祥麟 一生夷險心如鐵” : 續集 卷1, <奉呈梧里李相國元翼> “國値中興會 人膺間氣鍾 禹門擎一柱 周室範群工 遇遯初焚稿 歸園晩撫松歲寒來訪日 座上挹春風”
68) 김학수, 「17세기 嶺南學派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 李埈, 蒼石集』卷9, <答鄭景任> “我東儒者之出不數 况以儒者而兼相業則尤不易得 自麗迄今數百年之間 惟圃隱與我先生而已…先生以佐王之才 抱濟世之具 其所以黼黻王猷者 無非所得於學問者 而逮夫辰巳之亂 慨然以再造王室爲己任 卒能竭忠盡瘁 收復潰裂之勢 其功業之盛 本末可考 不幸晩節爲一時羣小所讒間 擯斥以殁 廟庭配食之議 亦爲昏朝邪議所沮 若復歲月寢久 德業漸泯 我等老門生之恨 自此而愈無窮矣 廣布其文集叙述其言行 庶幾傳諸後而翊斯道 是惟吾輩分内事 今荷此擔子之重者 其可不自勉耶”
69) 金坽, 溪巖日錄』<甲戌2月13日> “完平李相國元翼捐館 近代賢相 完平及鰲城李恒福․ 漢陰李德馨一松沈喜壽 皆以隆望 爲一國欽重 完平最壽 耉至八十八 淸白如寒士 謙恭愛․ 人 忠悃奉國 永昌大君之變 不能出力以捄 而中間廢母之論起 上箚爭卞 扶持倫紀 勇徃直前 廢論因此少緩 可謂有萬匂之力矣 反正之後 可以有爲 扼於時勢 不克展副其志 而副輿望 齎恨以沒 可惜 斯人豈可易得哉”
70) 李浚慶, 東皐遺稿 卷10, 附錄 <遺事>.
71) 위와 같은 곳.
72) 李浚慶, 東皐遺稿 續稿 卷6에는 <淵源從遊錄>과 <淵源門生錄>이 수록되어 있다. 종유인의 명단인 전자에는 李滉曹植成守琛徐敬德 4인의 이름이, 문인록에 해당하는 후자에는 李元翼을 수제로 하여 鄭琢沈守慶金貴榮鄭彦信崔興源李恒福李德馨柳永慶沈喜壽 등 총 17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선조조에 재상을 지낸 동인계[남인북인] 인사가 대부분인데, 연령에 있어 적게는 20년, 많게는 30년 선배들을 제쳐두고 이원익을 맨 앞에 수록하였다. 이원익은 1569년에 문과에 합격했고, 이준경은 1572년에 사망했으므로 두 사람이 관계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었던 시기는 약 3년 정도이다.
73) 李元翼, 梧里日記 <李相國家錄>.
74) 許穆, 記言 卷16, <三賢祠記>.
75) 許穆, 記言 卷10, <李文忠公遺卷序>.
76) 許穆, 記言 別集 卷10, <李相國年譜跋>.
77) 그 전형적인 예가 되는 것이 李晉哲의 경우이다.(權斗寅, 荷塘集 卷6, <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李公墓誌銘> “公諱晉哲 字明叔…始公爲承文正字 謁梧里李相國請敎 相國諄諄以遠大勖之 末乃以一語警策曰 窮達在天 非人所能 吾嘗病世之逐逐者 惟委順可也蓋公終身服膺 公之與道進退 守正不苟 其得之梧里者爲多云”
78) 金尙憲, 淸陰集 卷8, <哭梧里李相公> “相公希代寶 光價世無比 沈冥百寮底 栗翁是知己 遂際風雲會 蔚爲廊廟器 察理言行間 纖鉅無不備 赫赫中興績 一半公所策 彝倫晦以熄公手再扶植 盛朝二百年 相業孰居前 薑桂久愈辣 玉雪寧獨潔 先王陟帝庭 監茲錫九齡 朝廷作鑑砥 士林仰典刑 小子門墻下 實庇幪與屛 疹瘁遽興哀 已矣梁木摧 白首望梧里 淚灑淸漳水” 여기서 김상헌은 이원익을 李珥의 知己로 기술하고 있는데, 아마도 평안도사 시절에 同官한 인연, 이이가 이원익을 천거한 사실에 착목하여 이런 표현을 한 것 같다. 그러나 梧里家 및 남인들은 ‘知己’로 표현되는 이이와의 관계적 확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梧里集 부록에도 김상헌의 輓詞는 수록되지 않았다.
79) 趙翼, 浦渚集 卷29, <祭完平李相國元翼文> “承以先契之舊 賜以顧遇之厚 又察區區之愚 收置門下之後 不但許與之 公期以事業 亦且眷憐之 私視猶子姪”
80) 趙翼, 浦渚集 卷1 <完平李相國元翼挽>.
81) 尹鑴, 白湖全書 附錄 卷2, 行狀(上).
82) 허목의 부친 許喬는 화담문인 朴枝華의 제자이고, 윤휴의 아버지 尹孝全은 화담고제 閔純의 제자이다. 허목과 윤휴 두 집안 모두 화담학파로서의 연원의식이 강했고, 특히 윤효전과 윤휴 부자는 각기 花潭集 의 발문과 중간발문을 지었다.(신병주,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 일지사, 2000, 239-246쪽)
83) 허목은 정구의 수제자로 인식되고 있고, 윤휴의 경우는 아버지 尹孝全이 한강문인이었다. 윤효전은 1617년 경주부윤에 재직시 동래에서 온천욕을 하고 경주를 거쳐 칠곡의 泗陽精舍로 돌아가던 정구 일행을 영접하며 제자의 예를 행했다. 윤휴의 白湖年譜 에 따르면, 정구가 윤효전을 방문하던 날 윤휴가 태어났고, 이를 기념하여 정구가 윤휴에게 ‘斗魁’라는 小字를 지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구가 경주 仙桃觀에서 묵은 날은 9월 1일이고, 윤휴가 태어난 것은 동년 10월 14일이므로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의 왜곡적 성격보다는 윤효전윤휴 부자와 정구와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파악된다. 이런 맥락에서 윤효전은 자신의 선조 尹寬의『三休堂遺稿 서문을 정구에게 부탁한 바 있었고, 윤효전이 임지에서 사망하자 정구는 자신의 고제 李潤雨를 특별히 보내 조문하는 등 그 유대가 자못 돈독했다(김학수, 「조선중기 寒岡學派의 등장과 전개 -門人錄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40,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0.06.11)
84) 채제공은 濁南의 영수 許積의 복관 및 치제를 반대하는 등 탁남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蔡濟恭, 樊巖集』卷26, <請寢許積復官之命箚>)
85) 尹鑴, 白湖全書 附錄 卷5, 「年譜」 <辛未>(1631).
86) 후일 윤휴가 李舜臣의 유사를 찬한 것도 이런 인척적 관계와 결코 무관치 않다고 본다.(尹鑴, 白湖全書 卷21, <統制使李忠武公遺事>)
87) 윤영의 주요 저술 및 편찬서로는 당론서인 帶素雜記 와 지도첩인 恒符賭奇 가 있는데, 특히 후자는 이익으로 극찬을 받은 바 있다. 또한 그는 「同朝錄」을 남겼는데, 이것은 남인의 재집권기인 1691년(숙종17) 당시의 在朝 현황을 세세하게 기록한 중요 사료이다.(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 일조각, 1995, 406쪽)
88) 각주44) 참조
89) 李瀷, 星湖僿說 卷1, 天地門 <東國地圖>.
90) 尹鑴, 白湖全書 卷12, <經筵講說> “臣曰 此說見於故完平府院君李元翼所記”
91) 尹鑴, 白湖全書 附錄 卷5, 「年譜」 <庚申>(1680).
92) 이우성, 許傳全集 해제, 아세아문화사, 1979 ; 차기진, 「조선후기 성호학파의 형성과 분기에 대한 연구-초기 천주교회사와 관련한 시론-」, 부산교회사보 13, 부산교회사연구소, 1997.
93) 이수건, 「조선후기 영남과 경남의 제휴」, 벽사이우성교수정년퇴직기념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 창작과 비평사, 1990. ;유봉학, 「南人의 분열과 畿湖南人學統의 성립」,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 신구문화사, 1998. 36-39쪽.
94) 이 계보는 정조조 남인의 영수 채제공이 이익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언명한 것으로 탁남계를 배제시키면서까지 사신의 학문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했던 채제공 현실적 이해가 반영된 설정이라 할 수 있다(유봉학, 앞의 논문 : 蔡濟恭, 樊巖集 卷51, <星湖李先生墓碣銘> “但念吾道自有統緖 退溪我東夫子也 以其道而傳之寒岡寒岡以其道而傳之眉叟 先生私淑於眉叟者 學眉叟而以接夫退溪之緖 後之學者知斯文之嫡嫡相承有不誣者 然後庶可以不迷趣向 以是而銘先生可乎 處士君曰 之言也要而不煩 知先生矣”). 허목은 아버지 許喬와 청년기에 사사한 鄭彦訥이 朴枝華의 문인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화담연원이라 할 수 있고, 중년에는 정구를 사사함으로써 南冥․退溪學을 아울러 계승했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허목의 학문은 花潭南冥退溪學이 혼융된 형태라 할 수 있다.(김학수, 「星湖 李瀷의 學問淵源-家學淵源과 師友關係를 중심으로-」, 성호학보 창간호, 성호학회, 2005)
95) 허목의 ‘寒岡嫡傳論’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 대표적 인물은 미수고제로 꼽히는 李萬敷였다. 심지어 이만부는 ‘한강적전론’은 물론이고 허목의 ‘寒岡弟子說’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김학수, 「17세기 嶺南學派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270쪽)
96) 李元翼, 梧里集 卷1, <許抱川喬哀詞> ; 許穆, 記言 卷43, <抱川縣監楊州鎭管兵馬節制都尉府君墓碑(許喬)>.
97) 許穆, 記言 「年譜」 卷1, <癸丑>(1613).
98) 許穆, 記言 「年譜」 卷1, <丁巳>(1617).
99) 李元翼, 梧里集 卷1, <偶吟書與許秀才穆 出於相愛也 壬申孟夏>
100) 李元翼, 梧里集 卷1, <書贈許秀才小學要語後>(1626)
101) 許穆, 記言 「年譜」 卷1, <乙亥>(1635).
102) 許穆, 記言 別集 卷2, <祭完平李相國文>.
103) 許穆, 記言 卷10, <李文忠公遺卷序>.
104) 허목의 역할에서 한가지 특기할 것은 이원익과 교유관계에 있었던 동인계[남인․북인] 주요 인사 관련 문자를 도맡아 찬술하였다는 사실인데, 이 또한 ‘梧里繼承論’의 일환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東皐遺稿序文」(李浚慶), 「東岡集序文」(金宇顒), 「忘憂公遺券序」(郭再祐), 「忘憂堂神道碑銘」(郭再祐), 「桐溪遺稿跋文」(鄭蘊), 「桐溪行狀」(鄭蘊), 「西厓遺事」(柳成龍), 「文穆公壙銘」(鄭逑), 「寒岡集序文」(鄭逑), 「石潭墓碣銘」(李潤雨), 「藤菴墓碣銘」(裵尙龍), 「雲川墓碣銘」(金涌) 등을 들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준경․곽재우․김우옹․류성룡․정구․정온․이윤우․배상룡․김용 등은 이원익의 교유관계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이다.
105) 許穆, 記言 「年譜」 卷1, <甲寅>(1674).
106) 許穆, 記言 別集 卷15, <戊午記行>.
107) 許穆, 記言 續集 卷55, <恩居詩序> ; 別集 卷9, <賜几杖記>.
108) 許穆, 記言 附錄 <賜几杖敎書>.
109) 李瑞雨, 松坡集 卷16, 朔寧郡守李公墓碣銘> “稍長 學於姑夫眉翁許先生 聞修己大方篤信力行”
110) 許穆, 記言 「年譜」卷2, <年譜識>(許磊) “ 先祖文正公八十八歲 出處去就與夫言論大致以編年 記其略者有三件 一件 乃李完城存道所編也 一件 乃李參奉澤所編也 一件 乃姜咸從樸與吳參判光運 往復于星湖李公瀷 次輯者也”
111) 추정컨대, 논란의 저본이 된 것은 「李存道本」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에 대해서는 보다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112) 李萬敷, 息山集 卷3, <答上雪軒從大父別紙> “己未 先生從完平 問曰云云 : 謹按 此一條 恐不可收入年條耳…甲戌 謹按年譜 是年完平捐舘舍 臨終 以不朽之役 托先生 此事 亦可遺也耶”
113) 南夏正, 桐巢漫錄 卷3, “景廟壬寅間 有一種新論 藥峯台主之 李仁復李重煥若干人倡之 其論以眉叟爲宗 割去驪社及睦閔柳三家 要自別於庚申己巳諸人云者 此爲門外派 以爲不可而排之者 權令重經主之 金華潤權敍經若干人倡之 此爲門內派 又有持兩端遨遊其間者 此爲跨城派 鬧作一場風波 擾擾不已 人比之兩寡婦鬪鬨”
114) 吳光運, 藥山漫稿 卷18, <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神道碑銘> “有一長老甞爲我言 曾拜文忠公遺像 來初頗有其風云 已而余亦拜于像 果然”
115) 영조실록 영조 즉위년 8월 30일(경자)
116) 吳光運, 藥山漫稿 卷18, <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神道碑銘>
117) 경종실록 권14, 경종 4년 윤4월 6일(기묘).
118) 吳光運, 藥山漫稿 卷18, <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李公神道碑銘> “且自士類喪 而人之失己者 不于黨則于時 公能矯然自立 不黏不撓 以古士類爲準 不善人多不悅 及累閱世變 而其操益明焉”
119) 17세기 중후반 근기남인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정시한은 원주 법천에서 강학하여 남인학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현재 확인되는 그의 문인은 趙宇鳴․李栻․趙沇․崔道鳴․權斗寅․權斗經․權斗紀․黃受一․黃受崙․李萬敷․金台潤․金昌錫․柳敬時․李喜時․趙湜․蔡成胤․金始慶․金道遠․李載基․鄭宇柱 등 약 20여명에 이른다. 특히, 그는 이잠․이익 등 여주이씨 성호 일문의 학문연원으로도 인식되고 있다(김학수, 「星湖 李瀷의 學問淵源」,『星湖學報 창간호, 성호학회, 2005)
120) 丁若鏞,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第十二卷, <故領議政梧里李公畫像贊>. 이 글에서 정약용은 선조∼인조조의 ‘社稷의 安危’, ‘백성의 肥瘠’, ‘왜적의 進退’, ‘윤리와 강상의 頹整’이 오로지 이원익에 달려 있었다고 표현했다.
121) 채유후(蔡濟恭의 종고조)가 1658년 이원익의 삼현사 봉안제문을 짓는 과정에서 오리가와 평강채씨 사이에는 세교가 형성되었으나 통혼은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이루어졌다(李元翼, 梧里集 附錄 卷5, <三賢祠奉安祭文(蔡裕後撰)>)
122) 蔡濟恭, 樊巖集 卷44, <大匡輔國宗祿大夫議政府左議政…贈原城府院君忠靖公斗巖金公神道碑銘> “嗚呼 世之數中興賢相 必曰西厓完平鰲城漢陰”
123) 崔岦, 簡易集 卷1, <爲平壤士民祭李相公生祠文>.
124) 李元翼, 梧里集 續集 卷2, <書箕城生祠撤還圖像褙後>.
125) 蔡濟恭, 樊巖集 卷57, <完平府院君李相國元翼生祠遺墟碑>.
126) 숙종초 허목이 서울에 머물 때 거처했던 建德坊 소재 ‘梧里舊居’가 바로 이 집이 아닐까 싶다.(각주102) 참조)
127) 蔡濟恭, 樊巖集 卷18, <稀年錄>(中) “十八年甲寅 上曠感眉叟許文正 欲得七分小眞以覽 乃命臣濟恭 臣與士林議 乃於秋七月辛亥 自漣上恩居堂 奉來先生八十二歲眞 安於梧里李文忠公故宅 移摸以進 後學之日來拜者以百千計”
128) 蔡濟恭, 樊巖集 卷59, <敬書眉叟許先生小眞> “使當世善畫者李命基摸以進 上覽之 別備綃 命命基移摸作帖 置諸大內”
129) 蔡濟恭, 樊巖集 卷59, <敬書眉叟許先生小眞> “於是士林合辭言曰 嶺南鄒魯鄕也 况順興之白雲洞 奉孔聖曁四聖十哲七十子寶幀 我東如安文成周愼齋李梧里先生影本 俱在焉今是眞也非是之歸 將安之乎 議遂合 奉詣于順興書院以安之”
130) 蔡濟恭, 樊巖集 卷59, <敬書眉叟許先生小眞> “况梧里卽先生之師友知己 易曰 同聲相應 同氣相求 聖人不我欺也 不亦奇哉”
131) 蔡濟恭, 樊巖集 卷18, <稀年錄>(中) “謹用六絶記事 以寓山仰之忱”